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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76)화 (76/300)

어느새 나는 환한 방 안에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었다. 밝은 주황색에 가까운 노르스름한 빛이 실내를 가득 물들이고 있는 걸 보니, 시간은 해가 질 무렵인 것 같았다.

“반반한 낯짝 하나 믿고 까불다니, 배짱이 좋은 아이로구나.”

또 지난번과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도 문에 손을 댄 직후, 내 주변 환경이 갑자기 바뀌었다. 그래도 이번이 두 번째이니만큼 지난번처럼 갑자기 내가 뜬금없는 장소에 와 있는 걸 알고 놀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상황이….

아니, 느닷없이 귀싸대기를 갈기다니, 도대체 이게 무슨 경우래?

나를 때린 사람은 올리비아 뺨치게 화려한 옷을 입은 여자였다.

풍성하게 구불거리는 긴 붉은 머리를 보석으로 장식해 풀어 헤친 여인은 섬뜩한 빛을 발하는 차가운 벽안으로 자신의 앞에 무릎 꿇은 나를 내려다봤다.

갸름한 얼굴에 살짝 위로 치켜 올라간 눈. 나이는 2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였는데, 꽤나 고혹적인 자태를 지니고 있어 어쩌면 실제 나이는 보기보다 좀 더 많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보자마자 의구심이 들었다.

어라? 그런데 이상하다. 묘하게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인데….

“더군다나 네가 내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건드린 2호실 양육자는 말이야, 이미 임자가 있는 남자라고.”

붉은 머리 여인은 모멸감을 주려는 듯이 손에 들고 있던 부채로 기분 나쁘게 내 뺨을 툭툭 건드리기까지 했다.

“마리네즈 님! 오해세요.”

바로 그때, 내 뒤쪽에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던 메이드 한 명이 갑자기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러고는 내 옆에 털썩 무릎을 꿇고 앉아 다급히 입을 열었다.

“엠버는 저택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냥 2호실 양육자님께 미뉴엘 도련님의 방이 어디인지 물어본 것뿐이에요. 마리네즈 님이 계시는데 감히 딴마음을 품었을 리가 없잖아요?”

그 순간 나는 크게 놀라서 숨을 들이켰다.

‘마리네즈!’

어쩐지 내 뺨을 때린 여자의 얼굴을 어디서 본 것 같더라니, 보라색 방 에피소드 때 나타난 환영 속의 그 여자였다. 게다가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여자는 1호실 양육자인 마리엔과도 얼굴이 많이 닮아 있었다.

방금 메이드가 말한 대로라면, 이 붉은 머리 여자가 바로 이전 1호실 양육자인 마리네즈였다. 즉, 지금은 유령이 된 검은 베일을 쓴 여인과 동일 인물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의 모습으로 내 눈앞에 나타났다는 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환영이 최소한 1년 전의 시간대라는 소리인가?

“내가 말하는 데 집중하지 않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바로 그때, 붉은 머리 여인이 기분이 나쁜 듯이 눈살을 찌푸리며 내 턱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아니, 그런데 이 언니 손힘이 장난 아니네. 턱이 으스러질 것 같잖아? 게다가 방금 맞은 뺨도 엄청 아팠다.

“엠버, 뭐 해! 빨리 사과드려…!”

나 대신 마리네즈에게 변명한 메이드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양새로 나를 재촉했다. 이제 보니 그녀는 지난번에 내가 지하실의 문을 만져서 처음 환영을 보았을 때 만났던 그 메이드였다.

‘그런데 이거 진짜 환영이 맞나…? 뺨이랑 턱이 아파도 너무 아픈데?’

똑똑!

“마리네즈 님, 만찬 시간이 되었습니다. 체스휘 님이 모시러 오셨어요.”

바로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메이드가 체스휘의 방문을 고했다.

잔뜩 찡그려져 있던 마리네즈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녀는 내 턱을 밀치듯이 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운이 좋은 계집이구나. 이번 한 번은 그냥 넘어가 주지. 하지만 다음에 또 걸리면 그땐 각오해.”

마지막으로 내게 경고한 마리네즈가 뛰듯이 방을 나섰다.

나는 얼얼한 턱을 문질렀다.

“엠버,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 양육자님들한테 함부로 다가가지 말라고!”

문밖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옆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던 메이드가 무릎걸음으로 후다닥 나한테 다가왔다.

“그렇게 경고했는데도 이 바보가 진짜! 마리네즈 님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 기분이 좋을 때는 고용인들한테도 잘해 주시지만 화났을 때는 정말 얄짤없다니까. 특히 체스휘 님 관련해서는 장난 아니야! 너도 이번 기회에 잘 알았겠지? 그러니까 절대 우연이라도 체스휘 님하고 마주치지 않게 조심해! 웬만하면 아예 말도 섞지 말고! 넌 예쁘게 생겨서 특히 오해받기 쉬우니까.”

자, 그러니까 상황을 한번 정리해 보자.

마리네즈가 나… 즉, 이 엠버라는 몸 주인이 체스휘를 유혹하려 했다고 오해해서 방으로 끌고 와 무릎 꿇린 다음 귀싸대기를 날린 상황인 것 같은데….

‘마리네즈 이 여자, 생각한 거랑 이미지가 다르잖아?!’

유령 상태일 때 계속 검은 상복만 입고 다니는 것도 그렇고, 또 내가 별채에서 본 환영에서도 죽은 아이를 끌어안고 구슬프게 울던 모습만 있어서 왠지 정 많고 애처로운 그런 여인을 상상했었단 말이다!

게다가 아무래도 지금 이 상황, 단순한 환영이 아닌 것 같다. 이게 일반적인 환영이면 이렇게 얼굴이 터진 것처럼 아플 리가 없잖아.

“세상에, 얼굴 부은 것 좀 봐. 손도 느리고 성격도 흐리멍덩해서 그나마 봐 줄 만한 건 이 얼굴 하나뿐인 애가…. 빨리 가서 찜질이라도 하자.”

나는 이름 모를 메이드에게 이끌려, 일단 마리네즈의 방으로 추정되는 곳을 빠져나왔다.

***

마리네즈의 앞에서 나 대신 변명해 줬던 메이드의 이름은 모리나였다.

나는 그녀가 얼음찜질을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메이드 침실에서 빠져나왔다.

지하실의 문을 만지고 거기에서 보라색 빛이 나오면 이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되었으니, 이제 그만 원래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지난번에도 여기에 잠깐 있었는데 현실에서는 다섯 시간이나 지나 있던 걸 보면, 오늘도 이곳에 오래 머무는 건 좋지 않을 듯했다.

“괜찮아요?”

그런데 막 계단을 내려가 1층에 도착했을 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돌아보자 역시 시야에 비친 건 체스휘였다. 그는 지난번에 보았을 때처럼 눈에 익으면서도 낯선 모습을 한 채로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다른 고용인들은 다들 어디로 갔는지, 지금 이곳에는 체스휘와 나밖에 없었다.

그런데 분명 아까 만찬 시간이라 체스휘가 마리네즈를 데리러 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도중에 잠깐 볼일이 있어서 밖으로 나온 건가?

“얼굴, 많이 부었네요. 마리네즈가 그런 거죠?”

“아, 예, 뭐….”

체스휘가 언뜻 눈매를 찌푸리며 건넨 말에 나는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애매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체스휘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신 사과할게요. 가끔 감정적으로 굴 때가 있어서 그렇지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왠지 마리네즈 대신 사과하고 변명하는 체스휘를 보자 기분이 영 복잡미묘했다. 음, 한마디로 내 호감남의 구 연애 상황을 속속들이 보고 듣고 있는 찝찝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체스휘가 이렇게 와서 사과하는 걸 보니, 엠버가 그를 일부러 유혹하려고 했다는 건 마리네즈의 오해가 맞는 것 같았다.

“글쎄요…. 남들한테 좋은 사람이어도 나한테 나쁜 사람이면, 그런 말은 아무 소용 없는 거 아닌가?”

죄 없는 체스휘한테 이런 식으로 퉁명스럽게 구는 건 옳지 않은 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지금 난데없는 봉변을 당해 얼굴이 욱신거렸고, 그래서 기분이 좀 나빴다. 내가 체스휘에게 쌀쌀맞게 구는 건 그 이유가 전부였다. 절대로 마리네즈의 편을 드는 그에게 은근히 불쾌한 기분이 들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아무튼 여자 친구분이 오해하신 것 같은데 두 분이 잘 대화해서 저한테는 피해가 없게 해 주세요.”

그런데 내 말에 체스휘가 찡그린 듯이 웃는, 묘한 미소를 얼굴에 그렸다.

“여자 친구요?”

그리고 이어진 말에 나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마리네즈와는 그런 사이가 아닌데요.”

“아니에요?”

“그런 소문이 돌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아니에요.”

예상 밖의 단호한 대답에 나도 모르게 귀가 솔깃해졌다.

뭐야, 둘이 세기의 비극적인 연인인 줄 알았는데 그게 다 헛소문이었다고?

“어쨌든 오늘 일은 다시 한번 미안해요. 지금 메이드 양이 말한 것처럼 또 이렇게 오해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 주는 일 없게 마리네즈에게는 내가 확실히 얘기할게요.”

체스휘가 마지막으로 내게 사과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체스휘 역시 마리네즈가 자신의 말을 들을 것이란 확신은 없어 보였다.

나는 돌아서서 걸어가는 체스휘의 뒷모습을 싱숭생숭한 기분으로 지켜봤다. 그런데 바로 그때, 체스휘의 앞쪽에 한 소년이 나타났다.

“아, 다이안.”

체스휘가 이름을 부르자 복도를 지나가던 아이가 이쪽을 살짝 돌아봤다.

어두운 복도에서도 환한 광채를 내뿜는 긴 은발과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하게 들어찬 예쁜 얼굴. 분명 우리 귀여운 뽀시래기였다!

“오랜만에 밖으로 나왔네요. 괜찮으면 식당에서 같이 저녁 먹지 않을래요?”

하지만 다이안은 내가 처음 보는 싸늘한 눈으로 체스휘를 한번 쳐다본 뒤, 그의 권유를 그냥 무시하고 지나갔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당황했다.

뭐, 뭐야? 지금 내 눈앞에 지나간 사람이 우리 다이안 맞아?

저렇게 어둡고 냉랭한 애기가 진짜 우리 고양이라고? 물론 지금도 까칠하고 쌀쌀맞을 때가 있는 다이안이었지만, 지금 내가 본 모습은 그것과 종류가 좀 달랐다.

분명 지금 체스휘의 말을 무시하고 지나간 다이안은 내가 깜짝 놀랄 정도로 음울하고 차가운 느낌이었다. 한마디로 흑화한 개복치 고양이 버전이라고 해야 하나?

물론 나는 우리 다이안이라면 어떤 버전이라도 다 사랑할 수 있었지만, 저런 모습은 마음이 좀 아렸다.

체스휘는 얕은 한숨을 내쉰 뒤 자리를 떠났다. 나는 살금살금 걸어서 다이안이 사라진 곳으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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