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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21)화 (21/300)

뉴 캐릭터가 보여 주는 생생한 반응에 나는 이거다 싶어졌다.

역시 보라색 방의 여자 유령이 1호실 양육자 마리엔과 연관이 있는 건가?

원래 게임에서는 적극적인 공략이 답인 법이다. 가만히 앉아서 들어오는 정보만 야금야금 주워 먹어 봤자 재미도 없고, 게임 진행 속도도 한없이 더뎌져만 갈 뿐이었다.

물론 이게 실제 현실이라면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해 여러 가지 신경 쓸 부분들이 있었겠지만, 어차피 여기 있는 건 전부 게임 데이터 아니던가?

“사실은 제가 얼마 전에 별채에 갔다가 직접 목격했거든요.”

“…직접 목격했다고?”

“네. 별채에 대한 소문에 오죽 귀가 따가웠어야죠. 그래서 호기심에 한번.”

그렇게 말하며 눈을 접어 웃었다.

“그럼 그것도 아세요? 별채에서 들리는 어린애 발소리의 주인은 검은 머리칼을 가진 아이….”

촤아악!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내 앞으로 뱀의 똬리 같은 길쭉한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스텔라 출신이라더니, 단번에 막아 내는군.”

연이어 귓가에 차가운 음성이 고였다.

아… 이 언니 진짜 너무 톡 쏘는 매운맛이네. 이렇게 다짜고짜 채찍을 휘두르는 법이 어디 있어?

“갑자기 뭐예요? 난데없이 이런 걸 휘두르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

언니랑 채찍, 너무 잘 어울리긴 한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여기에 맞고 싶었던 건 아니거든요? 난 그런 취향 없단 말입니다.

“그쪽이야말로 고작 그따위 말로 날 휘두를 생각이라면 잘못 생각했어.”

마리엔이 싸늘히 말하며 팔을 뒤로 당겼다. 내 손에 말아 쥐어진 채찍이 팽팽히 당겨졌다.

“내 앞에서 이전 1호실 페어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던가?”

나도 그녀에게 반격할까 하다가, 그 말을 듣고 손을 풀어 줬다.

“이전 1호실 페어?”

“굳이 별채의 유령 핑계를 대면서 내 속을 긁으려 하다니, 노력이 가상하다고 해 줄까?”

마리엔이 내 손을 떠난 채찍을 이번에는 바닥에 대고 위협적으로 내려쳤다.

“처음부터 보통내기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생긴 것답지 않게 악취미적이군.”

혹시 또 나한테 저 채찍을 휘두르면 그땐 나도 가만히 있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녀는 첫 공격을 제외하고는 나를 직접 건드리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저쪽도 그냥 한번 간을 본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나한테 꽂힌 그녀의 눈빛만큼은 당장 사람을 찔러 죽일 수도 있을 것처럼 날카로웠다.

“별채에서 본 대로 얘기했을 뿐인데 예민하게 반응하시네요. 이전 1호실 페어도 붉은 머리 여자에 검은 머리 소년 조합이었나 보죠?”

내 말에 마리엔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계속 순진한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군. 다른 사람들은 거기에 속을지 몰라도 난 믿지 않아. 스텔라의 방침이 특이해 혼자만 아무것도 모른 채 저택에 들어왔다고? 지나가던 개가 웃을 소리지.”

마리엔은 신랄하게도 말했다.

하지만 그녀가 잘못 짚었다. 일부러 순진한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라 그냥 이번 회차 때는 변한 게 많아서 나도 정보 좀 얻어 보려고 이러는 건데.

물론 뒤에서 다른 방법으로 조용히 알아내도 되는 걸 이렇게 굳이 1호실 양육자 언니 앞에 와서 직접 떠본 건 일부러 어그로를 끈 거긴 했다.

하지만 이것 봐라. 역시 이 바닥의 트러블 메이커가 되니까 이렇게 게임이 한결 흥미진진 두근두근해지잖아?

무엇보다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한테 먼저 적대감을 보인 사람에게 나만 착하고 배려심 있게 굴어 줘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앗, 루스카 님! 지금 그쪽으로 가시면 안 돼요!”

그때, 누군가 정원의 덤불 뒤에서 바스락거리면서 나타났다. 검은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소년이 오늘도 손에 책을 든 채 잔디를 밟으며 걸어와, 마리엔과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둘이 싸워요?”

짤막한 물음이 녹음 가득한 정원 위로 내려앉았다.

아, 그런데 아이의 고요한 눈을 보자 왠지 쾌락주의형 플레이어인 내가 몹쓸 어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마리엔을 한번 힐끗 쳐다본 뒤 루스카를 향해 빙긋 웃었다.

“아니, 그냥 인사한 거야. 방금 우연히 만나서.”

마리엔도 자기 애가 보는 앞에서 채찍을 또 휘두를 생각은 없는지 손을 내렸다.

“정원에서 책을 읽고 있었나 보네? 1호실 언니가 혼자 산책을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네가 여기 있어서 보러 온 거였구나.”

“우리 애한테 함부로 다가오지 말라고 전에 분명 말했을 텐데요. 지금처럼 친한 척 말 걸지도 말고.”

“먼저 다가온 건 제가 아니라 루스카인데요. 그런데 언니, 조금 전까지 엄청 자연스럽게 반말하다가 왜 갑자기 존대로 말하세요?”

“아이 정서에 안 좋으니까. 아니, 아예 그쪽이란 사람 자체가 애 교육에 안 좋으니 지금 당장 우리 눈앞에서 사라져 줬으면 좋겠는데.”

“제가 왜 아이 정서에 안 좋아요? 저 정서 발달에 엄청 도움이 많이 되는 사람이에요.”

내가 투덜거렸으나 마리엔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계속 냉랭하게 반응했다.

그래도 조금 전보다는 살벌하던 분위기가 다소 완화되었다. 나야 원래 이런 성격이라 쳐도, 마리엔이 방금까지의 무시무시하던 눈빛을 한풀 가라앉히고 내 말에 짧게나마 대꾸해 주는 건 좀 의외였다.

이것도 정서 교육 때문인가? 아무래도 그녀는 우리가 싸우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 주려고 일부러 루스카한테 나와 대화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그래도 양육하는 아이의 눈을 신경 쓰긴 하나 보지?

“다들 여기서 친목 도모라도 하시나요?”

그런데 한낮의 정원은 내 생각보다 더한 핫플레이스였나 보다. 루스카에 이어 체스휘까지 등장한 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친목 도모라니, 그런 걸 하는 것처럼 보이나요…?

“혹시 저도 껴도 될까요? 마침 일광욕을 하기에도 좋은 날씨네요.”

나른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 데 이어, 특유의 느릿한 걸음걸이로 체스휘가 다가왔다. 그런데 그는 처음 본 날처럼 오늘도 몸이 푹 젖은 상태였다.

“체스휘 씨…. 무슨 일 있었어요? 오늘은 또 왜 그렇게 젖었어요?”

“아, 애들이 또 연못에 떨어뜨린 공을 주워 달라고 해서요.”

내 물음에 체스휘가 대수롭지 않다는 양 대꾸했다.

조금 거리가 떨어진 곳에서 아이들이 ‘꺄하하하!’ 해맑게 웃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꼭 재미있는 놀이를 하기라도 한 듯이 밝고 경쾌한 웃음소리였다.

“그냥 고용인한테 꺼내 달라고 하지 그랬어요?”

“애들이 저를 좋아하는지 꼭 저한테 꺼내 달라고 그래서요.”

그래? 체스휘는 애들한테 인기가 있는 편인가 보다. 뭐, 비교적 접근하기 쉬운 분위기이기는 하지. 지금 내 앞에 있는 1호실 언니에 비하면 훨씬 친근감 있는 느낌이기도 하고.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그때, 내가 막 곁눈질로 본 마리엔의 얼굴에 조소 비슷한 것이 떠올랐다.

“난 가끔 그쪽이 눈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헷갈려. 나와는 상관없으니 딱히 어느 쪽이든 알 바는 아니지만.”

마리엔은 그렇게 체스휘를 향해 읊조린 뒤 루스카의 손을 잡고 먼저 자리를 벗어났다. 검게 흔들리는 베일 밑으로 선명한 붉은 머리칼이 리본처럼 나부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와 체스휘의 시선이 다음 순간 동시에 마주쳤다. 체스휘가 으음, 하고 묘하게 웃으며 내게 물었다.

“혹시 지금 저, 마리엔 씨에게 욕먹은 건가요?”

“그런 것 같은데요.”

“전 눈치가 굉장히 빠른데, 왜 헷갈린다는 걸까요?”

“아아, 네…. 그러게요.”

나도 모르게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글쎄요, 다른 건 몰라도 방금 1호실 언니와 나를 보고 진짜 친목 도모를 한다고 생각한 거면 눈치가 없는 게 사실인 것 같긴 한데요.

“그보다 애들이 연못가에서 자주 노는 모양인데, 주의를 주는 게 좋겠네요.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제가 볼 때마다 말하고 있긴 한데, 전담 양육자가 아니라 그런지 그냥 흘려듣더라고요.”

체스휘가 젖은 셔츠의 아랫단을 손으로 잡고 물기를 짜냈다. 환한 햇빛 아래에서 체스휘의 복부가 일부 드러났다.

‘흐음…?’

나도 모르게 거기에 시선이 꽂혔다.

처음 봤을 때부터 은근히 잘 단련된 몸인 것 같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직접 보니 생각보다 복부 근육이 굉장히 예쁘게 잘 잡혀 있었다. 근육이 부담스럽게 우락부락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빈약한 느낌이 드는 것도 아닌, 누구나 보자마자 감탄할 만한 훌륭한 복근이라고 해야 할까?

‘생각보다 내 취향…. 아니, 그런데 이 정도면 데이터 설정에 의외로 상당한 공을 들인 것 같은데?’

갑자기 미심쩍은 마음이 들었다.

물론 복근 하나 보고 확신하긴 그렇지만, 혹시 체스휘도 플레이어의 연애 공략 대상 중 하나로 새로 만들어진 캐릭터인가?

이 게임은 육성 장르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연애 시뮬레이션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런 만큼 메인 공략 캐릭터들의 외관은 전부 뛰어났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깜짝 놀라서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체스휘의 방에 찾아갔을 때 어둠 속에서 언뜻 본 그의 맨얼굴이 또 제법 내 취향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린 씨, 그렇게 보시면 조금 쑥스러운데요.”

그런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나도 모르게 체스휘의 배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나 보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체스휘가 옷자락의 물기를 짜고 있던 손을 멈춘 채 나를 향해 살짝 멋쩍게 느껴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햇빛에 반짝반짝 빛나는 그의 모습이 생각보다 청초한 느낌을 자아냈다.

이렇게 보니 어제의 그 퇴폐적이던 분위기는 체스휘가 아니라, 같이 있던 메이드 언니에게서 흘러나온 것인가 싶기도 했다.

‘어라, 이렇게 보니 진짜 공략 캐릭터 같은데?’

이게 현실 사회였다면 당연히 남의 맨살을 흑심 있는 눈으로 봤던 것에 뜨끔하며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그러려고 했던 게 아니라~’ 하고 사과와 변명의 이단 콤보가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게임 세상이라 나도 좀 뻔뻔해질 수 있었다.

“아, 체스휘 씨 복근이 제 취향이라 저도 모르게 눈길이 갔네요. 데이터 트레이닝 좀 열심히 하셨나 봐요.”

“데이터 트레이닝이요? 그게 뭐죠?”

그러니까 일단 캐릭터 디자인 중 건강한 육체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당신의 데이터 값이 훌륭하다 이 말입니다.

체스휘는 내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 의아한 듯했지만, 이내 나를 보고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제 몸이 린 씨 취향이라니…. 기분 좋네요. 원하시는 만큼 마음껏 보세요. 흠, 아예 다 벗을까요?”

“아, 그러실래요?”

“그럼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아, 아! 잠깐만요, 농담이었어요.”

그러나 체스휘가 진짜 윗도리를 아예 다 벗으려고 해서 서둘러 그를 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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