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데려가라.”
“예, 마리엔 님.”
“마리엔 님, 제발 용서를…!”
메이드가 절절하게 용서를 구하며 외쳤으나 마리엔은 자신을 붙든 손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매몰찬 건 다른 메이드들도 마찬가지였다.
손목에 붉은 끈을 묶은 마리엔의 메이드들이 바닥에 무릎 꿇은 사람을 데리고 린의 반대 방향으로 사라졌다. 마리엔은 멀어지는 그들의 모습을 싸늘한 눈으로 지켜보다가 방으로 들어갔다.
‘악마의 화원?’
린은 복도가 조용해지고 나서야 다시 모퉁이를 돌아 나왔다.
조금 전 들은 대화에 나온 ‘악마의 화원’이란 곳은 지금까지 한 번도 게임에 나온 적이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거기가 어디기에 메이드가 저렇게 질색하는지,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뉴 캐릭터! 뉴 맵!’
원래 고인 물 유저들은 새로운 콘텐츠에 목말라 있는 법. 그건 린도 마찬가지여서, 새로운 맵의 정보를 알게 되자 군침이 싹 돌았다.
‘어차피 지금은 아침이고,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살짝만 가 볼까?’
첫 번째 에피소드를 앞두고 다이안을 주시해야 할 시간이 오기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린은 소리 죽인 발걸음으로 조금 전까지 서늘한 기운이 감돌던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메이드들이 향한 곳에는 밖으로 연결된 문이 하나밖에 없으니 금방 뒤쫓아서 그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여긴 양육자들 권한이 큰가 보지?’
아무리 잘못을 저질렀다고는 하나 메이드 하나를 저렇게 개인적으로 처벌하다니 말이다. 게다가 양쪽 다 저택의 단순 고용 관계라기엔, 마리엔을 대하는 다른 메이드들의 태도도 묘하게 충성심이 있어 보였다.
린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혹시 마리엔이 환영회 때 그녀를 위해 깜찍한 선물을 준비한 범인은 아닐지 생각해 봤지만 역시 이쪽은 아닐 것 같았다.
‘사실 의심되는 사람이 따로 있긴 한데…. 그보다 아까부터 내 뒤를 쫓고 있는 병아리는 언제 나오려나?’
다이안의 방을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그녀를 미행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실을 진작 눈치채고 있었지만, 린은 내색하지 않았다.
미행에는 재능이 없는 듯, 기척을 전혀 숨기지 못하는 사람은 어린 소년이었다. 게다가 아까 언뜻 휘황찬란한 금발이 보인 걸 보면, 범인은 첫날 만났던 2호실의 미뉴엘이 분명했다.
그런데 미뉴엘은 왜 양육자도 없이 혼자 이렇게 돌아다니고 있지? 보통 다른 아이들은 방금 본 마리엔처럼 전담 양육자들이 옆에 찰싹 붙어 있는 것 같던데.
“흐음.”
‘혹시 체스휘 씨는 자유 방임형 양육자인가?’
아까 아침 식사 시간에 다이안이 꺼낸 ‘애착형 양육자’라는 말을 토대로 가져다 붙여 본 것이었다.
물론 린도 지금 다이안과 떨어져 있었지만, 그건 다이안이 가정 교사에게 수업을 들을 시간이기 때문이다.
저택의 아이들은 각자의 스케줄에 맞춰 여러 가지 과목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러지 않는 시간에는 양육자가 아이들 옆에 붙어 있는 게 보편적인 것 같았다.
뭐, 하지만 원래 아이들이란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법이었다. 그러니 미뉴엘이 양육자인 체스휘를 두고 혼자 몰래 밖으로 빠져나온 것일 수도 있었다.
린은 노골적으로 그녀를 쫓아오는 소년의 속셈이 뭔지 궁금했다. 그래서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척 건물을 나섰다. 예상대로 얼마 걷지 않아, 앞서간 메이드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뭐야, 어디까지 가는 거야?’
그들은 으슥한 후원 쪽으로 향했다. 린은 괜히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혹시 저택을 돌아다니다가 위험한 상황에 맞닥뜨리면 사용하려고 사자 동상 밑에서 꺼내 온 총을 옷 속에 숨겨 놓고 있었다.
43회차의 경험치로 린의 사격 실력은 아주 출중했다. 총만이 아니라 첫날 다이안의 방에서 썼던 칼이나 창, 도끼, 단검, 석궁, 그 밖에 온갖 무기와 저택 곳곳에 마련된 무기 대용품을 전부 사용할 줄 알았다.
애초에 린은 이런 액션 공포 장르 게임의 마니아답게 시나리오에 포함된 전투를 즐기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번 시스템 오류로 유혈 같은 부분까지 지나치게 현실감 있게 된 건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그러니 시스템 복구 전까지는 웬만하면 괴물이나 악령과 자주 마주칠 일이 없는 게 가장 좋은 일이었다.
“우와, 문 크다. 후원 안에 이런 데가 숨겨져 있었네?”
잠시 후, 린은 생각보다 거대한 철문 앞에 섰다.
조금 전 메이드들이 저택 뒤쪽의 후원과 연결된 이 녹슨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니 이곳이 그들이 말한 악마의 화원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화원치고는, 문 너머에서 아무런 향기도 풍겨 나오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것도, 끝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안개에 가려진 오솔길과 그 앞에 무성하게 자라난 녹색 풀들뿐이었다.
‘그런데 느낌이 좀 이상한데?’
정확히 표현하지는 못하겠지만, 이 안에서 묘하게 찝찝하고 불쾌하면서 불길한 기운이 스멀거리며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린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눈앞의 철문으로 직접 손을 뻗었다.
“잠깐…!”
아까부터 그녀를 미행하던 미뉴엘이 나무 뒤에서 뛰쳐나온 건 바로 그때였다.
“7호실 신참, 지금 뭐 하는 거야? 거기서 손 떼!”
내심 그를 기다렸던 린이 반색해서 인사를 건넸다.
“우와, 언제 나와서 아는 척해 줄까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생각보다 금방이네? 안녕, 미뉴엘?”
“안녕… 이 아니라! 뭐, 뭐야! 내가 뒤쫓아 오는 걸 알고 있었어?”
미뉴엘은 린의 반응에 당황했다. 그는 혼자 묻고 혼자 답을 낸 듯, ‘역시 무서운 여자!’라고 중얼거리면서 다급히 린에게서 한 발짝 뒷걸음질 쳤다.
“아니, 그보다 당신 지금 뭐 해? 이 화원에는 왜 들어가려고 하는 건데! 여기가 어떤 곳인지 몰라?”
“악마의 화원이잖아? 너도 같이 산책할래?”
“뭐, 뭐라고? 여기가 악마의 화원인 걸 알면서 산책…?! 더군다나 같이 들어가자고?”
오전인데도 강렬한 햇빛 때문인지, 아니면 린을 바쁘게 따라왔기 때문인지, 오늘따라 빨갛게 달궈진 얼굴을 한 미뉴엘이 혼란스러운 눈빛을 했다.
“엘리트 출신 양육자가 기본 정보도 없이 저택에 왔을 리는 없고…. 내가 미행하는 것도 알고 있었던 걸 보면, 혹시 내 반응을 떠볼 생각인 건가?!”
제 딴에는 혼잣말이랍시고 중얼거린 모양이지만, 그런 것치고는 목소리가 너무 컸다.
그런데 왠지 뭔가를 착각한 것 같은데. 어쨌든 혼자서 또 자문자답해 결론을 내린 듯한 미뉴엘이 다시 시선을 들어 린을 째려봤다.
“뭐야, 같이 산책할 생각이 아니면 왜 따라왔어?”
“그, 그건….”
“응? 왜 따라왔는데?”
하지만 이번에는 미뉴엘의 입이 다시 열리기 전에 린이 선수를 쳤다. 린이 더 가까이 다가가서 시선을 맞추며 묻자 예쁜 소년이 티 나게 몸을 흠칫 떨었다.
“그냥… 마침 지나가다가 보여서 혹시 수상한 짓은 안 하나 보러 와 봤을 뿐이야!”
왠지 핑계를 대는 느낌이었지만 린은 굳이 딴지를 걸지 않았다.
“에이, 내가 무슨 수상한 짓을 한다고.”
“그럼 왜 새로운 양육자가, 겁도 없이… 이런 악마의 화원 앞을… 얼씬거리는, 흐으.”
그런데 어째서일까?
린을 손가락질하며 비난인지 뭔지 모를 말을 쏘아붙이던 미뉴엘이 중간부터 목소리를 천천히 늘이더니, 이내 하던 말을 끝맺지도 못하고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미뉴엘? 갑자기 왜 그래?”
가까스로 혼자 균형을 잡고 서긴 했지만, 미뉴엘은 숨을 쉬기 어려운 듯이 일그러진 얼굴로 목과 가슴 부근에 손을 댔다. 린은 조금 전보다 더 붉어진 얼굴로 거친 숨소리를 내뱉는 미뉴엘을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시, 신참 씨.”
그때, 미뉴엘이 목구멍에서 아주 힘들게 쥐어짠 듯이 동정심마저 들 정도로 가냘픈 음성을 입술 사이로 내뱉었다.
“나… 기절할 거 같아.”
“뭐?”
“그러니까, 빨리… 이리 와서 날 부축….”
이 와중에도 꼭 어린 폭군이 제 시종에게 명령하듯이 린에게 말하며 손을 내밀던 미뉴엘이 허물어졌다. 린은 반사적으로 앞으로 뛰어나가 쓰러지는 미뉴엘을 붙잡았다.
손에 닿은 미뉴엘의 팔은 아주 뜨끈뜨끈했다. 조금 전에 오늘따라 유독 붉다고 느낀 얼굴은 강한 햇빛 탓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미뉴엘의 온몸에서 열이 펄펄 끓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린은 이 상황이 왠지 모르게 익숙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라?”
어째서인지 원래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다이안이 앓아야 할 증상을 미뉴엘이 대신하고 있었다.
***
“예에…. 그냥 단순 감기네요.”
미뉴엘의 방으로 불려 온 레드포드 저택의 주치의, 닥터 콘라드가 환자를 진찰한 결과를 말했다.
“단순 감기요?”
긴 갈색 머리를 하나로 대충 헐렁하게 묶은 잘생긴 남자는 이 상황이 아주 귀찮고 성가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처음 왔을 때부터 찌푸리고 있던 눈썹을 한번 펴지도 않았다.
미뉴엘의 가슴팍에 대충 가져다 대는 시늉만 한 청진기를 주섬주섬 챙긴 닥터 콘라드가 이번에는 뿌연 외알박이 안경을 벗어서 옷으로 대충 슥슥 닦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일단 감기약을 드릴 테니 정신 차리면 먹이시고…. 틈틈이 수분 보충이나 잘해 주십시오.”
나는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인 상황에 쯧쯧 혀를 찼다.
갑자기 열이 심하게 나면서 애가 쓰러졌는데 단순 감기라니. 역시 게임에서 봤던 대로 월급 값을 못 하는 돌팔이 의사였다.
“대부분은 밤에 배를 내놓고 자서 탈이 나는 거니까 이불을 잘 덮도록 주의 시키시고요.”
“그렇군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하지만 체스휘는 아직 이 인간의 실체를 모르는 듯, 황당해하기는커녕 돌팔이에게 순순히 감사 인사를 전했다.
조금 전 체스휘는 복도에 나와 방에서 사라진 미뉴엘을 찾고 있다가, 느닷없이 내게 업혀 온 아이를 보고 깜짝 놀란 것 같았다.
지금도 침대에 누워 시름시름 앓는 미뉴엘을 내려다보며 탄식하는 체스휘의 모습이 꼭 상심해서 축 처진 수사슴 같았다.
“쯧. 하여간 극성 양육자들이란….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이 괜히 있나. 원래 애들이 다 감기도 걸리고 다치기도 하면서 크는 거지, 고작 이 정도 일로 오전부터 사람을 오라 가라….”
돌팔이 의사 콘라드는 이 게임의 유력한 고구마 인사답게, 별것도 아닌 일로 자신을 부른다고 투덜거리면서 방을 나섰다.
나는 내 취향과 일억 광년은 멀리 떨어진 남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런 인성 파탄 난 캐릭터가 연애 공략 대상이라니, 토끼사는 각성하라!’
자고로 요즘 대세는 보기만 해도 눈과 마음이 청량해지는 순정남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시대에 안 맞는 심보 고약한 캐릭터라니!
“미뉴엘! 정신 좀 차려 봐요. 콘라드 선생님이 약을 주고 가셨어요.”
“으으.”
“어서 이걸 먹어야 낫죠. 자, 입을 벌려 봐요.”
그렇게 내가 속으로 혀를 차는 동안 체스휘는 침대 머리맡에 앉아 미뉴엘을 깨우려 하고 있었다.
그래도 미뉴엘은 체스휘의 부름에 금방 정신을 차렸다. 나한테는 체스휘의 뒷모습밖에 안 보였지만, 그는 제법 안타까운 목소리를 내며 미뉴엘에게 직접 약을 먹여 줬다.
“어흡, 컥! 쿨럭, 쿨럭!”
“미뉴엘! 괜찮아요? 정신을 차려요! 미뉴엘…!”
하지만 약이 목에 걸렸는지, 다음 순간 미뉴엘이 사레가 들린 듯이 엄청난 기침을 쏟아 냈다. 덩달아 체스휘도 미뉴엘의 어깨를 부여잡고 절박하게 그의 이름을 외쳐 댔다.
“허윽….”
“미뉴엘, 미뉴엘…!”
그러다 미뉴엘이 다시 눈을 감고 힘없이 침대에 풀썩 드러누운 순간, 체스휘가 아까보다 짙게 탄식했다.
“맙소사, 이럴 줄 알았으면 그동안 좀 더 잘해 주는 건데.”
아니, 당신 애 안 죽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