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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44)화 (44/300)

‘신세계에서 농사짓기라니, 갑자기 게임 장르가 너무 달라지긴 하네.’

나는 일지를 덮고 방을 나섰다.

그런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복도의 공기가 텁텁했다.

걸으면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꼭 숨은그림찾기라도 하듯이 평소와 사소하게 달라진 부분을 발견해 냈다.

늘 복도 한쪽에 장식되어 있던 꽃병들이 없었다. 원래 고용인들의 역할에는, 새벽에 성수를 넣은 꽃병을 담당한 구역에 가져다 두는 게 규칙으로도 명시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 방에 있는 꽃병도 아직 교체가 되지 않았었지. 지금 시간이면 성수 디퓨저 효과도 다 됐을 텐데?’

저택의 고용인들이 이렇게 한꺼번에 맡은 업무를 잊는 건 특이한 일이라,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린 님, 큰일 났어요!”

사라로사가 복도의 저편에서 황급히 달려온 건 그때였다. 양 갈래로 묶은 갈색 머리를 퍼덕이며 달려오는 모습이 꼭 편지를 물어 날아오는 참새 같았다.

“무슨 일이에요, 사라로사?”

“저택에서 보관 중이던 성수들이 전부 망가졌대요…!”

나는 뜻밖의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침에 세안할 때까지는 멀쩡했잖아요?”

“아침 기도 시간과 세안할 때 사용하는 성수는 전날 미리 1층에 옮겨다 두거든요. 그런데 그것 말고, 다른 방에 보관 중이던 일주일 치 성수들이 망가져 있는 걸 이제 발견했다나 봐요.”

그래서 이 시간이 되도록 성수 화병 조달이 안 되고 있었구먼.

내 바로 앞까지 다가온 사라로사가 소리를 한결 낮추어 은밀하게 속닥거렸다.

“이렇게 하루아침에 갑자기 성수가 망가지다니, 누가 일부러 그런 게 분명하다고 지금 난리가 났어요.”

나는 사라로사의 얘기를 듣고 계단을 내려갔다.

“성수가 없으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요?!”

“일단 진정들 해 보게. 지금 당장 다른 곳에서 성수 조달이 가능한지 총괄 집사님이 확인하러 가셨으니까….”

레드포드 저택의 고용인들은 내 생각보다 더한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시끄럽게 웅성거렸다.

“린 씨.”

그때 누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렸다.

“체스휘 씨.”

나는 내 뒤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순간 몸을 움찔했다.

“린 씨도 여기 와 있었네요?”

“아, 네. 체스휘 씨도 소식 듣고 왔어요?”

사실은 얼마 전에 악마의 화원에 들어갔다 온 뒤로 체스휘를 보면 살짝 겸연쩍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체스휘가 게임 데이터라는 건 알았지만, 남에게 그런 추태를 보인 건 처음이라 그런지 멋쩍은 기분이 완전히 가시지를 않았다.

하지만 체스휘는 그날 일을 조금도 마음에 담아 두고 있지 않은 것처럼, 전과 같은 태연한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아뇨, 전 미뉴엘이 화병 갈 시간이 됐는데 아무도 오지 않는다고, 저한테 빨리 가서 확인해 보라고 해서 와 봤는데….”

체스휘가 나를 내려다보던 시선을 들어 앞에 모인 고용인들을 힐끗 스쳤다.

“역시 무슨 일이 있나 보네요.”

나는 그에게 내가 들은 것을 설명해 주었다.

“성수가 망가졌대요. 누가 일부러 한 짓 같다던데요.”

내 말을 들은 체스휘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그래요? 성수를 일부러 건드리다니, 누군지 참 할 짓이 없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체스휘의 목소리에는 지금도 저 앞에서 두려움에 질려 시끄럽게 떠드는 고용인들과 달리, 정말 지루한 일을 목도한 듯한 권태감만 스며 있었다.

나는 그런 체스휘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체스휘 씨는 별로 걱정되지 않나 봐요.”

“상부에서 기껏 이 저택에 몰아넣은 사람들을 전부 다 죽게 내버려 둘 리가 없으니, 성수든 뭐든 늦지 않게 공급해 주겠죠.”

그렇게 말한 체스휘가 다시 나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그러니까 린 씨도 불안해하지 마세요.”

나는 반쯤 습관적으로 체스휘의 인물 정보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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