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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59)화 (59/300)

제한 시간: 42:30:41

퍽! 퍼억!

그날 저녁, 나는 또다시 도끼를 들고 화랑을 찾았다.

수많은 초상화들이 벽면을 가득 채운 방. 그 안에는 주인 없는 빈 액자가 하나 있었다. 이 100번째 초상화가 지금 나를 흉내 내고 있는 가짜 린 도체스터의 본체인 게 분명했다.

나는 찾아낸 빈 초상화를 도끼날로 찍었다.

퍽! 퍽!

하지만 몇 번 시도해 본 뒤 혀를 내두르며 손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어이없네…. 무슨 초상화 액자가 도끼로 내려쳐도 흠 하나 안 생겨?”

그래도 혹시나 효과가 있을까 싶어서 빈 초상화를 부수려 시도해 봤는데, 내 팔만 아프고 등만 쑤셨다. 특히 어젯밤에 계단에서 떨어질 때 다친 등짝에서는 불이 나는 것 같았다.

‘그나마 콘라드에게서 얻은 약 덕분에 검은 공기 중독 증상은 나타나지 않고 있어 다행이지.’

콘라드는 대부분 돌팔이였지만 그래도 아주 아주 드물게 이런 식으로 명의다운 모습을 보일 때도 있었다.

오늘 밤에는 내 흉내를 내고 있는 초상화 놈과 직접적인 술래잡기를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까 낮에 생각했다시피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내내 바쁘게 그놈을 쫓아 이리저리 뛰어 봤자 체력이 떨어져서 나만 손해였다.

설령 그놈을 잡아 다시 겉모습이 교체된다 해도, 어차피 제한 시간이 끝나기 전까지 놈을 계속 피해 다닐 자신도 없었다. 그러니 차라리 그놈을 확실히 붙잡아 둘 다른 방법을 강구하는 게 나았다.

‘일단 오늘 밤에는 악령 퇴치용 총탄으로 놈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지 확인해 볼까?’

낮에는 그놈이 끈질길 정도로 집요하게 아이들 옆에 달라붙어 있어서 시도해 보지 못했지만, 최소한 밤에는 떨어져 있을 테니까 말이다. 게다가 모두가 잠든 시간이라면 나도 남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이렇게 애먹을 줄 알았다면, 그냥 처음부터 놈이 어린애 모습을 하고 있다고 봐주지 말고 총알부터 갈길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나는 막 문을 열고 들어간 방에 다른 사람이 와 있는 걸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늦었네요.”

“아, 깜짝이야!”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친 순간 나도 모르게 심장을 부여잡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해가 완전히 져서 어두워진 방에 체스휘가 불을 밝히고 있었다. 손에 촛대를 들고, 테이블 위에 놓인 촛불에 불을 옮겨 붙이고 있는 체스휘의 몸에 주황색 빛이 번졌다.

내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문을 닫자, 나른한 웃음이 뒤를 이어 고막을 간지럽혔다.

“미안. 놀랐어요?”

“아뇨. 그냥, 방에 누가 있을 줄 몰라서요.”

“미리 말하고 올 걸 그랬네요.”

하지만 애초에 여기는 체스휘가 마련해 준 방이었다. 그러니 체스휘에게 왜 허락도 없이 방에 들어와 있냐고 따져 물을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늦은 시간에 여긴 어쩐 일로….”

무심코 물어 놓고 멈칫했다.

체스휘는 내가 메이드라고 알고 있으니, 나야말로 왜 고용인들 방으로 쉬러 가지 않고 여기로 왔는지 의아하게 여길 수도 있었다.

“내가 왜 왔는지 몰라요?”

촛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체스휘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나를 보다가, 이내 자리에서 걸음을 뗐다. 내게 다가오는 체스휘의 뒤로 불빛이 어스름하게 일렁였다.

낮의 비밀 공간에서만큼은 아니지만, 나와 가까이 붙어 선 체스휘에게서 또다시 귀를 간지럽게 만드는 음성이 나지막하게 속삭여졌다.

“이거, 벗어 보지 않을래요?”

메이드 복의 옷깃 아래에 묶인 리본에 체스휘의 손가락이 가볍게 걸렸다.

“혹시 힘들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고요.”

나는 그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옷은 또 왜요?”

체스휘가 경계심 가득한 나를 향해 입술을 휘어 예쁘게 미소 지었다.

“그래야 치료를 하죠. 다친 곳을 그대로 방치하면 덧나요.”

내가 이럴 줄 알았다. 또, 또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분위기 묘하게 만들지!

“그냥 제가 하면 돼요.”

“등이라 혼자는 어려울 텐데. 닥터 콘라드에게 봐 달라고 하지도 않았잖아요.”

그걸 체스휘가 어떻게 알지?

하지만 의문이 짙어질 새도 없이 체스휘의 손이 내 팔을 부드럽게 붙잡아 당겼다. 나는 아침에 그랬던 것처럼 침대에 걸터앉게 되었다. 마침 나도 다친 곳이 쑤시던 참이라 못 이긴 척 체스휘에게 등을 보여 줬다.

잠시 후, 내 상처를 확인한 체스휘는 말이 없었다.

“이건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

그러다 이내 그가 살짝 기가 찬 듯이 말했다.

“도대체 밖에서 뭘 했길래 이렇게 상처가 또 다 터져서 돌아온 건지 이해가 안 되는데요.”

당연히 그냥 도끼질 좀 했습니다… 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심해요?”

체스휘는 내 물음에 또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기분이 좀 상한 것 같은데, 어쩌면 아침에 기껏 치료해 준 게 무색해져서 그런 건지도 몰랐다. 같은 맥락에서, 나도 약간 체스휘의 눈치가 보였다.

“방에서 쉬라고 해도 말을 안 듣고…. 혹시 아픈 걸 좋아해요?”

그런데 다음 순간, 등에 날카로운 통증이 파고들었다. 나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신음 소리가 샜다. 체스휘가 상처 부위를 소독하고 약을 바르기 시작했는지, 화끈거리는 고통이 등을 덮쳤다.

그런데 체스휘가 그럴 리는 없겠지만, 꼭 상처를 일부러 후벼 파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반면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해서 괴리감이 들었다.

“아니면 좀 더 아파 봐야 조심하려나.”

“읏!”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처음부터 덜 고쳐 주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럼 정말 움직이지 못하고 방에만 있었을 텐데.”

“아, 흐으…. 잠깐만….”

등 뒤로 점점 더 강하게 번지는 통증을 피해 몸을 뒤틀었지만 체스휘가 나를 단단히 붙잡고 있어서 그의 손을 피할 수가 없었다.

“아, 아프다고요, 진짜… 흐읍….”

체스휘가 움직임을 멈춘 건 내 입에서 거의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을 때였다.

어느새 나는 거의 침대에 엎어지다시피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숨을 할딱거리면서 발발 떨리는 손만 겨우 움직여 체스휘의 팔을 붙잡았다. 아프니까 이제 그만하자는 의미였는데, 다행히 체스휘도 내 뜻을 알아들은 것 같았다.

잠시 후, 내가 알고 있는 부드러운 손길이 앞으로 흘러내려 내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또 우네요.”

한숨 섞인 속삭임이 귀에 울렸다. 그의 말처럼, 이번에는 그냥 눈물만 눈에 그렁그렁하게 고였을 뿐이라고 우길 수도 없었다.

“마음 아프게.”

정말 안쓰럽고 가련한 걸 대하듯이 달콤하게 녹아든 속삭임이 고막을 적셨다. 이어서 손과는 다른 부드러운 감촉이 위로하듯이 이마에 언뜻 닿았다.

깜짝 놀라서 눈을 깜빡이자 눈물이 후드득 떨어지면서 시야가 약간 맑아졌다. 그래서 훌쩍 가까워진 체스휘의 얼굴이 선명히 보였다.

방금 뭐가 지나간 건지 얼떨떨한 찰나에, 체스휘가 나한테 숙였던 고개를 들고 달래듯이 내 머리를 쓸었다.

“이제 다 됐어요. 붕대만 감으면 되니까 가만히 있어요.”

이번에는 정말 깃털이 스치나 싶을 정도로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는 붕대를 감았다.

뭔가 병 주고 약 주는 느낌이어서 나는 살짝 기분이 요상해지려고 했다. 혹시 이 남자가 방금 일부러 아프게 치료한 게 아닌가 싶은 의심도 살짝 고개를 들었다.

잠시 후 치료가 다 끝나고 나는 옷매무새를 다시 정리하면서 체스휘를 설핏 찌푸린 눈으로 돌아봤다. 왠지 어느 정도 이성을 되찾고 나니 미심쩍은 마음이 더 강해졌다.

“진통제도 가져왔으니까 먹어요.”

체스휘는 나를 등지고 앉은 채로 반대쪽에 있는 사이드 테이블 위로 손을 뻗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을 본 순간 문득 아까 낮에 마주쳤던 메이드 세라의 말이 떠올랐다.

“혹시 다음에 2호실 양육자가 옷을 벗은 걸 보게 되면 말이야, 등이랑 어깨 좀 잘 살펴봐 볼래? 여기. 이쯤에 뭐가 있는지 없는지.”

나도 모르게, 거의 충동적으로 손이 움직였다.

내 손이 날개뼈 위에 닿는 순간, 체스휘가 움직임을 멈췄다. 나는 혹시 체스휘에게도 나와 똑같은 게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이 그의 어깨와 견갑골, 그리고 등을 손으로 훑었다.

그런데 체스휘 씨…. 등이 참 태평양이네.

하지만 아무리 더듬거려도 딱히 손에 만져지는 건 없었다.

하긴, 세라가 말한 게 꼭 가이드라는 법은 없지. 그냥 흉터나 문신 같은 걸 의미하는 걸 수도 있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체스휘의 반대쪽 어깻죽지로 손을 미끄러뜨렸다. 강한 힘이 내 손을 감싸며 옥죄어 온 건 바로 그때였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몸을 반쯤 돌린 체스휘가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물었다.

퍼뜩, 예쁜 메이드 언니가 이런 식으로 손을 대려고 했을 때 체스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 미안해요. 이런 식으로 함부로 만지는 거 싫어한다고 했는데.”

그러자 체스휘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기울어졌다.

“내가 메이드 씨한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던가요?”

아차! 맞다, 체스휘가 그 말을 한 건 내가 린 도체스터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였지.

“들었어요! 다른 메이드한테. 이 바닥이 얼마나 좁은데요. 소문이 퍼지는 데 한 시간이면 충분하죠, 예.”

임기응변으로 서둘러 둘러댔으나 체스휘의 눈은 이미 가늘게 좁혀진 채였다.

하지만 그는 곧 표정을 풀고 몸을 돌려 나를 마주했다. 왠지 체스휘가 꼭 속아 주기도 어렵다는 듯이 작은 한숨을 내쉰 것 같았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예상 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그건 다른 사람 얘기고, 원하면 더 만져도 돼요.”

“네?”

당황해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 나를 보며 체스휘가 웃었다.

“내 몸이 취향이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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