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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38)화 (38/300)

좀 오버해서 말하자면, 왠지 지금 이 아저씨 태도가 꼭 입덕 부정기에 발가락만 살짝 담근 사람을 보는 것 같은데….

하지만 얘랑 나 사이에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다고?

얼마 전에 복도에서 들었던 올리비아의 말이 머릿속에 떠오른 건 바로 그때였다.

“어머어머, 웬일이야! 지금 거기서 둘이 뭐 하는 거야? 더군다나 지금 그 옷차림은…! 하, 4호실이 메이드라면 환장하는 건 알았지만 도대체 둘이 무슨 상황극을 즐기는 거야? 더군다나 방도 아니고 이런 탁 트인 복도에서 애들 교육에 안 좋게!”

‘…설마 내가 메이드복을 입어서?’

갑자기 진심으로 경계심이 들었다.

그런 게 아니고서야 상냥한 말 한마디 해 준 적 없는 나한테 레이븐이 관심을 갖는 이유를 떠올리기 힘들었다.

‘아니면 이 녀석, 혹시 알고 보면 되게, 막…. 자기를 구박하고 막 대하는 여자한테 끌리는 거 아니야?’

나는 레이븐의 취향이 의심스러워졌다. 내 의심은 합당했다.

이놈이 그토록 세라, 세라, 허구한 날 타령을 해 댔던 사람도 저택에서 제일 도도하기로 소문난 메이드 언니가 아니던가.

나는 레이븐에게서 슬금슬금 떨어졌다.

“뭐야, 그 눈빛은?”

“레이븐 씨, 죄송하지만 레이븐 씨는 제 취향이 아니에요.”

“그게 무슨 말…. 어? 그런데 너 내 이름 알고 있었어?”

그러고 보니 내가 레이븐을 이름으로 부른 게 처음인가?

“내가 몇 명 되지도 않는 양육자들 이름도 못 외웠을까 봐요? 아무튼 전 볼일이 있어서 이만 먼저 갑니다. 제가 지금 한 말 꼭 기억하세요.”

“앗! 잠깐, 7호실!”

레이븐은 내가 고작 자기 이름을 불렀다는, 그런 사소한 부분에서 귀를 쫑긋하며 삼천포로 빠지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이 먼저 자리를 떠나는 나를 불렀다. 나는 그를 무시한 채 걸음을 서둘렀다.

그리고 잠시 후, 정원의 한구석에 있는 분홍 머리 소년, 비비를 다시 발견했다.

그는 정원 한가운데에 멈춰 서서 벤치에 앉은 소년을 보고 있었다. 그 소년은 책을 읽고 있는 1호실의 루스카였다.

비비는 혼자 공놀이를 하는 척하면서 루스카에게 공을 던졌다.

퍽!

하지만 그림자처럼 나타난 마리엔이 곧바로 그 공을 쳐 냈다. 절묘하게 조준된 공이 다시 비비의 품으로 날아들었다.

“흐악!”

“무슨 일이죠?”

1호실의 양육자 마리엔은 그냥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위압감이 넘쳐흘렀다. 그녀는 꼭 루스카의 기사처럼 그의 앞을 가로막고 서서 비비를 싸늘히 내려다봤다.

“3호실 어린이는 꼭 이 시간에 여기 와서 공을 던지고 놀던데. 좀 더 넓은 공터에 가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는 이유는 뭘까요?”

잠깐 움츠러들었던 비비가 이내 가슴을 펴고 마리엔에게 따지듯이 말했다.

“저, 저도… 여기가 좋단 말이에요! 루스카가 다른 곳으로 가면 되잖아요!”

“이곳은 앉아서 휴식을 취하도록 만들어진 공간이에요. 그런 곳에 공을 가지고 들어오면 안 된다는 건 기본적으로 숙지하고 있어야 할 상식이 아닐까요?”

마리엔은 딱히 비비를 혼내듯이 말하지 않았으나, 말하자면 그녀의 존재 자체가 아이들을 쭈그러들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비비도 언제 당당하게 정원을 이용할 권리를 주장했냐는 듯이 급격히 쭈글쭈글해져서 엉거주춤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는 마리엔의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다시 기운을 되찾았다.

조금 전의 일을 회상하듯이 입을 삐죽인 비비가 다음으로 향한 곳은 연못이었다.

비비는 꼭 누군가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자꾸만 힐끔거리며 어딘가를 쳐다봤다.

그러다 산책이라도 하는 중인지, 마침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던 체스휘가 눈에 띄었다. 비비도 그를 발견한 것 같았다.

뒤이어 비비가 기다렸다는 듯이 연못에 공을 퐁당 빠트리는 게 보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 체스휘에게 쪼르르 다가가 팔을 잡아당겼다.

“2호실 형, 오늘도 놀다가 공을 연못에 빠뜨렸어요. 빨리 주워 주세요!”

안경알 너머로 체스휘의 눈이 살짝 가늘게 떠지는 게 보였다.

“그래요, 주워 줄게요.”

비비에게 순순히 끌려간 체스휘가 연못 앞에 섰다.

“오늘은 공이 꽤 멀리 날아갔네요….”

“내가 공을 얼마나 잘 던지는데요! 다음에는 더 멀리 날려 보낼 건데!”

비비가 뻐기듯이 말했다. 꼭 가슴을 있는 힘껏 부풀린 작은 아기 분홍 새 같아서, 어쨌거나 겉모습만큼은 귀여웠다.

“그래요?”

체스휘는 잠깐 느릿하게 고개를 모로 기울이다가, 이내 신발을 벗고 연못으로 들어갔다.

그때 비비가 나뭇가지를 들어 체스휘의 등을 쿡 찔렀다.

체스휘가 ‘아앗’ 하고 영혼 없는 추임새를 넣으며 연못에 빠졌다.

“아하하! 바보! 매일 연못에 빠지고! 2호실 형은 바보야!”

그 모습을 본 비비가 큰 소리로 웃으며 체스휘를 비웃었다.

“그러게요. 이상하게 여기 공만 주우러 들어오면 자꾸 연못에 빠지네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이 실로 자연스러운 걸 보니, 지금까지 한두 번 이런 일이 있었던 게 아닌 것 같았다.

나도 그동안 체스휘가 왜 일주일 동안 두 번이나 연못에 빠졌었는지 이유를 깨닫고 황당해졌다.

‘어쩐지, 그래서 이전에 1호실 언니가 체스휘를 비웃은 거였구나.’

연못은 꽤 넓고 깊어서 체스휘의 가슴 밑까지 물이 찼다.

잠시 후 연못에서 빠져나온 체스휘가 안에서 꺼내 온 공을 비비에게 넘겨줬다.

“그보다 연못에서 공놀이를 하는 건 위험하다고 말했잖아요, 비비.”

그러고 나서 그는 물기를 가득 머금은 옷자락을 손으로 짜기 시작했다. 거의 동시에, 비비가 악마처럼 씨익 웃더니 연못을 향해 공을 발로 뻥 걷어찼다.

“2호실 형아! 공이 또 실수로 연못에 빠졌어. 가서 주워 줘! 빨리!”

“…….”

비비가 즐거운 얼굴로 까르르 웃었다.

이번에는 체스휘도 인내심에 살짝 한계가 오는지, 그는 웃는 얼굴을 한 채로 옷의 물기를 짜던 손을 멈췄다.

비비도 아예 눈치가 없진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체스휘의 지긋한 시선을 받고 서서히 웃음을 그쳤다.

“잠깐만 기다려요.”

하지만 체스휘는 다른 말 없이 연못에 또 들어가 비비의 공을 주워다 줬다.

이번에는 비비도 못된 장난을 더 치지 않고 체스휘의 옆에서 조용히 그를 힐끔거렸다.

체스휘는 그런 비비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바닥에 놓은 신발을 주워들며 지나가는 어투로 말했다.

“그런데 비비, 다이안에게 사과는 했어요?”

“사과? 사과는 먹는 거예요. 빨간 사과가 특히 맛있어요.”

한순간 움찔한 비비가 천진난만한 얼굴로 동문서답을 했다.

“다이안이 그때 일로 충격을 받아서 아직도 누워 있는 것 같던데 걱정되지는 않아요?”

“…….”

이번에는 비비에게서 아무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후, 비비가 눈을 치켜뜬 채 체스휘에게 되려 따지듯이 외쳤다.

“난 예쁜 걸 양육자 누나에게 선물할 수 있도록 다이안을 도와줬어! 그런데 내가 왜 사과해야 해요?”

“글쎄, 나쁜 짓인 걸 네가 알고 있으니까?”

비비는 또다시 할 말을 잃은 듯이 입을 다물었다.

공을 만지작거리는 비비의 손이 더 바빠졌다.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눈동자도 조금 더 빠르게 깜빡였다.

“유지니아는 착하고 바보 같은 것보다 나쁘고 똑똑한 게 더 좋은 거라고 했어요.”

뒤이어 비비가 작게 중얼거리듯이 속삭인 말을 듣고 나는 그의 상태가 왜 이런지 알 수 있었다.

‘양육자가 문제였구나.’

아니…. 그런데 잠깐만요, 3호실 양육자?

나한테는 자기 애가 착해서 그런 짓을 했을 리 없다고 하더니, 뒤에서는 나쁘게 살라는 교육을 하고 있었어? 너무 겉과 속이 다르잖아.

“확실히 착하고 바보 같은 것보다 나쁘고 똑똑한 게 세상 살기 편할 수도 있지.”

“그렇죠? 역시 유지니아는 똑똑해.”

“그런데 나쁘고 똑똑하게 사는 게 즐겁지 않으면 그건 차라리 안 하는 게 나아요, 비비.”

체스휘가 젖은 손으로 비비의 머리카락을 휘적였다.

“난 3호실 담당 양육자가 아니라서 이런 말 하기도 그렇지만.”

곱게 빗겨져 있던 비비의 머리카락이 체스휘의 손 아래에서 헝클어졌다. 비비는 공을 든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체스휘를 올려다봤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린 듯이, 비비가 체스휘의 손을 찰싹 쳐냈다.

“머리카락이 축축해졌잖아…! 내 머리가 수건인 줄 알아? 2호실 형 바보!”

버럭 소리 지른 비비가 후다닥 잔디밭을 뛰어 사라졌다.

그 모습을 잠깐 쳐다보는가 싶던 체스휘가 고개를 돌렸다.

“나쁜 애는 아니에요, 린 씨.”

앗, 내가 여기 있는 거 알고 있었구나?

나는 덤불 뒤에서 쓱 고개를 내밀었다.

“엿보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알아요. 애초에 뭘 비밀리에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넓은 저택도 아니고. 그리고 봐도 상관없는걸요.”

잉, 그런데 넓은 저택이 아니라니. 그런 말은 너무 금수저 같으신데?

체스휘가 소속되어 있다는 41세계는 세계관 기준으로 상위 세계인가 보다. 아니면 뱀들에게도 우두머리가 있으니, 하위 세계에서 부자인 걸 수도 있긴 하지.

내가 그렇게 잠깐 시시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체스휘가 문득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듯이 덧붙였다.

“아, 그런데 다이안하고 린 씨가 비비 때문에 다칠 뻔했으니 방금 제가 두둔하듯이 말한 것도 린 씨 입장에서는 기분 나쁠 수도 있겠네요. 혹시 마음 상했으면 미안해요.”

“아니에요. 저도 비비 자체가 나쁜 애라는 생각은 안 해요.”

나는 눈앞에 있는 데이터의 집합체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혹시 체스휘가 리뉴얼 버전의 새로운 공략 캐릭터가 맞다면,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다정캐로 은근히 인기가 많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당장 나부터도 같이 지낸 시간은 길지 않지만 호감이 드는데.

“참, 그런데 린 씨. 사제님이 오늘 새벽 일찍 저택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어차피 금식 기도 중이라 아침 식사는 함께하지 못했겠지만 아쉽긴 하네요. 미뉴엘도 사제님을 직접 보지 못해서 아침에 심통이 났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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