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체스휘 씨.”
체스휘는 등불도 없이 어두운 복도에서 나타났다. 나는 다가오는 발소리에 경계심을 품고 있다가, 체스휘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긴장을 풀었다.
“그렇지 않아도 침실이 있는 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가 보려던 참이었는데, 혹시 별일 없었어요?”
체스휘는 내게 다가오며 내 물음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답했다.
“네, 별것 아니었어요. 그냥 모로스가 나와서요.”
하지만 나는 가까워진 체스휘에게 불빛이 선명히 비치자마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모로스를 만났다더니, 그의 팔에 검은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는 게 보였다. 팔뿐만 아니라 상의와 얼굴에도 검은 액체가 튀어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잠깐 잊고 있던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이 갑자기 내 뒤에서 강렬한 기운을 흘리기 시작했다.
[레드포드 저택의 ‘방랑하는 영혼’이 린 도체스터에게 빙의를 시도합니다.]
[실패(1/5)]
‘뭐?’
나는 느닷없이 떠오른 상태 창에 몸을 움찔 떨면서 이맛살을 구겼다.
[레드포드 저택의 ‘방랑하는 영혼’이 린 도체스터에게 빙의를 시도합니다.]
[실패(2/5)]
두 번 연속으로 실패한 유령은 다시 잠잠해졌다. 나는 섬찟한 기분이 들어서 오싹거리는 목을 문질렀다.
뭐, 뭐야? 이 유령이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왜 이래? 왠지 체스휘를 보고 갑자기 분위기가 바뀐 것 같은데….
나는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이 있는 쪽으로 살짝 돌렸던 시선을 다시 움직여 내 앞에 있는 남자를 쳐다봤다.
하지만 체스휘는 여전히 동요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체스휘의 눈에는 내 뒤에 있는 유령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왜지? 일전에 4호실의 레이븐은 별채에서 검은 베일을 쓴 여자 유령을 볼 수 있었는데.’
어쨌든 전에 체스휘는 유령을 싫어한다는 말도 했었으니까, 차라리 다행이었다. 지금 이렇게 자신의 앞에서 강렬한 기운을 흘려보내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면 놀랐을 테니까.
참, 그러고 보니 만약 이 유령이 내 짐작대로 이전 1호실 양육자가 맞고, 또 체스휘에 대한 소문도 진짜라면…. 지금의 이 만남은 옛 연인 간의 재회라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혹시 그래서 저 검은 베일을 쓴 여인도 굳이 별채 밖으로 나와서 지금 이렇게 체스휘에게 뜨거운 시선을 보내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약간 숙연해지면서 괜히 속이 좀 묘하게 불편한 기분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아무튼 이런 갑작스러운 빙의 시도라니, 또 말하기도 새삼스럽지만 이번 회차에서는 진짜 돌발 상황이 많이 일어난다 싶었다.
“상대한 모로스가 여럿이었나 봐요? 피가 많이 묻었네요.”
“그래도 다이안은 무사하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체스휘 씨는 다친 데 없어요?”
그런데 내가 무심코 체스휘의 팔을 붙잡으려던 찰나에, 그가 내 손이 닿지 않게 뒤로 물러났다. 그래서 내 손은 허공만 스쳐 지나갔다.
“괜찮아요. 난 멀쩡하니 신경 쓰지 말아요.”
체스휘는 여전히 상냥한 목소리로 답한 뒤, 묘하게 서두르는 듯한 모습으로 나를 재촉했다.
“그보다 빨리 가짜를 쫓아야죠. 건물 밖으로 나간 것 같았는데, 우리도 가요.”
처음에는 혹시 어디를 다쳐서 이렇게 건드리지 못하게 하나 싶었다.
나는 등불에 비친 체스휘의 모습을 찬찬히 살피다가 설핏 눈을 가늘게 떴다.
체스휘가 나타난 방향에서는 아직도 희미한 소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갑자기 거세진 바람에 지금 내가 서 있는 복도의 창문도 덜컹거리면서 소음을 더했다.
나는 플레이어의 권한으로 언제든 열람할 수 있는 다이안의 기본 상태 창을 통해 그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한 뒤, 가늘게 좁혔던 눈을 다시 원래대로 떴다.
“그래요…. 건물 밖으로 나갔다고요? 지금 가 보죠.”
체스휘와 나는 같이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검은 베일을 쓴 여인도 소리 없이 우리의 뒤를 쫓았다.
그러다가 내가 먼저 짐짓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체스휘 씨, 건물 밖으로 나가도 괜찮겠어요? 전 중독 증상 때문에 밖에 오래 나가 있기 좀 무서운데….”
“괜찮아요. 상태가 안 좋아지면 바로 다시 들어오면 되죠.”
체스휘가 나를 달래듯이 말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불안하니까 꽃은 한 번 바꿔 들고 가요. 체스휘 씨도 그러면 더 안심할 수 있을 거예요. 어차피 바로 이 앞이 방이니까 시간도 얼마 안 걸려요.”
체스휘는 그런 내가 답답한 듯했지만 빠른 걸음으로 앞서가는 나를 결국 붙잡지 못하고 뒤를 따라왔다.
“그럼 빨리….”
그리고 마침내 체스휘가 내가 준비해 둔 덫을 밟았다.
파지직!
“으, 아악…!”
나는 몸을 뒤트는 체스휘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흠칫 놀란 체스휘가 나를 뿌리치려 했으나, 그는 방금 영혼에 큰 타격을 입었는지 비틀거리며 검은 피를 토해 내기 급급했다.
나는 그의 팔을 옥죈 손에 더 강하게 힘을 주면서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먼저 내 눈앞에 나타나 줘서 한시름 덜었어. 어떻게 여기까지 유인하나 고민이었거든.”
내 말을 들은 체스휘… 아니, 체스휘의 흉내를 내고 있던 영혼의 눈깔이 확 돌아갔다.
아무래도 환영을 위에 덧씌웠던 것인 듯, 체스휘의 모습은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리다가 금방 사라졌다. 그 밑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린 도체스터의 얼굴이 드러났다. 하지만 나한테 붙잡힌 그녀의 얼굴은 다시 검은 머리칼을 가진 소녀로 돌아가고 있었다.
“너… 흐, 무슨 짓을… 한 거야!”
나를 노려보면서도 맥을 못 추는 모습이 퍽 고통스러워 보였다.
이 정도 영혼이면 성수는 통하지 않을 줄 알았다. 내 눈앞에 나타난 첫날에도, 버젓이 성수 화병이 놓인 아이들의 방에 들어왔던 놈이니까.
그렇다고 총으로 쏴서 무력화시키자니, 소리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을 너무 끌 것 같았다.
그래서 소지한 총탄을 분리해 그 안에 있는 특수 물질로 복도 곳곳에 덫을 쳐 놨다. 게임상에서 사용하는 총과 총알은 모로스와 악령을 잡기 위해 교황청에서 특수 제작된 것이라 효과는 이렇듯 확실했다.
“어떻게… 내가 가짜인 걸 알았….”
“그냥 느낌이 그랬어.”
가짜의 물음에 나는 심드렁하게 답했다.
물론 내가 체스휘의 모습을 한 이 녀석과 얼굴을 마주한 건 지극히 짧은 시간뿐이었다. 하지만 녀석이 내 손을 피했을 때, 정확히 말로는 설명하지 못할 어떤 위화감 같은 게 느껴졌다.
“그보다 넌 날 어디로 데려가려고 한 거야? 설마 중독 증상 때문에 죽을 때까지 밖에 붙들어 두려고 한 거야?”
그럴 생각이었다면 계획을 잘못 세웠다고 하고 싶었다. 콘라드의 약을 먹어서 이 몸은 이제 중독 증상에서 자유롭단 말이다.
그래도 솔직히 난 어린애들에게 약한 편이라 이 녀석을 내 손으로 직접 퇴치하는 데 살짝 망설임이 들었는데, 이렇게 날 직접 해치우려고 다른 사람의 얼굴까지 뒤집어쓴 채 찾아오다니…. 역시 악령들은 봐줄 필요가 없었다.
“안 돼…. 난 해야 할 일이 있단 말이야…!”
완전한 어린애의 모습으로 돌아온 가짜가 핏발 선 눈을 뜬 채 절절 끓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쨍그랑!
그 순간, 갑자기 등불이 터지듯이 깨졌다.
시야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동시에 무언가가 내 손등을 거칠게 할퀴어서 잡고 있던 팔을 한순간 놓치고 말았다.
내 손에서 빠져나간 초상화 속 영혼이 서둘러 달아나는 게 느껴졌다. 그 뒤를 쫓아가려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멈춰 섰다.
“뭐야, 저리 비켜요.”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이 자꾸 내 앞을 가로막았다.
“언니, 나 지금 기분 별로거든요? 조금 전에 내 손등 긁은 것도 언니인 거 다 알아요.”
영혼 상태인 유령이 무슨 수를 쓴 건지는 모르겠지만 얼마나 세게도 긁었는지, 지금 내 손등에서는 피가 철철 나고 있었다. 내게 직접적인 물리적 타격을 입히면서 그 대가로 생기를 많이 잃었는지, 유령의 몸은 한결 투명해져 있었다.
나도 성질이 나서, 그녀가 내 앞을 막거나 말거나 그냥 유령의 몸을 통과해서 지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이 구슬픈 분위기를 폴폴 풍기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걸 보고 결국 그냥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허 참.”
꼭 내가 애꿎은 영혼을 무참히 괴롭히는 나쁜 인간이라도 된 느낌이었다.
하기야, 어차피 조금 전 그 영혼은 크게 손상을 입었다. 게다가 혹시 몰라 복도에 쳐 둔 덫이 한두 개가 아니니, 혼자 도망치다가 거기에 걸려 또다시 큰 타격을 입을 확률이 높았다.
더군다나 뜻밖에도 가짜 놈이 먼저 내게 다가온 덕분에 생각보다 일찍 린 도체스터의 모습을 되찾아 마음의 여유도 살짝 생겨났다. 물론 제한 시간이 끝나기 전까지 내가 이 모습을 무사히 지켜내야 퀘스트를 완료할 수 있을 테지만, 쉽게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영혼은 상대하기 그리 까다롭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잘만 나를 피해 다니던 녀석이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꿔서 나한테 먼저 접근한 거지? 게다가 묘하게 초조해 보이던 그 모습은….’
“거기 린 씨예요?”
체스휘가 나타난 건 그때였다.
이번에는 가짜가 아니라 진짜 체스휘였다. 그는 머리카락과 옷차림이 좀 흐트러진 것 말고는, 먼저 나타났던 가짜 체스휘보다 확실히 멀쩡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긴장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서, 꼭 혼자 한가롭게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보였다.
그런 체스휘를 보고 나도 마음을 한시름 놨다. 사실은 가짜 놈이 체스휘의 모습을 한 걸 보고 혹시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내심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금 이쪽에서 큰 소리가 들렸는데…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네요?”
체스휘는 밤눈이 상당히 좋은가 보다. 어둠 속에서도 그는 나를 바로 알아본 듯이 내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나저나, 그냥 얼굴만 보면 가짜랑 나를 헷갈릴 수도 있는데 체스휘는 진짜 금방 알아보네.’
나는 내 앞에 있는 검은 베일을 쓴 여자 유령을 한번 힐끗 쳐다본 뒤 슬쩍 옆으로 위치를 옮겼다.
“도와주신 덕분에요. 체스휘 씨가 있던 곳도 조금 시끄러운 것 같던데 무슨 일 있었어요?”
“아, 모로스가 나왔어요. 지금은 다른 양육자들도 잠에서 깨서 다 같이 아이들을 보고 있으니까 걱정하진 않아도 돼요.”
“체스휘 씨는 다친 데 없어요?”
“흠, 그러고 보니까 이쪽 팔이 좀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아, 장난치지 말고요.”
체스휘가 작게 키득거리면서 자신은 괜찮다고 말했다. 가짜와 달리 진짜 체스휘의 옷은 깨끗한 걸 보니, 아무래도 실제로는 모로스가 한두 마리 정도 나온 게 아닌가 싶었다.
“린 씨야말로 괜찮아요? 다친 것 같은데.”
그러다 체스휘의 시선이 느릿하게 미끄러지듯이 떨어져, 내 손등에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