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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16)화 (16/300)

검은 머리칼을 가진 어린 소년과 붉은 머리칼을 가진 여인의 평화롭고 안온한 한때였다. 그들은 누가 봐도 다정한 모자처럼 보였다.

하지만 행복했을 것이 분명한 시간이 지난 후, 소년은 붉은 꽃에 둘러싸여 죽었다. 장소는 지금 이 별채의 복도. 그는 여인에게 선물 받은 보라색 리본을 옷깃 아래 묶은 채 죽어 있었다. 여인이 장례식장에서 슬프게 절규하며 우는 모습을 끝으로 환영은 끝났다.

이건 에피소드의 종료를 알릴 때 플레이어들에게 보여 주는 영상이었다. 시스템이 고장 나서 다른 기능은 다 망가졌는데, 이런 영상은 어째서인지 아직 살아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본 환영은 그동안 게임을 하면서 보던 것과 좀 달랐다. 정확히 말하면, 환영 속에 나온 두 사람의 얼굴 디테일이 달라졌다.

참… 뭐가 뭔지 모르겠네. 이것도 새로운 버전에서 바뀐 설정인가?

환영이 사라진 자리에 검은 베일을 쓴 여자는 없었다. 꽃병 속의 흰 국화는 보라색으로 변해 있었다. 나는 그것을 한 송이 빼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린 씨.”

“어? 체스휘 씨. 4호실은요?”

3층과 4층 사이의 중간 층계참에서 체스휘와 마주쳤다.

오, 문이 열리자마자 벌써 여기까지 올라오다니, 속도가 빠른데?

나는 감탄했으나 체스휘는 내 질문을 듣고 뭔가가 마음에 안 드는 듯, 한쪽 눈썹을 비스듬히 추어올렸다.

“4호실이라면 좀 전에 별채 문이 열리자마자 헐레벌떡 밖으로 뛰어나가던데요.”

“그래요? 혼자 가다니 의리 없네.”

쫄았네, 쫄았어. 물론 내가 문 열리는 시간을 참고하라고 알려 주긴 했지만 이렇게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다니.

그런데 도대체 이 별채의 뭐가 무섭다고 그러는 거지? 어차피 여기에 와서 본 거라고는 벌레랑 검은 베일을 쓴 여자 유령밖에 없잖아? 더군다나 생김새가 무서운 것도 아니고, 어차피 베일로 다 가려서 얼굴도 전혀 안 보이는데.

“린 씨, 너무 4호실한테만 관심 있는 거 아니에요?”

그때 체스휘가 흐음, 하고 낮은 소리를 낸 뒤 내게 말했다.

“원래 오늘 나한테 여기서 보자고 그래 놓고선.”

별채가 어두워서 그런지, 계단을 올라오는 체스휘의 형체가 생각보다 크게 느껴졌다. 창밖에는 유독 불그스름한 기운이 감도는 달이 떠 있었다. 그 때문일까, 체스휘의 보라색 눈도 다른 때보다 붉어 보였다.

그는 여느 때처럼 약간 느릿한 목소리로 짐짓 투정을 부리듯이 말했다.

“귀신이 나오는 별채라고 들어서 무서운데도 꾹 참고 왔더니, 나는 문전박대하고 4호실이랑만 사이 좋게 노닥거리고.”

“4호실이랑 제가 사이좋게 노닥거리는 것처럼 보였다니, 체스휘 씨 시력이 별로 안 좋나 봐요.”

그러고 보니 손에 총을 그냥 들고 있는 게 떠올라서 체스휘가 보기 전에 슬쩍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애초에 4호실은 제가 부른 것도 아니에요. 그쪽도 다른 사람을 만나러 왔다고 하던데.”

“그래요? 이런 데서 다른 사람을요?”

“체스휘 씨가 밖에 있는 동안 혹시 별채에 온 사람 없었어요?”

“계속 저 혼자 있었어요.”

그럴 줄 알았어. 그 메이드 언니가 4호실 엿 먹이려고 부른 거라니까.

“참! 원래 오늘 우리가 여기 오려고 했던 목적도 달성했어요!”

아, 그러고 보니 지금 중요한 건 4호실이나 메이드 언니 같은 게 아니었다.

나는 손에 들고 있는 보라색 국화꽃을 체스휘의 눈앞에 ‘짠!’ 하고 흔들었다.

“이것만 가져가면 미뉴엘도 씻은 듯이 나을 거예요! 체스휘 씨도 이제 걱정 안 해도 돼요. 잘됐죠?”

“으음, 그걸 가져가면 된다고요?”

체스휘가 아까 미뉴엘의 방 앞에서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내가 든 국화를 지그시 응시하는 눈이 실로 오묘했다.

체스휘가 플레이어였으면 시스템 창이 다 설명해 줬을 텐데. 미뉴엘이 별채의 보라색 방에 대한 소문을 듣고 호기심에 왔다가, 영이 씐 물건을 잘못 건드려 악령의 저주를 받아서 어쩌고저쩌고하면서 말이다.

“맞습니다. 이걸 오늘 밤 머리맡에 두고 자면 오케이라고요. 그럼 갑시다!”

“아아, 네에.”

내가 먼저 팔을 잡고 끌자 체스휘가 미적거리며 따라왔다. 그러다 문득 조금 전에 환영으로 본 소년과 여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참, 체스휘 씨. 혹시 별채에 나타나는 귀신에 대한 소문 자세히 들어 본 적 있어요?”

아무래도 내가 그동안 알던 에피소드의 내용과 상세 설정이 좀 달라진 것 같아서 호기심이 들었다.

“아니요. 저는 잘 몰라요.”

“아, 그래요? 사람들이 별채 얘기 많이 하지 않아요?”

“그렇긴 한데 방금 말했지만 전 귀신을 무서워해서 안 들었어요.”

“진짜요? 농담 아니고요?”

“그럼요. 여기도 린 씨가 부른 게 아니면 안 왔을 텐데.”

체스휘가 나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왠지 진담인지 농담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아무튼 그에게 검은 베일을 쓴 여자와 보라색 방의 주인인 남자아이에 대해서는 더 물어보기 어려울 듯했다. 아까 영상을 보니, 지금 1호실 사람들이랑 되게 비슷하게 생겼었는데. 혹시 4호실은 뭔가 알려나?

이번에는 체스휘가 먼저 내 팔을 잡아끌었다.

“가죠. 미뉴엘이 기다리겠네요.”

우리는 더 이상 용무가 없어진 별채를 벗어났다.

***

깊은 밤.

미뉴엘의 방에는 색색거리는 숨소리만 들리고 있었다. 달이 하늘 꼭대기에 걸려 있음에도 방의 주인은 들끓는 열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 손님이 찾아왔다.

“미뉴엘.”

“체, 체스휘?”

방문이 열리고, 곧 부드러운 목소리가 미뉴엘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미뉴엘은 가쁜 숨을 헐떡이며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막 달빛이 비치는 방에 들어온 체스휘가 손에 무언가를 든 채 미뉴엘이 있는 침대로 걸어오고 있었다.

“뭐야, 이 시간에 왜….”

“왜기는. 아픈 거 낫게 해 주려고 왔죠.”

미뉴엘의 물음에 체스휘는 담담하게 답했다. 그러나 미뉴엘의 반응은 탐탁지 않았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 신참 양육자랑 뭔가 한 거지? 그거 나한테 소용없다니까….”

“아, 그건 나도 아니까 굳이 입 아프게 얘기할 필요 없고.”

그럼 도대체 뭘 말하는 건가 싶었으나, 미뉴엘은 곧 다가온 체스휘의 손에 들린 것을 보고 경악하고 말았다. 헉, 하고 숨을 급히 들이마신 미뉴엘이 이마에 얹혀 있던 물수건을 떨어뜨리면서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뭐, 뭐야…! 그걸 왜 네가 들고 있어?”

체스휘는 확연히 동요하는 그 모습을 보며 입술 끝을 느슨히 기울였다.

그가 미뉴엘의 방에 가져온 것은 가방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라진 린의 가방이었다.

체스휘는 당황해서 푸드덕거리는 미뉴엘의 앞에 가방을 떨어뜨렸다.

“어디에 숨겼는지 몰라서 찾는 데 시간이 좀 걸렸네요. 하여간 가만히 보면 정말 쓸데없는 짓을 잘한다니까.”

“어, 어떻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리예요, 미뉴엘.”

체스휘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후 그가 무료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날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면 실망인데.”

미뉴엘은 7호실의 양육자인 린이 저택에 온 첫날, 몰래 훔친 그녀의 가방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미뉴엘이 린의 가방을 탐낸 데에는 큰 이유가 없었다. 그냥 예비 양육자 시절 단 한 번도 미뉴엘을 선택한 적이 없다고 하는 린의 말을 듣고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그녀를 조금 골려 주고 싶었다. 또 모든 것이 베일에 싸인 새로운 양육자에 대해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충동적으로 린의 가방을 훔치고 나니 덜컥 두려운 마음이 들어서, 미뉴엘은 그것을 열어 보지도 못하고 꼭꼭 숨겨 놓았다. 그런데 그것을 체스휘가 찾아내 이렇게 미뉴엘의 눈앞에 들고 온 것이다.

미뉴엘은 평소에 체스휘를 막 대하던 모습과 대비되는 긴장감 어린 조심스러운 얼굴을 한 채 체스휘의 눈치를 보았다.

체스휘가 그런 미뉴엘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린 씨한테 처음 온 날, 양육자를 바꾸자는 소리를 했었다고 들었는데.”

순간 미뉴엘의 어깨가 흠칫 튀어 올랐다.

“내가 양육자인 게 그렇게 불만인 줄은 몰랐네요, 미뉴엘.”

“아, 아니야. 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다이안을 놀리느라 한번 해 본 소리….”

미뉴엘이 어물어물 변명했다. 그사이에 또 열이 올랐는지, 그의 뺨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조금 전보다 숨 쉬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미뉴엘, 저택에서 퇴출당하고 싶어요?”

체스휘가 이불 위에 떨어진 물수건을 느릿하게 주워들었다.

“귀여운 짓을 하나만 해도 귀찮을 판에 도둑질에 거짓말까지 하고.”

달빛을 머금은 나지막한 음성이 밤공기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니까 이렇게 벌을 받는 거잖아.”

체스휘가 미뉴엘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밀쳤다. 힘이 들어가지 않은 손길이었지만 미뉴엘은 몸에서 힘이 빠진 듯이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린은 미뉴엘이 별채의 악령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믿는 듯했지만, 사실 그건 귀여운 착각이었다.

미뉴엘은 지금 저택의 규칙을 어겨 벌을 받는 것이었다. 저택의 규칙은 아주 엄격하고 그에 대한 페널티가 돌아오는 정도는 변덕스러워서, 자칫 잘못하다가는 정말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체스휘는 손에 든 마른 물수건을 미뉴엘의 이마 위에 다시 올려놨다. 다른 때 같으면 신경질을 부렸지만 미뉴엘은 조용히 숨을 죽인 채 체스휘의 눈치를 보았다.

그런 그를 향해 체스휘가 혼잣말을 하듯이 중얼거렸다.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 왜 이렇게 겁이 없지. 또 내가 어떻게든 해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오늘따라 유독 붉게 보이는 눈이 어둠 속에서 싸늘히 빛났다. 미뉴엘은 찔끔해서 그의 시선을 피했다.

“한 번만 봐줘….”

“이미 너무 많이 봐주고 있는데.”

무언가를 재는 듯한 날카롭고 냉정한 눈빛이 미뉴엘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그러다 잠시 후, 체스휘의 입가에 천천히 옅은 미소가 스몄다.

“그래. 한 번만 더 봐주지 뭐.”

느릿한 손길이 미뉴엘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슬슬 지겹고 따분해서 그냥 이 짓도 그만둘까 했는데 왠지 이번에는 좀 재미있어질 것 같으니까.”

귓가에 낮게 읊조려지는 목소리에 미뉴엘은 살짝 소름이 돋았다. 달빛이 내린 보라색 눈이 붉은 광채를 내며 이질적으로 빛났다.

“대신 다음에 또 말없이 사고 치면 그땐 진짜 혼나요.”

짐짓 다정하게 흉내 낸 말에 미뉴엘은 바싹 굳어서 그저 고개만 열심히 끄덕였다.

“그리고 이건 린의 선물인데… 어차피 넌 필요 없으니까 내가 가져도 되겠지?”

질문의 형식이었지만 이미 그건 답을 구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가방 위에 올려져 있던 보라색 국화꽃을 들어 올린 체스휘가 향기를 맡듯이 꽃을 가까이 끌어왔다.

곧 기묘한 만족감이 담긴 미소가 그의 입가에 그려졌다.

아무래도 지겨웠던 저택 생활이 전보다 즐거워질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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