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제 방에 오다가 넘어져서 다친 거예요?”
나는 놀라서 다이안을 쳐다봤다.
우리 아기 고양이가 먼저 내 방에 찾아왔었다니 이루 말할 수 없는 감격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개복치 다이안이 내 방에 오다가 이렇게 다쳤다는 사실에 더 큰 미안함이 들었다.
나는 다이안을 촉촉한 시선으로 보다가 시무룩해졌다.
“어쨌든 환영회는 못 가겠네요. 한동안 발목 쓰지 말고 방에서 쉬셔야겠어요.”
“뭐? 고작 이 정도로 왜? 난 아무렇지도 않아!”
그런데 뜻밖에도 다이안이 내 말에 펄쩍 뛰었다.
아니, 이런 격렬한 반응이라니? 아무래도 다이안은 환영회에 많이 참석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는 애잔한 눈으로 다이안을 쳐다봤다.
“그럼 목발이나, 아예 휠체어라도 준비시킬까요?”
“그런 거 없이도 식당 정도는 그냥 걸어서 갈 수 있….”
“그건 절대 안 되죠. 지금 다리가 이렇게 퉁퉁 부었는데요?”
이번만큼은 나도 단호하게 말하자 풀이 죽은 듯이 다이안의 어깨가 밑으로 축 처졌다.
음, 이렇게 실망할 일인가? 휠체어는 좀 그렇다 쳐도 목발 정도는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타협안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이안은 싫은 모양이었다.
“그럼… 차라리 린 혼자 다녀올래?”
아니, 그런데 왜 생각이 이렇게 극단적인 방향으로 튀지?
좀 더 우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이안은 의외로 포기가 빨랐다.
“도련님을 혼자 두고 제가 어딜 가요?”
“난 혼자 있어도 상관없으니까 다녀와.”
나는 콧방귀를 뀌었지만 다이안은 완고했다.
“린을 위해 준비한 환영회인데 주인공이 빠지면 어떡해. 저택에 들어와서 딱 한 번밖에 없는 환영회잖아.”
아까 내 1지망이 다이안이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처럼, 그의 목소리가 약간 아련하게 흔들렸다. 왠지 다이안의 마음을 조금 알 것도 같아서 난감해졌다.
‘솔직히 난 그냥 안 가도 그만이었는데.’
사실 나는 저택에서의 첫날이 44번째였지만 이번 회차의 다이안에게는 세상에서 단 한 번뿐인 날일 게 분명했다. 더군다나 이번 설정에 의하면 그동안 다이안에게만 양육자가 생기지 않았다고 했으니, 오늘 환영회는 확실히 그에게 남다를 터였다.
아유, 그럼 어쩔 수 없지.
“대신에 환영회에서 돌아올 때 말이야….”
“그냥 제가 안고 갈까요?”
살짝 머뭇거리는 듯한 기색으로 내게 다른 말을 덧붙이려 하는 다이안에게 불쑥 권유했다.
“뭐?”
다이안은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는 듯한 반응이었지만, 내게는 몹시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다친 걸 다른 사람들에게 티 내는 게 싫으신 것 같아서요. 제 생각에는 이게 제일 자연스럽고 좋은 방법인 것 같은데요? 제가 다이안 도련님의 양육자가 된 게 너무너무 기뻐서 어화둥둥 얼싸안고 환영회에 참석했다고 하죠, 뭐.”
“뭐, 뭐, 어화둥둥….”
내 말에 다이안이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면서 펄쩍 뛰었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싫어!”
“그렇게 단칼에 거절하시다니, 매정하시네요….”
하지만 내가 괜히 상처받은 척하자 다이안은 순진하게 거기에 속아서 안절부절못했다.
“아, 아니…. 린한테 안겨서 가는 게 싫은 게 아니라, 내가 무거워서… 그래서 린이 힘들까 봐 그래.”
“그런 걱정은 하실 필요 없어요. 우리 개복… 아니, 우리 도련님 정도는 한 손으로도 거뜬히 들 수 있는걸요.”
하지만 부끄러움이 많은 우리 개복치 아기 고양이는 내 논리적인 설득에도 끝내 넘어오지 않았다.
“너무해…. 내가 흔들림 없는 승차감으로 곱게 안아서 식당까지 데려다줄 수 있는데.”
하여 그날 저녁, 나는 작게 투덜거리면서 혼자서 쓸쓸하게 복도를 걸었다.
다이안은 결국 나만 환영회에 보내고 혼자 방에 남기로 했다. 당연히 나는 그가 무척 신경 쓰였다. 하지만 누구보다 아쉬워하는 게 눈에 훤히 보이면서도 끝까지 내 권유를 거절하는 다이안에게 계속 고집을 부릴 수도 없었다.
‘우리 개복치 고양이 성격상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
사실 내 고정 육성 캐릭터인 다이안은 남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걸 싫어했다. 그러니 나한테 안겨서 환영회에 참석하는 걸 끝까지 거부한 것도 쑥스러움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흑, 그러니 하는 수 없지. 아쉽지만 존중해 주는 수밖에.’
환영회가 열리는 식당으로 가는 길은 나한테 아주 익숙했다.
어떤 직업은 이 환영회에서 필수 퀘스트를 받아 다음 시나리오로 넘어가야 했기 때문에, 나도 메이드 직업에 안착하기 전에는 거의 꼬박꼬박 참석했었다.
보통 환영회는 게임상에서 같은 직업군에 있는 NPC들이 열어 주었다. 그러니 이번 44회차의 환영회에서는 아까 잠깐 만났던 두 사람을 포함한 다른 양육자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혹시 내 가방의 행방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는지도 확인해 봐야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눈앞에 있는 식당의 문을 열어젖혔다.
***
“안녕하세요!”
“린 씨, 어서 와요.”
문을 벌컥 열고 활기차게 인사하자, 식당에 있던 사람들 중 체스휘가 가장 먼저 내게 아는 척했다.
완전히 물기가 마른 그의 머리카락은 아까보다 한결 부스스하게 곱슬거리며 눈가를 가리고 있었다. 꼭 따분한 가젤처럼 식탁에 턱을 괴고 나른히 앉아 있던 그가 나한테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의 옆에는 금발 보브 커트 미소년인 미뉴엘이 앉아 있었다.
미뉴엘은 아직도 나한테 기분이 상한 게 풀리지 않았는지, 나를 보고 몸을 움찔 떤 뒤 ‘흥!’ 소리를 내며 팽하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예상대로 식당에는 양육자로 보이는 6명의 어른들과 저택에 사는 다른 6명의 아이들이 동그란 식탁에 둘씩 짝지어 둘러앉아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들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굉장히 우중충했다.
저기요? 이게 어딜 봐서 사람을 환영해 주는 분위기죠? 누가 보면 환영회가 아니라 송별회라도 치르는 줄 알겠다. 게다가 내가 식당에 들어서는 순간, 가뜩이나 음울하던 공기가 바짝 얼어붙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와, 누나가 새로 온 양육자예요?”
“비비!”
그때 솜사탕처럼 폭신폭신할 것 같은 분홍 머리를 가진 귀여운 남자애가 호기심 어린 눈을 빛내며 내게 물었다. 그의 옆에 있던 단발머리 여자가 엄하게 이름을 불렀지만 이미 적막은 깨진 뒤였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네, 맞아요! 7호실 다이안 도련님의 양육자 린이랍니다.”
어차피 빈자리는 두 개밖에 없었기 때문에 굳이 누군가한테 안내받거나 물을 필요 없이 성큼성큼 걸어가서 그중 우측 자리에 앉았다.
그런 뒤에 오늘 환영회에 나 혼자 참석한 이유를 적당히 둘러대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는 없었다. 아까부터 입이 근질거린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던 긴 올리브그린색 머리의 여자가 나한테 따지듯이 불쑥 말했기 때문이다.
“당신, 첫날부터 너무 튀려고 작정한 거 아니에요? 이런 자리에 그 옷은 도대체 왜 입고 온 거야?”
그런데 이 시비 거는 말투는 뭐람?
“그냥 옷장에 있어서 입은 건데,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난 진짜 몰라서 물어본 건데 날 향한 눈빛이 좀 더 뾰족해졌다.
꼭 하면 안 되는 잘못을 저질러 놓고 뻔뻔하게 시치미를 떼는 사람을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지금 내가 입은 옷은 옷장에 있던 유니폼이었다. 케이프가 달린 군청색 드레스 형식이었는데 가슴 쪽에 작게 레드포드 가문의 문장이 수놓아져 있었다. 피 묻은 옷을 그냥 입고 오기도 그렇고, 디자인도 튀지 않는 유니폼이라 무난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잘못된 선택이었나 보다.
‘매뉴얼 북이 없어서 몰랐는데 특별한 날에만 입는 건가 보지?’
하지만 자기가 내 옷을 가지고 눈에 띈다고 뭐라고 할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긴 올리브그린색 머리에 갈색 눈을 가진 여자는 굉장히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바로 옆에 있는 하늘색 머리를 가진 소년도 화려한 연회복 같은 걸 입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둘이 의상을 세트로 맞춰 입은 듯했다.
아무튼 누구 말마따나, ‘튀려고 작정한’ 듯한 의상이었다. 누가 보면 오늘 환영회의 주인공이 나와 다이안이 아니라 그들인 줄 알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주황색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족제비 같은 얍삽한 인상의 남자도 그들이 아니라 나를 향해 비죽 웃었다.
“7호실의 양육자님은 정말 튀는 걸 좋아하시나 보네. 저택에 들어온 첫날부터 여러 가지로 눈에 띄게 행동하시는데.”
거기까지 보고 대강 상황을 파악했다. 아무래도 이 자리에 있는 양육자들은 대개 나한테 적대적인 듯했다. 그래도 아이들은 대부분 호기심을 느끼는 것 같았는데, 분홍 머리 소년 빼고는 주변의 분위기를 살피는 듯이 나한테 쉽게 말을 걸지 않았다.
나는 앞에 놓인 물수건으로 손가락을 꼼꼼히 문질러 닦으며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러기 전에 먼저 자기소개부터 한 번씩 해 주시지 않을래요? 다들 절 알고 계신 것 같은데, 저는 전부 잘 모르는 분들이라. 아, 아까 통성명한 체스휘 씨 빼고요.”
이 중에서는 아까 복도에서 마주쳤던 검은 옷을 입은 붉은 머리 여자와 체스휘만 얼굴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내 말의 어디가 또 거슬렸는지, 양육자들이 입술을 꿈틀거렸다.
“허. 이 중엔 저택에 꽤 오래 있었던 양육자도 있는데 아는 사람이 없다니. 엘리트 출신이라 그동안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는 아예 관심도 없었나 보지?”
그 비슷한 얘기는 한 적도 없는데, 올리브그린색 머리를 가진 여자가 또 혼자 곡해해서 성을 냈다.
난 오늘 처음 이 저택에 들어왔으니 서로 잘 모르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그런데 여자는 내가 그들을 모르는 게 엄청난 모욕이라도 된다는 듯이 화를 냈다. 혹시 이 바닥에서는 미리 인물 정보를 숙지하고 들어왔어야 예의인 건가?
“왜요. 스텔라는 다른 곳과 방침이 다를 수도 있잖아요.”
그때 느른한 미소를 지은 채 상황을 관망하던 체스휘가 입을 열어 대화에 끼어들었다.
“원래 그쪽 동네는 수료 과정이 특이하다고 했으니까, 어쩌면 양육자로서 직업적인 선입견을 갖지 않게 하려고 저택에서 지내는 선임들의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을 수도 있죠.”
모두가 그의 말에 수긍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효과는 있는 것 같았다. 못마땅한 눈으로 날 보던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체스휘 씨가 날 도와주려고 한 것 같았는데,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방금 내가 한 생각이 맞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야, 성가시게. 저택에서 일하는 양육자들의 정보가 기관에 있는 예비 양육자에게 공개되는 시스템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