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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22)화 (22/300)

물론 이게 게임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훤한 대낮에 공략 캐릭터(추정)의 탈의 쇼를 당당하게 구경할 만큼 얼굴이 두꺼운 것도 아니었다.

내가 기겁하자 체스휘가 다시 팔을 내리고 나직하게 웃었다. 그걸 보고 내가 속았다는 걸 알았다.

“뭐야, 진짜 벗으려는 건 줄 알았잖아요.”

“설마요. 제가 얼마나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데. 그래도 린 씨가 원하신다면 부끄러움을 참고 나중에 단둘이 있을 때 살짝 보여 드릴 수는 있어요.”

그건 조금 혹하네… 가 아니라.

체스휘 씨, 이제 보니 은근히 잔망스럽네. 지금까지 이런 유형의 공략 대상은 없었는데 말이야.

잠시 후 체스휘와 나는 정원의 입구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마침 다이안과 미뉴엘이 각자 듣는 수업 시간이 거의 끝나 갈 때였다.

“그런데 체스휘 씨는 저택에 들어온 지 1년쯤 되었다고 했죠?”

“그랬죠. 기억하고 있었네요.”

그런데 내 말에 체스휘의 목소리가 약간 변했다. 그는 내가 자신과 일전에 나눈 대화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하지만 뒤이은 내 물음에는 다시 건조한 반응을 보였다.

“혹시 1호실 언니는 저택에 언제 들어왔는지 알아요?”

“아, 이번에는 1호실한테 관심이 있는 거였구나….”

내 물음에 체스휘가 잠깐 생각하듯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다가 답했다.

“저보다는 늦게 들어왔고, 그 후로 계절이 세 번 정도 바뀌었으니까 아마 9개월이나 10개월 정도 된 것 같은데. 엄밀히 따지면, 제가 저택에 들어온 건 1년 2개월에서 3개월 정도 전이거든요.”

생각보다 얼마 안 됐네.

물론 별채의 유령들이 진짜 이전 1호실 페어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별채에 유령이 나오기 시작한 역사가 내 생각보다 훨씬 짧다는 거였다.

‘앗, 잠깐.’

그런데 체스휘가 1호실 마리엔보다 일찍 저택에 들어왔다는 건….

“그럼 체스휘 씨는 이전 1호실 양육자를 직접 본 적이 있겠네요?”

그 순간 체스휘의 걸음이 멈춰졌다.

“본 적, 있죠. 당연히.”

“혹시 친했어요?”

이번에는 내 물음에 바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오래된 레드포드 저택의 건물을 훑고 불어온 바람이 나뭇가지 사이에서 작게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체스휘의 위로 나뭇잎이 뒤엉켜 만들어 낸 그림자와 보석 더미가 쏟아지듯이 환하게 반짝이는 햇빛이 함께 춤을 추듯이 흔들렸다.

“그건 왜 물어보시죠?”

체스휘의 입술에는 여전히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안경알이 햇빛에 반사되어 그가 어떤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이전 1호실에 대해 궁금한 게 있는데 혹시 아실까 싶어서요.”

“어떤 점이 궁금한지 먼저 들어봐야, 대답할 수 있을지 없을지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별 건 아니고요. 예전 1호실 양육자와 마리엔 씨가 무슨 관계인지 궁금해서요.”

그래도 이건 체스휘가 대답할 수 있는 부분이었나 보다. 그는 그런 거였냐는 듯이 아, 하고 말을 이었다.

“린 씨는 몰랐나 보네요.”

언제 못 박힌 듯이 가만히 서서 나를 내려다봤냐는 듯이, 체스휘의 걸음이 다시 자리에서 떼어졌다.

뒤이어 그의 입에서 나온 설명을 듣고 나는 조금 놀랐다.

“이전 1호실 양육자는 지금 1호실 양육자인 마리엔 씨와 자매였어요.”

“자매요?”

“그리고 지금 1호실에 사는 루스카는 그 전에 1호실에 살았던 아이와 쌍둥이였죠.”

확실히 특이한 경우였다. 1호실의 양육자는 양육자끼리,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피를 통한 자매와 형제였다니….

“마리엔 씨와 루스카는 이전 1호실 페어가 죽고 난 뒤에 선출되어 저택에 들어온 거예요.”

생각보다 긴밀한 연관성에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러다 한순간 아차 싶어서 입술을 작게 벌렸다.

방금 마리엔이 나한테 과민 반응을 보였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별채의 유령들이 정말 이전 1호실 페어가 맞다면, 나는 본의 아니게 마리엔의 앞에서 그녀의 죽은 여동생 얘기를 해 버린 셈이었다.

역지사지로, 만약 누군가 어디에서 네 죽은 여동생과 닮은 귀신을 봤다고 하면서 나를 자극했다고 생각하면….

‘채찍 휘두를 만했네.’

이 경우에는 채찍을 한 번만 휘두른 게 오히려 양호하다고 할 수 있을 듯했다.

나는 마음이 좀 껄끄러워졌다.

이게 현실이라면 본의 아니게 패드립을 친 것에 충격을 받고 당장 마리엔을 찾아가 넙죽 사과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또한 어차피 게임 캐릭터에게 부과된 설정일 뿐인데, 그걸 듣고 진심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안쓰러운 마음을 품는 건 내가 오버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애초에 가상 현실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의 방식은 가지각색이었지만, 게임사들은 갑갑한 현실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게임 속에서 해소하거나 힐링 라이프를 즐기는 것을 꾸준한 주요 홍보 전략으로 삼았다. 진한 감정 소모를 이끌어 내는 무거운 내용의 게임보다는 기분 전환용으로 가볍게 즐길 수 있는 게임이 월등한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재미있으려고 하는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가상으로 만들어진 NPC의 눈치를 보는 건 말도 되지 않았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지금은 묘하게 마음 한구석이 살짝 불편해졌다.

‘그보다 44회차 때는 별채의 유령과 양육자 설정이 이런 식으로 연결되는 건가 보네.’

확실히 원래 세계관보다 더 세밀하고 유기적으로 연결되게 내용을 업그레이드시킨 것 같기는 했다.

나는 생각에 잠긴 채 지나가듯이 말했다.

“안타깝네요. 그럼 둘 다 모로스한테 당한 건가요?”

“아니요. 모로스한테 죽을 만한 사람은 아니었죠. 맡은 아이를 모로스 손에 죽게 할 만한 사람도 아니었고.”

이번에는 내가 멈칫했다.

둘 다 모로스한테 죽은 게 아니라고? 그럼 왜….

그러나 체스휘는 마저 설명해 주는 대신 나를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무슨 의미인지 모를, 모호한 느낌의 미소였다.

“방향이 달라서 여기서 헤어져야겠네요. 그럼 나중에 또 봐요, 린.”

대화는 여기까지라는 듯이 명백한 단절을 암시하며 날아든 작별 인사에, 나는 그를 붙잡을 수도 없었다.

양쪽으로 갈라진 계단의 좌측으로 올라가기 시작한 체스휘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에게서 떨어진 물이 그림자처럼 발뒤꿈치를 따라가고 있었다. 계단에 깔린 붉은 카펫의 색이 물기에 젖은 탓에 더 짙어져 꼭 그것이 핏자국처럼 보였다.

“체스휘 씨.”

나는 그걸 보다가 체스휘가 내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입을 열어 조용히 그를 불렀다. 체스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지만 고개를 약간 틀어 나를 쳐다보긴 했다.

“제 환영회 때 시체꽃을 준비한 사람이요.”

나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다른 질문을 했다.

“저택에 있는 사람들 중 한 명만 고르자면, 누가 그런 짓을 할 가능성이 가장 높을 것 같아요?”

체스휘의 입가에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미소가 그려졌다. 이어서 그가 답했다.

“글쎄요. 제 생각에는….”

***

마리엔은 정원을 빠져나가며 조금 전 7호실 양육자에게 들은 말을 생각했다.

“그나저나 1호실 언니, 별채에 있는 보라색 방에 대해 혹시 들어 봤어요?”

“그 복도에 검은 베일을 쓴 여자가 나오는데요, 머리 색이 붉은색이래요.”

“마리엔.”

그러다 그녀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짧은 상념에서 깨어나 시선을 내렸다.

“마리엔은 7호실 양육자가 싫어요?”

햇빛이 내리쪼이는 초록색 길목에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검은 머리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원래 겉으로 감정 표현을 하는 일이 드문 아이라 그는 지금도 거의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리엔의 눈에는 루스카가 조금 전의 일을 신경 쓰는 것이 보였다.

“아니, 그런 건 아니야.”

마리엔은 손을 뻗어 루스카의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마리엔 역시 속에 든 생각을 밖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었으나, 지금 한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레드포드 저택에 새로 온 양육자인 린이 정말 순진하고 해맑은 건지, 아니면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그런 척을 하는 건지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속이 새까만 사람이 은연중에 풍기는 불쾌한 느낌은 아직까지 들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 해도, 아이를 지켜야 하는 입장에서 경계심을 완전히 거둘 수는 없었다. 감히 루스카를 해치려 했던 그 메이드처럼 언제 어디서 사특한 자들이 검은 손을 뻗을지 알 수 없었으니.

마리엔의 말을 들은 루스카는 안심한 듯이 두 눈을 내리깔았다. 하얀 햇빛 아래에서 드러난 아이의 얼굴은 유독 창백해 보였다.

“햇빛을 너무 오래 쬐었나 보구나. 날이 점점 더워지고 있으니 앞으로 야외 활동 시간은 해 질 무렵으로 옮기는 게 좋겠다.”

“네.”

“그래, 곧 약을 먹을 시간이니 방으로 돌아가자.”

루스카는 착하게도 마리엔의 말에 반발하지 않고 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레드포드 저택에서 함께 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다른 호실의 페어들보다 서로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어쩌면 과거에 같은 슬픔을 겪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마리엔도 이내 조금 전의 일을 머릿속에서 지워 내며 잠깐 늦췄던 걸음을 원래 속도로 되돌렸다.

“사실은 제가 얼마 전에 별채에 갔다가 직접 목격했거든요.”

그러나 그녀의 머릿속에는 또다시 7호실 양육자인 린에게 들은 말이 맴돌고 있었다.

별채의 보라색 방 앞에 가끔 나타난다는 유령에 대해서는 당연히 마리엔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래된 저택에 으레 생겨나는 시시한 괴담 비슷한 헛소문이라 생각해 그것을 귀담아들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붉은 머리 여자와 검은 머리 소년이었다고?’

지금까지 저택 사람들이 수군거리던 이야기에서 그런 구체적인 외모적 특징은 나온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된 일일까? 하지만 조금 전에 본 린도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럼 혹시 정말로 별채의 유령이 그녀가 아는 사람일 가능성도 있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마리엔은 그들을 만나 꼭 들어야 할 말이 있었다. 지금 그녀가 맡은 소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마리엔은 루스카의 작은 손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멀리 보이는 별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흔들리는 검은 베일 밑으로 여름 하늘처럼 밝은 벽안이 서늘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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