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몰라서 밤이 될 때까지 다이안을 살펴봤는데, 그는 아무 탈 없이 멀쩡했다.
우리 하얀 아기 고양이가 아프지 않은 건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건강함이 유일한… 아니, 가장 큰 장점이라는 옆방 아이와 달리 우리 아이는 개복치별의 사랑을 받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밤 10시가 되어, 나는 다이안에게 잠들기 전 마지막 인사를 하러 갔다.
“자, 밤이 왔어요! 착한 어린이는 이제 코오 잘 시간… 어?”
하지만 그의 방에 들어가자마자 시야에 비친 광경에 나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앗, 벌써 잘 시간이야?”
뜻밖에도 다이안은 방에 혼자 있지 않았다.
테이블에 오순도순 둘러앉아 머리를 맞대고 있던 아이들이 나를 보고 번쩍 고개를 들었다. 미어캣처럼 동시에 휙 머리를 돌려 나를 쳐다보는 얼굴들이 과연 게임의 주인공들답게 반짝반짝했다.
“와, 새로 온 양육자 누나다.”
“진짜네! 안녕하세요?”
나한테 삐약삐약 인사하는 모습들이 꼭 귀여운 병아리들 같았다.
다이안은 다른 두 명의 소년과 함께 친목 도모를 하고 있었던 듯했다. 한 명은 솜사탕 같은 분홍 머리에 연하늘색 눈을 가진 순하고 귀여운 인상의 소년, 또 다른 한 명은 갈색 곱슬머리에 주황색 눈을 가진 장난스러운 인상의 소년이었다.
분홍 머리 소년은 환영회 때 나한테 아는 척했던 3호실의 비비, 갈색 머리 소년은 엘리트 출신이라는 양육자를 둔 4호실의 레오였다. 참고로 이 두 사람은 육성 대상인 7명의 아이들 중에 가장 친화력이 갑인 아이들이었다.
“그럼 다이안, 이제 잘 시간이니까 우린 가 볼게.”
“내일 다시 얘기하자! 잘 자.”
귀여운 아이들이 자리에서 폴짝 뛰듯이 일어나 다이안에게 인사했다.
“그래, 너희도 잘 자.”
다이안도 의외로 평범하게 그들을 배웅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감격해서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안녕히 계세요, 누나!”
“다음에 또 놀러 올게요!”
내가 있는 문가로 타박타박 걸어온 아이들이 나한테도 공손하게 인사했다.
“그래…. 언제든 또 놀러 와, 얘들아.”
난 문을 나서는 아이들에게 촉촉한 눈빛을 보냈다. 뭐야, 뭐야! 뭐지, 이 기분? 처음으로 자식을 초등학교에 입학시킨 학부모의 마음이 이럴까? 혹은 처음으로 아들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 온 기분 같기도 한데?
“뭐야, 왜 그런 눈으로 봐?”
다이안이 웬 종이를 주섬주섬 숨기다가 내 시선을 받고 흠칫했다. 경계심 어린 눈빛을 띤 채 구겨진 종이를 옷 속에 쑤셔 넣고 몸을 빙글 돌리는 게 수상했다. 하지만 지금은 나도 다른 데 관심이 쏠려 있었다.
“다이안 도련님! 방금 저 애들 도련님 친구예요? 원래도 나 없을 때 가끔 친구가 놀러 오고 그랬어요?”
“가, 갑자기 왜 이래?”
“도련님이 친구들이랑 많이 친한지 궁금해서 그러죠!”
감동스러워서 그래! 난 당연히 우리 앙칼진 고양이한테 친구가 없을 줄 알았단 말이야. 물론 이런 말을 하면 다이안이 또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삐죽삐죽 세울 걸 알아서 속으로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뭐, 그냥 그래. 막 엄청 친한 건 아니고 그럭저럭?”
다이안은 이런 관심을 받은 게 처음인지 우물쭈물 말했다. 그래도 친구가 아니라고 하진 않는 걸 보니, 우리 아기 고양이가 내 생각보다 다른 아이들과 잘 지내고 있던 모양이다.
“다음엔 낮에 놀러 오라고 해요. 같이 과자도 먹고 또… 여기 애들은 친구랑 뭘 하고 노는지 모르겠네. 카드 게임이나 공놀이나 뭐, 그런 것도 하고?”
“요즘 누가 그런 걸 해, 유치하게.”
다이안이 내 말에 콧방귀를 뀌긴 했지만 그런 모습도 귀여웠다. 실실 웃으면서 다이안의 뺨을 쿡쿡 찌르자 그가 “아, 뭐.” 하면서 괜히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다이안은 내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잠깐, 혹시.”
그러다 어째서인지, 퍼뜩 다이안의 표정이 변했다. 혼자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이안이 나를 홱 돌아봤다.
“혹시… 관심 있는 거 아니지? 걔들한테.”
“관심 많은데요?”
당연하지, 우리 고양이 친구들인데.
하지만 내 말에 무슨 오해의 소지가 있었는지, 돌연 다이안의 눈이 거센 파도를 맞은 것처럼 흔들렸다. 그러다 그의 눈매가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걔네들도 다 양육자 있어! 사이도 엄청 좋아!”
그 첫마디에서부터 나는 다이안이 왜 또 까칠하게 털을 곤두세웠는지 이유를 알아차렸다.
“다들 페어 교체 없이 여기 있은 지 1년은 넘었다고. 애들이랑 양육자랑 엄청 돈독한 사이라 아마 앞으로도 자의로는 절대 안 헤어질걸?”
아유, 우리 애가 또 냥냥 펀치를 날리네. 나는 히죽 웃으면서 다이안의 머리가 헝클어지도록 마구 쓰담쓰담했다.
“그으래요? 공통점이 있네요. 우리도 1년 넘게 같이 있을 거고 절대 페어 교체 안 할 거니까.”
당장이라도 또 뭐라고 쏴붙일 듯이 뻐끔거리던 다이안의 입이 다물어졌다. 독 오른 복어 같던 얼굴도 다시 얌전해지고, 날카롭게 치켜뜨고 있던 눈도 서서히 동그스름한 모양을 되찾았다.
“나, 나는 잘 거야.”
자신이 오해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는지, 다이안의 얼굴과 귀가 서서히 빨갛게 달아올랐다. 눈에 띄게 하얀 은발이라 그런지, 급작스러운 색 변화가 더 극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나는 계속 웃으면서 삐걱삐걱 침대로 걸어가는 다이안의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 도련님, 방금 질투한 거죠? 그렇죠?”
“아니, 아니거든?”
“에이, 맞는 것 같은데?”
“아니라니까.”
그렇게 다이안에게 저녁 인사까지 마치고 나자 완전히 안심이 되었다.
‘좋아, 우리 애는 오늘 안전한 게 맞고.’
이 시간까지 아픈 곳이 없는 걸 보면, 역시 이번 에피소드에서는 개복치 신이 다이안을 살짝 비껴갔나 보다. 물론 미뉴엘이 대신 아픈 것 같아 안쓰러웠지만… 체스휘랑 같이 빨리 낫게 해 주면 되겠지.
아무튼 오늘 밤에도 귀여운 걸 봐서 기분 전환도 되었겠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산뜻하게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러던 길에 눈 버리는 광경을 목격했다.
“하, 싫다고 했잖아요.”
“그러지 말고 다시 생각해 보라니까? 내가 뭐 엄청 대단한 걸 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냥 산책이나 한번 같이 하자는 건데!”
웬 남자가 메이드에게 추근거리고 있는 장면이었다.
저 검은 머리 메이드는 나도 얼굴을 알고 있었는데, 레드포드 저택에서 예쁘고 도도하기로 치면 한 손에 꼽는 유명한 메이드였다.
반면 남자는 얍삽한 인상의 생기다 만… 까지는 아니고, 그냥저냥 나름대로 괜찮게 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딘가 비열한 느낌이 스며들어서 살짝 꺼려지는 인상이었다.
그 남자 역시 내 눈에 익은 사람이었다. 지난번 환영회 때 본 양육자 중의 한 명. 조금 전에 다이안의 방에서 본 갈색 머리 소년 레오의 양육자, 4호실의 남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굳이 외우려고 노력하지 않아서인지 이름은 생각나지 않았다.
“참나, 그만 좀 튕겨. 이 저택에 나 정도 되는 남자가 또 올 것 같아? 내가 엘리트 출신이라 앞길이 탄탄대로인 거 모르냐고!”
추근거리다가 뜻대로 안 돼서 기분이 상했는지, 4호실이 날카롭게 말하며 메이드의 팔을 잡으려는 듯이 손을 뻗었다.
“그러니까 지금 기회가 왔을 때 바보같이 놓치지 말고 얼른 잡으란 말….”
“아, 관심 없다니까 왜 자꾸 귀찮게 굴어!”
“으악!”
하지만 과연 도도하기로 유명한 메이드 언니였다. 그녀는 4호실에게 팔을 잡히기 전에 냅다 그의 정강이를 걷어차 버렸다.
4호실이 다리를 부여잡고 메뚜기처럼 폴짝폴짝 뛰었다. 그러는 동안 메이드는 짜증스럽게 씩씩거리면서 자리를 벗어났다.
“아으, 진짜 끝까지 도도하게 구네. 뭐, 그게 좋은 거긴 한데….”
정말 아팠는지 눈꼬리가 살짝 촉촉해진 4호실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그와 내 눈이 마주쳤다. 설마 목격자가 있을 줄 몰랐는지, 4호실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 헉 숨을 들이켰다. 곧이어 그의 얼굴에 빠르게 열이 몰렸다.
“뭐, 뭘 봐!”
“너요.”
나는 해로운 벌레를 보는 듯한 눈빛을 띤 채 나한테 질문한 남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에, 에잇, 재수가 없으려니까!”
얼굴이 더 빨개진 4호실이 수치스러운 듯이 뭐라고 욕설을 내뱉었다. 그 이후 서둘러 도망치듯이 쿵쿵거리면서 자리를 떠나는 그를 나는 떫은 눈으로 쳐다봤다.
참나, 수치스러운 걸 알면 그런 짓을 하지를 말든가. 내세울 게 엘리트 출신이라는 것밖에 없나? 저 메이드 언니가 얼마나 얼굴과 인품을 따지는데 별 꼴뚜기 같은 게 들이대고 있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방으로 돌아갔다.
***
또각또각.
11시 소등 시간이 되자 복도를 걸어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밤 외출을 위해 필요한 준비물을 정비했다. 그리고 시간이 되었을 때 방을 나섰다.
복도에는 불이 반쯤 꺼져서 어두컴컴했다. 고용인들도 모두 자러 갔는지 쥐 죽은 조용한 복도에는 음침한 어둠이 깔려 있었다.
‘좋다, 이 음산함. 당장이라도 뭐가 튀어나올 것처럼 스릴 있어!’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릴 뻔하다가 아차 해서 입을 찰싹 때렸다. 혹시 가는 길에 체스휘와 마주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우연은 생기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 넓은 저택에서 체스휘가 어느 방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물어봐야겠다 싶었다. 그러고 보니 체스휘뿐만이 아니라 다른 양육자들의 방도 아직 어디인지 몰랐다.
뭐, 꼭 친목 도모를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알아두면 나쁘지 않으니까…. 아무래도 이번 일을 마무리하면 본격적으로 양육자들을 파헤쳐 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싶었다.
잠시 후 도착한 별채는 숙소 건물보다 더 조용했다.
체스휘는 아직 오지 않은 것 같았다.
‘혹시 바람맞히는 건 아니겠지? 숙녀 혼자 한밤중에 귀신 소굴에 들어가게 내버려 둘 정도로 양심 없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는데.’
저녁에 다시 한번 찾아갔을 때, 미뉴엘은 여전히 골골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체스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간병 중이었다. 그러니 체스휘라면 미뉴엘을 위해서라도 꼭 올 거라고 생각했다.
짤랑.
나는 먼저 열쇠를 꺼내 별채 정문의 문을 열었다. 소리 없이 다가온 누군가가 내 뒤로 바싹 붙어선 것은 바로 그때였다.
철컥!
나는 주저 없이 총을 꺼내 막 나한테 손을 뻗은 사람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그러자 앞에서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헉! 뭐, 뭐야!”
“뭐긴 뭐야. 총 처음 봐?”
뒤돌아서기 전에 예상했듯이 지금 나타난 건 체스휘가 아니었다.
내 다른 손에 들린 등불에 창백하게 질린 남자의 얼굴이 비쳤다. 주황색 머리카락과 검은색 눈. 족제비 같은 인상에 뾰족한 턱. 갸름한 눈매.
아까 복도에서 봤던 4호실 남자가 자신의 머리를 겨눈 내 총을 보고 다시 한번 헉 소리를 냈다.
“너 미, 미, 미쳤어? 당장 이거 치워!”
“싫은데?”
사실은 조금 전부터 주변을 맴도는 인기척을 느끼고 있던 참이다. 그래서 갑자기 나타난 남자의 존재가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발걸음 소리가 아까 정강이를 걷어차여서 한쪽 다리를 살짝 끌던 4호실과 비슷해서 진작부터 의심을 품고 있기도 했다.
“지금…! 지금 그걸로 날 쏘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너, 네가 그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