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드들의 대화에서 엿들었던 내용도 생각났다.
“그런데, 마리엔 님이 엄격한 걸 알면서 왜 1호실에 가고 싶어 하는 메이드들이 많은 거야? 루스카 도련님은… 몸이 건강한 것도 아니잖아. 그건 꽤 큰 핸디캡인데.”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육체의 건강함이 평가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아니니까…. 순위식 때도 1호실이 꾸준히 높은 점수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그래, 훌륭한 성인(聖人)이 되기 위한 기준이 꼭 한 가지인 건 아니지.”
마지막으로 다이안이 일전에 내 앞에서 했던 말도….
“같은 섭정 후보니 나쁘게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미뉴엘 성격은 참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나는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게임 제작사가 이번에 진짜 칼을 빼 들었나? 새로운 설정을 되게 상세하게 만들어 추가했네.’
지금까지 내가 보고 들은 정보를 정리한 바에 의하면, 이곳은 유니버스 세계관이 맞았다.
어쩐지 라파엘이 제18세계가 어쩌구, 제44세계가 어쩌구 하면서 떠들어서 의심스러웠는데, 진짜 세계 대통합 시대였다니.
내가 밤새 훑어서 정독한 매뉴얼북의 앞부분에도 이 내용이 나와 있었다.
‘지금까지는 내가 양육자 설명 부분만 확인해서 발견을 못 한 거였어. 흑, 하지만 이미 달달 외울 정도인 앞부분을 44회차씩이나 돼서 다시 자세히 살펴볼 플레이어가 어디 있겠냐고.’
아무튼 내가 밤 동안 파악한 이번 회차의 세계관은 이랬다.
현재까지 발견된 세계는 총 44개.
각각의 세계가 ‘문’이란 것으로 연결되어 일정 조건만 충족하면 다른 세계를 자유롭게 오가는 것도 가능하다고 했다.
하여 이 레드포드 저택이 있는 곳이 바로 제18세계이고, 라파엘이 온 곳이 제44세계였다. 이번 회차에서 나 역시 44세계 출신인 것으로 설정되어 있었고 말이다.
아침에 밖에 나가 보았듯이, 18세계는 이 레드포드 저택이 서 있는 부지가 전부라 담벼락 너머는 모조리 텅 빈 공간이었다. 시험 삼아 담장 밖으로 돌멩이를 던져 봤는데 꼭 안개 속에 빨려들기라도 한 것처럼 한참이 지나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더라. 그러니 아마 그 밑으로 떨어지면 뼈도 추리지 못할 듯했다.
보통 이 정도 스케일이면 우주 대전쟁이라도 발발했을 것 같지만, 이곳 사람들은 각자의 세계를 넘보지 않고 평화롭게 균형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었다.
다만 문제가 생긴 것은 개미 한 마리 살지 않는 텅 빈 세계, 즉 사람들이 ‘공허’라 이름 붙인 곳으로 통하는 문이 생겨나면서부터였다.
아무것도 없는 빈 세계이니만큼 처음에는 아무도 이곳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 공허한 세계는 이상하게도 점점 커져서 다른 세계까지 침범하게 되었다.
게다가 거기에 휩쓸려 공허 안에 들어간 사람들은 누구도 다시 돌아오지 못한 채 그대로 실종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람의 형상을 한 괴물이 갑자기 여러 세계에서 속출하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모로스.’
더 놀랍게도 생물의 영혼에 대한 연구가 유달리 발전한 세계에서 실험한 결과, 이 괴물의 영혼이 문 너머로 사라진 사람들의 영혼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공허는 점점 넓어졌고, 심지어 새로운 공허로 통하는 문의 숫자도 그사이 몇 개가 더 늘어났다.
당연히 거기에 휩쓸려 그 안에 빨려 들어가는 사람의 숫자도 증가하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인류가 멸망할 위기였다.
존속의 위협을 느낀 전 세계의 사람들이 또 수많은 연구를 거듭한 끝에, 드디어 그들은 공허의 문을 닫을 방법을 찾아냈다.
빈 세계가 아주 드물게 출입을 허락하는 사람이 안에 들어가 자신의 의지로 문을 닫으면 된다.
극소수이긴 하나, 긴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공허에 들어가도 죽지 않는 특수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하여 사람들은 이를 ‘섭정’이라 부르며 왕으로 추대해 빈 세계에 보내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섭정을 키우는 곳이 바로 이 레드포드 저택이란 설정이었다.
나는 방금 빠져나온 저택을 뒤돌아보았다.
흐린 하늘 아래에 산맥처럼 높게 선 웅장한 레드포드 저택은 오늘도 음산한 기운을 사방으로 흘리고 있었다.
“섭정. 말은 좋지.”
지금까지 지겹도록 보아 온 그 풍경을 시야에 담은 채 작게 중얼거렸다.
매뉴얼북에는 빈 세계로 간 아이가 어떻게 되는지는 나와 있지 않았다.
꼭 ‘두근두근, 새로운 세계의 왕이 되신 것을 축하합니다!’ 같은 내용인 양 다들 떠들었지만, 애초에 그 공허인지 뭔지 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인간은 극소수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럼 그 텅텅 빈 곳에서 섭정이 된 애 혼자 살라는 거야?’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스텔라가 관제탑으로 진행 중이라는 그 판도라 프로젝트인지 뭔지도 분명 이걸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아침에 본 레드포드 저택 밖의 삭막한 풍경을 떠올렸다.
갑자기 기분이 저조해지면서 내 귀여운 아기 고양이의 해맑은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우리 사랑스러운 뽀시래기가, 그 개복치인 몸으로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노력할 거라고 작은 주먹을 불끈 쥔 채 오늘 아침 식사 자리에서 다짐했던 모습을 떠올렸다.
매일 그런 생각을 하며 이 저택에서 다이안 혼자 외로운 시간을 보냈을 걸 생각하니 눈물이 망가진 수도꼭지처럼 콸콸 쏟아질 것 같았다.
갑자기 이번 회차의 게임 플레이 방식에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다이안을 저택의 목적에 걸맞게 키워서 그 공허한 세계의 섭정으로 만들어 버리는 게 정말 옳은 건가?
그럼 우리 애기는, 그 후에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저는 이 세계의 모든 속박과 굴레를 던져 버리고 다른 세계로 떠납니다! 뿅!’ 하고 영원히 제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는 건가요?
‘안 돼…!’
내가 그동안 다이안의 엔딩을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지겹도록 염불을 외웠지만 이런 탈세계 엔딩을 보고 싶었던 건 아니라구요?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란 말은 그 희생 당한 사람이 우리 애가 아닐 때나 통하는 거지!
‘그런데 1호실의 마리엔도 루스카를 그렇게 위하면서 이런 시스템에 동의했단 말이야?’
나는 어제 어두운 복도에서 보았던 마리엔의 얼굴을 떠올렸다.
일단 나는 매뉴얼북에 적힌 것만 봤을 뿐이고…. 혹시 내가 모르는 뭔가가 더 있을지도 모르니까 우선 할 수 있는 만큼 정보를 좀 더 알아봐야 할 듯했다.
“아하하하!”
그때, 내 솜털을 곤두서게 만드는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분홍 머리 소년이 해맑게 웃으면서 공을 들고 어디론가 뛰어가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앗, 저 녀석!’
예전에는 마냥 귀엽다고 생각했던 아이였으나, 얼마 전의 일이 있은 후에는 나도 모르게 그를 볼 때마다 눈을 뾰족하게 뜨게 됐다.
나는 분홍 머리 소년이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인물 정보를 확인했다.
<비비(12)>
- 레드포드 저택 3호실 소속
- 성격: 겁이 많음, 내향적, 소심함, 자존감 낮음
- 현재 상태: 두려움
- 속성: 악
- 호감도: ?/?(비활성화)(시스템 로딩 70% 이상부터 열람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