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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66)화 (66/300)

나를 향해 기가 막히다는 듯이 쪼아대는 메이드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고개를 숙여 내 모습을 살폈다.

따로 갈아입은 적도 없는데 나는 또 메이드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가슴 밑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금발인 걸 보면, 초상화의 영혼과 몸이 바뀐 건 아니었다. 아무래도 지금의 나는 엠버라는 이름을 가진 메이드가 된 것 같았다.

“게다가 체스휘 님은 1호실의 마리네즈 님이랑 은근히 소문이 돌고 있단 말이야! 너 마리네즈 님한테 머리채 다 뜯기고 싶어?”

“뭐?”

“뭐는 뭐가 뭐야? 허튼 생각하지 말고 이거나 손님방에 두고 와!”

메이드는 나한테 하늘색 꽃을 꽂은 화병을 강제로 떠넘겼다.

나는 꼭 한낮에 꿈이라도 꾸는 것 같은 기분으로 화병을 들고 복도를 걸었다.

분명 지하실 안에 있던 수상한 문을 만졌을 때 이상한 느낌이 들었고, 그 후로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그러니 이 모든 일의 원인은 그 문인 게 분명했다.

나는 이게 환영이든 뭐든, 다시 원래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지하실로 가 봐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마음이 급했던 탓인지, 막 복도의 모퉁이에서 나온 사람을 피하지 못해 부딪치고 말았다.

“앗!”

그런데 무슨 사람 몸이 이렇게 돌덩이처럼 단단해? 난 내가 잠깐 딴생각을 하다가 벽에 부딪힌 줄 알았다.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어 앞에 있는 사람을 급히 붙잡지 않았다면, 아마 그대로 뒤로 튕겨 나가 바닥에 넘어졌을지도 몰랐다.

갑작스러운 상황이었는데도 팔을 붙잡힌 사람은 오래된 거목처럼 내게 조금도 끌려오지 않고 굳건히 서 있어, 나도 곧 몸의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화병에 담겨 있던 성수가 살짝 찰랑이면서 몇 방울 햇빛에 부서져 떨어졌다.

“아, 죄송합니….”

그런데 다음 순간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기묘한 느낌에 말을 멈추고 말았다.

가까이에 있는 남자의 얼굴이 깜짝 놀랄 정도로 잘생겼기 때문은 아니었다.

모퉁이 너머에서 나타난 건 키가 아주 크고, 빛 한 점 머물지 못할 것처럼 무척 어두운 검은 머리칼을 가진 남자였다. 원래 내 머리도 검은색이었지만 그래도 빛이 비출 때는 고동색을 띠었는데, 이 남자의 머리는 창가에서 쏟아지는 햇빛 아래에서도 여전히 먹을 칠한 듯이 새까맣기만 했다.

타오르는 석양 같은 주홍색 눈은 따뜻한 색채와 달리 아릴 정도로 차가운 빛을 발한 채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깎아 만든 듯한 이마와 콧대, 그리고 날렵한 턱을 타고 하얀 햇빛이 굴러떨어졌다.

왠지 겨울철 해 질 녘의 어스름함이 내린 고요한 전나무 숲이 떠오르는 사람이었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근사한 외모도 외모지만, 특히나 독특한 분위기가 시선을 잡아끌어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에게서 아주 조금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앞에 있는 얼굴을 살짝 찌푸린 눈으로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을 때, 남자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레드포드의 메이드?”

귀가 간지러울 정도로 부드럽고 나른한 저음의 목소리였다. 나는 점점 더 의아해졌다.

‘왜 목소리에서도 비슷한 느낌이 들지?’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사람과 분명 목소리 자체는 다른데, 이상하게 말하는 억양이나 풍기는 느낌 같은 게 비슷했다.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언제까지 이렇게 매달려 있을 생각인지.”

아, 그제서야 나는 내가 이 사람에게 지나치게 가깝게 달라붙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사실도 한 가지 더 알아차렸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는 자신과 부딪쳐서 내가 넘어질 뻔했는데도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아니, 보통은 이런 상황이면 무심코 당황해서 손이라도 뻗지 않나?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이 날 당연히 붙잡아 줘야 한다는 건 아니었고, 또 거기에 기분이 상했다거나 한 것도 아니긴 했지만.

“죄송합니다. 넘어질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실례했네요.”

나는 순순히 사과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 인물 정보를 확인해 보려 했지만 시스템 창은 먹통이었다.

아니, 그런데 아무리 봐도 얼굴이 참….

뭐지? 아무리 봐도 일회용 모브 캐릭터 외모는 아닌데. 물론 이 게임의 캐릭터들이 다 예쁘고 잘생긴 편이었지만 이건 좀 넘사벽 느낌이었다. 바니타스 놈들, 이런 외양의 캐릭터도 만들 수 있었단 말이야?

그런데 내가 얼굴을 너무 빤히 쳐다봐서 그런가? 남자도 나를 주시하는 시선을 치우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내가 이렇게 자신을 노골적으로 관찰하는 것이 흥미롭다는 듯이 입매를 희미하게 끌어당겼다. 서늘하게 얼어 있던 얼굴에 미약하게나마 미소가 실리자, 얼음 조각상 같던 모습에 그제야 약간이나마 온기가 도는 것 같았다.

“세상에, 손님?”

그때 마침 내 뒤에서 놀란 듯한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남자와 나는 한참 동안이나 더 눈을 마주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언제 오셨나요? 조금 전에 총괄 집사님이 손님을 맞이하러 내려가셨는데 어떻게 안내해 드리는 고용인도 없이….”

그런데 묘하게 익숙한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흠칫했다. 이쪽으로 급히 다가오고 있는 사람이 게임의 튜토리얼 때 죽은 메이드장 제인이었기 때문이다.

역시 이곳은 뭔가 이상했다. 방금 만났던 메이드가 1호실 양육자 마리네즈에 대해 했던 말도 그렇고, 체스휘의 분위기가 묘하게 낯설었던 것도 그렇고, 꼭 여기가 과거의 레드포드 저택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역시 이건 환영인 것 같았는데, 어쩌면 초상화 영혼의 수작질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이렇게 시간을 허비할 게 아니라, 역시 지금 빨리 지하실에 다시 가 봐야 할 것 같았다.

나는 화병을 안은 채로 내 앞에 있는 남자를 지나쳐 걸어갔다. 남자의 시선이 나를 따라오는 것 같았지만 그의 얼굴에 또 홀릴까 봐 일부러 뒤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빠른 걸음으로 복도의 모퉁이를 돌았다.

“이쪽으로 오세요. 손님 방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평온한 오후의 공기에 섞인 제인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나는 들고 있던 화병을 대충 아무 곳에나 내려놓고 복도를 달렸다.

잠시 후 지하실의 문 앞에 도착했다. 역시나 문은 잠겨 있었지만 손쉽게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번에도 문고리가 없는 커다란 검은 문 앞에 섰다.

우웅!

내가 문에 손을 대자마자 이번에도 공기가 울렁거리는 느낌이 들면서 보라색 빛이 터져 나왔다.

원래대로 돌아왔나?

그때, 화병을 두고 와서 비어 있던 내 손에 딱딱한 무언가가 잡혀 있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주변을 자세히 확인할 새도 없이 갑자기 뒤에서 무언가가 나를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바로 뒤를 돌아 총구를 겨냥했다.

탕!

“아악!”

고막을 찢을 듯한 비명이 바로 코앞에서 울렸다. 총탄에 맞은 초상화의 영혼이 서둘러 몸을 피했다. 놓치지 않고 한 발 더 총을 쐈다. 녀석이 정신없이 빠르게 도망쳤지만, 이 정도 거리에서도 맞추지 못할 거라면 우리 개복치 고양이를 열여섯 살까지 무사히 키우지도 못했을 것이다. 다시 한번 비명을 지른 영혼이 바닥에 나동그라져 끅끅 신음을 흘렸다.

일단 갑자기 튀어나온 초상화의 영혼을 제압한 뒤 내 모습을 살폈다.

옷차림과 머리카락을 확인해 보니 린 도체스터의 모습이 맞았다. 검은 베일을 쓴 여인도 아까처럼 내 뒤에 서 있었다.

제한 시간: 25:14:44

좋아, 시스템 창도 멀쩡하고… 가 아니라! 뭐야, 다섯 시간이나 지났어?!

찌푸린 얼굴을 돌려 아직도 위용 있는 모습으로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검은 문을 보았다.

환영 속에서 그냥 방을 빠져나와 복도를 걸어온 게 다인데 현실의 시간이 이렇게 많이 지났다니…. 그래도 그동안 저 초상화의 영혼이 내 몸을 어떻게 하지는 않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끼익… 쿵!

그런데 바로 그때, 지하실의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총괄 집사인가? 하긴, 어젯밤에도 사람들이 죽었으니 이곳에 시체를 옮기러 온 건지도 몰랐다. 모로스는 죽으면 재가 되어 사라지지만, 일반 사람의 시체는 그대로 남아 있으니까.

나는 일단 급한 대로 지하실 구석에 몸을 숨겼다. 다행히 이곳에는 흰 천에 씌워진 잡다한 물건들이 많아 내 한 몸 가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지하실에 내려온 건 집사복을 입은 노신사가 아니라, 눈에 익은 금갈색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을 가진 젊은 남자였다.

반갑게 나가서 체스휘를 아는 척하려다가, 문득 아까 환영 속에서 본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나를 낯설게 보던 체스휘를 생각하자 어째서인지 지금 나가서 그에게 말을 걸기가 좀 망설여졌다. 게다가 지금 그가 이곳에 온 목적이 뭔지도 아직 모르지 않는가? 어쩌면 나를 찾으러 온 게 아니라, 다른 이유로 지하실에 내려온 걸 수도 있었다.

“린 씨.”

하지만 체스휘가 조용히 입을 열어 꺼낸 것은 내 이름이었다. 게다가 그는 내가 어디에 몸을 숨기고 있는지도 눈치챈 듯이, 바로 이쪽으로 다가왔다.

결국 나는 체스휘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 시간이 꽤 많이 지나서 다이안에게 빨리 가 봐야겠다 싶기도 했고, 체스휘가 나를 부르는데 굳이 계속 숨어 있을 이유도 없었다.

“체스휘 씨, 저 찾아온 거예요?”

나를 본 그가 걸음을 멈췄다.

그런데 체스휘는 어째서인지 잠깐 동안 말없이 나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당연히 나는 영문을 알 수가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데, 역시 저 수상한 검은 문을 만졌을 때 본 검은 머리 남자와 지금 내 앞에 있는 체스휘의 분위기가 살짝 비슷하게 느껴졌다.

“아무 데도 안 보여서 걱정했어요.”

하지만 체스휘가 언제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냐는 듯이 금방 평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해서 그런 내 감상도 옅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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