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뭐야, 린이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저야말로 묻고 싶네요. 도련님, 여긴 도대체 왜 온 거예요?”
이 말썽쟁이 개복치! 겁도 없는 고양이야!
다이안도 이 화원을 둘러싼 무시무시한 소문을 모를 리 없었는데 말이다. 그러나 나는 다이안을 추궁하는 걸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니, 얘기는 일단 여길 나간 뒤에 합시다.”
여긴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다이안을 데리고 신속하게 이곳을 뜰 생각이었다.
“잠시만 실례할게요!”
“으앗!”
일단 급한 대로 다이안을 훌쩍 들어 안았다. 그러고 나서 왔던 길을 되짚어 서둘러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사이에 화원 안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뭐야, 분명 이 방향이 맞았는데 왜 길이 없어? 혹시 이래서 화원 안에 들어왔다가 실종된 사람도 있다는 건가?
바로 그때, 꽃의 이파리 하나가 내 팔에 툭 하고 닿았다.
“왜 너만 살았니?”
어?
갑자기 귀에,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너만 살아 돌아왔어?”
“내 딸이 너 때문에 죽었는데 왜 너만 살았냐고…!”
이번에는 한결 더 또렷한 음성이 고막을 찔렀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굳었다.
“린? 왜 그래?”
다이안이 이상함을 느꼈는지 조용히 물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나는 다이안을 고쳐 안고 다시 꽃들 사이를 걷기 시작했다.
“…여기가 괜히 악마의 화원이라 불리는 건 아닌가 보네요.”
다행히도 다이안은 이상한 환청을 듣지 않은 모양이었다.
서둘러 이곳을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화원 안은 미로 같아서 출입구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러는 동안 잊고 있던 목소리들이 계속 내 귀를 두드렸다.
“알고 보니 첫째가 입양한 딸이었대요.”
“에구머니나, 그럼 진짜 딸이 죽고 입양한 애만 산 거네요?”
“더군다나 그 여자애가 동생을 데리고 몰래 밖에 나갔다가 그런 일이 생긴 거라, 혹시 일부러 그런 게 아니냐는 소리도….”
눈앞이 점점 어두컴컴해졌다. 이름 그대로 심연 속에 갇힌 것처럼 사방이 어두웠다.
“린 씨.”
그때, 어딘가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찬가지로 멀리서 작게 소곤거리는 듯한 음성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귀에서 웅성거리던 소리와 다르게, 거기에서는 나를 향한 일말의 부정적인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다른 시끄러운 소리에 밀려 바로 알아듣지 못했으나, 나지막한 부름이 연거푸 고막을 파고드는 순간 이번에는 다른 소음과 분리된 그 목소리가 확실히 머릿속에 인지되었다.
“이쪽이에요.”
한결 선명해진 목소리가 귀에 울렸다.
이어서 낯선 온기가 피부 위로 번졌다. 누군가의 손이 내 팔을 움켜잡고 어둠 속에서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나는 꼭 한낮에 짧은 꿈이라도 꾸고 깨어난 사람처럼 눈을 깜빡였다.
아까보다 시야가 한결 어두워졌다고 느낀 이유는 누군가가 내 앞에서 짙은 그림자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초점이 돌아온 눈에 나를 가까이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비쳤다.
“체스휘 씨…?”
체스휘는 급하게 뛰어왔는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넘기고 있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다시금 울창한 꽃밭 속이었다.
나는 뜻밖의 인물의 등장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내 품에 안겨 있던 다이안이 옷깃을 잡아당겼다.
“린, 괜찮아? 방금 되게 멍하니 서 있었잖아.”
“제가요?”
다이안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받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방금 이상한 환청 같은 걸 들은 것 같긴 한데….
나는 인상을 쓰고 조금 전의 일을 곱씹다가, 다이안의 얼굴에 서린 불안감을 눈치채고 곧 웃으면서 그를 안심시켜 주었다.
“괜찮아요. 저 멀쩡해요.”
다이안은 내 말을 바로 믿는 것 같았지만, 체스휘는 아니었다. 그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린 씨가 악마의 화원에 들어갔다고 사라로사라는 메이드가 알려 줬어요.”
“그래서 일부러 온 거예요?”
아앗, 이건 좀 감동인데?
“여기 한 번 들어오면 멀쩡히 못 나가는 화원이라고 하던데요?”
안경알 너머로 보이는 체스휘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그걸 알면서 여길 들어왔단 말이죠?”
“저는 당연하죠! 우리 도련님이 여기 있으니까요!”
내 품에 안겨 있던 다이안이 감동한 듯이 촉촉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린…!”
“다이안…!”
해바라기 씨를 받은 햄스터처럼 귀엽긴 했지만, 우리 도련님. 이번에는 혼 좀 나야겠다. 하지만 지금은 때와 장소가 좋지 않으니, 일단 나가서 봅시다.
체스휘는 내 말을 듣고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나를 향한 시선이 사고뭉치를 보는 듯했다.
“이쪽에 문이 있으니 일단 따라오세요.”
그도 아까의 나처럼 먼저 여기부터 나가자고 생각했는지, 긴 말을 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나는 그를 따라가면서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아까보다 꽃이 더 빽빽해진 것 같아요. 그새 식물이 더 자랐나?”
“그게 아니라 꽃이 다가온 거예요.”
아니, 그게 무슨 소름 끼치는 말씀이세요?
내 의구심 어린 말에 무덤덤하게 이어진 체스휘의 대답을 듣고 팔에 닭살이 돋을 뻔했다.
스스스스슷.
그의 말을 듣고 난 후라 그런지, 정말 주변에 있는 꽃들이 슬금슬금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히익!”
다이안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몸을 움츠리면서 나한테 더 바짝 안겨들었다. 몸을 파르르 떠는 모습이 오죽 가여워 보이던지, 내 마음이 다 아렸다.
“에궁, 이렇게 무서운 데를 우리 도련님이 왜 들어왔는지 몰라. 나갈 때까지 그냥 눈 감고 있으실래요?”
평소 같으면 좀 더 센 척했을 텐데 지금은 정말 겁이 났는지, 내 말을 듣고 다이안이 순순히 눈을 꼭 감았다.
“체스휘 씨, 우리 그냥 빨리 뛰어갈까요?”
“그러지 않아도 돼요.”
다이안과 나는 이 상황에 경계심을 느꼈으나, 체스휘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그의 손이 앞을 가로막은 꽃을 툭 건드리는 걸 목격했다.
앗, 꽃이 정기를 빨아들인다고 했는데?
하지만 정말 경악스러운 일은 그 후에 벌어졌다.
체스휘의 손에 닿는 순간 꽃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사사사사사사사삭!
그러고는 꽃들이 꼭 체스휘를 피해 도망치기라도 하듯이 갑자기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모세의 기적만큼이나 순식간에 벌어진 놀라운 상황에 나는 당황스럽게 눈을 깜빡일 수밖에 없었다.
“꽃이… 갑자기 왜 이럴까요?”
“글쎄요, 먹어 봤자 소화할 수 있는 게 아닌 걸 눈치챘는지도 모르죠.”
수상쩍은 기분에 꽃들에게 경계 어린 시선을 보내는 나와 달리, 체스휘는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나는 체스휘의 말을 듣고 갸웃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하긴. 뭐든 과식하면 탈이 나기 마련이니까, 인간의 정기도 너무 많이 먹으면 소화하기 어렵겠지.
“저기 문이 보이네요. 일단 여기서 나가죠.”
“네, 그래요.”
어쨌든 꽃들이 모조리 양쪽으로 갈라져 멀리 떨어진 탓에, 문이 어디 있는지 두 눈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화원 안쪽이 꽃과 나무들에 시야가 가려져 있어 헤맨 시간이 길다고 느꼈을 뿐, 생각보다 문은 가까이에 있었다.
우리는 악마의 화원의 악명을 떠올리면 약간 어리둥절할 정도로 생각보다 쉽고 안전하게 문밖으로 빠져나왔다.
***
“지, 진짜 멀쩡히 나왔어?”
악마의 화원 밖으로 나가자마자 사람들이 경악 어린 눈으로 우리를 맞아 주었다.
“린 님, 괜찮으세요?!”
사라로사가 울먹이는 얼굴로 가장 먼저 달려왔다.
“아니…! 7호실 꼬맹이는 그렇다 쳐도 너희들은 어떻게 멀쩡히 돌아온 거야?”
4호실의 레이븐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두 눈을 부릅떴다. 레이븐만이 아니라, 다른 호실의 양육자와 아이들도 일부 나와서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구경 올 일인가? 이 경우는 사라로사의 입이 가벼운 걸까, 아니면 다이안의 가정 교사의 입이 가벼운 걸까?
아무튼 다들 그렇게 기피하던 악마의 화원의 문 앞까지 몰려온 걸 보니 ‘이 안에 들어가면 사망! 혹은 실종! 아니면 최소 반죽음!’이라는 공식이 모두의 머릿속에 똑똑히 각인된 상태긴 한 모양이다.
“뭐야, 우리가 멀쩡히 돌아와서 유감스러워요?”
“무, 무슨 소리야?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요!”
내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말하자, 레이븐이 그제야 자신의 입방정을 깨달은 듯이 입을 닫았다.
“말로만 듣던 대로 악마의 화원이 정말 무섭긴 하던데요.”
그때 체스휘가 여느 때처럼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린 씨를 보자마자 꽃들이 도망쳐서 무사히 나올 수 있었어요.”
“응?”
나는 무슨 소리냐는 듯이 체스휘를 돌아봤다. 그런데 체스휘는 왜 그러냐는 듯이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 꽃들이 7호실을 보자마자 도망쳤다고?”
모두가 체스휘의 말을 듣고 웅성거렸다. 특히 레이븐은 조금 전보다 더 경악한 얼굴로 나를 손가락질하기까지 했다.
“말도 안 돼…! 다짜고짜 남의 머리에 총이나 겨누는 이런 여자가 순백의 천사라도 된다는 거야? 이게 가능해?! 이게 말이 돼…?!”
레이븐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흥분했다.
그런데 뭐요? 순백의 천사? 이 아저씨는 왜 한 번씩 헛소리야?
그리고 레이븐의 말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나는 잠시 후에 알게 되었다.
“사람의 악의를 빨아 먹는 화원이라고요?”
사람들이 물러간 뒤, 체스휘에게 설명을 듣고 흥미롭게 눈을 빛낼 수밖에 없었다.
“빨아 먹기만 하겠어요? 동료로 만들어 버리기도 하죠.”
동료라고? 그럼 거기 있는 거대한 꽃들이 설마?
“음, 좀 무서워하라고 말한 건데 오히려 흥미를 갖네.”
내 얼굴을 본 체스휘가 이건 예상 밖이라는 듯이 느릿하게 팔짱을 꼈다.
“혹시 저 안에 또 들어갈 생각인 건… 왠지 맞는 것 같은데.”
에고, 들켜 버렸다. 하지만 분명 이 새로운 맵과 관련한 퀘스트가 있을 것 같은걸!
오늘은 너무 아무 준비 없이 갑자기 들어갔지만, 다음엔 미리 장비 좀 챙겨서 들어가면 괜찮지 않을까?
“뭐? 린, 그게 무슨 소리야? 방금 이상한 꽃들이 달려드는 걸 봤으면서 저 소름 끼치는 곳에 또 들어가겠다고?”
그때 다이안이 고개를 번쩍 들면서 소리쳤다.
그는 바닥에 내려서서도 아직 두려움이 가시지 않은 듯이 내 허리를 꽉 끌어안은 채 옆구리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중이었다.
물론 나는 내 개복치 고양이를 너무너무 사랑하고 아꼈지만, 오늘만큼은 그에게 엄한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무서운 걸 아는 사람이 제가 없는 틈에 혼자 몰래 화원에 들어갔어요?”
“나… 나한테는 안 위험했는걸.”
다이안이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보며 풀이 죽은 듯이 웅얼거렸다.
아까 4호실 레이븐도 비슷한 말을 하던데, 나이가 어린 애들은 악의라 할 만한 것도 거의 없어 위험하지 않다는 건가?
“그래서 다이안.”
“으, 응?”
“도대체 저 화원에는 뭐 하러 간 건데요?”
일단 우리 애랑 대화를 좀 해 보자.
내 물음에 다이안이 우물쭈물했다. 그러다 그가 귀엽게 옆으로 메고 있던 작은 크로스백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이거… 린한테 주고 싶어서.”
다이안이 내게 두 손으로 내민 것은 아주 예쁜 황금색 보석이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이건 보석이 아니라 무언가의 씨앗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