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 받은 대로 주말이 된 다음 날 오전, 상위 세계의 교황청에서 갓 제작이 완성된 따끈따끈한 성수가 레드포드 저택에 도착했다.
드디어 원치 않는 감금 생활에서 벗어나게 된 고용인들도 오랜만에 활기가 넘쳤다.
다수의 모로스가 나온 이후 방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던 사람들도 한마음 한뜻으로 밖에 나와 성수를 옮겼다.
잠시 후, 저택의 복도와 방들 곳곳에 성수가 담긴 꽃병이 놓였다. 사흘 동안 농축된 독기에 절어 있던 공기가 서서히 맑아질수록 사람들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오늘 날씨도 되게 좋네요! 창문도 전부 활짝 열까요?”
“그래! 계속 밀폐된 곳에서 지냈더니 답답한데 열자, 열어.”
기분이 좋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양육자들과 아이들도 오랜만에 하하호호 웃으며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였다.
검은 공기 중독을 방어하는 콘라드의 약은 효과가 좋았으나 대신 맛이 아주 쓰레기 같았다. 게임을 플레이하고 나서 이번처럼 성수의 소중함을 여실히 절감한 때는 또 없었던 것 같았다.
저택이 어느 정도 환기되자, 고용인들은 부지런하게 저택 대청소에 들어갔다.
“신문! 혹시 오늘 자 신문은 아직 안 왔나요?”
“아! 우편물에 섞여 있을 거예요. 지금 가져다 드릴까요?”
“내 연구실로 부탁합니다. 지금 당장이요.”
콘라드도 레드포드 저택에 따로 마련된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가려는 것 같았다.
그는 사흘 전에 비해 확연히 더 초췌해진 얼굴로 성수 꽃병을 소중히 품에 끌어안고 비틀거리면서도 빠르게 복도를 걸어갔다.
“내가 빨리 이 망할 저택을 떠나야지…. 복권… 숫자 다섯 개만 맞으면…. 아니 네 개라도….”
그러면서 혼자 간절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을 들어 보니, 얼마 전에 사 둔 복권의 당첨 번호를 확인하려고 신문을 찾는 것 같았다.
“닥터 콘라드,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바로 그때, 콘라드가 걸어가던 복도의 앞쪽에서 갑자기 슥 나타난 총괄 집사 슈나우더가 길을 막아섰다. 그를 본 콘라드가 소스라치게 놀라 안경이 기울어지도록 펄쩍 뛰며 뒤로 물러났다.
“무, 무슨 일입니까? 또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아닙니다. 이틀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경계심이 그득한 콘라드의 얼굴을 보고 총괄 집사가 허둥지둥 손을 내저었다.
총괄 집사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지난날 콘라드를 묶어 놓고 위협했던 일을 사과했다. 하지만 콘라드는 총괄 집사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말은 잘하는군요…! 오늘 오전까지도 날 몰래 감시했던 주제에! 낮은 물론이고 밤에도 내가 자는 방이 비었는지 아닌지 확인한답시고 틈틈이 찾아와서 노크를 해 대는 바람에 난 이틀 내내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콘라드가 흥분한 듯이 씩씩거리며 외친 소리를 듣고 나는 눈썹을 추어올렸다.
뭐야, 총괄 집사가 그랬어?
콘라드의 말에 총괄 집사가 반박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줄줄 흐른 식은땀만 손수건으로 닦는 걸 보니 아무래도 진짜인 것 같았다.
“총괄 집사님도 생각보다 고집이 있네요.”
그렇게 내가 두 사람의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을 때, 누군가 내 어깨에 무게를 실었다.
고개를 돌리자, 내 어깨에 가볍게 팔을 올린 채 거기에 얼굴을 기대고 있던 체스휘가 눈을 접어 웃었다.
체중을 실은 건 아니라 무겁지도 않았고, 딱히 이런 접촉이 기분 나쁘지도 않아서 그냥 내버려 뒀다. 하지만 괜히 콧잔등이 간지러워서 손가락으로 슬쩍 문지르면서 말했다.
“체스휘 씨도 조심해요. 총괄 집사님이 점잖아 보여도 은근히 외골수라 뭐 하나에 꽂히면 다른 얘기는 잘 안 듣더라고요.”
“저런, 앞으로 주의해야겠어요.”
콘라드의 방에서 직접 본 총괄 집사의 모습을 떠올리며 혀를 내두르자, 체스휘가 동조했다.
“당신 때문에 내가… 내가 얼마나…!”
“닥터 콘라드, 다시 한번 정말 죄송….”
우리는 콘라드와 총괄 집사의 모습을 좀 더 지켜봤다.
체스휘는 나한테 조금 더 몸을 기댔다. 실컷 이리저리 뛰어놀고 나서 나른해진 고양이가 배를 깔고 누워 장난감 낚싯대를 가볍게 툭툭 건드리듯이, 느른한 손길이 내 머리카락을 장난스럽게 만지는 게 느껴졌다.
총괄 집사는 그때는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었다며, 아무래도 검은 공기 중독 증상이 일어나 그런 미친 짓을 했던 것 같다고 주장했다.
더군다나 총괄 집사의 의심과 달리 오늘까지도 콘라드는 모로스로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은 총괄 집사도 뒤늦게 ‘아뿔싸! 내가 실수했구나!’ 싶어 이렇게 부랴부랴 콘라드에게 사과하기로 한 것 같았다.
사실 밀폐된 공간에서 사람까지 죽어 나가니, 총괄 집사에게 패닉 상태가 와서 그렇게 극단적인 짓을 저지른 것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 비록 돌팔이 생활을 하고 있기는 하나, 그래도 의사이기는 한 콘라드도 결국 그 부분을 감안하기로 한 것 같았다.
그는 당장 총괄 집사를 해고시켜 버리고 싶은 것처럼 파들거리다가, 결국 다시는 자신을 귀찮게 하지 말라고 성을 낸 뒤 자리를 떠났다.
총괄 집사는 어쨌거나 콘라드가 이 일을 여기에서 마무리 지을 것 같은 느낌이 들자 안심한 기색이었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닥터 콘라드치고는 원만한 결말이네요.”
“닥터 콘라드의 성격을 잘 아시나 봐요?”
“그야 워낙에….”
“가끔 보면 린 씨는 저택에서 지낸 지 몇 년은 된 것 같아요.”
체스휘의 말에 별생각 없이 대답하다가, 이어서 고막을 파고든 음성에 몸을 작게 움찔했다.
“제가 원래 적응력이 엄청 좋아요.”
하지만 태연히 대꾸하며 몸을 앞으로 움직이자, 체스휘가 나한테 기댔던 상체를 똑바로 세우면서 소리 없이 웃었다.
“정말 그런 것 같네요.”
잠시 후, 나는 기회를 봐서 다시 한번 지하실에 내려가 봤다.
그러나 생각한 대로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걸 보니, 역시 그 어린 영혼은 집(초상화)으로 잘 돌아간 것 같았다. 나중에 한번 화랑에도 들러서 하마터면 내가 입주할 뻔한 빈 액자에 초상화의 영혼이 고이 들어가 있는지도 살짝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지하실에 내려온 김에 기묘한 검은 문도 다시 한번 만져 봤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는 그날 본 환영이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아무튼 나는 진행된 장기 퀘스트의 중간 결과를 라파엘에게 보고했다. 시스템 창에 나와 있었듯이 일단은 지하실의 문에 대해서만 보고하고, 저택의 살인마에 대해서 알리는 건 미뤘다.
이번에도 라파엘에게서 답장은 오지 않았지만, 전적이 있기에 이제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리고 다음 날.
“하, 이게 얼마 만의 여유야.”
시간이 되는 양육자들과 아이들은 티룸에 준비된 테이블 앞에 둘러앉아 모처럼의 여유를 즐겼다.
시간이 하루 더 지난 오늘, 레드포드 저택의 분위기는 한결 안정되었다. 마침 업무가 없는 주말이기도 해서, 오늘은 저택의 모두가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티룸 곳곳이 예쁜 꽃과 화초로 꾸며져 있어 실내는 꼭 온실 같았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오늘의 모임에 3호실 유지니아와 6호실 길버트 페어는 참석하지 않았다.
“린 씨, 이거 접시에 덜어 줄까요?”
“린! 내가 해 줄게. 나한테 맡겨.”
내 왼쪽에 앉은 체스휘가 다정하게 물어보자, 오른쪽에 앉은 다이안이 말리기도 전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테이블 중앙에 놓인 간식을 집게로 집으려고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테이블은 넓었고, 다이안의 팔은 그 중앙에 놓인 과자에 닿기에는 좀 짧았다.
“기… 다려…. 내가 꼭 린에게 덜어 줄 거니까!”
체스휘는 흰 셔츠의 소매를 살짝 걷어 올린 채 손에 턱을 괴고 앉아, 낑낑거리는 다이안을 웃는 낯으로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는 열과 성을 다해 우리 뽀시래기를 응원했다.
“앗, 잘하고 있어요…! 거의 다 됐어요! 조금만 더 하면 닿을 것 같아요!”
갑자기 내 눈앞에 반짝이는 글씨가 떠오른 건 바로 그때였다.
시스템 로딩 중….
50%
진행률 50%에 도달해 가속화 기능이 자동 사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