사람들이 모로스를 피해 이미 한바탕 소란을 떨며 달아난 후라 그런지, 복도는 아주 한산해져 있었다.
“으으….”
잠시 후 나는 아마도 모로스가 출몰한 지점인 듯한 곳에 다다랐다. 피가 낭자한 바닥에는 모로스에게 당해 죽은 듯한 사람들과 부상자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중 가장 부상이 적어 보이는 사람을 붙잡고 다급히 물었다.
“우리 애기 어디 갔어요?!”
“뭐, 뭐, 뭐?”
“다이안! 그리고 모로스! 어디 갔어?!”
“저, 저쪽….”
내 다그침에 놀란 사람이 한쪽을 손가락질했다.
복도에 놓인 화병과 장식품들, 그리고 복도를 오가는 사람들이 들고 있었던 듯한 물건들이 죄다 난장판으로 깨지고 부서져 있어서 처음에는 모로스가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고용인이 가르쳐 준 방향으로 이동하자, 과연 바닥에 점점이 떨어진 핏자국이 눈에 띄었다.
순간 섬찟한 느낌이 들었다.
설마 이거, 우리 애 피는 아니겠지?
와장창!
“다이안…!”
바로 그때, 한동안 조용하던 복도에서 또 무언가가 박살 나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렸다. 나는 소리의 근원지를 쫓아 복도 끝의 부서진 방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 푸! 쿨럭, 쿨럭…!”
이곳은 식료품 창고인 듯했다. 바닥에 얼기설기 쓰러진 찬장과 쏟아진 물품들에 하마터면 발이 걸려서 넘어질 뻔했다. 설상가상으로 밀가루도 터졌는지, 실내가 온통 뿌옜다. 그 안쪽에서 모로스의 기괴한 목울음 소리와 무언가가 떨어져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뿌연 시야는 금방 걷혀서, 나는 곧 식료품 창고 안쪽으로 이동하는 모로스 두 마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향하는 곳에는 쓰러진 찬장 뒤쪽에 숨어 달달 떨고 있는 낯익은 은발 소년이….
“야, 이놈들아…! 우리 애한테서 떨어져!”
나는 눈깔이 돌아서 넘어진 서랍장을 뛰어넘어 모로스한테 달려들었다.
퍼억!
“어억…?!”
그런데 이 모로스는 어지간한 돌머리가 아니었나 보다. 내가 휘두른 대걸레 자루는 모로스의 머리에 부딪치자마자 우지직 소리를 내면서 허망하게 부러져 버렸다.
키야아악…!
타격이 하나도 없을 것 같던 내 공격에 그래도 자극을 받긴 했는지, 대걸레에 얻어맞은 모로스가 타깃을 바꿔 나한테 달려들었다.
내 앞으로 휘둘러지는 손을 부러진 대걸레 자루로나마 막으려 했다. 하지만 나는 또 이 몸이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잠깐 잊고 있었다.
“악!”
모로스의 손이 나를 후려치자마자 이 연약한 메이드 언니의 몸은 순식간에 날아가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이번에는 비명조차 나오지 않고, 입에서 ‘끅….’ 하는 신음만 작게 흘렀다.
모로스에게 할퀴어진 팔뚝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다. 만약 저게 좀비 같은 거였다면 나는 이번 일격으로 단번에 감염되고 말았을 것이다.
‘아이고, 나 죽네! 이 몸 진짜 왜 이렇게 약한 거야?’
고작 이 정도 타격을 입었다고 벌써 삭신이 쑤시고 팔다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아무래도 이 엠버라는 메이드 언니의 전투력은 기껏해야 100점 중에 1점 정도밖에 안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지? 왜 이 소란을 듣고도 여기에 와 보는 인간이 하나도 없는 거야?
고용인들이야 다들 제 살길을 찾아 도망갔다고 쳐도, 양육자들은 왜 모로스를 처리하러 오지 않는 건데?
“이, 씨…. 야! 내가, 우리 애한테 가까이 가지 말랬지!”
바닥에 널려 있던 식료품 중에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쥐어 다이안에게 다가가고 있는 모로스들에게 던졌다. 깨진 양파와 감자 같은 게 모로스들에게 부딪쳐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그나마 쓰러진 찬장이 길을 막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우리 개복치 고양이의 조그만 몸쯤은 저 흉악한 모로스들의 손에 단번에 찢기고도 남았을 것이다.
어쨌든, 모로스의 주의를 끄는 데는 성공한 듯했다. 나는 갓 태어난 망아지처럼 바들거리면서 일어나 문 쪽으로 뛰어갔다.
이 한 몸 으스러져도 우리 애를 죽게 할 수는 없다!
계획대로 내 어그로에 끌린 모로스들이 다이안을 두고 나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크아악!
하지만 일반인의 몸으로 상대하기에 모로스는 지나치게 빨랐다. 식료품 창고를 빠져나오자마자 내 등 뒤로 날카로운 무언가가 공기를 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으앗!”
본능적으로 몸을 수그리자 모로스의 날카로운 손톱이 쇄액, 하고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모로스의 손톱에 잘린 금빛 머리칼 몇 가닥이 허공에 흩날렸다.
“이거나 먹어라!”
나는 식료품 창고에서 가지고 나온 작은 밀가루 포대를 모로스에게 던졌다. 날카로운 손톱에 찢긴 포대에서 새하얀 가루가 터져 나와 모로스의 얼굴을 덮었다.
시야가 막힌 모로스가 주춤한 틈에 얼른 일어나서 줄행랑쳤다. 등 뒤에서 모로스가 포효하는 소리가 섬뜩하게 복도를 울렸다.
사실 내 목적은 모로스가 나를 따라오게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에, 모로스를 피해서 너무 거리를 벌려도 안 되었다. 멀어진 사냥감에게 흥미를 잃은 놈들이 다시 다이안에게 돌아가면 큰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애초에 이런 부분을 고민할 필요조차 없었다.
‘느려…! 이 엠버라는 메이드, 엄청나게 느려!’
그래도 아까 다이안을 찾으러 갈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체력이 떨어져서 그런가?
“헉, 허억….”
다리가 후들거려서 속도를 내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게다가 얼마 뛰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숨이 찼다. 게다가 아직 식료품 창고가 있는 복도에서 벗어나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 와중에 모로스 한 놈이 뒤돌아 다이안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고 하기에 주머니에 있던 빗을 냅다 꺼내 내던졌다.
“거기가 아니라… 헉, 이쪽이라니까….”
밀가루가 눈에 들어갔는지 허우적거리던 모로스들이 다시 나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당연히 모로스들은 너무나 쉽게, 또 너무도 금방 나를 따라잡았다.
그런데 재수 없게도, 하필이면 계단이 있는 곳에 다다르자마자 바닥에 떨어진 촛대를 발견하지 못해 그것을 밟고 넘어져 버렸다.
쇄액!
또다시 선득한 느낌이 등줄기를 스쳤다.
바로 그 순간, 어미 고양이가 새끼 고양이의 뒷덜미를 물어 올리듯이 누군가 내 목 뒤의 옷깃을 한 손에 움켜쥐어 끌어당겼다.
거의 동시에, 모로스의 날카로운 손톱이 내 얼굴 옆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조금만 늦게 피했더라면 머리가 뚫렸을지도 몰랐다.
“어디를 봐도 비전투요원인 메이드인데….”
급박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여유로운 목소리가 내 귀를 파고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다른 사람들은 도대체 뭘 하고, 이렇게 메이드 혼자 모로스를 상대하고 있지?”
꼭 오수에라도 빠졌다가 나온 것처럼 나른하게까지 들리는 저음의 음성이 귓바퀴를 간질였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머리 위에서 울리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지금 나타난 남자가 누구인지 대번에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 양육자들은 전부 하자품들뿐인가.”
나를 붙잡고 있던 손이 떨어지자마자 힘이 빠진 몸이 허물어졌다. 나는 비틀거리면서 계단 난간을 붙잡았다.
그 순간 검은 형체가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거의 동시에, 석양으로 물든 시야에 검은 핏줄기가 튀었다.
무언가를 무참히 잡아뜯는 듯한 살벌한 소리가 들린 직후, 동그란 무언가가 장난감 공처럼 계단을 통통통 튕겨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모로스의 뜯긴 머리통이었다.
남자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나는 그가 도대체 뭘 한 건지, 두 눈을 멀쩡히 뜬 상태에서도 전혀 보지 못했다.
순식간에 머리와 몸통이 분리된 모로스들이 망가진 인형처럼 바닥으로 풀썩 쓰러졌다. 그 주변에 검은 꽃 무더기가 피어났다.
남자가 팔을 내리자 긴 손가락을 타고 검은 핏방울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바로 뒤이어 나를 돌아본 남자의 얼굴은 예상대로 낯설지 않았다.
역시 그때 그 남자였다. 지난번에 검은 문을 만져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햇빛이 물살처럼 고여 있던 복도에서 마주쳤던 검은 머리 남자.
지금 복도에 깔린 낙조와 비슷한 빛깔을 띤 눈이 주저앉은 나를 유심히 응시했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남자의 눈동자에 흥미가 어렸다.
“누구인가 했더니, 얼마 전에 본 그 메이드였군.”
이 남자도 일전에 복도에서 본 나를 기억하는 건지, 아니면 그동안 이 몸의 주인인 엠버와 또 마주쳤던 적이 있는 건지, 어쨌든 내 얼굴을 보고 눈에 이채를 띠었다.
이곳으로 다급히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모로스가 나왔다고 들었는데 괜찮습니까?!”
늦었잖아! 그것도 엄청나게…!
뒷북을 치면서 나타난 사람들이 나와 검은 머리 남자, 그리고 바닥에 검은 꽃을 피우며 쓰러진 모로스의 사체를 보고 놀라 숨을 들이켰다.
“앗, 소, 손님께서 어떻게 여기에…!”
“헉, 설마 직접 모로스를 처리해 주신 겁니까?”
달려온 사람들 사이에는 체스휘와 그의 뒤에서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마리네즈도 있었다. 모두가 검은 머리 남자에게 관심을 보일 때, 체스휘는 재빨리 주변을 훑어 상황을 파악하고 나를 향해 뛰어왔다.
“괜찮아요, 그린로스 양? 다친 곳은 없어요?”
나는 잠깐 넋을 놓고 있다가 그때 정신이 들었다. 황급히 얕은 숨을 들이마시면서 체스휘의 팔을 붙잡았다.
“식료품 창고에… 다이안, 있….”
하지만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아니면 연약한 이 메이드 언니의 몸은 여기까지가 한계였던 걸까?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머리가 핑 돌면서 눈앞이 깜깜해졌다. 힘이 쫙 빠진 몸이 옆으로 기울어졌다.
“그린로스 양!”
쓰러지는 나를 붙잡은 체스휘의 다급한 목소리를 뒤로한 채, 마지막으로 그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나 대신 식료품 창고에 있는 우리 애 좀 꺼내와 주라….
어두워지는 시야 너머로 의미 모를 눈빛을 띤 채 나를 주시하는 검은 머리 남자의 얼굴과 섬뜩한 표정을 지은 마리네즈의 얼굴이 보인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바로 정신을 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