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서야 나는 잊고 있던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아, 맞다. 아직 체스휘 씨 방 앞에 있었지.’
“방금 왜 얘기하다 말고 그냥 가요?”
이어서 체스휘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음성이 매끄럽게 두 귀에 흘러들었다.
“나 보러 온 거였잖아. 아니야?”
가까이에서 속삭여진 나지막한 목소리가 꼭 내 고막을 쓰다듬는 듯해서 왠지 귀가 간지러웠다.
그때 문이 조금 더 활짝 열리더니, 이번에는 체스휘와 함께 있던 메이드 언니가 복도로 나왔다.
“세, 세라?”
4호실이 그녀를 보고 입을 멍청하게 벌렸다.
“하.”
검은 단발이 매력적인 메이드 언니는 ‘또 너냐?’ 하는 눈으로 4호실을 찌릿 째려봤다. 그러고 나서 우리를 지나쳐 먼저 자리를 떠났다.
그런데 내 오해인가? 왠지 마지막에 날 스쳐 지나갈 때의 시선도 썩 곱진 않았던 것 같은데…. 혹시 내가 좋은 시간을 방해해서 그런가?
“뭐야? 왜, 왜 그 방에서 세라가 나오는….”
체스휘에게 묻는 4호실의 목소리가 마구 흔들렸다. 그의 눈도 불쌍할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글쎄요, 메이드가 방에 들어올 이유가 뭐겠어요.”
반면 체스휘는 권태감까지 느껴질 정도로 감흥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이 4호실을 자극했는지, 그가 갑자기 급발진했다.
“이, 이 자식…! 어제도 신입이랑 바로 별채에서 따로 만날 약속을 잡은 걸 보고 의심스러웠는데 알고 보니 생각보다 더 가벼운 놈이었어!”
4호실은 체스휘의 멱살을 틀어잡고 광분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사실 나로서는 누구보다 가볍게 메이드 언니를 건드렸던 녀석이 저런 소리를 하는 게 더 웃겼다.
“이 샌님 같은 놈이! 지금까지 운빨로 퇴출당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게 감히 세라를…!”
흥분한 4호실을 마주한 체스휘의 입꼬리가 위로 비스듬히 올라가 가느다란 선을 그렸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레이븐 씨. 메이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려고 방에 들어온 거죠.”
체스휘의 멱살을 잡은 4호실의 손 위에 다른 손이 덧대졌다. 체스휘의 손은 4호실의 손을 전부 다 덮을 정도로 컸다. 그리고 꼭 피아니스트 손처럼 손가락이 길고 예뻤다.
“청소 좀 하고 나간 걸 가지고 되게 예민하게 구네요.”
“처, 청소?”
“그럼 그거 말고 할 게 뭐가 더 있는데?”
체스휘는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반문하며 4호실의 손을 풀어 냈다.
그의 눈빛이나 말투가 심히 무미건조해서, 체스휘와 메이드 언니 사이에 뭐가 있다고 오해한 4호실이 상대적으로 몹시 불순한 인간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불순한 인간이 여기 하나 더 있었다. 하지만 진짜 청소만 할 생각이었다면 왜 그렇게 붙어 있었지요?
“청소라고…? 진짜 청소? 그럼 세라랑 아무 사이 아니야?”
그나저나 4호실 이름이 레이븐이었구나. 이제 기억해야지.
4호실 양육자 레이븐은 체스휘의 말에 주춤하면서 물러났다.
“그, 그럼 진작 그렇다고 말할 것이지 왜 사람 오해하게….”
“혼자 착각해서 갑자기 달려들어 놓고 뭘.”
“그건…! 그래, 내가 실수….”
“그보다 린 씨, 내 방엔 왜 찾아왔어요?”
레이븐이 뒤늦게 자신의 행동이 민망해졌는지 얼굴을 붉히면서 뭐라고 변명하려 했다. 하지만 체스휘는 그런 레이븐을 무시하고 웃는 낯으로 나한테 고개를 돌렸다.
“일단 안으로 들어올래요?”
“아뇨.”
아, 그런데 체스휘의 권유를 너무 바로 거절했나? 나도 모르게 조금 전에 어둠 속에서 본 그의 모습이 떠올라서 그만.
“너무 즉답이네요. 상처받게.”
그러자 체스휘의 어깨가 힘 빠진 초식 동물처럼 밑으로 축 처졌다.
“혹시 린 씨도 오해한 건 아니죠? 방금은 메이드가 청소를 하러 들어왔는데, 제가 자고 있어서 깨워 준 거예요.”
“아하, 네. 그런데 저한테 굳이 설명해 줄 필요는 없답니다.”
“이런, 매정하시기까지.”
하지만 체스휘도 나를 진짜 방으로 들이려고 했던 건 아닌지, 내 반응을 보고 그냥 소리 없이 가볍게 웃었다.
“하긴, 방금 컵을 깨서 일단 대충 치우긴 했지만 아직 파편이 남았을지도 모르니 안 들어오는 게 나을 수도 있겠네요.”
나는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체스휘에게 궁금했던 것이나 확인하자 싶어서 물었다.
“체스휘 씨 혹시 매뉴얼 북 가지고 있어요?”
“매뉴얼 북이요? 그게 뭐죠?”
“레드포드 저택에 대한 안내서랑 이것저것이 적힌 책자라고 해야 할지.”
“그런 건 안 받았는데요.”
아, 역시 없나. 하긴, 원래 플레이어 전용이니까. 그래도 혹시 있으면 나 좀 보여 달라고 하려 했는데.
“무슨 소리야?”
그런데 그때, 어째서인지 아직까지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옆에 서 있던 레이븐이 끼어들었다.
“저택에 들어오기 전에 다들 안내 책자 받잖아.”
레이븐의 의구심 어린 눈이 체스휘에게 향했다. 체스휘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잠깐 기억을 더듬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그런 걸 받은 것 같기도 하고. 오래전 일이라 제가 깜빡했나 봐요.”
“고작 1년 전이면서 무슨…. 나보다 고작 몇 달 먼저 저택에 들어와 놓고는.”
레이븐이 옆에서 혼자 구시렁거렸다. 물론 체스휘는 그를 무시하고 금방 내게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확인해 보면 방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그 책자는 왜요?”
“아, 제가 받은 책자 뒷면이 찢어져 있어서 좀 빌리고 싶어서요.”
“그래요? 그럼 바로 찾아볼….”
“그런 거면 내가 빌려주지. 어차피 난 이제 다 외워서 볼 일도 없으니까.”
레이븐이 체스휘의 말을 가로챘다. 나로서는 나쁠 게 없는 제안이었다.
‘의외로 쓸모가 있는데?’
“그럼 잠깐만 빌려주세요.”
사실 양육자 중에 그나마 친분이 있는 게 체스휘라, 다른 사람한테는 이 매뉴얼 북에 대해 물어볼 생각 자체가 없었다. 일단 다른 양육자들은 나한테 적대적이니, 매뉴얼 북이 있어도 빌려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 만큼 레이븐의 제안은 나한테 굉장히 의외로 느껴졌다. 더군다나 바로 어젯밤의 일을 떠올려 봐도, 그와 내가… 썩 호의적인 관계는 아니지 않았던가?
“그럼 이제 볼일 다 끝난 거지? 어이, 신입. 나랑 조금 전에 하던 얘기나 마저 하자. 어제 일에 대해서.”
엥, 그 얘기 다 끝난 거 아니었어? 왜 계속 옆에서 죽치고 있나 했더니만 그런 이유였군.
“그러죠, 뭐. 그럼 전 그만 가 볼게요, 체스휘 씨.”
어찌 되었든, 나로서는 목적을 달성했으니 여기 더 서 있을 이유가 없긴 했다.
그래서 레이븐에게 매뉴얼 북을 받아 갈 생각으로 체스휘에게 인사하자, 그의 시선이 레이븐에게 미끄러졌다.
그런데 어디 냉방 틀었나요? 갑자기 왜 이렇게 공기가 서늘해?
“뭐야, 어디 창문 열렸어? 여기 복도가 좀 춥네.”
레이븐도 나와 같은 걸 느꼈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체스휘가 조금 전처럼 그런 레이븐을 무시하고 나한테 고개를 돌렸다. 그의 입가에 익숙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요, 린 씨. 그럼 이따가 또 봐요.”
그렇게 체스휘와 헤어져 계단을 내려가는 길에, 레이븐이 나한테 말했다.
“너 저 녀석이랑 너무 가까이 지내지 마.”
갑자기 이게 무슨 초등학생 같은 소리야?
레이븐은 조금 전에 떠나온 곳을 자꾸 뒤돌아보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왜요? 내가 누구랑 친하게 지내든 아저씨랑 무슨 상관인데요.”
“하, 신입 네가 이제 막 저택에 와서 진짜 혼자만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서 해 주는 소리야.”
그러고 나서 레이븐이 덧붙인 말은 참으로 기가 막혔다.
“저 녀석, 가진 능력이라고는 운 좋은 것밖에 없다고. 엘리트 출신이라 모든 방면에서 우수한 우리랑 다르게 떨거지 같은 놈이라니까? 내가 볼 때는 저택에서도 언제 퇴출당할지 몰라.”
아, 이 인간. 그놈의 엘리트 자부심 참. 여자 꼬실 때도 그렇고, 엘리트 출신이라는 걸 강조하지 않으면 자기 자랑할 게 없나?
그보다 이 아저씨, 엘리트 스텔라 출신이라는 것도 거짓말 같은데 말이야. 그리고 지금 이러는 것도, 역시 조금 전의 그 예쁜 메이드 언니 일 때문에 체스휘가 거슬려서 그러는 거 아니야?
“아저씨, 같잖은 공감대 형성하지 마요. 난 딱히 그쪽이랑 같은 카테고리로 묶이고 싶은 마음 없으니까.”
나는 차게 식은 눈으로 레이븐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레이븐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듯이 내게 성을 냈다.
“설마 너 지금 그 샌님 편드는 거야? 야, 그래도 어제 너랑 나랑 그 무시무시한 별채에서 같이 위기를 뚫고 나온 정이 있는데!”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쳐 놓고 무슨 정을 운운해?”
“그건, 그건! 아씨, 그건 도망친 게 아니라…!”
레이븐은 내 말에 뭐라고 변명하고 싶은 듯했지만, 마땅히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결국 그가 선택한 건 급히 말을 돌리는 것이었다.
“아, 그보다 내가 진짜 해야 할 말이 있었는데 그 샌님 때문에 잊고 있었네. 너 어제 별채에서 본 유령 얘기, 그거 1호실 누님한테는 말하지 마.”
그런데 레이븐이 꺼낸 말은 또 조금 의외였다. 나는 흥미가 동했다.
“그건 또 왜요? 아저씨, 뭐 아는 거 있구나?”
“아무튼 말하지 말라면 하지 말라고! 책자는 빌려줄 테니까 가져가든가.”
마침 방에 도착해, 레이븐은 서둘러 안에서 꺼내 온 저택 안내 책자를 나한테 던져 준 뒤 문을 쾅 닫았다.
하지만 원래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게 인지상정.
“안녕하세요, 1호실 언니!”
다음 날, 나는 정원에 나가 1호실 양육자인 마리엔과 얼굴을 마주하고 웃었다.
마리엔은 혼자 산책을 나온 듯, 벤치에 앉아 있다가 내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지금 날 뭐라고 부른 거지?”
“1호실 언니?”
자고로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했지. 일단 다른 양육자들에게는 흥미가 있었기에 먼저 살갑게 굴며 방긋 웃었다.
“저보다 연상 같으셔서요. 이렇게 부르면 안 돼요?”
그러자 검은 베일 속에서 서늘한 침묵이 전해져 왔다.
별채에서 본 여자 유령과 달리, 마리엔이 쓴 베일은 얇아서 그 너머의 얼굴이 내 눈에도 훤히 보였다.
그녀는 어디서 굴러들어온 게 함부로 친한 척을 하는지, 정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메이드들이랑 같이 산책을 나오셨나 봐요.”
그런 마리엔을 향해 여전히 웃는 낯으로 물었다.
“그런데 언니가 악마의 화원에 보낸 메이드는 오늘 안 보이네요. 결국 돌아오지 못했나요?”
마리엔이 앉은 벤치 뒤에 서 있던 메이드들이 내 말에 몸을 흠칫 떠는 게 느껴졌다. 마리엔은 예의 그 서늘한 눈으로 나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나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없는지, 마리엔은 첫 물음을 제외하고는 다시 입을 열어 내 말에 호응해 주지 않았다.
물론 나는 이 정도로 실망하는 성격이 아니라 뒷짐을 진 채로 산책이라도 하듯이 총총 걸어 마리엔의 뒤를 따라갔다.
“그나저나 1호실 언니, 별채에 있는 보라색 방에 대해 혹시 들어 봤어요?”
그러면서 짐짓 가볍게 스쳐 지나가는 듯한 어투로 마리엔을 떠보았다.
“그 복도에 검은 베일을 쓴 여자가 나오는데요, 머리 색이 붉은색이래요.”
바로 그 순간 1호실 양육자 마리엔의 걸음이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