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걱정을 하는 걸 보니까, 다행히 몸은 좀 괜찮아진 것 같네요.”
실소하듯이 야트막한 웃음소리를 내뱉은 체스휘가 문을 닫고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물컵과 웬 약병, 그리고 접시 같은 게 놓인 쟁반이 들려 있었다.
“그래도 조금 더 누워 있는 게 좋지 않겠어요?”
역시라고 해야 할지, 체스휘는 내 얼굴을 보고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 같았다. 갑자기 내 얼굴이 바뀐 걸 알아봤으면 놀라는 낌새라도 비쳤을 텐데, 조금도 그런 느낌이 없었다.
어젯밤의 일이 전부 다 기억나진 않았지만, 계단에서 떨어지고 나서 초상화에게 잡혔을 때 얼굴이 완전히 바뀐 게 아닐까 싶은데…. 그리고 체스휘가 날 발견한 건 그 이후일 테니까….
‘역시 체스휘는 내가 7호실 양육자라는 걸 모르는 게 분명해!’
옷도 어제 자다가 나와서 잠옷을 입은 상태였기 때문에, 옷차림으로 나를 알아볼 수 있을 리도 없었다.
그러니까 어차피 지금 내가 린이라고 말해 봤자 믿기 어렵지 않을까 싶었다. 하긴, 이렇게 얼굴이 달라졌는데 당연했다. 미친 사람 취급이나 안 하면 다행이겠지.
“실례지만, 제가 어젯밤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그러는데요.”
나는 목을 가다듬고 일단 체스휘에게 상황을 확인했다.
“제가 왜 여기에 있는 걸까요?”
“기억이 잘 안 나요?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것 같던데.”
체스휘가 테이블 위에 쟁반을 내려놓으며 답했다.
“그럼 체스휘 씨….”
나는 말을 이으려다가, 퍼뜩 지금 내가 린 도체스터의 모습이 아니란 걸 다시 한번 자각하고 호칭을 얼른 바꿨다. 저택에 있는 다른 고용인들은 양육자들에게 전부 존칭을 썼지, 아마?
“체스휘 니이임이 쓰러진 저를 발견하고 여기로 데려와 주셨을까요?”
그 순간 체스휘의 손이 멈칫했다.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래도 게임 아바타가 아니라 현실의 모습으로 이렇게 얼굴을 마주한 건 처음이라 어색해서 또 슬그머니 머리카락을 앞으로 모아 입과 코라도 가렸다.
“왜, 왜 그렇게 보세요?”
“진짜 기억이 하나도 안 나나 보다 싶어서요.”
뭔가를 가늠하듯이 나를 쳐다보던 체스휘가 이내 소리 없이 웃었다.
“네, 제가 발견해서 여기로 데려온 게 맞아요. 아무래도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여서 일단 발견한 곳에서 제일 가까운 빈방으로 들어왔고요.”
그러다 그가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로 팔짱을 꼈다.
“그보다 방금 불렀던 대로 다시 한번 불러 볼래요?”
“뭘요?”
“방금 그 호칭요.”
호칭? 설마 ‘체스휘 니이임’을 말하는 건가?
“그건 왜요?”
“음, 나도 나한테 이런 취향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서?”
뭐라는 거야?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거의 다 저렇게 부르던데 왜 낯선 것처럼 말하지? 게다가 취향이 어쩌고 저째요?
아무튼 방금 문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묘한 미소를 짓는 체스휘를 보자 괜히 더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헛기침을 하면서 얼른 화제를 돌렸다.
“크흠, 아무튼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저택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신입 메이드인데요. 밤에 잠깐 화장실을 다녀오다가 어두워서 발을 헛디뎠지 뭐예요. 그래서 하마터면 찬 바닥에서 밤을 보낼 뻔했는데….”
아니지. 이 경우에는 그냥 찬 바닥에서 밤을 보내는 게 대수가 아니라 중독 증상 때문에 죽을 뻔하기까지 한 거지?
“아, 신입 메이드. 낯선 얼굴인 것도 그래서다?”
“네, 그런 거죠! 특히 제가 주로 세탁실 같은 곳에서 일해서 더 얼굴 볼 일이 없었지요.”
갓 지어낸 변명치고는 그럴듯한 것 같았다. 체스휘도 납득했는지, 나를 향해 그러냐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메이드 씨. 일단 좀 더 안정을 취해야 할 것 같으니 다시 누워요.”
“아니에요. 여기까지 옮겨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 으앗!”
하지만 내가 체스휘의 권유를 거절하고 막 그의 옆을 지나가려고 했을 때, 갑자기 발에 뭔가가 걸렸다.
순식간에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하지만 다행히 볼썽사납게 바닥으로 넘어지지는 않았다. 별안간 단단한 팔이 내 허리를 휘감아 몸을 받쳐 줬기 때문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듣는 순간 솜털이 곤두서는 것 같다고 느낀 깊고 낮은 목소리가 귓바퀴를 건드리며 바로 지척에서 울렸다.
“저런, 몸이 아직 많이 안 좋은가 봐요. 다리에 힘까지 풀리고.”
아니, 무슨 소리야? 지금 네가 나한테 발을 걸었잖아?
나는 바닥에 넘어지려던 나를 붙잡아 준 체스휘를 황당하게 올려다봤다. 하지만 그는 정말 애석하다는 듯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어, 혹시 내가 뭘 착각한 게 아닌지 어리둥절해졌다.
“역시 좀 더 쉬는 게 좋겠네요. 침대까지 부축해 줄게요.”
그런데 체스휘 씨, 3 대 500 정도 치시나 봐요…? 내 허리에 감긴 팔뚝이 되게 실한 느낌인데. 아니, 내 발로 걸어가려고 밀어내도 뭐 이렇게 꼼짝도 안 해?
내 의문은 체스휘에게 부축 당해 엉겁결에 침대에 앉혀진 이후에도 계속됐다.
“혹시 다른 아픈 곳은 없어요? 어제 정말 큰일 날 뻔했는데.”
체스휘는 꽤나 다정하고 친절한 태도로 내 상태를 살폈다.
어제 그랬던 것처럼, 약간 서늘한 체온을 가진 체스휘의 손이 내 이마를 덮었다. 그것만이면 차라리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어서 침대에 걸터앉은 체스휘의 상체가 내 쪽으로 가깝게 기울어진 순간 나도 모르게 얕게 들이마시던 숨을 멈췄다.
햇빛을 머금어 밝은 금색처럼 보이는 머리칼이 바로 코앞에서 반짝거렸다. 아래로 내리깔린 보라색 눈도 지금까지 중에 가장 가까운 곳에서 멈춰졌다.
곧이어 이마와 이마가 가볍게 맞닿았다.
오늘따라 햇빛이 비친 체스휘의 얼굴이 유독 환해 보였다. 금방 씻고 온 건지, 체스휘에게서는 상쾌하고 시원한 비누 향 같은 게 났다.
체스휘가 내리깔고 있던 시선을 들자 숨소리까지 들릴 것 같은 거리에서 눈이 마주쳤다. 햇빛이 담긴 체스휘의 홍채는 평소보다 밝고 투명해서 꼭 보석 같았다. 나는 눈 한번 깜빡이지 못하고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잠시 후 체스휘의 입술이 느릿하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다행히 열은 안 나는 것 같고.”
낮은 속삭임이 간지럽게 귀를 스쳤다. 얼굴을 가까이에서 마주했던 순간은 짧았으나 왠지 그 잠깐 동안 시간이 멈췄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잠시 후 체스휘가 내 위로 숙였던 고개를 들고, 헝클어진 내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듯이 다시 손을 움직였다.
그 모든 게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는 그걸 제지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어젯밤에는 시간이 너무 늦어서 닥터 콘라드를 부르지 못했거든요.”
상황을 설명해 주는 체스휘의 목소리보다 이어서 느릿하게 내 팔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한 손길에 더 신경이 쏠렸다.
그러다가 잠옷 소매 밑으로 그의 손가락이 살짝 미끄러져 들어온 순간,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고 말았다.
“그래서 제가 급한 대로 응급 처치를 했는데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긴 손가락을 따라 살짝 걷어 올라간 소매 밑으로 붕대에 감긴 손목이 드러났다. 그제야 나는 손목 말고 다른 곳에도 체스휘가 말한 치료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 네. 치료까지 직접 해 주시고, 그것참 감사….”
얼떨결에 감사 인사를 하다가, 뭔가 좀 이상한데 싶었다.
아니…. 꼭 이렇게 야릇하게 소매를 걷어야 하나요?
왠지 다른 때보다 체스휘와의 거리감이 가까운 것 같은데 이번에도 내 착각인지 모르겠다. 상대가 체스휘만 아니었다면 ‘이게 무슨 수작질이세요?’ 하는 소리가 나왔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내가 체스휘를 향해 무어라 말을 하려고 막 입을 연 순간, 눈앞에 돌연 이상한 인물 정보 창이 떠올랐다.
<???(??세)>
- 제44세계 중앙 비밀 기관 스텔라(stēla) 소속 전 1등급 집행관
- 제18세계 레드포드 저택 양육자(임시)
- 성격: 냉혹함, 오만함, 자기중심적, 몰인정함, 비정함
- 별명: 스텔라의 사신, 이단 처형인, 대주교의 광견, 도살자
- 현재 상태: 흥미, 관심, 즐거움, 의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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