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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75)화 (75/300)

내 말에 다행히 올리비아도 얼굴을 누그러뜨렸다. 유지니아는 여전히 고까운 듯이 나와 올리비아를 쳐다봤지만, 그래도 시비를 더 걸지는 않았다.

한자리에 모였던 사람들이 흩어졌다. 나는 체스휘에게 손이 잡힌 상태라 먼저 방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이 떠나기를 기다렸다.

“7호실, 잠깐 시간 좀 돼? 내가 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는데.”

그런데 어째서인지 4호실 양육자 레이븐이 바로 나가지 않고 미적거렸다. 심지어 그는 나한테 볼일이 있는 듯이 다가왔다.

대답은 내가 아니라 체스휘에게서 흘러나왔다.

“무슨 일인데요?”

“아니, 2호실 말고 7호실한테 볼일이 있는데.”

레이븐은 탐탁지 않은 눈으로 체스휘를 곁눈질했다. 어디로 보나 자리를 비켜 달라는 뜻이었지만, 체스휘는 눈썹 한 올 까딱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제가 먼저 린 씨와 약속을 잡아서요. 레이븐 씨가 먼저 나가 주셔야겠는데요.”

“그래? 중요한 얘기야?”

“레이븐 씨가 하려는 말보다 훨씬 중요하죠.”

“뭐?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못마땅한 눈으로 체스휘를 훑어본 레이븐이 문득 수상쩍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둘이 왜 그렇게 찰싹 붙어 서 있어?”

나는 체스휘의 발을 콱 밟았다. 그러자 체스휘가 나지막한 웃음을 흘리면서 장난은 여기까지만 치겠다는 듯이 내 손을 놔주었다.

나는 체스휘에게서 떨어진 뒤 레이븐에게 말했다.

“잠깐이면 괜찮아요. 무슨 일인데요?”

레이븐은 옆에 체스휘가 있는 게 마음에 안 드는 듯이 떨떠름한 시선을 보내다가 그래도 그냥 입을 열었다.

“혹시 7호실 페어랑 우리 페어랑 한동안 협력하면 어떨까 싶어서.”

“레이븐 씨 페어랑 우리랑 협력을요?”

“오늘 일도 그렇고, 또 얼마 전에는 성수 사건도 있었잖아? 아무래도 요즘 저택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은 것 같아서 말이야.”

레이븐은 막상 먼저 제안해 놓고 내가 거절할까 봐 약간 초조한 듯이 얼른 덧붙였다.

“애들도 하나보다는 둘이 같이 붙어 있는 게 더 안심될 것 같지 않아? 무슨 일이 생기면 교대로 상대방 애도 좀 봐 주고, 말하자면 한동안 동맹 관계를 맺어서 협력하자는 거지.”

레이븐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바로 이해가 됐다.

사실 내가 계속 다이안에게 붙어 있는 것도, 언제 어디서 모로스 같은 위험 요소가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우리 애가 워낙에 쉽게 죽는 개복치다 보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종일 다이안과 함께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만큼 레이븐의 의도는 쉽게 파악할 수 있었지만… 한 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있었다.

“레이븐 씨. 그런 제안을 왜 린 씨에게 하죠?”

나와 비슷한 의문이 들었는지, 체스휘가 팔짱을 낀 채 레이븐에게 물었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체스휘는 분명히 웃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웃는 것처럼 느껴지지가 않았다. 여느 때처럼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에서도 왠지 모를 싸늘함이 느껴졌다.

“뭐… 이런 제안을 하기에 제일 적절한 사람이 7호실이니까?”

“그러니까 왜 제일 적절한 사람이 린 씨일까요?”

체스휘는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고개까지 비스듬히 기울여 갸웃거리면서 레이븐에게 다시 물었다.

아니, 나도 그 부분이 궁금했던 건 맞는데 왜 체스휘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거지? 나는 묘한 기분으로 체스휘를 쳐다봤다.

무엇보다도, 지금 레이븐이 한마디씩 말을 꺼낼 때마다 그를 향한 체스휘의 호감도는 무참할 만큼 가차 없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레이븐은 그것도 모르고 자신이 왜 체스휘에게 이런 식으로 추궁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발끈한 어투로 말했다.

“다른 사람들하고는 그렇게 안 친하니까 그러지. 그럼 내가 2호실한테 이런 말을 꺼내 보겠어?”

“린 씨하고도 이런 성가신 부탁을 할 만큼 친하지 않을 텐데 쓸데없이 용감하네요.”

“뭐…! 2호실이 7호실하고 내가 친한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이제 보니 체스휘는 웃는 얼굴로 남을 열받게 만드는 데 재주가 있는 것 같았다. 애석하다는 듯한 그의 말과 눈빛에 레이븐이 발끈했다.

“2호실이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히 있어. 이래 봬도 7호실하고 나는 다른 사람은 모르는 우리 둘만의 비밀까지 공유한 사이거든?”

“아, 지금 뭔 소리 하는 거예요?”

“내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아!”

쓸데없이 오해할 만한 소리를 하는 레이븐을 향해 내가 짜증을 냈으나, 레이븐은 체스휘에게 제대로 기분이 상한 듯이 오히려 더 소리 높여 자신이 한 말의 진실성을 주장했다.

그래 봤자 지난번에 내가 메이드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걸 보고 스텔라의 비밀 지령을 받아 저택에 들어온 게 아니냐고 제멋대로 착각했던 것뿐이잖아? 물론 사실 그건 착각이 아니라 진짜였지만, 아무튼….

가만, 그러고 보니까 혹시 지금 레이븐이 나한테 동맹 제안을 한 것도 내가 스텔라의 비밀 요원이라 무력이 강할 거라 생각해서 덕 보려고 그런 거 아닌가? 만약 그런 거면, 역시 잔머리를 잘 굴린다고 해야 할지.

“그래요…? 린 씨하고 둘이 비밀을 공유한 사이라니, 도대체 언제부터?”

그때, 체스휘가 흥미롭다는 듯이 느릿하게 레이븐의 말을 따라 읊조렸다. 꼭 방금 들은 말을 곱씹어 음미하는 것 같기도 했다.

체스휘의 입술에 걸린 미소도 한결 짙어졌다. 그리고 내 눈앞에 호감도 알람이 떠올랐다.

[‘체스휘’의 ‘레이븐’을 향한 호감도가 변경되었습니다.]

[호감도 -950]

와….

레이븐에 대한 체스휘의 호감도가 한꺼번에 50이나 하락했다. 만약 이게 주식이었다면 휴지 조각이 되다 못해 가루가 될 정도의 떡락이었다.

레이븐이 한기를 느낀 듯이 일순간 몸을 파르르 떨었다. 이상하게도 바로 그 순간, 나도 원인을 알 수 없는 위기감을 느꼈다. 나는 본능적으로 얼른 입을 열어 외쳤다.

“생각해 볼게요! 일단 지금은 체스휘 씨랑 할 말이 있으니까 나중에 다시 얘기하죠.”

그러자 왠지 모르게 선득한 느낌이 들던 공기가 거짓말처럼 다시 잠잠해졌다.

레이븐은 몇 번이나 잘 생각해 보라고 나한테 당부한 뒤 못마땅한 눈으로 체스휘를 흘겨보면서 방을 나섰다.

“저 사람은 가짜 주제에 너무 나대네요.”

이후에 체스휘가 레이븐이 떠난 곳을 보며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앗, 그런데 뭐야? 가짜라니, 체스휘도 레이븐이 스텔라 출신이라고 한 게 거짓말인 걸 아는 건가?

“아무튼 린 씨. 저런 제안은 그냥 바로 거절하지, 왜 생각해 본다고 했어요?”

체스휘는 조금 전의 내 대답이 불만스러운 듯했다. 나는 꼭 심통 부리는 사슴처럼 미간을 찌푸린 채 나를 내려다보는 체스휘를 미묘한 눈으로 마주했다.

“왜 레이븐 씨 제안을 당연히 거절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자 체스휘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답했다.

“누군가와 짝을 이뤄서 뭘 할 거면 당연히 나하고 해야죠.”

그런데 이어진 그의 말이 참 뻔뻔스러웠다.

“날 제일 좋아하잖아요.”

아니, 물론 양육자들 중에서 제일 친한 사람을 꼽자면 당연히 체스휘를 우선순위에 둘 수 있겠지만… 그렇지만…! 그래도 그걸 이런 식으로 말한다고?

“내가…! 체스휘 씨를 제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체스휘 씨가 날 제일 좋아하는 거겠죠!”

나는 괜히 발끈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체스휘가 눈을 반달처럼 접어 웃었다.

“당연히 그것도 맞는 말이고.”

그가 너무 순순히 수긍해서 나는 또 할 말이 없어졌다.

왠지 작은 벌레 같은 게 가슴에 들어와 붕붕거리는 것처럼 근질근질한 느낌이 들었는데, 그래도 ‘호감도 15! 호감도 15!’를 되뇌며 혼자 착각의 늪으로 발을 담그지 않으려 노력했다.

“참 나, 됐어요. 전 다이안한테 가 볼 거예요.”

“린 씨, 왜 또 화내요?”

“화 안 나따그유.”

그러다 또 체스휘의 짜다 못해 씁쓸하기까지 한 호감도를 생각하니 마음이 언짢아져서 이를 악물며 말한 뒤 그를 혼자 둔 채 먼저 방을 나섰다.

“저도 미뉴엘에게 들러야 하는데 같은 방향이니 같이 가요.”

하지만 체스휘가 긴 다리로 느릿느릿 걸으면서 너무 빨리 나를 따라잡아서 더 열이 올랐다.

등 뒤에서 부스러지는 듯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울렸지만, 나는 골이 나서 그를 돌아보지 않고 쿵쿵거리면서 걸음을 서둘렀다.

그리고 그날 저녁, 처음으로 라파엘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는 다른 외부 일정이 있어 지난주에 내가 보고한 내용을 늦게 확인했다면서, 수상한 지하실의 문을 조금 더 조사해 보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래서 그날 밤, 나는 모두가 잠든 사이에 방을 빠져나왔다.

“콘라드의 물약이 유용하게 쓰이네.”

성수가 깨졌을 때 콘라드에게서 뜯어낸 물약이 조금 남아 있었는데, 그래서 꽃병을 치우는 밤에도 편하게 방 밖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시스템 로딩 중….

83%(Err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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