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저도 나중에 알았어요. 저한테도 말도 없이 가셨더라고요.”
라파엘을 생각하자 저절로 떨떠름한 표정을 짓게 되었다.
아무튼 라파엘은 이미 떠난 사람이고….
마침 만난 김에 저택의 시스템에 대해 체스휘와 대화를 나누고 싶기도 했지만, 아직 나는 이번 회차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이 부분에 대한 사람들의 분위기를 잘 알지 못했다.
이번 44회차에서는 변수가 워낙 많기도 하고 또 아무래도 이게 메인 시나리오인 것 같아, 좀 더 신중하게 행동하는 편이 나을 듯했다.
그래서 그냥 탈세계 엔딩에 대해서는 나 혼자 조금 더 생각해 보기로 하고, 며칠 전부터 체스휘에게 말해 보려고 생각하고 있던 다른 물음을 입 밖에 꺼냈다.
“체스휘 씨, 혹시 괜찮으시면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다행히 체스휘는 흔쾌히 수락했다.
“얼마든지요.”
“그런데 사실 이게 좀 조심스러운 부탁이긴 한데요….”
“아, 혹시 방금 한 말 취소해도 될까요? 린 씨가 그런 반응을 보일 만한 일이라니 좀 더 신중하게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은데.”
아니, 그 말은 무슨 뜻이지요?
나는 체스휘가 조금 전에 한 말을 번복하기 전에 얼른 말했다.
“혹시 저랑 악마의 화원에 다시 들어가 주실 수 있나요?”
체스휘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린 씨, 혹시 고통받는 걸 즐기는 취미라도 있어요?”
“그런 게 아니라…. 아, 일단 이것부터 여쭈어봐야 하는데 깜빡했네요. 체스휘 씨는 거기 들어가도 꽃들한테 영향을 안 받는 게 맞죠? 지난번에 막 손가락 하나로 꽃들을 다 쫓아 버리시던데요.”
체스휘는 대답하지 않고 팔짱을 꼈다.
“그러니까, 저랑 좀 같이 들어가서… 제가 거기 있는 꽃들과 일심동체가 되지 않게 좀, 도와주시면 안 되나 하고… 옙. 그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나는 몹시 드물게도, 게임 캐릭터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은 체스휘가 없으면 내가 아쉬웠기 때문이다.
“화원에 들어가려는 이유를 물어보고 싶은데요.”
“거기에서 다시 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보고 싶은 거요?”
“네, 여기 있는 동안 꼭 한번 다시 보고 싶은 게 있어요.”
내 단호한 말에 체스휘가 잠깐 입을 다문 채 내 얼굴을 내려다봤다.
“정말 한 번만요. 부탁드릴게요.”
들어 줄까? 거절할까?
혹시 체스휘가 거절해도 지금 바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몇 번 더 그를 설득하고 회유해 보고, 그래도 안 되면 그때는… 한 마리의 위험한 짐승, 아니 플레이어가 되겠다!
악마의 화원에 과감하게 혼자 들어가서 거기 있는 꽃들하고 친구도 먹고, 한마음 한뜻을 가진 대왕 꽃이 되어 함께 악마의 화원 속 빌런이 되겠습니다. 흑흑.
하지만 다행히도 체스휘는 내가 악마의 화원에 뿌리를 내리도록 놔두지 않았다.
“알겠어요. 린 씨 부탁인데 거절할 수 없죠. 그럼 시간은 언제가 좋을까요?”
“앗! 전 언제든 괜찮아요. 오늘 저녁에도 괜찮… 지가 않네요. 다이안이 다 나을 때까지는 제가 옆에 있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아서. 혹시 내일이나 모레쯤 어떠세요? 아니면 다른 날도 괜찮고요. 제가 체스휘 씨 일정에 맞출게요.”
혹시 내가 일정을 미뤄서 체스휘의 마음이 바뀔까 봐 속사포처럼 줄줄이 설명을 쏟아내 다시 시간을 잡았다.
다행히도 체스휘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 뒤 저녁은 어때요?”
“괜찮아요.”
“그럼 그때로.”
그렇게 체스휘와 약속을 정한 뒤, 나는 우리 귀여운 아기 고양이 다이안을 볼 때를 제외하고 가장 들뜬 상태로 폴짝폴짝 뛰어서 방으로 돌아갔다.
***
안녕하세요, 라파엘 카드리고 선배님. 린 도체스터입니다.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연락드립니다. 본국의 기관으로는 무사히 귀환하셨는지요?
저는 위대하신 대주교님과 친애하는 선배님의 기대를 충족시켜 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참, 그런데 얼마 전에 다녀가셨을 때 붉은 오렌지를 안 가져가셨더라고요. 방구석에 떨어져 있는 걸 메이드가 발견해서 결국 그건 저택 안의 사람들과 처리했습니다.
그 붉은 오렌지는 레드포드 저택과 바로 연결된 제19세계에서 구입한 것이니, 혹시 대주교님께서 찾으시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제18세계인 레드포드 저택보다 한 등급 위의 상위 세계이니, 이곳에 다시 직접 방문하시는 것보다는 공기가 조금이나마 더 상쾌하실 겁니다.
그럼 또 금주의 보고 때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
“체스휘 씨!”
마침내 약속한 날이 되어, 나는 신이 나서 악마의 화원으로 뛰어갔다.
문 앞에 서 있는 체스휘를 보자 마음이 마구 들뜨고, 벌써부터 즐겁고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린 씨, 꼭 눈 오는 날 밖에 나온 강아지 같네요.”
체스휘가 그를 향해 달려가는 나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 들어가는 게 그렇게 좋아할 일이 아닐 텐데…. 다른 사람은 분명 돈 주고 안에 들어가라고 해도 거절할걸요.”
체스휘는 이렇게까지 악마의 화원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정말 오늘이 기대되어 어젯밤에 잠까지 설쳤을 지경이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금 이렇게 신이 난 이유가 새로운 맵을 탐방한다는 기대감 때문만인 건 아니었다.
체스휘가 나보다 한발 먼저 악마의 화원의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그의 뒤를 따랐다.
체스휘는 설렘을 감추지 못하는 나를 보고 얕게 웃으면서 지나가듯이 말했다.
“그래도 차라리 다행인가. 사실 린 씨가 저한테 처음 부탁했을 때, 무턱대고 혼자 화원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은 게 용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앗, 그건 저를 잘 파악하신 겁니다.
체스휘가 동행을 거절하면 이 화원에 장렬히 혼자 들어가서 악마의 꽃 동지가 될 생각까지 하고 있던 자로서 지금 살짝 속이 찔렸다.
체스휘도 그의 말에 입을 딱 다문 나를 보고 진상을 눈치챈 것 같았다. 체스휘의 입에서 황당함을 담은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니, 저 지금 농담한 건데 진짜라고요? 진짜 꽃이 될 생각이었다고?”
“예쁘잖아요. 악마의 꽃….”
나는 괜히 머쓱해져서 변명하듯이 말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체스휘는 도대체 내가 왜 그렇게까지 굳은 마음을 먹고 여기에 들어오려고 했는지 의아한 것 같았다.
물론 그 이유는 체스휘도 이제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면 될 것 같아요.”
악마의 화원의 입구에서 조금 걸어 들어가자, 그때 보았던 기괴한 대왕 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체스휘를 돌아보았다.
“그럼 제가 이제부터 이걸 만질 건데요.”
내가 입을 열어 운을 떼자, 체스휘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제 귀가 좀 이상한가 봐요. 방금 이상한 말이 들렸는데.”
“제가, 지금, 이걸, 만질, 건데요.”
귀를 의심하는 체스휘에게 다시 한번 말해주자 그가 입을 다물었다. 나도 이런 말을 하면 체스휘가 나를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생각할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할 말을 잃은 듯한 그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혹시 제가 제정신이 아니게 되거나, 여기 있는 꽃 친구들처럼 되기 전에 손 좀 써 주실 수 있을까요?”
체스휘에게 말하자 그가 또 얼마간 말없이 나를 쳐다봤다. 그러다 체스휘가 내게 확인하듯이 말했다.
“이 화원은 꽃에 손을 대는 사람의 악의만큼 정기를 빨아들이지만, 그러는 동안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고 들었는데요.”
“네, 누군가에게 악의를 받았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고 저도 들었어요.”
저택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그 애기를 듣고는, ‘아, 그래서 그때 나도 그런 기억이 떠올랐었던 거구나.’하고 생각했다.
내 차분한 대답에 체스휘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린 씨, 진짜 자학하는 취미라도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셔도 할 말이 없지만, 아무튼 한 번만 부탁드려요.”
체스휘의 얼굴에는 계속 묘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나를 특이하다고 생각하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나도 어쩔 수 없지 싶었다.
체스휘는 결국 내 부탁을 들어줬다.
나는 한번 심호흡을 한 뒤, 체스휘가 지켜보는 앞에서 눈앞에 있는 거대한 꽃의 이파리에 손을 댔다.
곧바로 오래된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
“왜 너만 살았니?”
내가 있는 곳은 병원이었다.
짙은 소독약 냄새와 그 사이로 코끝을 파고드는 비릿한 피 냄새가 섞여 당장이라도 토악질을 할 것 같았다.
“왜 너만 살아 돌아왔어?”
“뭐라고 말 좀 해 봐, 하린아.”
나와 함께 병원에 실려 온 동생의 시신을 직접 확인한 뒤 기절했던 엄마는 눈을 뜨고 나서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다가, 나중에는 무서울 정도로 조용해졌다.
“네가 데리고 나갔잖아. 네가 우리 아가 데리고 나갔잖아.”
넋이 나간 채 초점이 흐린 눈으로 병실에 누운 나를 보며 계속 중얼거리던 엄마가 옆에서 말리는 할머니를 밀치고 다시 내게 달려들었다.
“왜, 왜 그랬는지 말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어!”
“내가 그동안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하은이가 널 얼마나 좋아했는데? 그런데 어떻게 네가 이래?”
“내 딸이 너 때문에 죽었는데 왜 너만 살았냐고…!”
나와 내 동생 하은이는 함께 집 밖에 나갔다가 사고를 당했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 신호를 무시하고 달려온 트럭이 하은이를 그대로 밀치고 지나갔다. 그 직전까지만 해도 해맑게 웃고 있던 귀여운 얼굴이 순식간에 내 눈앞에서 사라지던 순간을 나는 아직까지도 잊지 못했다.
그때 나는 열세 살, 하은이는 열 살이었다.
나는 하은이가 마지막 순간까지 꽉 잡고 있던 팔을 가장 크게 다쳤다. 그 애에 비하면 경미한 부상을 입는 선에서 끝났지만, 하은이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엄마는 그 후로 많이 아팠다. 그래서 나를 미워하고 증오했다.
“알고 보니 첫째가 입양한 딸이었대요.”
“에구머니나, 그럼 진짜 딸이 죽고 입양한 애만 산 거네요?”
“더군다나 그 여자애가 동생을 데리고 몰래 밖에 나갔다가 그런 일이 생긴 거라, 혹시 일부러 그런 게 아니냐는 소리도….”
다른 사람들도 그 후로 나를 볼 때마다 저런 말을 속닥거렸다. 그때 나는 갑자기 나한테 무슨 일어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더 이상 네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
“네가 하은이를 죽인 게 아니라고 해도, 너를 보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
“그러니까 우리 다시는 보지 말자, 하린아.”
엄마가 어느 날 울면서 나를 붙잡고 말했다. 그게 그녀와 내 마지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