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화원 깊은 곳에만 드물게 자라는 꽃의 씨앗인데, 여기서 엄청나게 예쁜 꽃이 피어난대. 그래서… 린한테 환영 선물로 주고 싶었어. 내 양육자가 되어 줘서… 고맙다고.”
다이안이 자신감 없이 눈을 내리깔고 발끝을 바닥에 비비면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나는 예상치 못한 말에 다이안을 꾸중하려던 것도 잊고 당황했다.
뭐? 나 때문에 화원에 들어간 거였다고?
그러다 뒤늦은 깨달음에 화들짝 놀라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세, 세상에, 우리 귀염둥이가 나한테 선물을…?!
다이안 덕질 인생에 지금까지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철없이 심장이 벌렁벌렁 두근두근 온갖 난동을 다 부려 댔다.
서, 설마 이게 바로 소문으로만 듣던 역조공인가요? 전 이제 성덕이 되는 건가요…!
“뭐라도 꼭 선물하고 싶은데 내가 가지고 있는 게 없어서, 린한테 줄 수 있는 것도 없었어…. 그래서 이거라도 받아 줄 거야?”
조금 전에 내가 처음으로 정색하고 살짝 그를 혼내려는 낌새를 보여서 그런지, 다이안은 굉장히 주눅이 든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바들거리는 손을 내민 채 내 눈치를 보는 아이를 어떻게 무섭게 혼낼 수 있을까?
“정말 고마워요, 다이안 도련님. 저를 위해서 이런 선물을 주시다니 너무 기뻐요.”
나는 다이안이 내민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그의 앞에 몸을 낮춰 시선을 맞댔다. 하지만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만약 이것 때문에 오늘 도련님이 잘못되었다면, 전 너무너무 슬펐을 거예요. 저한테 제일 중요한 건 다이안 도련님이 늘 건강하고 행복한 거거든요.”
그래서 다이안에게 진지하게 당부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절대 이런 위험한 일 하시면 안 돼요. 저한테는 다이안 도련님의 양육자가 된 게 가장 큰 선물이고 행복이니까요. 아시겠어요?”
다이안은 잠깐 아무 말도 없이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그러다 이내, 그가 고개를 숙인 채 또 작게 속삭였다.
“응…. 나도 린이 내 양육자가 되어 준 게 세상에서 제일 큰 행운이라고 생각해.”
다이안과 나 사이에 몽글몽글하고 말랑말랑한 공기가 부드럽게 감돌았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속으로 온갖 난리블루스를 다 추고 있었다.
‘으아아아, 귀여워! 우리 애가 너무 귀여워어…! 세상 사람들, 이것 좀 보세요! 제 최애가 저한테 역조공을 해 줬답니다아아아! 더군다나 제 존재가 세상에서 가장 큰 행운이래요!’
조금만 방심하면 눈물이 콸콸 흘러나올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흡 하고 눈에 힘을 주게 되었다.
“와아…. 정말 감동적인 장면이네요.”
짝짝짝!
그때까지도 옆에 서 있던 체스휘가 우리를 보고 영혼 없는 목소리로 읊조리며 박수를 쳐서 산통을 깼다. 물론 그런 그의 반응이 내 즐거운 기분까지 깨트리지는 못했다.
“그럼 이건 화분에 심어서 같이 키울까요? 얼마나 예쁜 꽃이 필지 궁금하네요.”
나는 활짝 웃으면서 다이안의 손에 들린 씨앗을 옮겨 받았다.
“아, 잠깐만요, 린 씨. 지금 엄청 큰 벌레가 그쪽으로 날아갔어요.”
“네? 어디요?”
“제가 쫓아낼게요.”
바로 그때, 체스휘가 마치 우연인 듯이 내 손을 후려쳤다. 평소의 여유롭던 몸짓이나 느릿한 말투가 연상되지 않을 정도로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그래서 미처 방비하지 못한 사이, 막 손에 쥐었던 다이안의 선물을 놓치고 말았다.
“앗!”
다이안이 내 손에서 날아가는 씨앗을 잡으려 했다. 내가 이상한 느낌을 받은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나는 당장 다이안을 끌어안고 최대한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
촤르륵! 파밧…!
거의 동시에, 황금색 껍질을 뚫고 나온 뾰족한 줄기들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바늘처럼 날카롭고 긴 가시들이 우리가 있던 곳으로 사정없이 내리꽂혔다. 식물이 증식한 속도도 굉장히 빠르고, 그것이 퍼진 반경도 넓었다.
다이안이 놀라서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이, 이게 어떻게 된….”
다이안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충격을 받은 듯이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체스휘 씨! 괜찮아요?”
나도 놀라서, 조금 전 미처 함께 피신하지 못한 체스휘의 안부를 확인했다.
다행히 뽀얀 흙먼지 속에서 작은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와, 깜짝이야….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요.”
체스휘도 늦지 않게 저 수상쩍은 식물의 공격을 피하는 데 성공했는지,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은 멀쩡한 모습으로 흙먼지 속에서 나타났다.
“방금 뭐였죠? 린 씨가 가지고 있던 씨앗이 폭발한 건가요?”
“폭발한 건 아니고… 갑자기 뿌리가 자란 것 같아요.”
“이렇게 갑자기요?”
체스휘는 아직도 잔기침을 하면서 정말 놀란 듯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모습이 퍽 자연스러웠지만… 나는 체스휘의 반응을 보고 미심쩍은 기분이 들어 그를 묘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방금 굉장히 공교로운 타이밍에 내 손을 쳐낸 것 같지 않았어?’
만약 체스휘가 시기적절하게 씨앗을 멀리 날려 보내지 않았다면 다이안과 나, 둘 다 위험했을 수도 있었다.
“다이안하고 린 씨는 괜찮아요?”
“저희도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아요.”
“다행이네요.”
하지만 안심한 듯이 가슴을 쓸어내리는 체스휘의 모습에서 다른 수상한 점은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그의 시선을 따라 바닥으로 눈길을 옮겼다.
다이안이 악마의 화원에서 가져온 씨앗에서 갑자기 자라난 식물은 빈말로도 예쁘다고 할 수 없었다. 검고 붉은, 뾰족한 가시들이 들쑥날쑥 자라나 반경 3m를 넘는 곳으로까지 야금야금 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줄기가 바닥에 박히며 피어오른 흙먼지가 주변을 뿌옇게 만들었다.
아마 피하는 것이 조금만 늦었다면 분명 저기에 꿰뚫려 다쳤을 것이다.
“그런데 다이안. 방금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듣고 화원에 들어갔다고 했죠?”
체스휘가 먼지바람 속에서 옷을 툭툭 털어 내며 지나가듯이 다이안에게 물었다.
“이런 게 악마의 화원에 있다고 알려 준 사람이 도대체 누구일까요?”
나도 그 말을 듣고 심각한 눈으로 다이안을 쳐다봤다.
“그건….”
다이안은 입만 벙긋거렸을 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아하하하!”
그때, 불현듯 뒤에서 해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무 뒤에서 툭 튀어나온 분홍 머리 소년이 재미있는 것이라도 본 듯이 우리를 보고 웃으면서 건물 쪽으로 뛰어갔다.
“비비?”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을 듣고 다이안이 몸을 움찔 떨었다. 그 순간 느낌이 왔다.
“혹시 비비가 알려 준 거예요?”
나는 믿기 어려운 심정으로 다이안에게 물었다. 다이안도 폭풍이라도 맞은 단풍잎처럼 정처 없이 흔들리는 눈으로 분홍 머리 소년이 사라진 곳과 이상한 가시 식물로 초토화된 흙바닥, 그리고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내 생각이 맞다는 걸 확신했다.
물론 비비가 뭘 모르고 다이안에게 악마의 화원에 있는 꽃에 대해 말해 준 것일 수도 있지만, 지금 웃으면서 우리를 구경하던 모습을 보면 아무래도 고의가 맞는 것 같았다.
곧 내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아니, 이놈의 망할 게임이 지금 아기 토끼 같은 귀여운 소년을 흑화시켜서 소악마로 만들어 버린 거야?
05. 스텔라의 악마 같은 천사
불쌍한 우리 아기 고양이는 큰 충격을 받고 앓아누웠다.
“도련님, 괜찮아요? 제가 빨리 해열제 가지고 올게요.”
“괘, 괜찮아…. 그냥 좀 무리해서 그런가 봐.”
얼마 전의 미뉴엘처럼 침대에 드러누운 다이안이 애써 담담한 척 미소를 지으려 노력하며 내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열 때문인지, 마음의 상처 때문인지 모를 눈물이 그렁그렁했고, 목소리도 가련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아이고, 아이고, 곡소리가 저절로 나오려고 했다.
나는 다이안을 방에 두고 별수 없이 돌팔이 의사를 찾아갔다. 내가 오늘 기껏 마을에서 사 온 약은 외상에 효과가 있는 것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약을 구매할 걸 그랬다고 뒤늦게 후회해 봤자 소용없었다. 아쉬운 대로 돌팔이 의사의 약이라도 받아 오는 수밖에.
나는 거의 날 듯이 뛰어서 레드포드 저택의 의원 내에 있는 콘라드의 연구실에 도착했다.
똑똑!
“콘라드 선생님. 약 받으러 왔는데 잠깐 들어갈게요!”
노크 후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벌컥 열었다.
그동안 내가 이 돌팔이를 지겹도록 상대해 봐서 잘 아는데, 이놈 특기가 바로 방에 있으면서 없는 척하기였다.
“뭡니까? 허락도 안 했는데 왜 마음대로 들어오는 거죠?”
아니나 다를까, 연구실 구석에서 담요를 뒤집어쓴 채 열심히 신문을 들여다보고 있던 갈색 머리 남자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나를 쏘아봤다.
“마음이 급해서 실례했어요. 해열제 좀 받아 가고 싶은데요!”
“하, 도대체가 이 저택 사람들은 하루라도 날 가만히 두는 날이 없다니까. 일자리를 잘못 찾았어….”
콘라드가 구시렁거렸다. 그는 귀찮음이 한가득 묻어나는 동작으로 들고 있던 종이와 펜을 놓고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콘라드가 약을 찾으러 간 동안 나는 책상에 놓인 종이 쪼가리와 신문을 쓱 훑어봤다.
아니나 다를까, 콘라드가 보고 있던 건 복권이었다. 펜으로 표시해 놓은 걸 보니, 7개의 숫자 중에서 덜렁 1개에만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고, 나머지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것이 메인 연애 공략 대상 캐릭터의 방이라니….’
전에 말했듯이 히든 퀘스트를 깨서 돌팔이 의사를 참된 의사로 갱생시키면 콘라드의 연애 루트가 열렸다. 하지만 너무 대규모 작업이라 번거로워서 콘라드 루트는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도 거의 버리는 패로 여겨지고 있었다.
간혹 특이한 취향을 가진 마니아들은 콘라드 루트의 참된 맛을 중생들이 모른다면서 한탄하긴 했지만, 딱히 그걸 알아볼 의욕은 생기지 않았다.
“여기, 감기약입니다. 나갈 때 문 앞에 있는 팻말 돌려놓고 가세요.”
“이거 말고 노란 거 주세요.”
“그건 다 떨어져서 없어요.”
“그럼 저쪽 선반에 있는 건 뭔데요?”
이놈이, 눈에 다 보이는데 어디서 공갈이야?
내가 눈짓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콘라드가 진짜 너무너무 귀찮아서 돌아 버리겠다는 듯이 우거지상을 썼다.
내가 어떻게 약을 구분하는지 궁금할 만도 한데, 콘라드는 귀차니즘의 대가답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한숨만 푹푹 쉬면서 선반에서 약병을 가져와 나한테 떠넘겼다.
“이제 됐습니까? 볼일 다 봤으면 빨리 나가 주시죠.”
그렇게 닦달하지 않아도 나갈 거네요.
“팻말 꼭 돌려놓고!”
그건 까먹을 예정이고요.
나는 문을 닫고 나와서 또다시 다이안이 있는 방으로 마구 뛰어갔다.
콘라드가 뒤집어 놓으라고 했던 ‘진료 종료’란 말이 적힌 팻말은 ‘진료 가능’ 상태로 그대로 놔두고 왔다.
“도련님! 약 가지고 왔어요!”
나는 다이안에게 급히 생명수나 마찬가지인 해열제를 먹였다.
다이안은 내가 준 약을 먹고 다시 침대에 누워서 골골거렸다.
우리 도련님은 연약하니까 또 며칠은 이렇게 아프겠지. 원래 다이안이 이렇게 아플 때는 그냥 장면을 건너뛰었었는데. 하지만 지금은 스킵 기능이 먹통이라 이 어린애가 며칠 내내 앓는 걸 생으로 지켜봐야 했다.
“린도 열감기 옮으면 안 되니까 방에 가 있어….”
“제가 안 괜찮아요. 그리고 원래 아플 때 혼자 있으면 외롭잖아요.”
“아니야…. 난 원래 늘 혼자였는걸. 그러니까 지금도 혼자 있어도 진짜 괜찮아.”
나는 내 사랑스러운 소년을 내려다보다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요. 정말 씩씩하고 착하네요, 우리 다이안 도련님. 그런데 저는 혼자 있으면 조금 외로워요. 그러니까 오늘은 저를 위해서 같이 있으면 안 될까요?”
착한 다이안은 내 말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는 별을 가득 품은 것 같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다이안이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 주었다.
오늘 하루가 많이 고되고 지쳤었는지, 다이안은 금방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뱉었다.
식은땀이 배어난 이마를 닦아 주며 깊게 잠든 소년의 말간 얼굴을 내려다봤다.
그러다가,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다이안처럼 이전에 이 저택에 살았던 어떤 소년에게 찾아왔다는 비극을 떠올렸다.
아직도 별채를 헤매고 있는 여자 유령과 그녀가 지키지 못한 아이.
그들이 이전 1호실 양육자와 소년이 아닐까 하는 건 단순한 추측일 뿐이었지만, 어쨌든 그 두 사람은 죽었다.
게다가 어쩌면 최소 그들 중 한 명은 살해당했을지도 몰랐다.
그게 만약 사실이라면, 그 범인은 아직도 저택 안에 있을까?
이번에 다이안이 다른 사람 때문에 곤경을 겪은 일 때문인지, 온갖 싱숭생숭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어쨌든, 덕분에 은근히 느슨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나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게임 초반에는 크게 위험한 일이 생기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아니잖아.
이렇게 갑자기 예상치 못한 변수가 튀어나와서 다이안을 위협할 줄이야. 혹시 정말 크게 다치거나 죽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는가.
그동안 다이안의 죽는 모습은 수없이 봐왔지만, 몇 번을 겪어도 거기에는 익숙해지지 않았다.
“다이안. 아프지 말고 건강해야 해요.”
나는 다이안의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속삭였다.
깊이 잠든 다이안은 대답이 없었다. 눈을 감고 새근새근 잠든 소년의 얼굴 위로 기억 속의 희미한 얼굴 하나가 언뜻 덧칠되었다.
그 악마의 화원에서 한동안 잊고 있던 거스러미 같은 기억을 마주했기 때문인가. 다이안에게서 자꾸 다른 누군가가 겹쳐 보였다.
밤은 깊어 갔지만 왠지 그날은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