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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26)화 (26/300)

평소라면 별생각이 없었겠지만, 지금은 그를 보고 나도 모르게 작게 탄식했다.

‘아, 틀렸어. 메이드들의 말을 듣고 나니까 체스휘가 진짜 사연 있는 남자로 보이기 시작했어.’

체스휘는 내 짠한 시선을 보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살 게 있어서 잠깐 마을에요.”

“혼자요?”

“네, 혼자.”

“혹시 길 안내를 해 줄 사람은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뉴 캐릭터와 함께하는 마을 탐방이라, 구미가 좀 당기긴 했지만 오늘은 필요한 볼일만 보고 들어올 거라 동행인은 없는 게 나았다.

그러다가 불현듯 잊고 있던 사실을 한 가지 깨달았다.

“아, 그러고 보니까 여기 온 첫날에도 체스휘 씨가 저택 안내를 해 준다고 했다가 미뉴엘이 불러서 결국 무산되지 않았었나요?”

“이런, 맞네요. 그런 일이 있었죠. 그럼 역시 오늘 만회를 하는 게 좋지 않을지.”

“아니에요. 오늘은 저 혼자 다녀오면 돼요. 정말 잠깐만 들렀다 올 거거든요.”

“그래요? 아쉽네요. 다음에는 저도 데려가 주세요.”

“네, 다음에.”

그렇게 대화가 마무리된 뒤, 체스휘가 나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잘 다녀와요, 린 씨.”

그런데 현실 세계에서 혼자 산 역사가 길어, 이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배웅을 받아 본 게 워낙 오랜만이라 그런가? 체스휘의 인사를 듣는 순간 왠지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한순간 멈칫했다.

나는 체스휘를 따라 어색하게 한번 웃어 보인 뒤, 몸을 돌려 문으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잠시 후 머뭇거림을 떨치고 다시 뒤돌아보았을 때, 체스휘는 여전히 다감하게 웃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다녀올게요.”

결국 나도 그에게 낯선 화답의 말을 남긴 뒤 괜히 도망치듯이 걸음을 서둘러 저택을 나섰다.

***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양육자님.”

“엥?”

잠시 후, 나는 누군가가 나를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다.

그런데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어리둥절했다.

주변을 살펴보니 나는 마차에 타 있었고, 마부가 막 문을 열고 밑에 발 받침을 놔주고 있었다.

어, 뭐야. 시스템도 고장 났는데 맵 이동 기능은 살아 있는 건가?

저택에 준비된 마차를 타고 정문을 넘은 것까지는 생각나는데, 이후로는 기억이 뚝 끊겨 있었다.

뭐, 순식간에 뿅 하고 도착했으니 대기 시간은 없어서 좋긴 한데… 보통 맵 이동 때와 달리 왜 이렇게 머리가 아파?

“저, 저기! 잠들어 계신 줄 몰랐는데 제가 감히 양육자님을 깨워서…. 혹시 기분이 나쁘셨으면 정말 죄송합니다.”

그런데 내가 무심코 인상을 쓰는 걸 보고 어떻게 생각했는지, 마부 존 씨가 식은땀을 흘리면서 변명하듯이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아유, 연세도 있으신 분이 저렇게 쩔쩔매는 걸 보니 그동안 잠들어 있던 내 안의 유교 걸이 불쑥 깨어났다.

나는 혹시 침을 흘린 건 아닌가 싶어서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며 열심히 내 눈치를 보고 있는 존 씨를 향해 웃어 보였다.

“아, 마차가 너무 편안해서 저도 모르게 잠들어 버렸네요. 깨워 주셔서 고마워요.”

“아앗! 아, 네! 그러셨군요! 제가 다른 건 몰라도 마차 하나는 잘 몹니다! 하하핫!”

단순한 존 씨가 내 칭찬에 금방 얼굴을 활짝 폈다.

나는 그가 깔아 준 발 받침대를 밟고 마차에서 내려섰다.

“그럼 저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편하게 일 보고 오십시오.”

마을의 풍경은 그동안 내가 지겹도록 봐 온 것과 똑같았다.

오늘 내가 이곳에서 사려는 건 우리 애기에게 혹시 위험한 일이 있을 때 사용할 응급 포션과 저택에서 입을 평상복을 포함한 몇 가지 생활 필수품이었다.

시스템이 동결되며 나는 알거지가 되었지만, 그래도 레드포드 저택에서 받은 돈이 있었다.

일단은 양육자로 고용된 상태라 매달 500 제나씩을 저택에서 지급받는데, 고맙게도 선불이었다. 그러니 이번 달은 일단 이걸 탈탈 털면 되겠지.

‘제작 스킬만 있으면 특특특특등급 포션으로 내가 직접 만들 수 있는데.’

앞서 말했듯이 포션 마스터였던 내 위명도 모조리 옛 회차의 것일 뿐, 지금은 스킬들이 모조리 초기화된 상태라 우리 아기 고양이에게 먹일 하급 감기약조차 직접 만들 수가 없었다. 내가 우리 애기를 위해 한 땀 한 땀 열심히 만들어 모아 둔 생명 유지 포션들도 내 아이템 창에 동결되어 있었고 말이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게 되었지만 곧 다시 마음을 비웠다.

어차피 게임 시간으로 보름이 지나 자동 로그아웃 되면 오류로 시작된 이번 회차는 초기화될 수도 있었다. 그래도 일단은 아까워하지 말고 최소한 그때까지는 다이안을 열심히 살려 볼 생각이었다.

‘난 우리 애한테 늘 최선을 다한다! 이것이 바로 올바른 덕질이지!’

그렇게 필요한 물건을 산 뒤 가방을 잃어버린 동안 옷을 빌려준 사라로사를 위한 작은 선물도 하나 샀다.

“여기 빨간 오렌지 있어요?”

“어유, 그러믄요. 저희 마을의 명물인걸요.”

그러고 나서 내가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과일 가게였다.

어제 스텔라 사무국에서 받은 편지의 추신을 떠올렸다.

ps. 오렌지는 붉은색. – 라파엘 카드리고의 전언입니다.

오렌지는 붉은색이라니, 무슨 암호인가?

일단은 뭐가 뭔지 아직 모르니까, 진짜 붉은 오렌지라도 준비해서 가져가 볼 생각이었다.

“진짜 오렌지가 사과처럼 새빨간 색이네.”

필요한 물건을 다 사서 존 씨가 기다리는 마차로 돌아갔다.

돌아갈 때도 눈을 멀쩡히 뜨고 있었는데, 마을을 나서는 순간부터 또 이상하게 갑자기 의식이 뚝 끊겼다.

눈을 떴을 때는 웅장한 레드포드 저택이 거대한 산맥처럼 다시 내 앞에 드리워져 있었다.

이번에도 머리가 아파서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졌다.

“어우, 시스템 오류도 가지가지…. 이놈의 토끼 자식들, 진짜 로그아웃만 하면 가만 안 둬.”

별점도 한 개만 주고, 고객 불만 게시판도 도배해 버릴 테다!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우리 귀여운 고양이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래도 방이 가까워질수록 저절로 발걸음은 가벼워지고, 입에서는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집에서 기다리는 햄스터 같은 아이들한테 줄 맛있는 사탕을 사서 돌아가는 가장의 마음이 이럴까!

“야, 양육자님! 이제 오십니까!”

하지만 내 미소는 방에 도착한 순간 산산이 깨졌다.

“다이안 도련님이 사라지셨습니다! 중간 휴식 시간 때 화장실에 간다고 나가셔서 여태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

뭐요, 우리 강아지가 어쨌다고?

“아아아아아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나는 손에 들고 있던 걸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 다이안의 가정 교사 1에게 다시 물었다.

우리 애기가 수업을 빼먹다니! 43회차 동안 단 한 번도 없었던 돌발 행동이었다!

“화장실에 갔다가 다시 안 돌아왔다니, 중간 휴식 시간이 언제였는데요?”

“대략 한 시간쯤 전입니다. 평소에는 이렇게 말도 없이 시간을 안 지키신 적이 없어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저택의 모든 화장실을 찾아다녔는데 어디에도 보이지 않으셔서….”

그래서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가 싶어서 땀을 비 오듯이 흘리고 있었구나?

나는 당장 다이안을 찾아서 문밖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바로 어제도 기억에 없던 모로스가 나와서 안심할 수가 없는데 어디로 사라진 거야?

“린 님, 돌아오셨군요! 크, 큰일 났어요!”

바로 그때, 타이밍 좋게 사라로사가 뛰어왔다.

“다이안 님이! 조금 전에 악마의 화원으로 들어가시는 걸 다른 메이드가 봤대요…!”

“뭐라고요? 악마의 화원?”

악마의 화원이라면 1호실 양육자인 마리엔이 루스카의 약을 바꿔치기 한 메이드를 보냈던 곳이었다. 그리고 그 메이드가 실종된 곳이기도 했다.

나는 메이드들에게 들었던 내용을 떠올렸다.

“악마의 화원에 대해 잘 모른다니, 너 진짜 신입 메이드인가 보구나? 이제라도 잘 알아 둬. 저택 본관에서 뒷문으로 나가면 후원이 있고 서쪽에 큰 문이 하나 있거든?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거기 들어가면 안 돼.”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데요?”

“어떻게 되긴, 정기를 쪽쪽 빨아 먹혀서 죽는 거지! 괜히 거기가 악마의 화원이라고 불리겠어?”

“거기 정기를 빨아 먹는 괴물이라도 살아요?”

“비슷해. 거기 들어가서 멀쩡히 돌아온 사람은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단 말이야.”

지난번에 미뉴엘도 그곳에 들어가려고 하는 나를 막은 적이 있었다.

이후로 나도 별채의 보라색 방과 예전 1호실 페어에 관련된 일들에 관심이 쏠려 다시 거기에 가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우리 다이안이 거기에 들어갔다고?

“알려 줘서 고마워요, 사라로사!”

나는 바로 복도를 달려가기 시작했다.

“앗, 린 님! 설마 직접 들어가서 데려오시려고요? 하지만 거긴…!”

사라로사가 뭐라고 말하며 나를 쫓아오다가, 내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뒤처졌다.

그녀가 내게 뭐라고 경고하려 하는지는, 메이드들에게 들은 내용이 있어 나도 알고 있었다.

이렇게 저택 사람들이 하나같이 두려워하는 걸 보니, 확실히 그 안에 심상치 않은 게 있긴 한가 보지?

하지만 우리 개복치 고양이가 거기에 있다는데 안 가볼 수가 없잖아!

‘기다려, 애기야! 누나가 간다!’

나는 지난번에 봤던 철문 앞에 다다라 으스스한 기운을 흘리는 화원 안으로 거침없이 뛰어 들어갔다.

***

말로만 들었던 악마의 화원은 왜 이름을 그렇게 지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음침했다.

그냥 철문 하나만 열고 들어온 것뿐인데, 꼭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별개의 공간에 들어온 것 같았다.

사실 처음에는 보통 화원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하나로 이어진 오솔길에는 초록색 풀과 나무, 그리고 소박한 들꽃이 피어 있었다.

혹시 악마의 화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공동묘지 같은 거라도 나오는 거 아니야 싶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길을 걸어 화원의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주변이 어두워졌다.

“정원사가 관리도 안 하나? 뭔 나무가 이렇게 빽빽하게… 어?”

하지만 고개를 들어 머리 위를 확인한 직후, 나는 흠칫했다.

울창한 잎으로 하늘을 가리고 있는 건 나무가 아니었다.

“꽃이잖아?”

아니, 뭔 꽃이 이렇게 커?

생긴 건 튤립과 비슷했는데, 나무처럼 거대했다.

설마 식물의 일조량에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있는 건가요? 아니면 이 세계관에만 존재하는 새로운 품종인가요?

아무튼, 원래 ‘예쁜 것+예쁜 것=최고 예쁜 것!’이라지만, 이건 너무 크니까 오히려 징그러웠다.

“다이안 도련님!”

아이구, 이런 기묘하고 으스스한 곳에 우리 개복치 고양이가 있다니! 지금쯤 누나 보고 싶다고 엉엉 울고 있는 건 아닐까?

“다이안!”

나는 소리 높여 다이안을 불렀다.

“앗, 발자국!”

그러다 바닥에 찍힌 익숙한 발자국을 발견했다.

이 발자국은 우리 개복치 고양이의 것이 맞다! 전체 길이도 발볼 크기도, 신발 밑창의 무늬도 확실해!

“다이안 도련님!”

“앗, 린…?!”

내 눈은 정확해서, 발자국을 따라가자 내가 찾던 소년과 만날 수 있었다.

다이안은 이번엔 코스모스처럼 보이는 거대한 꽃들 사이에 주저앉아서 뭔가를 하다가, 내가 오자마자 손을 후다닥 숨겼다. 그럴 정신이 있는 걸 보니, 다행히 이곳에서 무슨 큰일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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