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에게 제멋대로인 미뉴엘이 예비와 현역을 통튼 양육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말한 내용의 어느 부분은 다이안도 공감이 갔다. 양육자들은 몸과 마음이 연약한 아이들은 선호하지 않았다. 예비 양육자들의 투표율을 봐도, 육체가 강건하고 자신감이 강한 아이들이 늘 높은 순위에 드는 걸 알 수 있었다.
반대로, 성격이 소심한 아이들은 인기가 없었고,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의존적이거나 비굴하게 구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 듯했다. 아무래도 자기주장이 강하고 자립적인 쪽이 더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것으로 평가받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양육자가 도착했을 때도 긴장감을 숨기고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하려 애썼다.
벨벳 같은 긴 보라색 머리칼을 가진 린은 양육자답지 않게 순하고 앳된 인상이었다. 분홍색 눈동자가 특히 독특해서 눈길을 사로잡았는데, 저택에 들어온 첫날 모로스를 상대할 때는 무섭도록 날카로운 광채를 발했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양육자에게 달려가서 날 선택해 줘서 고맙다고, 지금까지 너무 기다렸다고 엉엉 울면서 매달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첫날부터 양육자가 그에게 질려 떠날까 봐 눈에 힘을 주고 눈물을 꾹 참았다.
발목을 다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이안은 혹시 첫날부터 조심성 없이 다친 그를 보고 린이 실망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녀는 그를 걱정해 주기까지 했다.
“아휴. 잠깐 눈 좀 뗐다고 이렇게 다치다니, 속상해라.”
“지금… 날 걱정하는 거야?”
“그럼 안 하나요?”
지난 일을 떠올리자 또 감동과 기쁨으로 마음이 울렁거려서 다이안은 괜히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자신에게도 이렇게 다쳤을 때 진심으로 걱정해 줄 사람이 생겼다는 게 기적처럼 느껴졌다. 더군다나 린은 다이안을 볼 때마다 정말 사랑스럽고 귀여운 것을 보듯이 매일 그를 칭찬해 주고 안아 주며, 아낌없는 애정 표현을 해 줬다.
특히 린은 그에게 처음 생긴 양육자였기에, 그런 만큼 그녀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다이안에게는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다이안도 고용인들이 린을 두고 소곤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어쩌면 린이 엘리트 출신일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다이안은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설령 린이 엘리트가 아니라 예비 양육자들 중에서 꼴찌였다고 해도, 다이안에게는 단 한 명뿐인 소중한 양육자였다.
‘그러니까…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다. 내 선물….’
다이안은 다른 아이들의 조언을 받아 곧 준비할 예정인 린의 선물을 떠올리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사실 그는 린이 혼자 갔었던 신입 양육자 환영회에서 누군가 그녀에게 악의 섞인 선물을 준 것을 알고 있었다. 린은 다이안에게 그런 흉흉한 일을 말하지 않았지만, 다른 아이들과 고용인들의 입까지 전부 막을 수는 없었다.
다이안은 도대체 어떤 고약한 인간이 린에게 그따위 시체꽃 같은 것을 선물이랍시고 준 건지, 너무나도 분통이 터지고 속상했다. 그래서 린에게 좀 더 제대로 된 환영 선물을 주고 싶었다.
다행히 평소에 다이안과 약간의 친분이 있던 비비와 레오가 그들의 양육자들이 좋아했던 선물을 추천해 줬다. 그러니 분명 린도 이 정도면 마음에 들 것이다.
창밖을 보는 다이안의 얼굴에는 어느새 또 보드라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
똑똑!
“체스휘 씨, 방에 계세요?”
그날 저녁, 다이안의 일정을 모두 마친 뒤 여유 시간이 났을 때 나는 체스휘의 방을 찾았다.
체스휘에게 혹시 매뉴얼 북이 있으면 보여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다른 양육자들의 매뉴얼 북도 다 내 것과 똑같은지 확인하고 싶었다.
분명 아까 다이안이 특정 단어를 말할 때, 내 귀에는 그것이 이상한 언어로 들렸다. 더군다나 아침 식사 전에 읽다 만 매뉴얼 북의 내용에도 어떤 부분에 검은 칠이 되어 있어 알아볼 수가 없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그 후에 다이안과 헤어져 방으로 돌아가 다시 한번 자세히 보니, 그건 잉크 자국에 가려진 게 아니었다. 그저 내가 알아볼 수 없는 복잡한 모양의 문자로 적혀서, 언뜻 보고 잉크 자국으로 착각한 것뿐이었다.
게다가 더 짜증스러운 건, 매뉴얼 북의 뒤로 갈수록 거의 다 이런 식으로 문장 곳곳이 뭔지 모를 문자로 적혀 알아볼 수 있는 내용이 무척 적었다는 점이었다.
‘이것도 시스템 오류인가?’
아니면 게임을 진행하면서 해금해야 하는 부분일 수도 있었다.
아무튼, 그래서 일단은 다른 양육자들의 매뉴얼 북과 비교부터 해 보자 싶어 이렇게 체스휘를 찾아온 것이다.
오늘 아침 메이드 사라로사에게 물어봐서 이제 양육자들과 아이들의 방은 전부 위치를 꿰고 있었다.
끼이이….
그런데 방문이 완전히 닫혀 있는 게 아니었나 보다. 내가 노크를 하자 문이 그 반동으로 조금 밀려나며 열렸다. 살짝 벌어진 틈이 꼭 얼른 들어오라고 나를 유혹하는 듯했다.
보통 게임에서 이런 식으로 여운 있게 문이 열리는 건 새로운 사건사고의 시작을 의미하던데.
그래도 나는 상식적인 플레이어이니, 아무리 NPC라 해도 허락 없이 막 방 안으로 들어가지는….
쨍그랑!
“체스휘 씨?”
하지만 1초도 지나지 않아, 스스로의 말을 번복하고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안에서 뭔가가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불현듯 아까 미뉴엘을 봤을 때 다이안이 한 말도 생각났다.
“미뉴엘 네 양육자, 너한테 감기라도 옮은 거 아니야?”
오늘 하루 종일 보이지도 않고, 지금도 방 안에 있는 건 맞는 것 같은데 대답이 없는 걸 보니, 다이안의 말대로 정말 어디 아픈 거 아닌가?
게다가 체스휘가 혹시 정말 감기라도 걸렸다면 그건 미뉴엘에게 옮아서가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일단 미뉴엘의 증상은 돌팔이 의사가 말했던 것처럼 진짜 전염성 있는 감기인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체스휘를 한밤중에 불러내 본의 아니게 밖에 오래 세워 뒀던 사람으로서, 정말 그가 감기라도 걸린 거라면 살짝 책임감이 느껴지려고 했다.
“엇.”
하지만 결국은 괜한 오지랖이었다.
다행히 체스휘는 침대 신세를 지고 있지 않았지만, 내가 맞닥뜨린 건 그것과 다른 의미로 난처한 상황이었다.
“린 씨?”
무엇보다도, 그는 혼자 있는 게 아니었다.
방 안은 어두웠지만 막상 밖에서 봤을 때만큼 빛 한 점 없이 어두컴컴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캐릭터를 생성할 때 설정을 조정해서 지금의 난 시력이 굉장히 좋았기 때문에,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 그럭저럭 선명하게 보였다.
체스휘는 일인용 소파에 앉아 있었다. 등받이에 반쯤 눕듯이 몸을 기댄 채 고개를 뒤로 젖혀 드러난 목이 희미한 빛에 반사되어 희게 빛났다.
그 상태로 그는 얼굴만 살짝 돌려 나를 보고 있었다. 게다가 그 바로 앞에서 소파의 등받이를 한 손으로 짚고, 체스휘의 위로 몸을 기울이고 있는 여인.
검은 단발에 요염한 눈물점을 가진 저 언니는 분명….
‘4호실이 추근거리던, 저택에서 도도하고 예쁘기로 유명한 메이드 언니!’
그런데 누가 봐도 지금 체스휘와의 자세나 분위기가 묘했다. 무엇보다도 저 메이드 언니의 손에는 지금 막 체스휘에게서 벗겨 낸 듯한 안경이 들려 있었다!
“내 방엔 어쩐 일이에요?”
그때 체스휘의 입술이 다시 한번 작게 열렸다. 기분 탓인지 나를 향한 그의 눈에 이채가 반짝이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체스휘와 지금도 몸을 가깝게 붙이고 있는 메이드 언니 역시 이 자리의 불청객인 나를 찡그린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방해해서 죄송하네요.”
나는 바로 뒷걸음질 쳐 문을 닫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세상에나.’
원래 게임 데이터들끼리 연애하는 경우가 시나리오상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건 좀 놀라웠다.
그 도도하던 메이드 언니와 체스휘라니, 의외성이 있네. 알고 보니 메이드 언니의 취향은 너드남이었던 건가?
더군다나 그 분위기는 도대체 뭐람? 지금까지는 체스휘를 보면서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는데,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체스휘의 맨얼굴은 놀랍게도 제법 퇴폐적으로 보였다.
아무래도 그와 함께 있던 세라가 섹시 요염 계열이다 보니, 그런 느낌이 더욱 짙어진 것 같았다.
“신입! 여기 있었구나. 한참 찾았잖아!”
누군가 복도의 끝에서 나타나 시끄럽게 소리친 건 바로 그때였다. 낯익은 얼굴을 보고 나도 아는 척했다.
“4호실 아저씨, 살아 있었네요?”
“잠깐 나 좀 봐.”
뭐가 그렇게 급한지, 4호실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하지만 급하게 온 것치고, 그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뜸을 들였다. 손으로 뺨을 쓸어내리면서 입술만 뻐끔거리는 얼굴이 밤새 잠을 하나도 못 잔 것처럼 퀭했다.
“뭐예요? 나 바쁘니까 할 말 있으면 빨리 해요.”
내가 채근하고 나서야 4호실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어제, 그, 그, 그거 역시 꿈 아니지?”
“뭘 말하는 거예요?”
나는 팔짱을 낀 채 4호실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별채에서 나한테 총 맞을 뻔한 일? 아니면 아저씨가 유령 보고 놀라서 혼자 도망친 일?”
내 말을 들은 4호실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어쩐지 낯빛은 허옇고 눈 밑만 시꺼멓더니, 지금까지 내내 현실 부정이라도 했나 보구먼.
“이씨, 그, 그럼 어제 내가 별채에서 본 그게 진짜 유령이라고? 잘못 본 게 아니고? 나 진짜 유령 나오는 저택에 살고 있는 거였어?!”
이 저택에 있는 유령이 그거 하나뿐인 줄 아나?
게다가 그나마 별채의 유령은 먼저 건드리지만 않으면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착한 유령이기라도 하지.
지금은 게임 초반이라 저택 안의 위험 요소로는 모로스만 나오고 있지만,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곳곳에서 악령까지 속출할 것이다.
“궁금하면 오늘 다시 가 볼래요? 아직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데, 가서 다시 한번 확인해 보든가.”
나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로 4호실에게 넌지시 권유하듯이 말했다.
“아, 아니. 나는 됐….”
“에구, 맞다. 아저씨는 겁이 많아서 무리겠구나. 뭐, 정 무서우면 용감한 내가 큰마음 먹고 같이 가 줄 수도 있고요.”
물론 진짜로 다시 4호실과 함께 사이좋게 오순도순 손잡고 별채에 갈 생각은 없었다. 그냥 4호실을 골려 주려고 한 소리였을 뿐이지.
“린 씨.”
그런데 바로 그때 뒤에서 소리 없이 문이 열리며 내 이름을 부르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뒤로 젖히자 뒤통수가 누군가의 가슴팍에 부딪쳤다. 그리고 안경알에 가려진 보라색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