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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68)화 (68/300)

그래도 지금까지는 검은 베일을 쓴 여인, 마리네즈의 영혼이 별채에 얌전히 처박혀 있어서 봐줄 만했다. 하지만 지금은 레드포드 전체를 감싼 검은 공기가 짙어진 탓에 영역의 구분 없이 저택 안을 제 마음대로 활개 치고 다니는 모양새였다.

더군다나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지, 그녀는 린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기까지 했다.

설마 이제 와서 자신의 죽음이 억울하기라도 한 건가? 하지만 여인이 죽은 건 자업자득이었다.

지금 체스휘의 눈에 거슬리는 건 하나 더 있었다. 린의 모습으로 의태했던 그 어린아이의 영혼.

그것은 현재 단순히 방랑하는 영혼 상태에서 벗어나 린과 의사소통이 가능했고, 또한 그가 깃든 자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현재 체스휘에게 더 거슬리는 건 마리네즈의 영혼보다 바로 그 어린 영혼이었다.

다만 마리네즈의 영혼이 그 어린 영혼에게 관심을 보이던 것으로 봐서 앞으로 벌어지리라 예상되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체스휘는 그 어린 영혼에는 더 마음을 쓰지 않기로 했다.

체스휘는 손에 턱을 괸 채 흐음, 하고 나른한 음성을 내뱉었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뭐?”

체스휘는 그의 혼잣말에 의문을 표하는 미뉴엘의 머리를 또 쓰다듬었다. 린과 비슷한 행동이어도 왠지 체스휘의 손짓은 꼭 강아지 털을 쓰다듬는 듯해서 미뉴엘은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 이번에도 캬악, 하고 송곳니를 드러내면서 체스휘의 손을 사납게 쳐 냈다.

체스휘는 입으로는 다정스레 웃으면서 눈으로는 앞에 있는 린의 얼굴을 싸늘히 응시했다.

앞으로 그는 린을 더욱 주시하기로 했다.

어쩌면 린 도체스터는 그가 찾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었다.

***

제한 시간: 18:54:01

“아휴, 진짜 징하다. 무슨 사흘이 이렇게 길어? 사흘이 아니라 세 달 같네.”

한밤중, 다시 지하실에 내려온 나는 혀를 쯧쯧 차면서 그때까지도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리고 있는 초상화의 영혼을 내려다봤다. 나를 본 어린아이는 원통한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씨근덕거렸다.

내가 없는 동안 도망치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 같긴 한데, 그래 봤자 바닥에 박힌 총알에 몸이 고정돼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게임의 장르상 지금까지 육성 대상을 위협하는 요소들은 많았지만, 플레이어를 이렇게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건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44회차에서는 역시 토끼 놈들이 난이도를 개떡같이 조정한 것 같았다.

더군다나 게임에서 의도한 건지 뭔지, 성수까지 다 망가지면서 검은 공기 중독 증상까지 겹치는 바람에 43회차 플레이어의 짬밥이 우습게도 이 조그만 녀석에게 진짜 죽을 뻔하기까지 했다. 아마 그때 체스휘가 나타나서 방으로 옮겨 주지 않았다면 정말 그대로 사망 엔딩이 떴을지도 모르지.

그런 생각을 하면, 이 영혼 녀석을 당장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았다.

하지만 나는 바로 놈을 없애 버리지 않고 오만 인상을 다 쓴 채로 상처투성이의 영혼을 내려다봤다.

“야. 내가 너무 착해서 너한테 기회를 줄까 하는데.”

그러다가 결국은 아까 생각했던 대로 초상화의 영혼에게 선택권을 줬다.

“너 지금 당장 소멸당할래, 아니면 이대로 얌전히 있다가 초상화로 돌아갈래?”

어차피 이 퀘스트의 목적은 술래잡기에서 이기는 것이지, 이 영혼을 퇴치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도 큰마음 먹고 이 녀석에게 기회를 줄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설마 내가 이런 제안을 할 줄은 몰랐는지, 버둥거리던 놈이 흠칫하면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당장 날 없애지 않겠다고?”

나는 말없이 초상화의 영혼을 쳐다보았다. 내가 빈말을 한 게 아니란 걸 알았는지, 녀석이 얼른 내 제안을 덥석 받아 물었다.

“그럼 얌전히 있을 테니까 이것 좀 풀어 줘.”

“그건 안 되지. 제한 시간 끝날 때까지는 그냥 그러고 있어.”

“온몸이 다 쑤신단 말이야! 어떻게 내일까지 이러고 있어? 풀어 주면 지금 바로 초상화로 돌아갈게.”

“야, 그건 너무 거짓말인 게 티 난다. 눈빛이나 좀 감추고 말을 하든가. 아직도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는 거 다 느껴지거든?”

몇 마디 약한 척을 하면 내가 바로 넘어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신경질이 났는지, 초상화의 영혼이 또 눈을 사납게 번뜩이면서 씩씩거렸다. 겉모습은 어린애에 불과했지만 그 눈빛은 결코 어린아이의 것이라 할 수 없을 만큼 살기등등하고 음습했다.

그걸 보니 아무래도 이 녀석을 봐주려고 한 내 생각이 잘못된 것 같았다.

“아, 안 되겠다. 지금 내가 한 말 취소. 역시 넌 그냥 지금 바로 처리해 버리는 게 낫겠어.”

“뭐? 아니, 그런 게 어디 있어…! 내가 얌전히 있겠다고 했잖아!”

초상화의 영혼이 화들짝 놀라서 소리쳤다. 나는 놈을 더 상대하지 않고 주머니에서 다시 총을 빼 들었다.

바로 그때, 이번에도 나를 따라온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이 움직였다. 만약 그녀가 또 지난밤처럼 내 손등을 할퀴거나 해서 방해하면 그냥 같이 총으로 쏴 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여인의 행동을 보고 나는 순간 방아쇠를 당기려던 손을 멈추고 말았다.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은 바닥에 쓰러진 영혼에게 다가가, 아이를 끌어안듯이 소중히 가슴에 품어 감쌌다. 그러고 나서, 꼭 엄마가 어린 딸을 보듬는 것처럼 초상화의 영혼을 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보니, 일전에 별채의 보라색 방 에피소드를 깰 때 봤던 환영이 눈앞에 재생되는 듯했다. 붉은 꽃들 한가운데에 죽어 있던 검은 머리 아이를 품에 안고 슬프게 울부짖던 여인의 모습이….

예전에도 언뜻 밝힌 적이 있지만 나는 이런 모습에 유독 약했다. 어릴 때 죽은 내 여동생이 생각나기 때문일 수도 있었고, 어머니의 애정에 목마르던 시절의 나를 이입해 이처럼 모성애가 느껴지는 광경에 쉽게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내가 다시 망설이는 걸 알았는지 초상화의 영혼이 약삭빠르게 구슬픈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불쌍한 척했다.

“흐윽…. 내가 잘못했어. 난 그냥 이렇게 죽은 게 억울해서… 그래서 언니랑 조금이라도 더 같이 놀고 싶었던 것뿐이야.”

이게 또 거짓말하네. 단순히 같이 놀려고 그런 게 아니라 내 몸을 빼앗으려고 그랬으면서 뻔뻔하게.

내가 바보도 아니고, 어차피 저게 다 날 속이려는 짓인 걸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상처투성이 몸으로 저렇게 처량하게 우는 걸 보니 확실히 의욕은 좀 꺾였다.

“그러고 보니까 넌 왜 죽었어? 어제 내 몸으로 꼭 해야 할 일이 있다고 그랬지? 그게 뭔데?”

그래, 세상에 사연 없는 귀신이 어디에 있으랴. 더군다나 이렇게 어린 나이에 죽었으면 더 억울하고 원통하겠지.

내가 이 녀석에게 몸을 줄 수는 없지만 혹시 한이 남을 정도로 하고 싶었던 일이 있다면 시간이 날 때 그거라도 어떻게 대신 풀어 줄까 하는 마음으로 선심 써서 물어봤다.

하지만 초상화의 영혼이 언제 가련하게 훌쩍였냐는 듯이 다시금 눈을 음습하게 빛내며 읊조린 말을 듣고 나는 괜히 물어봤다고 좀 후회했다.

“나를 이렇게 만든 놈들 전부에게 복수할 거야. 전부 다 사지를 조각 내 찢고 온몸의 살을 하나하나 저며서 아주 고통스럽게 죽여 버릴 거라고!”

음…. 이건 좀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원한인 것 같은데. 아니, 그보다 지금 이 영혼이 한 말은….

“널 이렇게 만든 사람들이 있다고? 너도 이 저택에서 살해당했어?”

“이런 꼴을 당한 게 어디 나뿐인 줄 알아?”

나는 녀석의 말에 관심이 생겼다. 하지만 그런 기색을 귀신같이 포착한 영혼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혀를 놀려 속닥거린 말에 가슴이 싸늘히 씻겨 내려갔다.

“그래! 그러니까 네가 맡은 그 7호실 아이. 그 아이도 위험해. 네가 날 풀어 주면 내가 아는 모든 걸 다 말해 줄게. 넌 네가 맡은 아이를 위해 뭐든 다 할 수 있는 훌륭한 양육자지? 그 애를 살리고 싶지 않아?”

“반대로 하자. 네가 알고 있는 걸 전부 다 말해 주면 풀어 줄게.”

하지만 초상화의 영혼은 입을 꾹 다문 채 결연한 의지가 담긴 눈으로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양쪽 다 타협의 여지가 없으니 결국은 교섭 결렬이었다.

“그래, 나중에 네가 있는 초상화에 놀러 갈 테니까 그때 들려주든지.”

나는 옆에 있는 검은 문을 한번 힐끔 쳐다본 뒤 지하실을 나섰다.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은 여전히 초상화의 영혼을 보듬고 있을 뿐,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굳이 그녀를 데려가야 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나는 그냥 그녀를 두고 혼자 방으로 돌아갔다.

***

상처 입은 영혼은 린이 떠난 자리를 보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녀는 방금 거짓 눈물을 흘려 축축하게 젖은 눈을 움직여 애타는 시선으로 검은 문을 바라보았다.

레드포드의 주인은 그녀가 아무리 간청해도 상처 입은 영혼을 회복시켜 주지 않았다. 이미 한번 기회를 줬으니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든 자신이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그래도 방금 지하실을 떠난 머저리 같은 여자가 같잖은 동정심으로 자신을 소멸시키지 않은 덕분에, 내일 낮까지 시간이 생겼다. 그러니 아직은 상황을 역전할 기회가 남아 있다고 믿었다.

‘그나저나 이 죽은 양육자의 영혼은 언제까지 나한테 이렇게 찰싹 달라붙어 있을 생각이지?’

초상화의 영혼이 아까부터 자신을 쓰다듬고 있는 여인에게 불만스럽게 눈을 흘겼다.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은 그녀가 자신의 아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지, 계속 부드럽게 머리를 만졌다. 거기에 이어 여인의 입술이 린에게 당해 상처투성이가 된 가여운 어린 영혼의 이마에 입을 맞추듯이 다정스레 내려앉았다. 그리고….

“응? 뭐, 뭐야…! 흐으, 아악…!”

갑자기 초상화의 영혼이 비명을 질렀다. 자신의 혼이 여인에게 흡수되기 시작한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혼비백산한 영혼이 마구 발버둥 쳤다.

“저리 비켜…! 아아아악!”

그러나 린의 총탄에 몸이 고정된 상태이기도 하고, 또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이 그녀를 으스러뜨릴 듯이 세게 팔로 조여서 이 경악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꼭 거대한 뱀이 사냥감의 온몸을 칭칭 동여매 공들여 통째로 집어삼키듯이,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은 가뜩이나 상처 입어 약해진 영혼을 아주 천천히 흡수했다.

“흐아… 시, 싫어…. 난… 이렇게 죽을 수….”

부스러진 영혼의 움직임이 점점 작아졌다. 지하실 안에 울리던 목소리도 빛이 꺼지듯이 서서히 사그라졌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얄궂게 흘러, 밤이 저물고 해가 떠올랐다. 지하실 바깥에는 새벽빛이 밝았으나 그들이 있는 곳은 여전히 어둡기만 했다.

결국 초상화의 영혼은 검은 베일을 쓴 여인에게 완전히 먹혀 사라졌다.

목적을 달성한 여인이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검은 베일이 작게 흔들리며, 입술을 날름 핥는 붉은 혀가 밖으로 드러났다. 꼭 오랜만에 제법 만족스러운 식사를 한 것처럼 핏빛 입술에 가느다란 미소가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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