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안은 굳이 사람들이 잘 이용하지 않는 복도와 계단을 통해 이동하고 있었다. 어두운 길을 혼자 걸어가는 모습이, 꼭 두더지가 혼자 굴속을 파고 들어가는 것 같은 장면을 연상시켰다.
그러다 문득 내 인기척을 느낀 듯이 다이안의 걸음이 멈춰졌다. 다음 순간 홱, 뒤를 돌아보는 다이안의 시선을 피해 나도 모르게 몸을 숨겼다.
까, 깜짝이야. 아니, 그런데 나는 왜 굳이 숨은 거지? 우리 뽀시래기의 분위기에 왠지 압도당해 버려서 그만….
그래도 뒤따라가는 나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잠시 후 다이안은 고개를 돌려 다시 가던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니, 그런데 진짜 무슨 뒷모습에서도 저렇게 쌀쌀한 분위기가 풍긴다니?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다이안이 혼자서 어두운 복도를 걸어가는 모습을 보는 동안 내 마음도 조금씩 무거워져 갔다.
이윽고 다이안이 문을 열고 들어간 곳은 나한테도 익숙한 장소인 그의 방이었다.
나는 다이안이 방으로 들어가 눈앞에서 사라지자마자 쪼르르 나와서 닫힌 문 앞을 얼쩡거렸다. 하지만 지금은 린 도체스터가 아닌 다른 메이드의 모습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 쉽사리 문을 열지 못하고 문고리 위에서 손만 방황했다.
물론 다이안은 얼마 전에 초상화의 영혼과 술래잡기를 할 때 내 모습이 바뀌었어도 바로 알아봐 주었다. 하지만 마리네즈가 살아 있는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지금 다이안은 아예 나를 모르는 상황인 것 같았으니까.
그렇다고 그냥 이대로 발길을 돌려 다시 지하실로 돌아가기엔, 우리 고양이의 우중충한 모습이 눈에 밟히고….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하고 문에 노크를 하려고 했을 때, 마침 복도를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응? 너 엠버 아니야? 거기서 뭐 해?”
쟁반을 들고 온 회색 머리 메이드가 다이안의 방문 앞에 서 있는 나를 향해 의아한 듯이 물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고개를 돌린 내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란 것처럼 두 눈을 크게 떴다.
“앗, 너 얼굴이…. 아까 마리네즈 님이 널 찾았다고 들었을 때부터 불안했는데, 설마 맞은 거야? 어유, 제인 님은 괜히 너한테 미뉴엘 도련님 방으로 심부름을 보내서! 얘, 너처럼 예쁜 애는 2호실 주변에 아예 얼쩡거리지 않는 게 최선이야.”
회색 머리 메이드가 딱하다는 듯이 혀를 차면서 하는 말을 들어 보니, 아무래도 메이드들 사이에서 마리네즈의 악명은 유명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다이안 도련님 방에는 왜 온 거야? 또 심부름 왔어? 너도 참 안 그렇게 생겨서는 맹하다니까. 그렇게 자꾸 남들 일을 대신 해 주다가는 너만 손해 볼걸? 쯧, 아무튼 나 지금 그 방에 들어가야 하니까 좀 비켜 봐.”
그러다 이어진 메이드의 말을 듣고 귀가 솔깃해졌다.
“지금 이 방에 들어간다고?”
“다이안 도련님한테 저녁 식사 가져다 드려야 돼.”
과연, 메이드가 든 쟁반에는 뚜껑이 덮인 접시와 식기, 물컵 등이 놓여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이거다!’ 싶어서 눈이 번뜩였다.
“내가 대신 가져갈게. 넌 돌아가서 쉬어.”
“앗, 엠버?!”
나는 회색 머리 메이드의 손에서 쟁반을 냉큼 빼앗아 들었다. 그러고 나서 깜짝 놀란 듯한 메이드를 뒤로하고 다이안의 방문을 두드렸다.
“다이안 도련님, 저녁 식사 시간이에요. 잠깐 들어갈게요!”
“잠깐…!”
쟁반을 빼앗긴 메이드가 당황한 듯이 나를 불렀지만, 그냥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다이안 방의 창문에서도 주황색 노을이 한가득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다이안은 그 속에 혼자 오도카니 앉아 창밖을 보는 중이었다.
처음에 그는 내가 방으로 들어온 것도 모르는 듯이,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다이안 도련님! 저녁 식사를 가져왔어요.”
하지만 내가 들으란 듯이 더 큰 소리로 말을 건네자, 그제야 내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다이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무심코 숨을 들이켰다.
차라리 다이안이 그의 대답도 듣지 않고 마음대로 방에 들어온 나를 꾸중했으면 이런 기분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다이안은 그냥 아까 복도에서 본 것 같은 서늘하고 어두운 눈을 한 채 나를 말 없이 응시하기만 했다.
그 얼굴을 보는데, 왜 이렇게 심장이 덜컹거리는 느낌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배고프지 않으세요? 주방장 톰 아저씨가 솜씨 좀 부렸나 봐요. 오늘따라 맛있는 냄새가 나네요, 그렇죠? 식기 전에 빨리 와서 드세요.”
나는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이안은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조용히 걸어와 테이블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나는 다이안의 얼굴을 힐끗 살피며 쟁반 위에 있던 것들을 테이블 위에 옮기기 시작했다.
“오늘부터 네가 내 담당이야?”
그러던 어느 순간, 다이안이 내게 물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얼른 대답했다.
“아니요. 지금만 제가 대신 온 거예요.”
거기에서 대화는 끊겼다.
나는 다이안과 말을 더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다. 하지만 다이안은 나한테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듯이, 이후로 나한테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쟁반 위에는 접시와 식기가 몇 개 없어서, 테이블 위에 그것들을 옮기는 작업도 금방 끝났다.
“아이구, 실수로 여기 물을 쏟았네…. 제가 빨리 닦을게요.”
나는 괜히 테이블 위에 물을 쏟은 뒤 그걸 느릿느릿 닦으면서 미적거렸다. 다이안은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식사를 시작했다.
나는 다이안이 밥을 먹는 모습을 보면서 더 느릿느릿 손을 움직였다.
그런데 우리 애기, 속이라도 안 좋은가? 왜 이렇게 먹기 싫은 것처럼 깨작거리지? 그냥 입맛이 없어서 그런가?
가뜩이나 몸도 허약해서, 밥이라도 잘 먹어야 체력을 보존할 텐데 말이다!
자나 깨나 우리 개복치 고양이 걱정뿐인 내가 그렇게 근심 어린 마음을 안고 다이안을 지켜보고 있을 때, 돌연 아래로 깔려 있던 그의 붉은 눈이 다시 한번 위로 들어 올려져 나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뭐 해?”
“네?”
“물은 다 닦은 것 같은데 왜 안 나가고 계속 거기 서 있냐고.”
테이블 앞에 버티고 있는 내가 거슬렸는지, 다이안이 식사를 멈추고 나한테 말했다. 나를 향한 눈빛과 목소리가 얼마나 한기가 뚝뚝 떨어지게 차가운지, 방 안의 온도가 10도는 족히 낮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음 같아서야 다이안이 저녁 식사를 다 끝낼 때까지 옆에 있고 싶었다. 내가 알고 있는 모습과 달라도 너무 다른 다이안과 좀 더 이런저런 얘기를 해 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내가 원래 있던 곳과 이곳의 시간 흐름이 다른 것 같았던 게 마음에 걸렸다. 지난번에도 이 엠버라는 메이드의 몸에서 눈을 떠 다시 지하실로 돌아가기까지 대략 15분 정도도 걸리지 않았던 것 같은데 현실에서는 다섯 시간이나 지나 있었으니까…. 만약 지금 흑화 버전 다이안이 저녁 식사를 다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돌아가게 되면 이번에는 하루가 꼴딱 지나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넵, 전 그만 나가 볼 테니 저녁 식사 맛있게 하세요.”
그래서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일단 지금은 자리를 비키기로 했다.
“다이안 도련님!”
하지만 이대로 그냥 가는 건 역시 너무 섭섭하지!
나는 쟁반을 들고 문을 나서기 직전, 마지막으로 다이안을 돌아보며 온 마음을 담아 우렁차게 외쳤다.
“오늘도 우리 다이안 도련님이 세상에서 제일 귀엽고 사랑스러워…!”
챙그랑!
다이안의 손에 들려 있던 포크가 테이블 위에 떨어졌다. 이어서 그가 뻣뻣하게 굳은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
“특히 밥 먹을 때마다 햄스터처럼 야무지게 빵실해지는 말랑 콩떡 모찌 같은 볼따구 최고!”
“뭐….”
처음으로 얼음 가면 같던 다이안의 표정이 깨졌다. 그는 어이가 없는 것 같기도 했고, 당황한 것 같기도 했다.
“소화 잘되게 천천히 꼭꼭 씹어서 저녁 맛있게 드세요! 제 마음도 여기에 두고 갈게요!”
다이안이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에게 손가락 하트까지 마구 날려 준 뒤 문을 나섰다.
크읍, 누나가 옆에 오래 같이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하지만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나한테는 우리 개복치 고양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럽고 귀여우니까 그것만큼은 믿어 줘!
그렇게 눈물을 머금고 다이안의 방에서 빠져나와 지하실을 향해 달려갔다.
외로워 보이는 이곳의 다이안을 이렇게 혼자 두고 가려니 마음이 많이 안 좋았지만, 그래도 내가 우선시해야 할 건 현실의 다이안이니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말해서, 나는 다이안의 방을 나오자마자 바로 원래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지하실의 수상한 검은 문이 또다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왜 이래, 이거? 왜 또 아무 반응도 없는 거야?!”
나는 난처함과 당혹감에 문을 몇 번이나 더듬거리고, 또 손으로 퍽퍽 때려 보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문은 고요하기만 했다.
혹시 이게 환영이라면 충격 요법으로 깰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뺨도 때려 봤다. 하지만 마리네즈에게 맞아서 가뜩이나 쓰린 뺨이 더 퉁퉁 붓게 되었을 뿐이다.
“엠버! 너 어디에 있니? 엠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하실 밖에서 나를 찾는 목소리까지 들려왔다.
혹시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문이 작동할 수도 있으니, 이대로 한동안 지하실에 죽치고 있으려고 했는데….
“이상하다, 이쪽으로 가는 걸 봤는데….”
하지만 반대로, 문이 언제 작동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마냥 기다리는 것도 위험한 일이긴 했다. 총괄 집사가 지하실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던 것도 그렇고, 지금은 문밖의 잠금장치까지 다 풀어 놓고 안으로 들어온 거라 내가 여기에 있는 게 발각되면 오히려 더 귀찮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없이 지하실에 있는 걸 들키기 전에 얼른 밖으로 나갔다. 문의 잠금장치를 원래 상태로 되돌려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 부르셨어요?”
“엠버! 내가 아까부터 찾은 걸 몰랐니? 저녁 시간인데 혼자 여기에서 뭘 하고 있던 거니?”
다행히 나를 찾던 사람은 내가 지하실에서 나온 걸 목격하지 못한 듯했다.
그런데….
‘또 죽은 메이드장 제인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