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마다 세부 시나리오나 퀘스트가 조금씩 달라서 게임 시작 전에 매뉴얼 북을 숙지하고 있는 게 유리했다. 물론 그런 거 상관없이 그냥 몸으로 부딪쳐도 되긴 한다만.
‘어차피 이름도 양육자니까 보모 비슷한 거 아닌가?’
그러니까 어쨌든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애를 잘 키우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 ‘양육자’란 건 노다지처럼 숨겨져 있던 게임의 히든 직업 같은 건지도 몰랐다. 아니면 다음 업데이트 때 게임사에서 새로 추가하려고 한 신규 직업인데, 버그 때문에 내가 신청한 적도 없는 베타 테스트에 실수로 참여하게 된 것이라든가….
이리 봬도 내가 이 바닥 고인물인데 게임 내 히든 직업에 대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걸 보면, 왠지 후자의 가능성이 더 높을 것 같았다.
‘참나, 신규 직업 추가할 생각하지 말고 개떡 같은 다이안 육성 난이도나 하향 패치 좀 해 줄 것이지.’
게다가 이렇게 로그아웃도 안 되는 버그라니. 게임사 놈들이 갈수록 플레이어들의 돈을 날로 먹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게임사의 욕을 하면서 방을 샅샅이 뒤졌다. 시스템도 먹통인 데다 언제 버그가 고쳐질지도 모르는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증발된 짐 가방을 찾는 것이었다. 무기도 없고 돈도 없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버틴단 말인가.
물론 내가 라이트 유저였던 것도 아니고, 맞춤 제작 유료 아이템 하나 없이 기본으로 제공되는 무료 물품이나 쓸 짬밥은 아니긴 하지만….
“아, 내 예쁜이들….”
사라진 시스템 창과 함께 강제 이별하게 된 내 아이템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훔쳤다.
원래 게임 엔딩 후에 튜토리얼부터 다시 시작해도 유료 아이템은 초기화되지 않았다. 그래서 내 취향대로 우리 예쁜 아가들도 완벽하게 깔맞춤했었는데…. 그런데 이놈의 망할 시스템 오류 때문에 무기뿐만이 아니라 충전해 둔 캐시, 특수 포션, 코스튬, 기타 버프 아이템 등등을 포함한 내 게임 속 전 재산이 증발했다.
‘기간 한정 아이템도 있는데…. 제작사 토끼 자식들, 혹시 지난번처럼 전부 복구 안 해 주면 이번에는 진짜 1인 시위 간다.’
공식 명칭이 ‘바니타스’라서 플레이어들이 애정을 담아 토끼(바니)라고 부르는 제작사 욕을 하며 다시 방문을 열었다.
어쨌든 언제 시스템 오류가 수정될지 모르니 다음 에피소드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무기부터 확보해야 했다. 여긴 메이드장 제인 같은 괴물이나 악령이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저택이었으니까.
그래서 다이안에게 가는 건 잠시 미루고, 곧바로 사라진 짐 가방을 찾으러 방을 나섰다.
***
“가방에 발이라도 달린 거야, 뭐야?”
하지만 내 가방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메이드들도 모르겠다며 난색을 표했다. 특히 내 가방을 방에 가져다 두었다는 메이드는 굉장히 당황해서 자신이 훔치거나 숨긴 게 아니라고 횡설수설했다.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가방을 내놓으라고 협박한 것도 아닌데, 그녀는 사자 앞의 토끼처럼 불쌍하게 오들오들 몸을 떨어 댔다. 그래서 나도 길게 얘기하지 않고 그냥 알겠다고 대답한 뒤 자리를 옮겼다.
‘이런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치고는 참 겁이 많네.’
혹시 내 옷에 아직 모로스의 검은 피가 묻어 있어서 무서워 보였나? 하지만 아이템 창과 가방이 다 같이 사라져서 편하게 갈아입을 여분의 옷이 없었는걸. 차라리 좀 불편하더라도 옷장 속에 있던 그 수수께끼의 유니폼으로라도 갈아입고 나올 걸 그랬나 싶었다.
아무튼, 메이드가 내 가방을 방에 가져다 놓은 건 사실인 듯했으니까…. 그럼 진짜 가방에 발이 달렸거나, 누가 내 방에 들어와서 가져갔다는 건데.
‘어떤 놈이야, 대체. 걸리면 먼지까지 다 털어 버려야지.’
누구인지 몰라도 걸리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차선책을 찾아 복도를 이동했다. 가방을 찾지 못했으니 다른 곳에서 쓸 만한 무기를 구해야 했다. 물론 게임 장르상 방이나 복도마다 장식용 칼이나 도끼, 창 같은 무기들이 벽에 걸려 있긴 한데, 그런 걸 매번 들고 다닐 순 없으니까. 그러니 좀 더 편하게 몸에 소지할 수 있는 걸 찾을 생각이었다.
찰그랑! 데구루루!
가까워진 복도의 모퉁이에서 동그란 무언가가 바닥을 굴러 튀어나온 건 바로 그때였다.
나는 허리를 숙여 내 앞까지 돌돌 굴러온 것을 주워 들었다. 사탕 통 같기도 하고 약통 같기도 한, 손바닥만 한 크기의 동그랗고 납작한 틴 케이스였다. 그것을 들어 올리자 안에 있는 조그만 것들이 차르륵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안녕하세요, 이거 도련님 거예요?”
나를 발견하고 멈춰 선 어린 소년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는 대답 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래도 이 케이스가 소년의 것이란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운 걸 그에게 돌려주러 다가갔다.
검은 머리칼과 푸른 눈을 가진 이 잘생긴 소년도 다이안, 미뉴엘과 마찬가지로 게임의 육성 대상 중 하나였다.
1호실의 천사 루스카.
단정하고 서늘한 인상의 미소년으로, 말수가 적고 신비로운 이미지로 인기를 끌었던 걸로 기억했다. 지금도 책을 들고 있어서 그런지 루스카는 아까 본 두 아기 고양이들과 달리 한층 지적이고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이렇게 보니 검은 아기 고양이도 귀엽네.’
지금까지 게임에서는 플레이어가 선택한 육성 대상자 외 다른 소년들은 직접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니 다이안 외길 인생이었던 나로서는 굳이 일부러 관련 이미지나 영상을 찾아보지 않는 한, 다른 육성 소년들을 볼 일이 드물었다. 그런데 이번 게임 오류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첫날부터 노란 아기 고양이와 검은 아기 고양이를 내 앞에 데려다 놨다.
‘사라진 가방 때문에 좀 짜증이 났었는데 역시 귀여운 애기들을 보니 기분이 나아지는구나.’
나는 흐뭇한 누나 마음으로 루스카에게 틴 케이스를 건네줬다.
“자, 여기. 중요한 거니까 다시 떨어뜨리지 않게 조심… 응?”
하지만 내 손에 있는 물건을 홱 낚아채 가져간 건 검은 아기 고양이가 아니라 붉은 살쾡이였다.
“누구세요?”
낯선 사람의 등장에 나도 모르게 물었다.
루스카의 뒤에 있는 복도의 모퉁이에서 튀어나온 건 붉은 머리를 하나로 높게 묶고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였다. 머리에도 검은 베일을 단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전체적인 복장이 꼭 상복 같아 보였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날 보는 여자의 눈빛이 심하게 싸늘했다.
“우리 아이에게 함부로 다가오지 말아 줄래요?”
뭐요? 꼭 위험한 사람을 경계하는 학부모 같은 대사였다. 그래서인지 괜히 ‘난 수상쩍은 사람이 아니요!’ 하고 해명하고 싶어졌다.
“그냥 떨어뜨린 걸 주워 주려고 한 것뿐인데요.”
“떨어진 걸 줍든 버리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상관하지 말라고.”
오… 이 언니 뭐야.
나는 황당함과 흥미를 동시에 느끼며 여자를 쳐다봤다. 그녀는 날 무시하고 그때까지도 조용히 서 있던 소년에게 말했다.
“루스카, 가자.”
“네.”
두 사람은 날 지나쳐 걸어갔다.
잠시 후 붉은 머리 여자가 손에 들고 있던 틴 케이스를 쓰레기 버리듯이 복도의 화분 속에 처박는 걸 목격했다.
나는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한결 더 흥미진진해진 기분으로 바라봤다.
초면부터 플레이어에게 저렇게 싸가지 없게 구는 캐릭터가 게임에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번엔 오랜만에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
43번이나 이 게임을 플레이하며 중요한 NPC는 다 꿰고 있었는데, 지금 나타난 여자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게임 캐릭터 설정값 참…. 예쁜 언니가 생긴 것처럼 성격도 매운맛이네.”
철컥, 철컥!
잠시 후, 나는 손에 넣은 총을 점검하며 혼자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좀 어이없기도 했지만, 생각할수록 화가 나기보다는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신 캐릭터를 봐서 기분이 좋았다. 게다가 저렇게 존재감 있게 생긴 걸 보면, 비중 없는 단순 엑스트라나 단발적으로 등장했다가 빠지는 소모성 캐릭터도 아닌 듯했다.
‘혹시 루스카의 양육자인가?’
아까 잠깐 만났던 미뉴엘의 말을 떠올리며 여자의 정체를 나름대로 추리해 봤다.
미뉴엘이 다른 아이들에게도 양육자가 있다는 식으로 얘기했으니, 왠지 그럴 가능성이 클 것 같았다. 1호실의 루스카 옆에 찰싹 달라붙은 빨간 머리 여자가 ‘우리 애’ 어쩌고저쩌고 떠들기도 했으니까.
아무래도 이번에 버그가 생긴 44회차의 ‘설정’은 그런 식인 모양이다. 저택에 사는 각각의 소년들에게 양육자가 한 명씩 붙어 그들을 전담해 양육하는….
바스락!
“아하하! 방금 진짜 웃겼다, 그치? 어떻게 돌 위에서 그렇게 미끄러지지?”
“응, 체스휘가 연못에 빠질 때 개구리들이 막 폴짝폴짝 뛰어서 도망치는 거 봤어?”
그때 가까이에서 들려온 아이들의 웃음 섞인 해맑은 목소리에 생각이 끊어졌다. 나는 총을 몸에 숨기고 서둘러 뒷정리를 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잡초가 무성한 후원이었다. 후원 구석에 있는 사자 조각상을 들어 올리면 그 밑에 잘 밀봉된 채 숨겨진 총이 있었다. 원래 이건 나중에 에피소드 10쯤에서 괴물들의 습격을 받았을 때 사용할 물건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으니 먼저 쓰고 나중에 원래 자리에 돌려 놓지 뭐.
‘좋아, 그래도 무기를 손에 넣고 나니 마음이 든든해졌다.’
나는 사자 조각상을 내려놓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조금 전에 웃으면서 이야기하던 아이들이 누구인지 궁금했는데, 이미 정원을 떠났는지 중간에 마주치지 않아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어라, 안녕하세요?”
또 다른 나른한 음성이 귓가에 울린 건 정원 입구를 막 빠져나왔을 때였다.
특이할 정도로 낮고 깊은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귀의 솜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목소리 미남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건 목소리만큼 멋진 미남이 아니라 물귀신 같은 몰골을 한 남자였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오늘 새로 온 7호실의 양육자시군요?”
혼자 비라도 맞았는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홀딱 젖은 남자가 퍽 반가운 목소리로 나를 아는 척했다.
햇빛을 받은 머리카락이 더티 블론드로도 보이고, 밝은 갈색으로도 보였다. 해초처럼 구불거리며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콧대에 삐뚤게 걸려 있는 두꺼운 안경이 얼굴의 반을 가렸다.
물에 젖어 몸에 달라붙은 옷에 동그란 수초까지 몇 개 붙어 있어서, 남자의 첫인상은 전체적으로 굉장히 허술해 보였다.
“아, 네. 안녕하세요!”
‘혹시 조금 전에 애들이 말한, 그 연못에 빠진 사람인가?’
나는 또 한 번 아까와 비슷한 반가움과 흥미를 느끼며 마주 인사했다. 아까 그 붉은 머리 여자와 마찬가지로 이 남자도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이번에 마주친 사람은 아까 그 여자처럼 까칠한 성격은 아닌 것 같았다.
“와아, 반가워요. 드디어 7호실에도 담당이 생긴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남자는 내가 화답해 주자, 꼭 옹달샘을 발견한 사슴처럼 반색하며 느릿한 움직임으로 나한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