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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5)화 (5/300)

‘호오…. 의외로 몸이 꽤.’

나도 모르게 다가오는 남자를 위아래로 슬쩍 훑어봤다. 멀리 있을 땐 몰랐는데, 막상 가까이 오니 몸집이 꽤 좋아 보였다. 게다가 키가 굉장히 커서 얼굴을 보려면 고개를 생각보다 많이 들어야 했다.

‘단련한 몸인데. 단순 고용인은 아니겠어.’

남자가 고개를 모로 비스듬히 기울이며 내게 물었다.

“그런데 왜 혼자 나와 계시죠? 혹시 길을 잃으셨나요?”

“아아…. 그렇죠, 뭐.”

“저런, 저택이 넓어서 처음엔 구조가 헷갈릴 거예요. 괜찮으시면 제가 주변을 안내해 드릴까요?”

“와아, 정말요? 그럼 저야 좋죠.”

나도 웃으며 답했다.

누가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면 초면인 사람들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지 않을까? 친한 친구를 대하듯이 이렇게 서로의 얼굴을 보며 다정하게 웃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실 나한테 저택의 안내 같은 건 필요 없었다. 내가 이 저택을 누비고 지낸 세월이 얼마인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뭘 안내받는단 말인가. 게임상으로 계산하면 내가 여기서 43회차 동안 몇 년이나 비볐더라… 음, 으음….

“…….”

막상 생각해 보니 갑자기 현타가 올 것 같아서 그냥 더 따져 보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옷이 많이 젖어서 지금은 일단 들어가 보셔야 하지 않겠어요? 저는 나중에 따로 시간을 잡아도 괜찮은데.”

그래도 이 남자가 먼저 권유한 저택 안내를 굳이 거절할 마음은 없었다. 일단은 신 캐릭터였고! 그로 인한 새로운 시나리오라면 언제든 환영이었다. 솔직히 게임의 초반부는 이미 단물을 다 빨아 먹어서 다이안 덕질을 제외하고는 재미있는 게 없었는데, 지금 아주 오랜만에 흥미진진한 기분이었다.

내 말에 남자는 그제야 행색을 깨달은 듯이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아아, 방금 아이들이 연못에 떨어뜨린 공을 주워 주다가 실수로 저도 빠져서요. 그래도 날씨도 따뜻하니 이 정도는 금방 마르겠죠, 뭐.”

남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한 뒤 뒤늦게 자기소개를 했다.

“참, 전 체스휘예요. 저택에 온 지는 1년 정도 되었어요.”

“린이에요.”

“린…. 좋은 이름이네요. 저택에 온 걸 환영해요.”

자신을 체스휘라고 소개한 남자가 나를 보며 웃었다. 그래 봤자 보이는 건 하관뿐이었지만 가느다란 선을 그리며 끌어올려지는 입술의 모양이 꽤 예뻤다.

‘오…? 그러고 보니 날카로운 콧날이나 턱선도 그렇고, 얼굴형도 제법 미형이네?’

머리카락에 가려진 남자의 나머지 얼굴도 괜히 궁금해졌다.

“그런데 린 씨는 오늘이 첫날인데 벌써 모로스를 해치우셨다면서요? 대단하시네요.”

함께 잔디밭을 걷기 시작하며 그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체스휘가 저택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내가 오자마자 메이드장을 해치운 건 벌써 소문이 파다하게 난 모양이다.

이 게임에는 저택의 소년들을 노리는 괴물과 악령이 있었는데, 이를 각각 모로스(Moros)와 데몬(Demon)이라고 불렀다.

중요하지 않은 정보였지만 ‘모로스’는 시체, 죽음, 파멸을 의미하는 라틴어 모르스(Mors)에서, 악령의 명칭인 ‘데몬’은 악마를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예전에 본 기억이 있었다.

“아니에요. 그래 봤자 모로스 하나였는데요, 뭐.”

메이드장을 처리하는 건 어차피 튜토리얼이었기 때문에 엄청 쉬웠다. 그런 만큼 괴물 중에서는 제일 약한 축이었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겸손한 반응이 나왔다.

“소문이 정말인가 보네요. 린 씨가 엘리트 코스를 거쳐서 오셨단 소문이 있던데.”

하지만 다른 사람 귀에는 내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반응이 겸양보다 자신감으로 느껴진 모양이다.

두꺼운 안경알과 머리칼 너머로 언뜻 보이는 체스휘의 눈이 나를 지긋이 응시하는 것 같았다. 조금은 내게 흥미를 느끼는 것 같기도 한 눈빛이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온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엘리트 코스라고?

귀가 쫑긋했지만 티 내지 않고 태연하게 시치미를 떼며 체스휘를 떠봤다.

“아, 그런 소문이 돌고 있어요?”

“네, 이번에 7호실 담당 양육자가 온다고 해서 저택이 떠들썩했는데 그런 것치고는 밝혀진 정보가 없어서요. 게다가 양육자들이라고 해서 전부 모로스를 그렇게 간단히 혼자 상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체스휘의 태연한 설명에서 느껴지는 뉘앙스가 묘했다. 아무래도 이 양육자라는 게, 내가 비슷하다고 느낀 보모와는 완전히 다른 직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트 코스가 따로 있다니…. 그냥 아무나 지원해서 고용인 면접을 통해 뽑는 게 아닌가 보지?

“그래서 다른 양육자들도 다들 린 씨에 대해 궁금해해요. 만약 린 씨도 정말 엘리트 출신이면, 4호실과 아는 사이겠네요. 현재 양육자 중에 4호실 딱 한 명만 스텔라 소속이라고 했거든요.”

또 낯선 명칭이 등장했다. 스텔라? 그 엘리트들만 모인 집단을 혹시 ‘스텔라’라고 하는 건가?

지금까지 양육자라는 직업을 단순하게 생각했던 나는 체스휘의 말을 듣고 더 알쏭달쏭해졌다.

그때 체스휘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참, 오늘 저녁에 린 씨의 환영회가 열리는 거 아시죠?”

아뇨. 지금 처음 알았는데요.

“그때 이런저런 이야기를 좀 더 나눌 수 있겠네요.”

체스휘가 오늘 저녁이 기대된다는 듯이 날 보고 웃었다.

“체스휘…!”

누군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체스휘를 부른 건 그때였다. 저택에서 서둘러 막 뛰어나온 금발 소년이 함께 있는 체스휘와 나를 보고 흠칫하다가 앙칼지게 외쳤다.

“거기서 뭐 해! 할 일도 많은데 빨리 안 와?!”

“아아, 네. 지금 가요.”

체스휘가 아까 처음 봤을 때처럼 약간 건성인 듯 느껴지는 느릿한 목소리로 소년에게 답한 뒤 나를 돌아봤다.

“아무래도 저택 안내는 나중에 마저 해 드려야겠네요.”

“체스휘 씨도 양육자였군요?”

막 깨달은 사실을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자, 체스휘가 옆으로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제가 말 안 했던가요?”

그새 말라 바람에 살짝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옅은 미소를 띤 신비로운 보라색 눈이 드러났다.

“전 2호실 미뉴엘의 담당 양육자랍니다.”

***

알고 보니 노란 고양이의 집사였던 체스휘와 헤어져 나도 본관 건물로 향했다.

게임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꽤 알찬 시간을 보낸 기분이었다.

‘뉴 캐릭터도 둘이나 봤고!’

처음에는 게임 오류 때문에 불만스러웠는데, 지금은 은근한 기대감이 들고 있었다.

어차피 현 상황에서는 내가 시스템 오류에 짜증을 느끼며 걱정해 봤자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그러니 그냥 현실에서 48시간이 지나 자동 로그아웃이 될 때까지 이 신선한 기분을 즐기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그럼 일단 필요했던 무기도 손에 넣었으니, 슬슬 다시 다이안에게 가 보자.’

그런 생각에 다이안의 침실이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을 때….

“양육자님, 큰일 났어요! 다이안 도련님이…!”

개복치의 역사가 벌써 시작되어 있었다.

02. 이런 환영회는 필요 없습니다.

“다이안 도련님!”

벌써 수백 번은 느껴 본 기시감 속에서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내 개복치 도련님이 익숙한 모습으로 침대 위에 기대 누워 있었다. 다이안이 인상을 팍 쓰면서 열린 문가를 돌아보았다.

“어디 있다가 이제 와? 옷 갈아입고 금방 다시 돌아온다면서? 메이드가 몇 번이나 방으로 찾으러 갔었는데!”

“죄송해요! 가방 찾으러요!”

“뭐, 가방?”

“아니, 그런데 도련님은 왜 벌써 다친 거예요!”

다이안이 의문을 드러냈지만 지금 나한테 중요한 건 가방 같은 게 아니었다. 나는 어이없는 기분을 느끼며 침대로 다가가 다이안의 상태를 살폈다.

“그냥 살짝 넘어져서 금이 간 것뿐이야. 이 정도는 다친 것도 아니지.”

다이안이 의연한 척 새치름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눈가와 콧방울은 이미 발긋했고, 꾹 다문 입술은 파르르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붕대로 돌돌 감긴 다이안의 발목이 퉁퉁 부은 걸 보고 오구오구 한탄했다.

다이안은 원래도 개복치별의 가호를 받는 듯, 진짜 별것 아닌 일로도 쉽게 다쳤다. 특히 이번에는 최단기간 부상 기록까지 갈아 치웠다.

게임 첫날부터 발목에 금이 가다니! 원래 게임 첫날에는 메이드장을 해치우는 튜토리얼만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번에도 다이안에게 다른 위험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다이안은 다이안이었다.

“다리에 금이 갔는데 다친 게 아니기는요! 많이 아프죠? 의사가 준 진통제는요? 먹었어요?”

“응.”

“혹시 2층 계단 앞에서 넘어진 거예요? 아까 보니까 거기 바닥이 낡아서 못이 튀어나온 데가 있던데, 바로 보수하라고 말해야겠어요!”

“거긴 아니고 다른 데서 넘어졌어.”

“하긴, 거기 말고도 애들한테 위험해 보이는 곳이 꽤 많더라고요! 아휴. 잠깐 눈 좀 뗐다고 이렇게 다치다니, 속상해라.”

“지금… 날 걱정하는 거야?”

“그럼 안 하나요?”

구시렁거리면서 다이안의 발목에 감긴 붕대를 도로 풀었다.

내가 그러는 동안 다이안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평소라면 이 갑작스러운 침묵을 좀 더 의아하게 여겼겠지만, 지금은 나도 다이안의 발목에 신경이 쏠려 있었다. 그래서 또다시 오구오구 한탄하면서 테이블에 있는 화병을 가져와 꽃잎을 따기 시작했다.

“지금 뭐 해?”

다이안도 내 행동에 의아함을 느낀 듯이 물었다.

“여기 의사가 돌팔이라 제가 배운 방법대로 다시 하려고요.”

성수 디퓨저의 꽃잎을 똑똑 떼서 다이안의 발목에 붙이고 붕대를 다시 돌돌 감았다. 다이안은 내 현란한 손놀림을 보고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되게 능숙하네. 혹시 의료술을 정식으로 배웠어?”

나는 다이안의 질문을 받고, 최근에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재미 삼아 유행처럼 번졌던 ‘모 고전 만화 속 집사의 대사 흉내 내기’를 실행에 옮겼다.

“훗. 다이안 도련님의 메이드 되는 자로서, 이 정도도 못해서야 되겠어요?”

“린은 메이드가 아니라 양육자인데.”

“아, 그러네요.”

아무튼 다이안은 내 자신만만한 모습에 감탄한 기색이었다.

사실은 애기야, 내가 지금까지 너한테 붕대 감아 준 것만 백만 번은 족히 넘을걸….

나는 아득한 마음으로 지금까지의 시간을 떠올렸다.

‘그나저나 이 돌팔이는 역시 붕대 감는 것도 영 엉성하구먼.’

레드포드 저택의 주치의는 의사란 말조차 아까운 엄청난 돌팔이였다. 월급 도둑인 주치의를 각성시켜 명의로 만들어 써먹으려면 반드시 히든 퀘스트를 깨야만 했다. 하지만 그 짓을 스무 번 정도 하다 보니 나중에는 참을 수 없이 귀찮아져서, 차라리 돌팔이를 버리고 직접 치료 스킬을 배우는 걸 선택했다.

참고로, 그 돌팔이 의사는 게임상 공략 가능한 플레이어의 연애 대상 중 하나였다.

초반에 설명했듯이, 이래 봬도 이 게임은 연애 시뮬레이션, 공포 액션, 육성 장르가 짬뽕 되어 있었다.

그래서 돌팔이 의사도 생김새만큼은 훌륭한 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포장이 화려해도 그 알맹이인 인성은… 이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이하 생략하도록 하겠다.

“신기하네. 모로스 독에 감염되었을 때 성수를 쓰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냥 다쳤을 때 이런 방법을 써 본 건 처음인데 진짜 조금 편해진 것 같아.”

다이안은 성수 먹은 꽃의 효능에 놀란 듯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는 내 전성기에 비하면 턱도 없는 효능이 마뜩잖았다.

시스템 창이 뜨지 않아서 두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게임이 리셋 되었으니 지금 치료 스킬도 레벨 1일 게 분명했다. 아무래도 당분간 또 주방이나 세탁실 같은 데를 돌아다니면서 자잘한 부상을 입은 메이드들을 열심히 치료해 경험치를 올려야 할 것 같았다.

“그보다 조금 전에 말이야.”

그때 다이안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저녁때 환영회에 같이 가자고 린의 방을 찾아갔던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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