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는 별 느낌이 없었는데, 다쳤다는 걸 인지하자 갑자기 팔이 쓰려 왔다.
“아, 진짜네요. 창문이 깨질 때 베였나 봐요.”
“제가 옆에 있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요.”
체스휘가 안타깝다는 듯이 말하며 상처 부위를 내려다봤다. 살피듯이 베인 곳 주변을 살살 어루만지는 손길이 간지러웠다.
“잠깐 한눈만 팔아도 자꾸 이렇게 다치니 곤란하네요….”
혼잣말처럼 나지막하게 소곤거리는 목소리에는 정말 그 말대로 유감스러움이 한껏 밴 얕은 한숨이 담겨 있었다.
그래 봤자 계단을 굴렀을 때 한 번을 제외하고는 그냥 자잘하게 부상을 입은 것뿐이었는데….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지금 체스휘의 말을 들으면, 내가 툭하면 사고를 몰고 다니는 사고뭉치인 줄 알 것 같았다.
나는 살짝 미심쩍은 눈으로 체스휘를 쳐다봤다.
눈매를 살짝 찡그린 채 내 상처를 살피는 그의 얼굴이 꽤 진지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진짜 날 걱정해 주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왜 호감도는 그 모양인 겁니까? 네?
“이 정도는 다쳤다고 할 수도 없는 수준인데요, 뭐.”
아무튼 별것도 아닌 상처로 체스휘가 이런 반응을 보이자 나는 살짝 겸연쩍어졌다. 그래서 체스휘에게 잡힌 팔을 빼내면서 앞서간 다른 양육자들을 따라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어느새 다른 사람들은 벌써 저 앞쪽으로 멀어져 있었다.
“그래도 린 씨가 다치면 싫은걸요.”
체스휘도 나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분명 그의 걸음은 느릿했는데, 다리가 길어서 그런지 금방 나를 따라잡아 옆에서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올리비아 씨의 손님이 이렇게 위험한 사람인 줄 알았으면 아까 혼자 보내지 않았을 거예요.”
옆얼굴로 시선이 느껴지는 걸 보니, 체스휘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반면 나는 일부러 체스휘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래서인가? 옆에서 울리는 체스휘의 목소리가 왠지 조금 전보다 한결 농밀하게 고막을 훑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린 씨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내 옆에 있는 게 더 안전하고 좋다고.”
그런데 체스휘가 나한테 소곤거리듯이 말한 그 순간, 왠지 일전에 들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 뒷덜미를 스쳤다.
지난번에 지하실 앞에서 총괄 집사를 피해 숨을 곳을 찾다가 체스휘와 마주쳤을 때.
그때도 분명 체스휘에게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무조건 그의 말을 따라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었다.
무심코 고개를 돌려 체스휘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는 모양 예쁜 입술에 다정한 미소를 띤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얼굴을 이렇게 똑바로 마주하고 있으려니, 왠지 머리가 조금씩 몽롱해지는 것 같았다.
다음 순간 나한테 느릿하게 뻗어진 체스휘의 손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듯이 내 옆머리를 어루만졌다. 눈가를 살짝 가린 그의 어두운 금발 사이로 명료한 광채를 발하고 있던 보라색 눈이 살며시 휘어졌다.
“어때요, 내 말이 맞죠?”
귓가에 낮은 속삭임이 내려앉는 순간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네…. 체스휘 씨 말이 맞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보다 체스휘 씨 옆에 있는 게 제일 좋아요.”
[‘체스휘’의 ‘린’을 향한 호감도가 변경되었습니다.]
[호감도 15]
그 순간 퍼뜩 정신이 들었다.
체스휘의 호감도가 갑자기 꽤 큰 폭으로 움직였다. 시야에 비친 그의 얼굴에도 한결 짙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착하네요. 그런 예쁜 말도 할 줄 알고.”
꼭 예쁜 짓 한 강아지를 칭찬하듯이 체스휘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래요, 내 옆에만 꼭 붙어 있어요. 다들 방으로 들어간 것 같은데, 그럼 우리도 그만 갈까요?”
그런 뒤 그는 조금 전보다 기분이 확연히 좋아진 듯한 얼굴로 내 손을 잡고 양육자들이 사라진 곳을 향해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도 얼떨떨한 상태로 체스휘에게 손을 잡혀 끌려갔다.
뭐야? 방금 뭐였지?
혹시 내가 지금 체스휘의 미인계에 홀린 건가…? 아니, 얼굴이 내 취향인 건 맞지만 이렇게 홀릴 정도였던가?
“체스휘 씨 지금… 혹시 나한테 뭐 했어요?”
“뭐 했냐니, 무슨 이야길 하는 거예요?”
체스휘가 내 물음에 잔잔하게 반문했다. 하지만 나도 그에게 지금 내가 느낀 의문과 혼란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내가 의혹에 잠긴 사이, 체스휘와 나는 샤벨과 마벨이 있는 방에 도착했다.
“…그러니까, 지금 손목 하나 날아간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야. 내가 묻는 말에 솔직히 말하지 않으면 아예 살점을 하나하나 도려내 줄 테니까!”
체스휘와 내가 얘기를 하느라 좀 늦게 와서, 다른 사람들은 이미 샤벨과 마벨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무도 우리를 주목하지 않았다. 체스휘는 방에 들어가서도 내 손을 놓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뒤에 섰다.
“저 사람들이네요. 린 씨를 다치게 만든 게.”
설핏 찌푸려진 체스휘의 눈이 의자에 묶인 채 앉혀진 샤벨에게 향했다.
[호감도 -1000/?]
컥!
눈앞에 떠오른 체스휘의 호감도를 보고 숨을 들이켰다.
레이븐의 –889보다 더 심한 호감도가 나오다니!
“내 말 알아들었으면, 누가 이런 짓을 시켰는지 어디 한번 뚫린 입으로 대답해 봐!”
그때, 올리비아가 샤벨의 입을 막고 있던 천을 치웠다.
“쿨럭, 쿨럭…!”
샤벨은 막혔던 숨통이 트이자 기침을 크게 몇 번 했다. 하지만 샤벨은 이런 불리한 상황에서도 조금도 기가 죽지 않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우리를 매섭게 쏘아봤다.
“죽어라, 이 악마들…!”
곧 옆으로 침을 퉤 내뱉은 샤벨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번에 욕을 지껄였다.
“이 저택에 있는 너희 악마들을 전부 죽이지 못한 게 한이다!”
“이게 지금 어디서 겁대가리 없이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어? 배후가 누구인지, 뭘 위해서 우리 쥬쥬를 노렸는지 순순히 말 안 해?”
퍼억!
당연히 올리비아의 보복이 이어졌다. 하지만 샤벨은 거기에 굴하지 않고 계속 입을 놀렸다.
“크흑…. 우리는 너희 악마들을 신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신성한 임무를 위해 선발된 자들…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다!”
“이 미친놈이, 그래도 계속…!”
“악마의 씨앗을 키우는 저주받은 놈들! 모두 다 지옥으로 떨어져라…!”
사이비인가…? 악마니, 악마의 씨앗이니 하면서 계속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데.
결국 귀가 따가웠는지, 올리비아가 다시 샤벨의 입에 축축해진 천 조각을 쑤셔 넣었다.
“이 새끼, 결국 우리 쥬쥬만 노린 건 아니라는 거지?”
올리비아에게 가장 중요한 건 그 문제였나 보다. 그녀는 살짝 김이 샌 얼굴로 양육자들 사이에 서 있는 유지니아를 한 번 흘겨봤다.
“그냥 죽이지 그래요? 어차피 더 이상 빼낼 정보는 없는 것 같은데.”
그때 1호실 양육자 마리엔이 팔짱을 낀 채 상황을 관망하다가 지나가듯이 말했다.
그런데 마리엔이 서 있는 곳이 하필 내 옆이라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쏠렸다.
그 순간, 내가 아직도 체스휘와 손을 잡고 있는 게 생각나서 얼른 팔을 뒤로 빼려고 했다. 하지만 체스휘는 날 놔주는 대신, 맞잡은 손을 그의 등 뒤로 당겨 사람들의 시선에서 가렸다.
이게 무슨 짓이냐는 듯이 내가 눈을 슬그머니 치켜뜬 채로 올려다보자, 체스휘가 한쪽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려 나를 향해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아, 아니, 이 남자가 정말?
다른 사람들이 쳐다봐서 대놓고 손을 빼지도 못하고 나는 참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체스휘는 참으로 천연덕스럽게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사람들을 보며 마리엔의 말에 동조했다.
“그러게요. 그냥 죽여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 어차피 정체도 대충 예상이 가고.”
난 그의 말에 눈이 번쩍 뜨였으나, 다른 사람들은 다들 거기에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뭐야? 저놈들 정체가 뭔지 나만 몰라?
이씨, 시스템 창! 너 뭐 하는 거야? 이런 기본 정보는 미리미리 알려 줘야지!
“이것들 악마의 화원으로 데려가.”
결국 샤벨과 마벨의 악마의 화원행이 결정되었다.
좀 더 제대로 신문하지도 않고 바로 이렇게 보내 버리다니, 그들의 정체가 뭔지 예상이 된다는 양육자들의 말이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양육자들과 모여서 대화할 때도 저택의 아이들을 공허에 보내는 데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 나왔었는데, 혹시 이번에도 같은 경우인 건가?
“저놈들은 참 지칠 줄도 모르네.”
“우리 양육자들과 아이들에게 반하는 부정적인 세력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한 번씩 저택에 들어와 분탕질을 치니 귀찮아서 원.”
맞다 보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이렇게 자폭 공격까지 한다는 소리는 없었잖아!
나는 양육자들이 나누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이건 아무리 봐도 내가 받은 스텔라의 장기 퀘스트에 나오는 반동분자와 연관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렇게 무분별하게 아무나 저택에 들이니 이런 일이 생기지. 개념 없는 양육자 한 사람 때문에 다른 사람들까지 전부 다 피해를 보잖아.”
“아, 또 개지랄하네. 내가 규칙으로 금지된 일을 한 것도 아니고, 지금까지 저택에 손님을 불렀던 사람이 나밖에 없는 것도 아닌데 왜 또 시비야?”
“5호실이 부른 사람이 유독 자주 저택을 들락거리는 건 사실이니까. 게다가 오늘은 이렇게 광범위하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무기까지 몰래 반입해 들어왔잖아. 이러다 다 같이 잘못되면 그거야말로 개죽음 아니야?”
이 두 사람은 정말 관계가 회복되기에는 텄나 보다.
유지니아와 올리비아가 또다시 심상찮은 기류를 흘리기 시작했다.
“그냥 앞으로는 다들 조심하기로 하죠. 어차피 어느 경로든 개미들이 저택에 숨어들어 오는 걸 전부 다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체스휘가 끼어들어서 상황을 정리했다. 나는 그만 손을 놓으란 의미로 손아귀에 힘을 세게 줬다. 하지만 체스휘는 아파하기는커녕, 내가 또 장난을 치는 줄 알았는지 오히려 누가 누가 더 손에 힘을 잘 주나 시합하듯이 내 손을 꽉 쥐어 왔다.
결국 나는 체스휘의 손에서 벗어나는 걸 포기하고 그냥 빨리 이 자리를 파하기로 마음먹었다.
“체스휘 씨 말이 맞아요. 올리비아 씨, 일단 오늘은 세르쥬가 많이 놀랐을 것 같은데 옆에 같이 있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