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들으면 시한부 환자라도 앞에 둔 줄 알겠네. 방금 돌팔이 의사가 한 말은 철석같이 믿는 것 같더니, 왜 또 지금은 당장 숨넘어갈 애를 보는 것처럼 이러는지 모르겠다.
“체스휘 씨, 미뉴엘은 그냥 지쳐서 누운 거예요. 그러니까 좀 진정하세요.”
아무래도 체스휘의 간호 아닌 간호를 받는 동안 미뉴엘의 얼굴빛이 점점 더 나빠지는 것 같아서 그만 이성을 찾으라는 의미로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러자 체스휘가 또 우울한 사슴처럼 나를 돌아보았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미뉴엘이 이렇게 갑자기 앓아눕다니….”
비통한 어조로 읊조린 체스휘가 침대에서 시름시름 앓고 있는 미뉴엘에게 더 가까이 몸을 붙였다.
“어린아이들에게는 감기도 치명적일 수 있다고 교육 기관에서 배운 내용이 사실이었나 보네요.”
새 수건을 집어 든 체스휘의 손이 침대의 머리맡에 있는 대야로 움직였다. 미뉴엘의 이마에 올라간 물수건을 갈아 줄 생각인가 보다.
그런데 지금 체스휘가 한 말, 왠지 이상한 위화감이 드는데.
“미뉴엘은 지금까지 감기에 걸린 적이 한 번도 없었나 보죠?”
“네, 저희 미뉴엘은 건강함이 유일한… 아니, 가장 큰 장점이라서요.”
잠깐. 방금 미뉴엘에 대한 굉장히 야박한 평가가 체스휘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나요?
어쨌든, 아까만 해도 혹시 체스휘가 자유 방임형 양육자인 건 아닌지 의심했는데, 이렇게 미뉴엘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내가 괜한 오해를 한 것 같았다. 하긴, 미뉴엘이 좀 제멋대로인 성격이라 여기저기 혼자서 잘 쏘다니는 것 같긴 하더라.
“그래도 일단 감기약은 먹였으니 미뉴엘도 한숨 자면 나아지겠죠?”
“제가 봤을 때 보통 감기는 아닌 것 같은데요.”
“그래요?”
체스휘가 나를 돌아보며 새 물수건을 미뉴엘의 이마에 내려놨다. 그런데 철퍼덕 소리가 나는 게 이상해서 봤더니, 수건의 물기를 하나도 안 짜서 미뉴엘의 얼굴로 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으으…. 차, 차가워….”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있던 미뉴엘이 진저리를 쳤다.
음, 체스휘는 간호에 대해 진짜 아무것도 모르나 보다. 조금 전에도 꼭 감기에 걸린 사람 자체를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선 듯이 말하더니.
“갑자기 이렇게 된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체스휘 씨가 미뉴엘과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혹시 짐작 가는 점 없어요? 평소랑 달랐던 점이라든가.”
나는 미뉴엘의 이마에 있는 물수건을 다시 걷어서 대야에 물기를 짰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체스휘를 떠봤다.
“글쎄요….”
체스휘는 내 말을 듣고 무언가를 생각하듯이 목소리를 살짝 낮게 깔았다.
“미뉴엘. 지금 린 씨 말 들었죠?”
미뉴엘의 젖은 머리칼을 느릿하게 쓰는 그의 손길이 퍽 상냥했다.
“혹시 이렇게 갑자기 아픈 이유가 뭔지, 알고 있는 거 있어요?”
여전히 열 때문에 오한이 드는지, 미뉴엘이 몸을 바르르 떨었다.
“모, 몰라, 나는….”
미뉴엘은 거짓말에 능하지 못한 것 같았다. 체스휘의 질문에 부정하는 미뉴엘의 목소리에는 무언가를 숨기는 느낌이 물씬 배어나고 있었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물기를 짠 수건을 미뉴엘의 이마에 부드럽게 다시 올려 주면서 이번에는 그를 직접 떠봤다.
“혹시 저택의 규칙에 어긋나는 일을 했다거나?”
그런데 돌려 말하는 건 취향이 아니라 처음부터 너무 정곡을 찔러 버렸나?
순간 주변이 아주 조용해졌다. 마치 방 안에 놓인 식물조차 일시에 호흡을 멈춘 듯한 갑작스러운 침묵이었다. 괜스레 피부에 닿는 공기의 온도마저 뚝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미뉴엘은 숨조차 멈춘 것 같은 얼굴을 한 채 나한테 굳은 눈을 고정하고 있었다.
‘응? 이 정도로 놀라고 당황할 일인가?’
좀 이상했지만 아무튼 미뉴엘의 상태 이상을 해결할 필요는 있었기 때문에 다 안다는 듯이 말했다.
“몰래 방을 빠져나가서 비밀스러운 일을 했다든가.”
“헉.”
“맞지?”
흔들리는 미뉴엘의 동공이, 지금 그가 얼마나 당황했는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나는 더 의기양양해졌다.
“그, 그게 무슨… 나, 나는 그런 일은….”
“보라색 방.”
“뭐?”
“소문 듣고 호기심이 들어서 어젯밤에 몰래 나갔다 왔지? 그렇지?”
날 속이려 해도 소용없단다, 이 깜찍한 노란 고양이야. 이미 이 첫 번째 게임 에피소드는 지겨울 정도로 해 봐서 내용을 다 꿰고 있단 말이다.
물론 이번에는 진행 방향이 좀 달라져서 다이안 대신 미뉴엘이 아픈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어쨌든 간에, 하필 첫 번째 에피소드가 시작될 예정인 오늘 미뉴엘이 이런 갑작스러운 증상을 보인다는 건 시기가 굉장히 공교로웠다.
“그, 그래…! 내가 거기 갔었다, 왜!”
아니나 다를까, 미뉴엘은 숨을 씩씩거리며 자신이 한 일을 시인했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이맘때쯤 레드포드 저택 안에서 별채의 보라색 방에 대한 소문이 불거지는 것도, 또 육성 캐릭터들이 개개인의 성격에 따라 각자 다른 이유로 거기에 몰래 가 보는 것도, 에피소드 1에서 늘 변하지 않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스템이 망가져서 강제력이 없는 만큼 그래도 혹시 몰라 떠봤는데, 이런 건 이번 버전에서도 변함없이 똑같은가 보다.
“아. 보라색 방이라면, 그 별채의?”
체스휘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인지, 한 박자 늦게 미뉴엘과 내 대화에 반응했다.
“미뉴엘, 한밤중에 몰래 방을 빠져나가서 거기에 갔었다고요?”
“그, 래…! 그냥 소문 듣고 궁금해서 한번 가 본 것뿐이야! 그게 뭐!”
미뉴엘은 오히려 큰 소리를 쳤다. 하지만 자신의 잘못을 알긴 아는지, 그의 두 눈은 여전히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얼굴이 조금 전보다 빨개진 걸 보니 흥분해서 열이 더 오른 것 같았다.
에구, 이러다가 증상이 더 심해지겠네.
“체스휘 씨, 미뉴엘은 일단 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우린 그만 나가죠.”
어차피 이건 감기가 아니라 간호한다고 낫는 것도 아니니까.
“미뉴엘… 린 씨 말대로 일단 쉬고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
놀라움이 가신 뒤 다시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는지 우울한 사슴으로 돌아간 체스휘가 미뉴엘의 가슴을 도닥였다. 미뉴엘은 앓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바들거리는 팔을 들어 체스휘의 손을 앙칼지게 쳐 냈다.
“가기 전에 물수건이나 한 번 더 바꿔 주고 가 봐.”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도 까칠하게 명령하는 게 미뉴엘다웠다.
이번에도 체스휘가 물에 흥건하게 젖은 수건을 미뉴엘의 이마에 그대로 얹으려고 해서 내가 또 대신 손을 써야 했다.
“자, 그럼.”
그런 뒤 미뉴엘의 방 밖으로 나와서 체스휘에게 말했다.
“오늘 밤 12시에 별채 정문 앞에서 만나요.”
“네?”
체스휘는 무슨 소리냐는 듯이 나를 돌아봤다. 나는 구두의 앞코를 바닥에 문지르며 의미심장한 얼굴로 웃었다.
“체스휘 씨도 미뉴엘이 걱정되잖아요? 아무래도 감기약으로는 안 나을 것 같으니까 가장 의심되는 부분부터 해결할 방법을 찾아봐야죠.”
원래 이 에피소드는 게임 NPC 중에 동료를 한 명 포섭해서 가야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대개 룸메이트인 사라로사를 꼬드겨서 데려갔었는데, 이번에는 마침 미뉴엘의 양육자이기도 한 체스휘가 있으니 그를 데려가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호감도가 높을수록 포섭 확률이 높아져서 지금까지는 효율성을 고려해 매번 그냥 사라로사를 선택했었다. 하지만 항상 비슷한 루트로 움직이는 것도 솔직히 지겨웠던 참이다.
‘그래서 초반 에피소드는 물릴 대로 물려 무조건 속전속결로 해결했었지.’
그런데 이번엔 뜻하지 않은 게임 오류로 모처럼 새로운 캐릭터가 생겼으니, 신선함을 추구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호감도가 높지 않더라도 체스휘는 미뉴엘 때문에 보라색 방에 가야 할 이유가 있었으니까, 그를 설득하는 게 어려울 것 같지도 않았고.
사실은 반대로, 이번에는 내 육성 대상인 다이안이 아니라 미뉴엘이 아픈 만큼 굳이 내가 직접 나서야 할 이유가 없긴 했다. 하지만 비록 우리 애는 아니더라도, 미뉴엘이 저렇게 앓는 걸 보니 영 안쓰러워서 도와주고 싶었다.
내 말을 들은 체스휘의 반응은 처음에 미지근했다.
“설마 별채에 있는 보라색 방에 가 볼 생각이에요? 하지만 열쇠도 없는데….”
“열쇠가 왜 없어요.”
짤그랑.
내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자 체스휘는 잠깐 할 말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진작 빌려 왔죠.”
“저택 고용인들이 별채 열쇠를 이렇게 쉽게 줬다고요?”
“당연히 말없이 빌려왔죠.”
내 당당함에 그는 깊은 감명을 받은 얼굴이었다. 혹시 체스휘의 반응이 아까부터 좀 떨떠름한 느낌인 게, 별채에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 때문에 꺼림칙해서인가 싶었다. 그래서 의욕을 북돋듯이 그의 팔을 툭툭 쳤다. 사실은 어깨를 토닥이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위치가 높아서 팔로 적당히 타협을 봤다.
“혹시 소문 때문에 꺼려지는 거면 나만 믿어요. 내가 지켜 줄게요.”
이래 봬도 에피소드 1은 43번이나 거친 짬밥이 있으니, 혹시 이번 버전에서 전개가 좀 달라져도 얼마든지 응용해서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내 말이 믿음직스러웠는지, 체스휘는 더 이상 동행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만만한 내 얼굴을 보고 탄성까지 작게 내뱉었다. 한순간 왠지 그게 탄성이 아니라 탄식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흠, 잘못 들었겠지.
아무튼 그렇게 오늘 밤 별채에서의 만남을 약속한 뒤 체스휘와 나는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