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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60)화 (60/300)

그 말을 듣는 순간 체스휘에게 붙잡혀 있던 손이 움찔 튀어 올랐다.

“그러고 보니 전에 원하시면 둘이 있을 때 더 자세히 보여 주겠다고 한 적이 있었는데.”

내 동요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한술 더 떠서 참으로 친절하게도 내 손을 자기 가슴팍에 직접 가져다 대 주기까지 했다.

“사실 예전 몸이 더 낫지만, 그래도 아쉬운 대로 지금도 나쁘진 않거든요. 그러니까 언제든 말만 해요.”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지만, 그 한순간만큼은 나도 모르게 손 밑으로 느껴지는 감촉에 신경이 쏠렸다.

와, 그러게요. 가슴 근육이 참으로 실하시네요… 가 아니라!

잠깐만. 그쪽 몸이 취향이란 말은 내가 린 도체스터의 모습일 때 한 소리인데?

그리고 장난스러운 빛을 띤 체스휘의 눈을 다시 마주한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 남자, 내가 린 도체스터인 걸 알고 있다.

“어떻게…!”

진심으로 놀라고 당황해서 말이 제대로 안 나왔다. 나는 체스휘의 얼굴을 마주한 채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어… 어떻게 알았어요? 나 지금 완전 다르게 생겼는데?”

체스휘의 고개와 입매가 같이 미묘하게 기울어졌다.

“글쎄요, 그렇게 다르지도 않은데요?”

당연히 그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내가 게임 캐릭터를 얼마나 공들여서 만들었는데?

물론 가상 현실 게임은 기본적으로 플레이어의 외형을 기본 바탕으로 해서 캐릭터를 설계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거기에서 수정할 수 있는 정도는 무궁무진했다. 그래서 난 엄청나게 많이 손을 봤단 말이다.

“언제부터 저인 걸 알았는데요?”

“음, 처음부터?”

뭐라고…?!

“그런데 왜 지금까지 모른 척했어요?!”

“필사적으로 모르는 사람인 척하는 게 귀여워서 장난 좀 쳐 봤어요.”

은은한 불빛 속에서 체스휘의 입가에 느슨한 미소가 그려졌다.

어쩐지, 내가 이 모습을 하고 있을 때 유독 이상하게 굴더라니 날 놀리느라 일부러 그런 거였구나!

기가 막혀서 헛숨을 들이켜고 있자, 체스휘가 내게 팔을 뻗었다. 그는 아까 제 손으로 풀어 내렸던 리본을 내 옷깃 아래에 다시 묶어 주면서 말했다.

“그리고 왠지 린 씨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에요.”

그 순간 왠지 가슴 언저리가 살짝 들썩거리는 듯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게 어떤 기분인지, 스스로도 정확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내 앞에서 눈을 내리깐 채 마지막으로 리본의 매듭을 묶는 체스휘를 쳐다봤다. 내 시선을 느낀 듯이 체스휘가 눈을 들었다. 그리고 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가 눈매를 나붓이 접어 미소를 지었다.

“어, 흠.”

나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갑자기 으스스한 호러 장르에 설탕이 한 스푼 첨가된 것 같은 느낌이 살짝 들었다.

“그런데 체스휘 씨는 제가 갑자기 외모가 바뀌었는데도 별로 놀라지 않는 것 같네요.”

“원래 이상한 일이 많이 일어나는 저택이니까요.”

체스휘는 내 의문에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담담하게 답했다.

“말했잖아요. 검은 공기가 짙어지면 빈 세계와의 경계가 흐려져서 이상한 것들이 들어올 수 있다고. 특히 레드포드 저택이 지어진 이곳은 원래 공허에 먹혔던 세계라 그런 것들의 출입이 더 쉬우니까.”

그 순간 멈칫했다.

여기가 이미 한번 공허에 먹혔던 세계라고?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다른 사람들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데?

나는 매뉴얼 북에서 보았던 내용을 떠올렸다.

책자에서는 분명 어느 날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빈 세계를 닫기 위해 이 레드포드 저택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빈 세계의 공허가 점점 영역을 넓혀 가서, 다른 세계를 침범해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미 공허에 완전히 먹힌 세계를 다시 복구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걸까?

하긴, 방금 체스휘의 말에서 느껴진 어감상으로는, 이 레드포드 저택만 예외인 것 같긴 했다.

그럼 이 레드포드 저택이 유독 이상했던 이유도 설명이 되었다.

성수 없이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하다거나, 모로스나 악령 같은 게 자꾸만 출몰한다거나….

“그리고 린 씨,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라고 했잖아요.”

체스휘가 진통제와 물컵이 놓인 쟁반을 내 앞으로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의논 상대조차 되어 주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미덥지 못한 사람은 아닌데요, 내가.”

내 눈을 들여다보는 체스휘의 얼굴이 언제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냐는 양 지금은 아주 진지했다.

나는 체스휘의 참된 마음씨에 다시 한번 감동했다.

사실 지금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었기 때문에 그의 말이 무척 반가웠다.

“그럼 지금 하나만 먼저 부탁드릴게요.”

그래서 염치 불고하고 체스휘의 손을 꼭 붙잡은 채, 내 마음을 가장 무겁게 만들고 있던 우리 집 개복치 고양이의 안위를 그에게 부탁했다.

“저희 애 좀 가짜한테서 떼어 내 주세요!”

***

제한 시간: 40:51:22

끼이익….

한밤중, 소등 시간도 진작 지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깊은 잠에 빠져들었을 때쯤 누군가 조용히 문을 열고 복도로 빠져나왔다.

창문에 은은하게 스며든 달빛이 소년의 머리칼을 희게 물들였다.

다이안은 성수 안에 들어 있던 연보라색 꽃을 부적이라도 된 것처럼 두 손에 고이 들고 적막한 복도를 걸었다.

그의 목적지는 고용인들이 모여 잠든 방이 있는 곳이었다. 낮에 봤던 검은 머리칼에 연갈색 눈을 가진 메이드를 찾기 위해서였다.

사실은 밤이 오기 전에 몇 번이나 그녀를 만나러 가고 싶어 몸이 들썩였지만, 하루 종일 그를 주시하는 눈이 있어 혼자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혼자 어디 가요, 다이안 도련님?”

“헉!”

그렇게 살금살금 복도를 걷다가 문득 고막을 파고든 선명한 음성에 다이안은 소스라쳤다.

깜짝 놀라서 머리카락이 휘날릴 정로도 고개를 휙 돌리자, 언제부터 자신을 따라오고 있었는지 모를 사람이 등 뒤에 서서 방긋 미소를 지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복도에 우뚝 서 있는 린의 모습에 다이안은 소름이 돋았다.

“나, 나는… 화장실이 급해서.”

“그래요? 그럼 제가 데려다줄게요.”

“나 혼자 갈 수 있어!”

“그건 안 돼요. 양육자의 말을 잘 들어야 착한 어린이지요.”

린은 여느 때처럼 다정하게, 그러나 어딘가 기묘한 한기가 느껴지는 미소를 지으며 다이안의 팔을 잡았다.

다이안의 양육자인 린은 오늘 계속 이랬다. 오늘의 그녀는 묘하게 강압적이었고, 다이안에게서 집요하리만치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다이안은 린의 손이 자신에게 닿는 순간 파르르 몸을 떨었다. 한순간 다이안의 눈에 두려움이 스쳤지만, 다시 고개를 든 그의 얼굴에는 그런 감정이 말끔히 걷혀 있었다.

“그런데 린은 왜 여기에 있어?”

“전 잠이 안 와서 산책하러 나왔어요.”

“이 시간에? 더군다나 공기가 이렇게 탁한데?”

“양육자잖아요. 이 정도는 거뜬하죠.”

린은… 아니, 린의 흉내를 내고 있는 괴물은 이번에도 다이안의 질문에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다이안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렇게 숨 막히도록 답답한 복도를 얼마간 더 걷다가, 그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들고 있던 꽃으로 가짜 린의 몸을 철퍽 소리가 나게 때렸다.

꽃잎을 적시고 있던 성수가 린의 몸에 몇 방울 뿌려졌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다이안이 기대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성수에 조금의 타격도 받지 않은 린이 너무도 멀쩡한 모습으로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지금 뭐 하신 거예요?”

그녀의 무미건조한 분홍색 눈이 자신을 때린 꽃으로 미끄러졌다가 다시 올라와 시선을 맞댄 순간, 다이안이 서둘러 변명했다.

“린은 꽃을 안 들고나온 것 같아서 내 거 빌려주려고.”

그러자 린의 얼굴에 짐짓 다정함을 흉내 낸 미소가 그려졌다.

“아, 지금 제 걱정해 주신 거예요? 귀엽기도 해라. 하지만 전 괜찮으니까 이건 도련님이 잘 들고 계세요.”

결국 다이안은 기껏 큰마음 먹고 밖으로 나온 보람도 없이 가짜 린에게 감시당하며 억지로 화장실에 들렀다가 다시 방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면 차라리 다행이었을 것이다.

“잠깐. 린도 들어오려고?”

“우리 귀여운 도련님이 오늘따라 잠을 잘 못 자는 것 같아서요. 완전히 잠들 때까지 옆에서 토닥토닥해 줄게요.”

이제는 밤에도 옆에 붙어 감시하겠다고?

다이안은 진심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여기서 뭐 해요, 린 씨?”

만약 그때 어둠 속에서 등불을 든 남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는 당장 린의 손을 뿌리쳐 버렸을지도 몰랐다.

가짜 린 도체스터는 주홍색 불빛을 일렁이며 다가오는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살짝 헝클어진 캐러멜색 블론드와 큰 안경에 가려진 보라색 눈. 늘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는 입술과 특유의 나른하고 권태로운 분위기를 가진 저 남자는 진짜 린 도체스터와 가장 가깝게 지낸다고 할 수 있는 2호실의 양육자였다.

린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그려졌다.

“체스휘 씨! 아직 안 자고 깨어 있었네요?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그녀의 자연스러운 물음에 체스휘의 입술에 그려진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잠이 안 와서 산책하러 나왔죠.”

아까 린이 다이안에게 핑계를 댔던 것과 동일한 말이었다. 분홍색 눈이 슬쩍 가늘게 좁혀졌다.

“그러는 린 씨는 다이안이 걱정돼서 나와 본 거예요?”

“네. 그런데 다이안이 잠을 잘 못 자는 것 같아서 재워 주려고요.”

“직접 옆에서 재워 준다고요?”

체스휘의 눈길이 다이안에게 떨어져 내렸다.

다이안은 사뭇 절실해 보이는 눈으로 체스휘를 쳐다봤다. 소리 없이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알아차린 건지, 그러지 못한 건지, 체스휘는 감흥 없는 얼굴로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까지 하다니, 왠지 오늘은 좀 여러모로 린 씨답지 않네요.”

그 순간 린이 흠칫했다.

“나답지… 않다고요?”

어째서인지 그녀는 아까처럼 강압적인 모습을 보이며 더 우기지 않고 주저했다. 그것을 느낀 다이안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냉큼 끼어들었다.

“맞아! 오늘따라 좀 이상해, 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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