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제인은 튜토리얼에만 등장하는 일회용 캐릭터였다.
그런데 지난번에 이곳에 왔을 때도 그렇고, 오늘도 이렇게 멀쩡한 모습으로 또 만나다니. 나중에 모로스가 되어 내 손에 죽은 여자를 이렇게 다시 만나고 있으려니 기분이 좀 묘했다.
제인은 가늘게 뜬 눈으로 자신의 앞에 선 나를 꼼꼼하게 뜯어 봤다. 나는 그녀가 내게서 수상한 점을 발견하기 전에 손으로 눈을 비비는 척했다.
“죄송해요.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쉬고 싶어서요….”
풀이 죽은 목소리로 작게 말하자, 생각대로 제인은 내가 혼자 구석에서 울고 있었던 것으로 오해한 듯했다. 거울을 보지는 못했지만, 뺨이 퉁퉁 부은 게 나한테도 느껴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래, 아까 1호실 양육자님이 널 찾았다고 들었다. 마리네즈 님이 엄격한 면도 있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고용인들에게 친절하신 분인데, 도대체 무슨 실수를 해서 귀하신 분의 심기를 어지럽힌 거니?”
제인이 나를 보다가 깊은 한숨을 푹 내쉬면서 말했다.
“네가 좀 굼뜨긴 해도 아직 적응 기간이라 그렇겠거니 생각하면서 나도 그동안 호되게 꾸중한 적은 없었는데…. 아무래도 그게 너한테는 독이 된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구나.”
그런데 말하는 걸 들어 보니, 아무래도 제인은 마리네즈가 체스휘 옆에 있는 메이드들을 견제하는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알면서 그냥 모르는 척하는 건가?
“앞으로 최대한 마리네즈 님과 마주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만, 그렇다고 부엌일이나 세탁실의 일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용모가 단정하긴 하지만 실수할까 봐 우려돼 손님의 시중을 들게 할 수도 없으니, 원….”
그녀는 측은함과 답답함, 그리고 난감함이 담긴 눈으로 나를 훑어보았다.
“어쨌든…. 일단 오늘은 그런 꼴로 돌아다니지 말고 방으로 가서 쉬어라. 앞으로 네가 저택에서 맡을 일은 좀 더 생각해 봐야겠다.”
“네, 알겠습니다.”
나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이마를 짚으며 내게 그만 가 보라고 손짓하는 제인에게 인사한 뒤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메이드장이 쉬어도 된다고 그랬으니, 한동안 일하라고 나를 찾는 사람은 없겠구나!’
기회를 봐서 또 지하실에 가 봐야 하니 그거 하나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1분 1초가 지날수록 마음이 초조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곳에 머무는 시간이 처음 예상보다 길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되면 시간이 얼마나 지나 있을지 쉽게 가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반드시 지난번과 동일한 일이 발생하리란 법은 없다고 생각하며 애써 마음을 다독였다.
문을 만져서 이 엠버라는 여자의 몸으로 과거의 레드포드 저택을 보게 된 건 이번이 고작 두 번째일 뿐이었다. 그러니 지난번의 경험만을 표본으로 삼기에는 일렀다.
나는 인적이 드문 곳에 숨어서 메이드장 제인이 자리를 떠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지하실로 향했다. 하지만 그사이에 고용인들의 식사 시간이 다 끝났는지, 사람들이 다시 1층을 활발하게 돌아다니기 시작해서 기회를 잡지 못했다.
‘젠장, 설마 이러다가 밤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니겠지?’
게다가 내가 계속 1층을 기웃거리니 이상하게 쳐다보는 고용인들까지 생겨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하는 수 없이 지하실 근처에서 배회하던 것을 멈추고 장소를 이동했다.
어차피 지금은 타이밍이 영 아닌 듯한데, 이럴 줄 알았으면 다이안이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그 옆에나 좀 더 있어 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떨떠름하게 1층 로비를 지나가다가, 나는 우연히 벽면에 걸린 거울을 보게 되었다. 당연히 거울에는 원래의 내 얼굴이 아니라 낯선 여인의 얼굴이 비쳤다.
그걸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오….”
만나는 사람마다 이 엠버라는 사람의 일솜씨는 탐탁지 않아 하면서도 외모는 꼭 칭찬하기에 얼마나 예쁜가 했더니, 정말 눈이 번쩍 뜨이게 예쁘긴 예뻤다. 내가 열심히 커스터마이징한 린 도체스터의 캐릭터나 저택에서 예쁘기로 소문난 메이드 언니 세라와는 또 다른 느낌의 미모였다.
굳이 분류하자면 이쪽은 청순가련 계열이라고 해야 할까?
엠버는 상아색에 가까운 연한 색깔의 긴 백금발과 유리처럼 맑고 투명한 벽안을 가진 미인이었다. 업무 시간이라 단정하게 묶은 머리카락과 메이드들이 공통으로 입는 유니폼도 이 몸의 아름다움을 가리지는 못했다.
‘이래서 마리네즈가 엠버를 경계했구먼.’
혼자 혀를 차면서 거울을 보다가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일전에 내가 별채의 보라색 방 에피소드를 끝낸 뒤 빨래방에서 메이드들에게 이전 1호실 양육자인 마리네즈의 정보를 캐냈을 때 그녀에 대한 안 좋은 말은 거의 안 나오지 않았었나?
원래 사람이란 죽은 자에게 관대해지기 마련이라 그런가?
아니면, 아까 메이드장 제인에게 들은 말처럼 체스휘의 옆에서 얼쩡거리지만 않으면 고용인들에게도 친절하게 대해 주는 편이라 그런 걸까?
어느 쪽이든 간에, 엠버는 이미 마리네즈에게 찍힌 것 같았으니 앞으로의 저택 생활이 고달파질 것 같았다.
‘그런데 이건 지금 갑자기 든 생각인데…. 혹시 지난번에 내가 멋모르고 이곳의 체스휘한테 가까이 다가가서 친한 척 팔을 붙잡은 것도 마리네즈한테 밉보인 이유 중 하나가 된 건 아니겠지?’
그런 거면 좀 미안한데…. 그래도 지금은 내가 뺨을 대신 맞았으니 이걸로 퉁치면 안 될까?
나는 얼얼한 뺨을 문지르면서 내가 서 있는 레드포드 저택의 실내 풍경을 유심히 훑어봤다.
그보다 이게 환영이 아니라면 도대체 뭘까? 아무리 봐도 여긴 내가 알고 있는 레드포드 저택이 맞는데, 죽은 사람이 살아 있는 과거의 시간대라니….
스텔라에서 나한테 조사하라고 한 지하실의 검은 문이 평범한 게 아니란 건 지난번의 경험으로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이 문이 내 생각보다 더 기이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꺄아아악…!”
그런데 바로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귀를 찢을 듯한 비명이 울렸다. 동시에 무언가에 깨지고 부서지는 것 같은 소리까지 연달아 고막을 파고들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과 가까운 장소에서 울린 소리였고, 심지어 소음은 내 쪽으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뭐야, 모로스인가?”
나는 급히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내 손에 잡혀 나온 건 총이 아니라 별 쓸모도 없는 빗이었다.
아차! 그러고 보니 지금 이건 내 몸이 아니었지.
“살려 줘!”
“저리 비켜! 아아악…!”
“으앍!”
잠시 후, 나도 요상한 비명을 내지르면서 급히 몸을 피하고 말았다. 갑자기 내가 있는 복도로 한 무리의 고용인들이 좀비 떼처럼 무섭게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사람 말을 하는 걸 보니 저 인간들이 전부 다 모로스인 건 아니었다. 그럼 모로스를 피해서 도망쳐 온 사람들인 건가?
아니, 그런데 갑자기 그렇게 한꺼번에 달려오면 무섭잖아요!
게다가 이상하다? 지금 난 열심히 뛰고 있는데, 왜 이렇게 금방 저 사람들한테 따라잡힌 거지?
이러다가는 인파에 휩쓸릴 것 같아서 일단은 급한 대로 벽에 찰싹 달라붙었다. 사색이 된 사람들이 성난 황소 떼처럼 내 옆을 우르르 지나쳐 뛰어갔다.
“엠버! 너 여기 있었어?!”
“모리나?”
그러다 그 성난 황소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익숙한 사람이 날 발견하고 내 팔을 잡아끌었다. 아까 나한테 얼음을 가져다주러 갔던 동료 메이드 모리나였다. 나는 얼떨결에 사람들이 만들어 낸 거친 파도에 편승해 그녀에게 끌려갔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이야? 사람들이 갑자기 왜 이래?”
“모로스가 두 마리나 나왔어! 마침 근처에 있던 고용인이 다섯이나 죽었고!”
원래 모로스는 저택의 아이들을 우선적으로 공격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보통 아이들 옆에는 양육자가 붙어 있기에 이 정도로 피해가 심각해진 건 의외라고 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이렇게 다들 정신없이 도망치는 걸 보면, 아직도 모로스를 해결하지 못한 것 같은데?
“다른 양육자들은 뭐 하고 있는데?”
“몰라! 다른 고용인이 도움을 요청하러 간 것 같긴 했어. 그런데 하필이면 모로스가 공격한 게 양육자가 없는 도련님이라….”
뭐?!
모리나의 말을 듣고 나는 숨을 들이켰다.
양육자가 없는 저택의 도련님이라고? 내가 알기로 그건 한 명뿐인데?
‘다이안이잖아!’
“안 돼, 우리 개복치…!”
“앗, 엠버?!”
나는 뒤에서 나를 부르는 모리나를 무시하고 다급히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뛰어가기 시작했다.
“방해하지 말고 비켜…!”
“으어악!”
하지만 나 혼자만 역주행을 하는 모양새라, 달리는 사람들에게 튕겨서 도무지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이 몸, 너무 약하잖아!’
원래의 내 몸이라면 캐릭터의 기본 설정값으로 이 정도 인파는 얼마든지 뚫고 갈 수 있었을 텐데, 이 엠버라는 여인은 너무나 연약했다.
그래도 우리 다이안을 위한 집념으로 가까스로 사람들을 헤치고 나오는 데 성공했다.
소음이 들리고 있는 쪽으로 정신없이 달리면서, 게임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복도와 방 곳곳에 진열된 무기를 아무거나 급히 꺼내 들었다.
그런데….
쿵!
“악!”
날이 구부러진 도검을 벽에 걸린 받침대에서 빼내자마자 그 무게 때문에 팔이 밑으로 뚝 떨어졌다.
“아, 씨!”
설마 이 정도도 못 드는 거냐?! 이 쓸데없이 연약한 팔뚝 같으니라고!
할 수 없이 나는 무기를 내팽개치고, 급한 대로 복도에 나뒹굴고 있는 대걸레를 집어 들었다.
“우리 애 괴롭히는 놈이 누구야…!”
그러고 나서 눈에 불을 켠 채 우리 집 개복치 고양이를 구하기 위해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