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지금 내가 본 게 뭔지 바로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몇 번 눈을 깜빡일 정도의 시간이 지난 끝에, 금방 경악스러운 마음이 밀려들었다.
뭐, 뭐?
호감도 2? 체스휘의 호감도가 2라고?
하지만 상황을 깨닫고 나서도 어리벙벙한 기분이 드는 건 마찬가지였다.
얼마나 믿기 어려웠으면 호감도 열람 기능을 서둘러 OFF 상태로 껐다가 다시 켜 봤다. 하지만 눈앞의 숫자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린 씨?”
체스휘는 내가 갑자기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어버버거리자 의아한 듯했다. 의자에 나른히 등을 기댄 채 여전히 은은한 미소를 띤 얼굴로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은 내가 늘 보아 온 것과 똑같았다. 그래서 나는 더 혼란스러웠다.
“저기, 올리비아 씨?”
“응? 왜?”
내 맞은편에 앉은 올리비아를 부르자, 자신의 양육 대상인 세르쥬의 옷에 묻은 크림을 닦아 주던 그녀가 의아하게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시스템 설정상 게임 캐릭터가 시야에 담고 있는 사람에 대한 호감도가 머리 위에 뜨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를 향한 호감도를 알려면 반드시 상대방의 눈에 내가 비쳐야만 했다.
올리비아가 세르쥬에게서 나한테로 시선을 돌린 순간, 그녀의 머리 위에 떠오른 호감도가 90에서 72로 변했다. 참고로 세르쥬는 양처럼 순하고 귀여운 생김새와 달리 또다시 말린 생선처럼 생기 없는 눈으로 올리비아를 보며 호감도 79를 표시했다가 나를 본 순간 숫자를 33으로 바꾸었다.
“마리엔 씨?”
이번에는 마리엔을 불러 그녀의 호감도를 확인했다. 차를 마시면서 시선만 미끄러뜨려 나를 쳐다본 마리엔의 머리 위에는 51이라는 숫자가 떠올랐다.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던 모두가 갑자기 다른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나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그래서 그들의 호감도를 확인하기도 쉬웠다.
어른이고 애고 할 것 없이, 다들 기본 호감도 30보다는 높은 숫자가 나왔다.
“린 씨, 갑자기 왜 그래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 나한테 가장 큰 호의를 드러내며 다정한 목소리로 묻고 있는 체스휘만이 오직 예외였다.
[호감도 2/?]
나는 충격적인 호감도를 목격하고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는 상태로 입술을 뻐끔거렸다. 하지만 작게 벌려진 입술 사이에서는 실소 섞인 헛숨만 새어 나왔다.
와…. 와아….
진짜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야? 아니, 체스휘 씨…. 도대체 저 호감도는 뭐지?
그래도 당신, 나랑 꽤 많이 친한 거 아니었어? 더군다나 기본 호감도라는 게 있잖아? 봐, 다른 사람들은 아무리 나랑 별다른 친분이 없어도 호감도가 최소 30 이상인데…!
차라리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 최근까지 나한테 가장 까칠하게 굴었던 마리엔이나 미뉴엘이 저 정도 호감도를 가지고 있었으면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뭐야? 야, 다이안. 네 양육자 왜 저래? 네가 준 과자가 상한 거였던 거 아니야?”
“린은 아직 내가 준 과자 안 먹었는데….”
그러나 심지어 마리엔은 51, 미뉴엘은 49의 호감도를 각각 표시하고 있었다.
당연히 나는 너무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말이 다 안 나왔다. 다른 사람도 아닌 체스휘가 나한테 저렇게 바닥을 치는 호감도를 보일 줄은 정말 몰랐다.
아니, 그럼 지금까지 나한테 애매하게 행동했던 건 다 뭔데요? 다른 사람한테는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친근하게 말하고 행동한 적 없었잖아?
더군다나 볼 때마다 나한테 그렇게 막 살살 눈웃음치고, 막 손도 붙잡고, 막 사람 헷갈리게 하는 말도 하고…!
솔직히 내가 데이터로 만들어진 캐릭터랑 연애하는 걸 즐기지는 않지만 그래도 체스휘한테는 그런 쪽의 호감이 좀 있었다.
그래서 체스휘랑 내가 지금 살짝 썸을 타는 사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었단 말이다. 그런데 그게 다 내가 혼자 착각한 거라고?
갑자기 목이며 귀가 뜨끈뜨끈한 걸 보니, 몸에서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속까지 탔다.
나는 앞에 있는 찻잔을 들어 미지근하게 식은 차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어휴, 옷 찾느라 한참 걸렸네. 무슨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이렇게 입을 옷이 없어? 조만간 새로 사든가 해야지.”
그때, 차를 쏟아서 옷을 갈아입으러 잠깐 자리를 비웠던 레이븐이 돌아왔다.
내가 더 깜짝 놀랄 만한 일은 바로 그 다음 순간 벌어졌다.
내 얼굴에 박혀 있던 체스휘의 시선이 레이븐을 향해 소리 없이 미끄러진 순간, 체스휘의 머리 위 숫자가 변했다.
[호감도 –889/?]
“푸읍!”
나는 하마터면 입 안에 있는 차를 테이블에 뿜을 뻔했다.
사레가 들려서 기침하는 나를 향해 다이안과 체스휘가 걱정하는 말을 건넸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괜찮다고 했다. 내 기침이 가라앉자 두 사람은 다시 시선을 돌렸다.
다이안은 앞에 있는 케이크로 눈길을 내려서 호감도가 떠오르지 않았고, 체스휘는 막 자리에 앉은 레이븐을 웃는 낯으로 다시 쳐다봤다.
[호감도 –889/?]
조금 전 내가 목격한 숫자는 양반이었다. 레이븐을 향한 체스휘의 호감도는 내핵까지 뚫고 내려간 듯한 엄청난 숫자였다.
나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채로 체스휘를 보았다. 체스휘의 시선이 레이븐에 이어 테이블에 앉아 도란도란 대화 중인 사람들을 짧게 스쳤다. 그리고….
[호감도 –654/?]
[호감도 –579/?]
[호감도 –608/?]
[호감도 –623/?]
충격적인 숫자가 연이어 내 앞에 폭탄처럼 떠올랐다. 레이븐만큼은 아니지만 이 또한 경악스러운 호감도이긴 마찬가지였다.
나는 완전히 얼이 빠졌다.
‘진짜… 도대체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야?’
아니, 시스템 오류 고쳐진 거 맞아? 아직도 맛이 간 상태인 거 같은데? 그것도 심하게!
원래 호감도는 100이 최대치인데, 체스휘의 호감도에는 그런 한계조차 없는 듯했다. 게다가 이토록 극악한 마이너스 호감도는 더더군다나 처음이었다.
그때, 내 시선을 느꼈는지 체스휘가 나를 돌아봤다.
여전히 테이블 위에 팔을 올린 채 손에 나른히 턱을 괸 그의 얼굴에 느슨한 미소가 걸렸다.
“린 씨, 아까부터 왜 그렇게 쳐다봐요?”
다른 때라면 그를 따라 가볍게 웃거나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겠지만, 지금은 뱁새눈을 뜬 채 체스휘의 얼굴을 쳐다봤다.
[호감도 2/?]
그래도 아까에 비하면 저 볼품없는 호감도가 비교적 정상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나마 –889보다는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지만….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뭐라고 형용하기 어려운 기분으로 짧게 읊조린 뒤 접시에 놓인 애꿎은 케이크만 포크로 푹푹 찌르기 시작했다.
뭐랄까, 굉장히 혼란스러운 느낌이었다. 왜 체스휘만 저렇게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이상한 호감도를 보이는 거지?
그나마 다른 사람에 비하면 나에 대한 호감도가 월등히 높다지만, 그래 봤자 한 자릿수였다.
‘큽, 한 자릿수….’
충격적인 마이너스 호감도에 비하면 선방한 느낌이긴 한데, 그렇다고 이게 객관적으로 봤을 때 높은 수치인 건 절대 아니지 않나?
‘이건… 호불호가 지나치게 확실한 와중에 그나마 나는 일단 보류해 둔 느낌이라고 해야 할지….’
여전히 혼란이 가시지 않은 마음에 서서히 껄끄러움이 들어찼다.
알고 보니 저렇게 사람 헷갈리게 만드는 행동이나 눈빛에 별다른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은근히 좀 언짢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시스템 창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 만약 체스휘의 호감도 창에만 오류가 생긴 게 아니라면 그동안 착각한 건 나일 것이다.
곱씹을수록 현타가 세게 오는 것 같아서 포크로 케이크를 찌르던 손을 멈추고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차라리 처음부터 호감도 기능이 켜진 상태로 게임을 진행했으면 이런 기분이 들지는 않았을 텐데.
“7호실, 그 케이크 먹기 싫어? 왜 그렇게 푹푹 찌르면서 괴롭혀?”
심지어 레이븐은 내가 아무것도 안 했는데도 혼자서 벌써 호감도 80을 찍고 있어서 더 현타가 왔다. 물론 이 경우에는 레이븐이 지나치게 쉬운 남자인 것 같기는 했지만, 아무튼.
그렇게 충격과 혼란의 호감도 공개가 있었던 날 이후로 나는 체스휘를 은밀히 관찰했다. 지금까지처럼 그에게 허물없이 친근하게 굴지도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예 그를 무시하거나 한 건 아니었고, 얼굴을 보면 인사를 하고 여전히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확실히 예전만큼은 아니었다.
“린 씨, 혹시 나한테 화난 거 있어요?”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체스휘도 이상함을 느꼈는지 나한테 제법 직설적으로 물었다.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친 체스휘와 짧은 인사를 나눈 뒤 막 그를 지나쳐 가려던 찰나의 일이었다.
“아, 아니요? 그런 거 없어요.”
나는 뜨끔해서 얼른 미소를 지으면서 내 손목을 붙잡아 세운 체스휘에게 말했다. 그러나 체스휘는 그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내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아, 내 행동이 그렇게 티 났나?
하지만 체스휘의 오해와 달리 나는 그에게 화나지 않았다.
당연하지. 내가 왜 체스휘에게 화가 나겠는가?
그냥 수면 위에서 간당간당하게 물장구치고 있는 호감도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나니 체스휘에게 거리감이 느껴지고 살짝 현타가 왔을 뿐이었다.
게다가 아직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사실 이건 내가 지금까지 어느 정도 잘 안다고 생각했던 체스휘라는 사람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진 이유가 가장 컸다.
체스휘의 호감도는 그만큼 보면 볼수록 의외성이 있었다. 특히 요 며칠 동안 집중해서 자세히 관찰한 결과….
아무래도 내가 이 저택에서 제일 친절하고 착하다고 생각했던 체스휘가 사실 지독한 인간 불신, 혹은 지독한 인간 혐오에 시달리는 건 아닌지 강한 의심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말 믿기지 않게도 이 저택에 있는 사람 중에 체스휘가 플러스 호감도를 가진 건 내가 유일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