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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36)화 (36/300)

“오랜만에 보는 얼굴인데 반가워해 주지도 않네요.”

두 눈을 부릅뜬 라파엘을 보고 남자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가 한 손에 든 우산도 같이 옆으로 기울어졌다.

“서운한데.”

라파엘의 심장은 그 가파른 곡선을 타고 굴러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미친 듯이 요동치며 뛰었다. 정체를 알고 나자, 저 어울리지 않는 말투조차도 섬뜩했다.

지금 스텔라의 다른 사람들은 라파엘을 두고 악마라 부르지만, 라파엘은 자신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이 악마 같은 사람이 먼저 스텔라에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분명….

“그보다 라파엘. 예전에 내가 한 말 기억할지 모르겠네.”

자신의 손에 죽었을 텐데.

“다시 만나면 그 눈을 파 주겠다고 했었지, 아마?”

빗방울이 깨진 진주알처럼 달빛에 희게 빛나며 눈앞에 흩어졌다.

악마가 입꼬리를 길게 늘이며 웃었다. 보기만 해도 베일 듯이 싸늘하고 날카로운 미소였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할 뿐이었는데도, 거대한 검은 짐승이 머리 위를 온통 뒤덮은 것처럼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라파엘의 가이드가 머릿속에서 시끄러운 경고음을 냈다.

그는 2단 심문관으로 특진한 이래로 처음 맞는 위기감에 서둘러 사제복 안에 숨겨 두었던 총을 꺼냈다.

탕…!

우르릉, 쾅…!

곧 총의 발포음이 거대한 천둥소리에 먹혀 사라졌다.

***

“확실히 시간이 오래 지나긴 했나 봐.”

쏟아지는 폭우는 시끄러운 소음을 감쪽같이 삼켰다. 뿐만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장막을 친 것처럼 시야에서 가려 주었다.

“생각보다는 꽤 버텼지만 못 본 새 안 좋은 습관이 들었어, 라파엘. 가이드에 의존하니까 그렇게 무시하던 하급 세계의 벌레만큼이나 움직임이 굼뜨지.”

체스휘는 유감스럽다는 듯이 말하며 바닥에 덩그러니 떨어져 있는 총을 발로 툭 차서 밀었다.

그것은 질척한 바닥을 미끄러져, 옆에 널브러진 남자의 몸에 부딪힌 뒤에야 멈췄다.

결벽증이라도 있는 것처럼 유난스럽게 희고 깨끗하던 사제복이 흙탕물에 젖어 지금은 얼룩덜룩하게 더러워져 있었다. 이름만큼이나 천사처럼 수려한 얼굴과 찬란한 빛을 머금고 있던 긴 금발 위로 날카로운 빗줄기가 떨어졌다.

거세게 쏟아지는 빗속에서 체스휘는 여전히 아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혼자 우산을 쓴 채 서 있었다.

그의 신발과 바짓단에는 바닥에서 튄 빗물이 묻었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비 한 방울 맞지 않은 것처럼 말끔한 모습이었다.

곧 체스휘의 몸이 바닥에 누운 남자의 위로 굽어졌다. 잠시 후 다시 허리를 세운 그의 손에는 엄지손톱만 한 타원형의 보석 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라파엘의 어깨 뒤쪽에 박혀 있던 가이드였다. 체스휘는 그것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나저나 린이 진짜 스텔라였다니, 의외네…. 그런 냄새가 하나도 안 났는데.’

그러다 그의 입가에 의뭉스러운 느낌을 풍기는 가느다란 미소가 피어났다.

‘혹시 감이 죽은 건 나였나?’

하지만 예측이 빗나간 것치고 그 미소에 불쾌감은 없었다.

체스휘는 뒤처리를 위해 발밑에 있는 남자에게 다시 손을 뻗었다.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처럼 가열 차게 쏟아지던 비가 잦아들기 시작한 것은 하얀 새벽빛이 레드포드 저택의 높은 담장 너머로 번져 온 뒤였다.

06. 위험한 술래잡기

나는 동이 틀 때까지 매뉴얼북을 읽고 또 읽었다.

이전에는 해독이 불가능한 단어가 많아 도중에 엎어야 했던 매뉴얼북을 드디어 걸리는 부분 없이 완독할 수 있었다. 이제는 시스템 기능이 일부나마 돌아온 덕분이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생각보다 굉장히 심오해서 여러 번 의미를 곱씹으며 읽어 봐야 했다.

그러다 문득 창밖에서 새벽빛이 번져 드는 게 느껴졌다.

다 읽은 매뉴얼북에서 시선을 떼고 그것을 보다가 충동적으로 방을 나섰다.

“엇, 안녕하십니까, 양육자님. 오늘은 일찍 일어나셨네요.”

일찌감치 일어나 일하고 있던 고용인들이 나를 보고 인사했다. 그들을 지나쳐 내가 멈춰 선 곳은 저택을 둘러싼 채 높게 솟아난 담벼락 앞이었다.

“네, 좋은 아침이네요.”

방금 먼저 내게 인사를 건넨 정원사가 의문 어린 눈으로 나를 힐끔거렸다.

나는 그를 뒤로한 채 눈앞에 있는 담벼락을 보며 그 높이와 내 능력치를 잠깐 가늠했다.

이 정도면 다른 도움 없이도 간당간당하게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뒤로 물러났다가 최대 속도로 달렸다. 그러다 이내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라 손을 뻗었다. 담벼락에 대롱대롱 매달린 나를 보고 뒤에서 헉,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야, 양육자님! 위험합니다! 빨리 내려오십시오!”

하지만 나는 아래로 떨어지는 일 없이 가뿐히 위로 올라가 선 채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하.”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나도 모르게 야트막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공허한 바람이 불어와 내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휘감아 날렸다.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은 없던 고소공포증과 공황 장애까지 생길 듯한 광경이었다.

‘이건 또 뭐야.’

아무리 주위를 훑어봐도 다른 건물의 지붕 하나, 풀 한 포기, 사람 한 명 눈에 띄지 않았다.

텅 빈 허공에는 오직 회색 구름 같은 안개만이 가득했다.

이것이 바로 라파엘이 말하던 제18세계의 풍경이었다.

끝이 어딘지 알 수조차 없는 아득한 빈 허공에 덩그러니 존재하는 저택 하나.

이 레드포드 저택만이 바로 이 좁은 세계에 존재하는 유일한 성채였다.

***

라파엘은 진짜 해가 완전히 뜨기도 전에 저택에서 사라졌다.

“그래요? 방에 없어요?”

나는 사라로사에게 소식을 듣고 살짝 황당해졌다.

“네, 손님방을 맡은 메이드한테 들었어요. 정말 해가 뜨자마자 떠나셨나 봐요. 존 아저씨한테 물어보니, 정말 새벽 일찍 사제님을 모시고 저택 밖에 나갔다 오셨다더라고요.”

명색이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선후배인데, 이렇게 말 한마디도 없이 가 버리다니 이게 도대체 어느 나라 매너람?

‘어젯밤에 방에 찾아갔을 때도 안 보였는데.’

사실은 식당에 들어가기 직전에 저택 밖을 서성이던 라파엘을 언뜻 본 게 기억나기도 했고, 또 그에게 묻고 싶은 게 생겨서 어젯밤 손님용 객실에 방문했었다. 하지만 라파엘은 그때도 자리에 없었다.

‘하급 세계의 공기조차 마시기 싫다는 양 말하더니, 진짜 1분이라도 더 오래 여기에 붙어 있고 싶지 않았나 보네.’

“그런데 린 님도 피곤해 보이세요.”

“아, 밤새 책을 좀 봤더니.”

“네? 그럼 한숨도 안 주무신 거예요?”

사라로사가 내게 수건을 건네주며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하지만 사라로사가 나였어도 잠을 잘 수 없었을 것이다.

“다이안은 왜 이 저택에 들어왔어요?”

잠시 후 또다시 돌아온 아침 식사 시간에, 나는 입 안 가득 오믈렛을 밀어 넣고 귀엽게 양 뺨을 움직이는 다이안을 보다가 물었다.

나한테 들을 줄 몰랐던 질문인지, 다이안이 멈칫했다.

“그야 당연히 사람들을 돕고 싶어서지.”

몹시도 이타적인 그 말에 나는 또 가슴이 짠해졌다.

“훌륭한 어른이 되어서 꼭 시험을 통과할 거야. 그럼 재해도 일어나지 않고, 사람들이 사는 땅도 넓어지고, 또 모로스의 숫자도 줄고….”

다이안은 그가 최종 시험에 통과해 레드포드 저택의 목적에 걸맞은 어른이 되었을 때 일어날 장점들을 줄줄이 열거했다.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뺨에는 생기 있는 홍조가 감도는 것을 보니, 다이안이 선택받은 소년이 되는 것을 얼마나 진심으로 간절하게 꿈꾸고 있는지 알 수 있을 듯했다.

나는 그런 다이안을 보다가 입매를 당겨 웃었다.

“그래요. 좋은 목표네요. 꼭 원하는 대로 될 수 있을 거예요.”

내 말을 듣고 다이안이 방긋 웃었다. 아침 햇살처럼 티 없이 맑고 환한 미소였지만 그걸 보는 내 마음에는 먹구름이 낀 듯했다.

***

<매뉴얼북 용어 설명>

※대표 용어는 중앙 세계에서 통용되는 단어를 기준으로 하여 채택한다.

※예외: 레드포드 저택에서 양육되는 아이들의 명칭은 구원자, 문지기, 성자, 성인, 파수꾼, 제물, 섭정 등 각 세계마다 판이하게 달라 중앙 세계의 언어가 대표성을 띠기 어렵다. 하여 본 매뉴얼북에서는 가장 최근에 전 세계 인권 위원회로부터 권고받아 상위 세계에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섭정’이란 단어를 대표어로 채택한다.

문: 현재까지 발견된 44개의 세계를 연결시키는 각각의 통로.

공허: 중앙 세계 기준 2543년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주인 없는 빈 세계.

양육자: 공허의 주인이 될 섭정 후보들을 육성하기 위해 선출된 인재.

섭정: 공허의 주인이 되어 빈 세계의 문을 닫기 위해 선출된 인재.

모로스: 공허에 빨려 들어가 안식에 들지 못한 영혼이 되돌아와 탄생한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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