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안이 찾던데 그만 돌아가요.”
체스휘는 나한테 그동안 뭘 하고 있었냐고 묻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그에게 핑계를 대지 않아도 됐다.
“흐으….”
그때 뒤에서 작은 신음 소리가 들려서 슬쩍 고개를 돌렸다.
초상화의 영혼이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지금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린 건 실수였던 듯, 영혼은 내 눈에 띄지 않으려는 것처럼 다시 소리를 죽이고 최대한 움직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물론 그래 봤자 소용은 없었다. 갑자기 체스휘가 와서 신경이 잠깐 다른 곳으로 쏠리긴 했지만, 아무렴 내가 다른 것도 아니고 저걸 잊겠는가?
그때,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이 내 시야에서 초상화의 영혼을 가리듯이 몸을 움직였다. 나한테 하지 말라는 듯이 고개까지 도리도리 젓는 걸 보니 실소만 나왔다.
체스휘에게 다른 반응이 없는 걸 보니, 역시 그의 눈에는 저 영혼들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에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한 뒤 초상화의 영혼을 처리하고 갈 생각이었다.
“아니, 지금 거기서 뭐 하는 겁니까?”
그런데 하필 그 순간 불청객이 또 나타나는 바람에 상황이 조금 애매해졌다. 이번에 등장한 건 콘라드였다. 그는 지하실에 내려오자마자 얼굴을 찌푸리며 체스휘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콘라드를 본 체스휘의 눈썹과 입술이 살며시 휘었다.
“닥터 콘라드? 여긴 어쩐 일이신지.”
“찾을 사람이 있어서 조금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려서 와 봤는데…. 지하실에 내려온 걸 총괄 집사가 알면 발광할 테니 빨리 나와요.”
아무래도 총소리를 듣고 온 모양이다. 콘라드는 어제 총괄 집사에게 시달린 게 어지간히 끔찍했는지 살짝 진저리를 치며 질색하는 얼굴을 했다.
나는 찡그린 눈으로 바닥에 웅크린 채 벌벌 떨고 있는 초상화의 영혼을 보다가 결국 총을 주머니에 다시 찔러 넣었다.
“나가요, 체스휘 씨.”
어차피 저 영혼은 총알 한 대만 더 맞으면 소멸할 것 같았다. 그래도 마무리는 해야 할 테지만 저렇게 다 죽어 가는 모습을 한 어린 영혼을 보니, 마지막으로 한번은 기회를 줘서 물어보고 싶었다. 내 몸을 빼앗는 걸 포기하고 얌전히 초상화로 돌아갈 건지, 아니면 이대로 강제로 소멸당할 건지.
나는 잠시 후에 다시 지하실에 내려와 초상화의 영혼을 처리하기로 하고, 일단 지하실 밖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콘라드가 가느스름하게 뜬 눈으로 내가 총을 넣은 주머니를 훑으며 물었다.
“그런데 그 총, 7호실 양육자 씨 게 맞습니까?”
“그런데요?”
“어제 만난 메이드가 가지고 있던 것과 비슷한 것 같은데….”
앗! 어제 총괄 집사를 상대하다가 주머니에 넣었던 총을 잠깐 떨어뜨렸었는데, 이 돌팔이 의사가 그걸 봤던 모양이다. 나는 뜨끔해서 얼른 변명했다.
“총이 생긴 게 원래 다 비슷비슷하죠, 뭐.”
“아닙니다. 총에 새겨진 무늬가 상당히 특이했어요. 혹시 잠깐 볼 수 있… 으어악!”
그런데 콘라드가 자꾸만 내가 있는 뒤쪽을 힐끔거리면서 계단을 올라가다가 갑자기 발을 잘못 디딘 것처럼 위험하게 휘청거렸다.
비틀거리며 계단 밑으로 고꾸라지려 하는 콘라드를 그 뒤에 있던 체스휘가 슬쩍 피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래도 콘라드에게 떠밀리면 같이 계단을 구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나도 반사적으로 그를 피하려고 했다.
“으억!”
“앗!”
하지만 그 순간 콘라드가 나를 붙잡고 늘어졌다. 동시에, 머리 위에서 이 상황이 마뜩잖은 듯이 혀를 차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곧바로 나한테 더 매달리려고 하던 콘라드의 몸이 훌쩍 들어 올려졌다.
다행히 체스휘가 콘라드를 붙잡아 준 덕분에 큰 사고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닥터 콘라드. 계단에서는 조심하셔야죠. 여기서 굴러떨어지면 코가 깨지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콘라드에게 말하는 체스휘의 목소리가 꼭 철없는 어린아이를 타이르듯이 상냥하기도 했다. 체스휘 덕분에 겨우 중심을 잡고 다시 선 콘라드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헉, 허억…. 정말 죽는 줄 알았….”
그런데 숨을 고르던 그가 돌연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체스휘에게 의심 어린 눈빛을 던지는 게 아닌가?
“그런데 혹시 방금… 저한테 일부러 발을 걸지 않으셨나요?”
“제가요?”
체스휘는 콘라드의 말을 듣고 무구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나는 이놈의 돌팔이 의사가 또 나쁜 성격을 드러내며 애먼 사람을 의심해 누명을 씌우는구나 싶었다.
“그랬으면 지금 제가 닥터 콘라드를 굳이 붙잡을 이유가 없지 않았을까요?”
콘라드의 의심에 화가 나지도 않는지, 체스휘는 고개를 살포시 기울이며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 밑으로 굴러떨어지게 그냥 놔뒀겠죠.”
콘라드가 체스휘의 말을 듣고 무심코 그가 굴러떨어질 뻔한 계단의 아래쪽을 쳐다보았다.
지하실로 이어진 계단은 확실히 까마득하게 어두워, 아주 위험한 구렁텅이처럼 보였다. 과연 발을 헛디뎌 저기로 넘어지면 뼈도 추리지 못할 듯했다.
콘라드는 체스휘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는지, 이내 의심 어린 시선을 거두었다.
“크흠, 아무래도 계단이 어두워서 제가 착각했나 보네요.”
“그럴 수도 있죠. 그보다 닥터 콘라드의 말대로 총괄 집사나 다른 사람들이 올 수도 있으니 빨리 나가죠.”
“헉! 맞다, 이럴 때가 아닌데!”
콘라드가 숨을 삼킨 뒤 허둥지둥 계단을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니, 조금 전에 관심을 가지던 내 총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은 것 같았다.
“우리도 가요, 체스휘 씨.”
그런데 그때, 따스한 온기가 내 손을 감쌌다. 시선을 내리자 내 손을 움켜쥔 체스휘의 손이 보였다. 다시 고개를 든 나를 향해 체스휘가 미소를 지었다.
“혹시 넘어질까 봐 저도 무서워서요.”
나는 괜히 뒤를 돌아봤고,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이 여전히 나를 따라오고 있는 걸 보고 괜히 몸을 움찔 떨었다. 하지만 조금 갈등하다가 그냥 체스휘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올라갔다.
잠시 후 우리는 지하실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왔다. 콘라드는 우리가 뒤에서 나오든 말든, 이미 저만치 앞서 멀어지고 있었다. 저러는 걸 보면 어제 총괄 집사에게 제대로 데이긴 한 모양이다.
나는 복도의 창밖을 보며 눈매를 찡그렸다.
“혹시 지금이 몇 시쯤이죠?”
“세 시 반 정도 된 것 같네요.”
하지만 어째서인지 바깥은 엄청나게 어두웠다. 비가 오려고 그러나? 어쩐지 체스휘랑 콘라드 둘 다 이 한낮에 등불을 들고 있더라니.
나는 체스휘와 잡고 있던 손을 자연스럽게 놓으려고 했는데 그가 손에서 힘을 풀어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고 앞서 걸어갔다.
“체스휘 씨, 혹시 전에도 지하실에 내려갔던 적 있어요?”
“그건 왜요?”
“저 안에 있던 문이 뭔가 싶어서요.”
한순간 내 질문에 체스휘의 눈에 희미한 이채가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저도 우연히 들은 건데 예전에 레드포드 저택의 노후화 때문에 건물 일부를 재건축했다고 들었어요. 그때 구조가 조금 바뀌면서 생긴 건가 봐요.”
하지만 이어진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하기만 했다.
“그럼 그냥 이제는 안 쓰는 평범한 문이라는 거예요?”
“문고리도 없으니 그렇겠죠?”
체스휘가 나를 내려다보며 답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그냥 다른 얘기를 더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체스휘에게서는 답을 얻을 수 없을 듯했고, 어차피 조금 이따가 그 지하실에 다시 한번 내려가 볼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냥 그 문을 만졌을 때 일어났던 이상한 일에 대해 더 말하지 않고 다이안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
방으로 돌아온 체스휘는 다이안과 함께 있는 린의 얼굴을 조용히 응시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눈가를 가리고 있어,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건 부드럽게 호선을 그린 그의 입술뿐이었다. 그래서 방 안에 있는 다른 양육자들과 아이들은 체스휘의 눈빛이 아주 차갑게 가라앉아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오직 체스휘의 옆에 앉은 미뉴엘만 미묘한 낌새를 느끼고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왜 그래? 밖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아니요. 미뉴엘은 신경 쓸 것 없어요.”
체스휘가 꼭 린의 흉내를 내듯이 빙긋 웃으며 미뉴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미뉴엘은 소름이 끼친다는 듯 얼굴을 구기며 그의 손을 쳐 냈다.
체스휘는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돌린 뒤 다시 상념에 잠겼다.
조금 전까지 분명 린의 존재가 저택 안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몇 시간 동안의 부재 끝에 갑자기 지하실에서 나타났다. 그녀가 사라졌을 때처럼 공기가 거세게 흔들리는 느낌이 든 직후의 일이었다.
원래도 레드포드 저택에서 이런 이질적인 공기의 흐름이 느껴진 적은 자주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죽은 자가 아닌 살아 있는 사람이 갑자기 사라지는 현상이 발생했다는 건….
체스휘는 지하실의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던 검은 문을 떠올렸다.
아무에게나 반응하지 않는 문이 린의 앞에서 움직였다. 그것은 체스휘에게 결코 가벼운 의미가 아니었다.
스르륵.
바로 그때, 이번에는 방 안까지 따라 들어와 린의 뒤에 서 있던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이 소리 없이 움직여 체스휘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체스휘가 앉아 있는 소파의 바로 코앞에 멈춰 서서 또 그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체스휘 씨, 죄송한데 커튼 좀 쳐 주시면 안 될까요?”
그걸 봤는지, 린이 얼른 체스휘에게 말을 걸었다. 체스휘를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의 앞에서 떨어뜨릴 생각인 듯했다.
“그래요. 이제 좀 해가 나려는지 눈이 부시긴 하네요.”
체스휘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이번에도 태연히 반응했다.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가는 그의 뒤로 검은 베일을 쓴 여자가 또 따라왔다.
체스휘는 미소 띤 얼굴로 커튼을 치고 뒤돌아, 그대로 검은 베일을 쓴 여자를 통과해 다시 소파로 걸어갔다.
그의 얼굴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기분은 조금 전보다 더러워져 있었다.
아, 이래서 죽은 영혼은 싫다니까. 눈에 거슬린다고 또 죽여서 치워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