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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29)화 (29/300)

내 예상대로 다이안의 열은 이틀이 지나서야 슬슬 떨어질 낌새를 보이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그동안 다이안의 모든 스케줄은 취소되었다. 일단은 몸을 정양하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듣자 하니 7호실 아이는 또 아프다던데요.”

가뜩이나 마음이 심란한데, 복도에서 마주친 5호실 양육자 올리비아가 내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했다.

“정말, 약해도 그렇게 약할 수가 없어. 전부터 한 달에 몇 번이나 이런 식으로 병이 나고 다치는지 몰라. 게다가 눈물은 또 얼마나 많은지, 그때마다 볼썽사납게 훌쩍훌쩍. 지금은 양육자 앞이라고 그나마 노력하는 듯한데, 예전에는 정말 못 봐 줄 정도였다니까. 그러니까 선뜻 양육자가 되려는 사람이 없었지.”

그녀는 오늘도 한 손에 세르쥬의 손을 잡고 지팡이 대신 들고 있던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코웃음을 쳤다.

“뭐, 그쪽도 안됐긴 해. 시험을 다 통과해서 양육자로 선출되었을 때 저택에 남은 게 7호실밖에 없어서 솔직히 실망하지 않았어요? 더군다나 그쪽이 진짜 엘리트 출신이면 기대치도 더 높았을 텐데. 뭐, 어차피 저택에 있는 모든 아이가 ■■■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우리 세르쥬처럼 뛰어난 아이와 페어가 되지 못했다고 너무 한탄하진 마요.”

처음에는 올리비아를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려 하다가 결국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니, 이 여자가 보자 보자 하니까?

“그런 말은 좀 웃긴데요. 그쪽이 자신 없는 걸 왜 애 탓으로 돌려요?”

“뭐라고요? 그게 무슨 소리야?”

“그동안 다이안에게 양육자가 생기지 않았던 이유는 우리 애가 부족해서가 아니거든요.”

나는 울컥한 기분을 숨기지 않고 올리비아를 향해 쏘아붙였다.

“용기도 없고 자신감도 없어서, 당신이 해 보지도 않고 포기한 걸 우리 애 탓으로 돌리지 말라고.”

“뭐, 뭐라고?”

“당신도 양육자면 괜히 어른들 사정에 맞춰서 애들 줄 세우기 시키지 마요. 다들 좋은 애들이고, 충분히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아이들이니까.”

당황하는 올리비아를 둔 채 몸을 돌렸다. 왠지 올리비아의 옆에 서 있던 세르쥬가 에휴, 하고 한숨을 내뱉은 것 같았다.

나는 얼굴을 왕창 구긴 채 계단을 내려갔다.

완전 소중한 우리 고양이한테 저딴 막말을 하다니, 나쁜 사람이잖아?

그나마 다이안이 옆에 없을 때라 다행인가? 만약 우리 개복치 고양이가 저런 말을 들었으면 얼마나 마음의 상처를 크게 받았을까? 어휴, 내 마음도 막 같이 찢어지는 것 같네.

촤악!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막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갑자기 머리 위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대뜸 물벼락이 떨어졌다.

“하 씨, 이건 또 뭔….”

짜증스럽게 고개를 들자 창가에 나와 있는 메이드와 눈이 마주쳤다.

“어, 어머! 하필 지금 이 밑을 지나가실 줄 몰랐네요! 청소하다가 실수했어요!”

떨리는 목소리로 변명하는 메이드의 얼굴에는 긴장감과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도망치듯이 후다닥 창문 안으로 사라졌다. 그 뒤로 가느다란 빨란 리본이 잔상처럼 남았다.

나는 헛웃음을 내뱉으며 손을 들어 턱으로 흘러내린 물을 훑었다.

그래도 걸레 빤 물은 아닌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나?

내 느낌상, 방금 저 메이드가 나한테 물을 쏟은 건 실수가 아니라 고의인 것 같았다.

그나마 최소한의 양심으로 더러운 오물이 들지 않은 맹물을 사용한 것 같긴 한데…. 물론 양심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무서워서 조금이나마 눈치를 보았을 확률이 큰 것 같긴 했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덕분에 뜨겁게 달아올라 있던 머리가 한풀 식은 것 같았다.

“아아니, 방금 그 메이드 도대체 뭐야?”

그때 황당함을 담은 앳된 미성이 옆쪽에서 들려왔다.

이번에 시야에 들어온 건 체스휘와 미뉴엘이었다.

미뉴엘은 기가 막히다는 듯한 얼굴을 한 채로 내 몰골을 구경하듯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 옆에 있던 체스휘도 살짝 찌푸린 얼굴이었다.

“린 씨, 괜찮아요?”

이어서 그가 걱정스러운 듯이 내게 묻기에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메이드가 유리창 청소를 하다가 실수로 물을 쏟았대요.”

“바보야? 그걸 믿어?”

미뉴엘이 나를 비웃었다.

나는 별말 없이 그냥 웃었다. 미뉴엘과 체스휘도 방금 창가에 나타났던 메이드가 고의로 물을 뿌린 건 눈치챈 모양이다.

빨간 리본을 손목에 묶고 있던 방금 그 메이드는 분명 1호실 마리엔의 뒤에 서 있던 사람이었다.

나는 혹시 지난번의 일 때문인가 싶었다.

1호실의 메이드들은 마리엔에게 유독 충성스럽다고 했다. 그러니 마리엔 앞에서 입을 함부로 놀려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한 내가 못마땅했던 걸 수도 있었다.

“고의든 실수든, 사과도 제대로 하지 않고 이렇게 먼저 자리를 뜨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 저도 얼굴을 아는 메이드인데, 지금 올라가서 찾아올까요?”

체스휘는 한번 작게 혀를 찬 뒤 의외로 단호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래, 메이드가 건방지게! 저런 건 초장부터 싹을 뽑아야 돼. 내가 신참 씨가 좋아서 편드는 건 아니지만, 저렇게 고용인이 선을 못 지키고 제멋대로 설치는 건 더 별로야.”

미뉴엘도 거기에 맞장구를 쳤다.

“됐어요. 그냥 물에 좀 젖은 것뿐인데요, 뭐.”

“뭐? 이걸 그냥 넘어가겠다고? 무슨 답답한 소리야?”

미뉴엘은 고구마 알레르기가 있는 것처럼 내 말에 우거지상을 쓰며 몸서리를 쳤다.

하지만 일을 저질러 놓고 벌벌 떨면서 도망치던 메이드의 모습을 떠올리니 화도 나지 않았다.

“린 씨는 마음씨가 넓네요. 다른 양육자들 같으면 벌써 소란을 피우고도 남았을 텐데.”

체스휘가 비스듬히 기울인 얼굴로 나를 보다가, 옆에 있던 미뉴엘에게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뭔가 했더니, 섬세한 꽃무늬 자수가 돋보이는 손수건이었다.

체스휘는 내게 다가와 미뉴엘의 손수건으로 직접 내 얼굴의 물기를 가볍게 문질러 닦아주었다. 그 모습이 또 어찌나 천연덕스럽고 자연스럽던지, 누가 보면 이 손수건이 미뉴엘이 아니라 체스휘의 것인 줄 알 듯했다.

미뉴엘은 여전히 나보다 더 흥분해서 체스휘가 자신의 손수건을 빼내 간 걸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저기, 제가 할게요.”

“잠깐만 가만히 있어요.”

누가 이런 식으로 내 얼굴을 닦아 주는 게 영 어색해서 체스휘의 손길을 슬쩍 피했으나, 체스휘는 오히려 한 발짝 더 다가와 계속 손을 움직였다.

햇볕이 체스휘의 머리 위로 떨어져 반짝이는 빛무리를 만들었다. 바람이 불어와서 눈가를 가리고 있던 그의 금갈색 머리칼이 옆으로 살짝 걷혔다.

나도 모르게 마주한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중에, 갑자기 체스휘가 시선을 느낀 듯이 눈길을 돌렸다.

가까이에서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꼭 비밀스러운 일을 하다가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괜히 흠칫해서 먼저 시선을 피했다.

“크흠! 아, 덥다. 오늘따라 햇빛이 강하네요. 물기도 금방 마르겠어요.”

체스휘가 입술에 비스듬한 호선을 그리며 손을 내렸다.

“린 씨, 그러고 보니 오늘 손님이 온다고 했죠? 혹시 지금 마중하러 나가던 길이에요? 옷 갈아입을 시간도 없을 텐데… 제 옷이라도 벗어 줄 테니까 위에 걸칠래요?”

“비치는 옷도 아닌데 괜찮아요. 그리고 저한테 벗어 주면 체스휘 씨는 어쩌려고요?”

“저야 바로 방으로 가면 되는데요, 뭐.”

그런데 기분 탓인지, 주변의 공기가 어째 조금 전보다 살짝 보송보송 말랑말랑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와 체스휘의 대화를 듣던 미뉴엘이 갑자기 뭐가 거슬렸는지, 옆에서 버럭 소리 질렀다.

“지금 내 앞에서 둘이 뭐 하는 거야? 노닥거리는 거 당장 그만두지 못해?!”

아이구, 노란 고양이가 또 하악질하네.

“미뉴엘. 발등에 거미가 앉았어요.”

“우와아악! 아악! 어디, 어디!”

그때 지나가듯이 던져진 체스휘의 말에 미뉴엘이 거의 발광하면서 펄쩍 뛰었다.

때맞춰 위에서 화분이 퍽! 소리를 내며 떨어져 부서졌다. 공교롭게도 원래 미뉴엘이 서 있던 위치였다.

아마 그가 1초만 더 늦게 움직였어도 화분에 정통으로 머리를 맞았을 게 분명했다. 나도 깜짝 놀랐고, 미뉴엘도 깨진 화분을 보고 기겁했다.

“뭐야! 갑자기 왜 이딴 게 위에서 떨어져!”

바로 화분이 떨어진 곳을 올려다보았지만,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바람이 불어서 떨어진 건가? 그런 것치고는 위치가 공교로웠는데.

나는 반사적으로 체스휘를 쳐다보았다. 그는 미뉴엘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어진 체스휘의 목소리는 방금의 상황에 진심으로 놀란 듯했다.

“큰일 날 뻔했네요, 미뉴엘. 마침 미뉴엘이 자리를 옮겼을 때 떨어져서 운이 좋았어요.”

“운이 좋긴 뭐가 좋아…! 체스휘, 뭐 해! 당장 쫓아 올라가! 만약 사람이 한 짓이면 실수건 뭐건 가만 안 두겠어!”

“알겠어요. 그럼 린, 저희는 먼저 갈게요.”

체스휘가 씩씩거리는 미뉴엘을 달랑 들어 옆구리에 끼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런 두 사람의 뒷모습을 조금 얼떨떨하게 바라보았다. 방금 전의 광경을 떠올리자 왠지 좀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지난번에도 분명 이런 식으로 체스휘 덕분에 우연히 위험한 사고에서 벗어나지 않았던가?

댕. 댕.

하지만 마침 원래 정해진 약속 시간보다 1시간이나 늦은 17시를 가리키는 종소리가 울려서 생각하던 것을 멈추고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

“저 마차인 거죠?”

“예, 양육자님이 마중을 나오실 때까지 절대 밖으로 나오지 않으신다고 해서….”

레드포드의 고용인들이 마차 앞에서 난처한 듯이 서 있다가 나를 보고 반색했다.

나는 공터에 떡하니 서 있는 마차를 보고 고개를 삐뚜름하게 기울였다.

지금 저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은 나를 만나러 온 손님이었다.

오늘이 15일. 스텔라에서 온 편지에 적혀 있던 파견인이 나를 찾아오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1시간 전, 1분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시간을 맞춰 레드포드 저택에 도착한 손님은 좀처럼 마차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후 고용인이 와서 내게 전달한 말을 듣고 기가 막혔다.

나더러 직접 인사를 하러 나오라니? 자기가 내 상사야, 뭐야?

‘아…, 혹시 상사 맞나?’

스텔라에서 보낸 내용에는 그냥 방문자의 이름만 적혀 있었을 뿐이지만, 저런 태도인 걸 보면 기관에서 나보다 더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나, 하지만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내가 게임에서도 상사 등쌀에 시달리며 살아야겠어?

그래서 그냥 무시했다.

그렇게 3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마차에 탄 손님은 정말 꼼짝도 안 하고 내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마차에서 내가 오기 전까지 정말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그쯤 되자 나도 슬슬 궁금해졌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게 비싸게 구는 거람? 혹시 스텔라의 회장님쯤 되시나요?

“똑똑똑. 안녕하세요. 그렇게 오매불망 기다리고 또 기다리시던 린 도체스터가 마중을 나왔습니다.”

하여 나는 마차 앞에 서서 치맛자락을 잡고 연극을 하듯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을 향해 과장되게 인사했다. 그러고 나서 내가 풋맨이라도 되는 것처럼 일부러 보란 듯이 공손한 자세를 취하며 덧붙였다.

“아, 혹시 문도 제가 열어 드리고, 제가 직접 손을 잡고 에스코트도 해 드릴까요? 원하시면 말씀만 하십시오, 회장님.”

벌컥!

그리고 마침내 마차의 문이 열렸다.

“린 도체스터. 본 기관을 떠난 지 열흘 만에 위계질서까지 잊은 건가? 회장님이라니, 그 괴상한 호칭은 도대체 뭐지?”

어머나? 그런데 웬걸. 꼰대 같은 사람이 안에 타고 있을 줄 알았는데 제법 내 취향인 게 튀어나왔다.

마차에서 내린 건 허리까지 찰랑이는 긴 금발과 푸른 눈을 가진 미남이었다. 성직자 같은 옷을 입어서 금욕적인 느낌마저 물씬 풍기는 청초한 외모의 남자를 보자 살짝 배배 꼬여 있던 마음이 스르륵 풀리는 것 같았다.

“게다가 분명 내가 방문하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 왜 인사를 하러 나와 있지 않았던 거냐? 게다가 무려 한 시간 2분 48초나 날 기다리게 하다니….”

아아, 그런데 생긴 것과 달리 성격은 좀 좀팽이 같기도 하고…. 무슨 속 좁아 보이게 기다린 시간을 초 단위로 세고 있나요?

“라파엘 카드리고?”

“…린 도체스터. 네가 지금 내 이름을 그 입으로 부른 건가?”

남자의 목소리는 의외로 미성이었다. 이름처럼 대천사장 같은 외모를 가진 남자에게 꽤 잘 어울리는 고요하고 평온한 울림을 가진 성스러운 느낌의 목소리였다.

“하, 됐다. 일단은 사람이 없는 곳으로 안내해라.”

라파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는 다른 사람에게 지시를 내리는 데 익숙한 듯했다. 눈썹 한 올에서도 귀티가 나는 걸 보니 태생적인 금수저인가 싶기도 하고.

“네넵. 응접실로 가시지요.”

“응접실이라니, 지금 나더러 저런 곳에 들어가라고?”

그런데 또 뭐가 문제인지, 라파엘이 눈앞에 있는 저택을 찌푸린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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