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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40)화 (40/300)

나는 환영 속에서 보이는 여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아, 진짜 오랜만이다.’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일이 된 과거.

별로 보고 싶은 장면은 아니었지만 이렇게라도 여인의 얼굴을 보게 되니 모순적이게도 조금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손을 뻗었지만 그녀에게 닿지는 않았다.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으나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게 웃겼다.

예전에는 이렇게 그녀를 보면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것 같았는데, 지금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미 시간이 꽤 지났기 때문인가.

여인은 여전히 나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녀를 원망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를 보는 동안 원망 같은 것보다는 다른 감정이 앞섰다.

그래서 내게 허락된 시간 동안 눈앞에 있는 사람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누군가 나를 깨울 때까지 그냥 한없이.

다시 눈을 뜨자 뿌연 하늘이 나를 맞아 주었다.

처음 꽃에 손을 댄 이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새 나는 바닥에 누워 있었다. 깊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난 듯이 축 늘어진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그런데 등에 와닿는 땅의 감촉이 마냥 차갑고 딱딱한 느낌은 아니라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체스휘가 내 쿠션 노릇을 해주고 있었다.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이 그림자에 먹혀 어두웠다.

“아… 저 오래 이러고 있었어요?”

왠지 시야가 가물가물해서 체스휘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다만 그는 내가 눈을 떴을 때부터 계속 조용했다.

“아니, 그런데 내 얼굴 왜 이러지? 혹시 체스휘 씨가 물 뿌린 건 아니죠?”

그냥 얌전히 꽃이 보여 주는 환영만 보고 나왔을 뿐인데, 그새 비라도 맞은 것처럼 이상하게 얼굴이 흥건했다.

나는 손을 들어 눈이며 뺨을 더듬더듬 닦아냈다. 그러는 동안 체스휘는 또 입을 굳게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다만 내 얼굴에 꽂힌 시선만큼은 한시도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봤으나 이미 거대한 꽃들은 체스휘를 피해 사방으로 흩어진 뒤였다.

나는 체스휘의 시야에서 얼굴을 가리는 걸 포기했다.

그래도 조금 민망하긴 해서 괜히 머뭇거리며 입을 우물거리다가 그에게 말했다.

“저기, 고마워요.”

“…….”

“사실 다시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 못 했는데….”

뒷말을 잇는 건 역시 어려웠으나, 결국은 밀려나온 진심이 조용한 화원 속에 가라앉았다.

“이렇게라도 봐서 너무 좋았어요.”

그런데 막상 스스로도 깨닫기 싫던 진심을 소리 내 말하고 나자 또 내가 웃기게 느껴졌다. 그래서 체스휘를 보고 푸스스 웃었다.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돼서 멍청하게 웃는 얼굴이 꽤 우스워 보였을 텐데, 체스휘는 그런 나를 보고 웃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이 게임 캐릭터에게 그게 조금 고마웠던 것 같았다.

***

‘아니, 생각해 보니까 창피하네.’

악마의 화원에서 나온 뒤 뒤늦게 현타가 왔다.

사실 막 환영에서 깨어나 눈물 콧물 다 쏟아 냈을 때는 그냥 개운한 기분만 들었다.

계속 침묵하던 체스휘가 나를 보다가 시간이 늦었으니 그만 돌아가자고 했을 때도 창피한 마음은 딱히 들지 않았다.

이후에 화원 밖으로 나와 하늘을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지난 것 같았다.

알고 보니까 체스휘는 정말 내가 환영 속에서 최대한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 준 듯했다.

귀찮아서 대충 처리하고 방으로 돌아가려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의 참된 마음에 나는 감동했다.

덕분에 보고 싶었던 얼굴도 원 없이 보고 나왔으니 말이지.

그런데 체스휘는 아까부터 말이 없었고, 그래서 나도 화원 안에서의 일에 대해 되새겨 생각할 시간이 충분했다.

그러다 보니 조금씩 내 행각에 대해 겸연쩍은 마음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보다 내 얼굴, 지금 엉망일 것 같은데.’

나는 체스휘를 따라 쫄래쫄래 걷다가 겉옷을 하나 벗었다. 그러고 나서 그걸 머리 위에 썼다.

그런 뒤 슬그머니 체스휘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체스휘 씨. 정말 고맙고 미안한데요, 혹시….”

“안 돼요.”

“헐,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악마의 화원에 다시 들어가는 건 안 되니까 이제 포기하세요.”

정곡을 짚은 체스휘 때문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물론 방금까지만 해도 속이 후련하다거나, 개운하다거나 하는 생각을 했던 사람으로서 좀 민망한 일이긴 했다. 하지만 어디 인간이 쉽게 만족을 아는 존재던가.

악마의 화원 밖으로 나와 몇 발짝 걷기도 전에 벌써 미련이 생겨났다.

어차피 이제는 현실에서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설령 만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내가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가상 현실 게임에서는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이 악마의 화원이 보여 준 환영은 연동 장치가 내 무의식을 스캔한 것일 터다.

그러니 내 기억을 내가 마음대로 보겠다는데, 그게 뭐 어때서?

그래, 가뜩이나 현실도 팍팍한데 게임에서 내 마음대로 좀 하는 게 뭐가 문제란 말이야?

그걸 막는 당신은 나쁜 데이터…!

“애초에 딱 한 번이면 된다고 린 씨가 먼저 말했잖아요.”

“넵…. 제가 그러긴 했었죠. 그런데….”

“게다가 계속 그런 걸 보면 정신 건강에 안 좋아요. 겉으로 티가 나지 않아도 사람 하나 망가지는 건 순식간인걸요. 린 씨도 방금 겪어 봐서 알지 않아요?”

하지만 체스휘의 말이 구구절절 맞아서 시무룩하게 포기했다.

그게 옆에서도 느껴졌는지, 체스휘가 악마의 화원 밖으로 나와서 처음으로 나를 돌아봤다. 그러자마자 그는 할 말을 잃은 듯했다.

“지금 머리에 뭘 쓴 거죠?”

체스휘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어물거리며 변명했다.

“그게, 아시겠지만 얼굴이 좀 그래서요…. 남들이 볼까 봐.”

물론 어차피 전부 다 게임 데이터지만 제가 아직 그렇게까지 면이 두껍지는 못했나 봐요.

초면인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가.

어쨌든, 그래도 게임이라 다행이다. 현실이었으면 나 지금 내 옆에 있는 이 사람도 이제 못 봐. 직장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잠수 타 버릴 거라고.

‘…아니다, 그건 취소. 월급을 주는 곳은 소중하지, 암!’

“아무튼 체스휘 씨 오늘은 고마워요. 안에서 있었던 일은 우리끼리의 비밀인 거예요?”

“그런 걸 어딜 가서 말하겠어요.”

내 말에 대답하는 체스휘의 목소리가 기분 탓인지 살짝 가라앉은 것 같았다.

“린 씨.”

“네?”

체스휘는 나를 불러놓고 아무 말이 없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체스휘의 얼굴이 낯설 만큼 무표정했다. 그 얼굴이 차갑게 느껴지는 것은 분명 달빛 때문일 것이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결국 체스휘는 내게 다른 말을 더 하지 않았다.

나는 체스휘와 헤어져 바로 내 방으로 가지 않고 조용히 발소리를 죽여 다이안의 방으로 향했다.

다행히 그러는 동안 다른 사람은 만나지 않았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대에 곤히 잠든 어린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살금살금 침대의 머리맡으로 다가가 바닥에 앉았다. 그러고는 잠든 다이안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잘 자고 있네. 이제 열은 다 떨어진 것 같아서 다행이다….”

조심히 손을 들어 눈가를 찌르는 아이의 머리카락을 옆으로 살살 치워 줬다.

다이안의 잠든 얼굴을 보자 나도 모르게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사실 그동안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말인데, 다이안은 죽은 내 여동생을 좀 닮았다. 그 애도 이렇게 통통한 뺨과 귀엽게 눈꼬리가 올라간 눈을 가지고 있었다. 쉽게 울고, 쉽게 풀이 죽는 모습도 닮은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여동생도 이렇게 자주 아팠었다.

물론 이제는 세월 속에 묻힌 오래된 기억이라, 내 안에서 미화되고 변화되어 괜한 그리움에 이렇게 애꿎은 사람에게서 그녀를 찾는 것일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그 애를 정말 많이 좋아했다.

그날, 그 애가 밖에 나가서 같이 놀자고 아무리 떼를 써도 그냥 달래서 집에 있을걸.

그때, 트럭이 우리에게 달려올 때 굳어서 가만히 서 있지 말고 그 애를 끌어당기기라도 할걸.

그렇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후회를 살면서 지겹도록 반복했을 정도로.

“그러니까 다이안은 나랑 같이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잠든 다이안의 얼굴을 보면서 소곤거렸다.

이게 게임이란 것을 알면서도 나는 이 소년이 너무 사랑스러웠고, 언제나 그의 행복을 바랐다.

사실 누구보다도 다이안의 행복한 결말을 보기를 원하면서도, 정작 정말로 이 게임의 끝을 보게 되면 너무나 허전하고 슬퍼서 울어버릴 것 같았지만.

어쨌거나 그런 모순 속에서도 나는 내 소년이 곁에 있어 행복했다.

***

<린의 일지>

오늘도 다이안은 너무나 사랑스럽고 눈이 부셨다.

아침 식사 후, 건강한 육체를 위해 적당한 운동을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는 하는 것이 좋다는 다이안의 의견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다이안은 공터를 다섯 바퀴 뛰겠다고 했다.

나는 다섯 바퀴는 무리이니, 한 바퀴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지만 다이안은 완고했다.

공터를 뛰기 시작한 다이안의 옆에서 나는 열성적으로 응원을 시작했다.

다이안은 힘들어 보였지만 끈기 있는 모습으로 공터를 다섯 바퀴 뛰는 데 성공했다.

어쩜 이렇게 훌륭한 소년이 다 있을까?

점심 식사 시간에, 다이안은 평소에 싫어하던 콩을 오늘은 세 개 먹겠다고 했다.

나는 한 개만 먹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지만 다이안은 완고했다.

콩을 먹기 시작한 다이안의 옆에서 나는 열성적으로 응원을 시작했다.

다이안은 힘들어 보였지만 끈기 있는 모습으로 콩을 세 개 먹는 데 성공했다.

진짜 어쩜 이렇게 훌륭한 소년이 다 있을까?

점심 식사 후 다이안은 싫어하는 철학책을 열 페이지 읽겠다고 했다.

나는 한 페이지만 읽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지만 다이안은 완고했다.

철학책을 읽기 시작한 다이안의 옆에서 나는 열성적으로 응원을….

(이하 생략)

오늘도 다이안은 정말 훌륭하고 멋진 소년이었다.

이렇게 매일같이 쑥쑥 성장하는 게 가능한 일인지, 다이안을 볼 때마다 놀랍다.

누가 양육하는 아이인지 참으로 대견하기도 하다.

내일도 다이안과 함께 하는 하루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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