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를 찾아서>
파파 존은 죽었지만 그의 기억은 사람들 마음속에 남았다. 테스 맥파일과
장례식에 참가한 사람들은 가스, 레바, 빈스 앨런, 존 마이클과 그 밖의 사람들과
함께 컨트리 음악의 인명 사전에서 파파 존의 이름도 읽게 되리라.
비록 슬픈 동기이긴 하지만 비슷한 성공을 거둔 사람끼리 모여 음악을 함께
나누는 자리에서 테스는 자신이 너무 오랫동안 중심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야 돌아온 것이다. 그녀가 만들어야 할 음악과 해야 할 일과
사랑하는 일이 기다렸다. 그리고 이 일은 케니 크로넥에 대한 감정을 삭여야
더 잘 이를 수 있었다.
그녀는 다음날부터 자신의 일에 매달렸다.
처음으로 종일토록 사무실에 있는 첫날은 사업 매니저인 데인틀리와 함께
그녀가 자리를 비운 동안 있었던 모든 일에 대해서 심도 있게 검토하는 것으로
6시간이 흘러갔다 또한 로스 하덴버그, 랠프 손리프, 아만다 브림흘과도 회의를
가졌다. 각각 지방공연 매니저와 앞으로 있을 순회 공연의 프로듀서와 의상
디자이너인 이들과 함께 콘서트 연습에 들어가기 전 세부 사항을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스튜디오로 가서 <녹슨 황금>을 다시 녹음했고, 잭 그리브스에게
노래 믹싱 작업을 완전히 끝내도록 하고 모두 완성되면 다시 들려 달라고 일러두었다.
그녀는 잭과 함께, 아이비 브릿이 새로 작곡한 노래 (오래 된 영혼)의 백그라운드
싱어와 스튜디오 연주자도 선정한 다음 나머지 시간은 스튜디오에서 이 노래를
녹음하는 데 하루를 보냈다.
그녀의 앨범 제작과정을 둘러보러 레코드사사장부터 시작해서 영업 담당
부사장에 이르기까지 레코드 회사의 중역들이 7명 찾아왔다. 테스는 잭과 같이
그들을 맞고 재킷 사진과 디자인 그리고 앨범에 실릴 곡을 담은 싱글 앨범
각각의 발매시기에 대해 토론했다.
테스는 이들에게 아직 1곡을 녹음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바로 그 노래를
타이틀곡으로 하고 싶다며 그 노래를 녹음할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는가 하고
물었다. 그러면서 이 노래가 발표되면 지금까지 발표한 노래 중 제일 멋진
뮤직 비디오를 제작할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레코드사 중역들은
메어리의 거실에서 녹음했던 <시골 여자> 데모 테이프를 들어보았다. 그들은
이 노래를 스튜디오에서 정식으로 녹음하고 효과까지 넣은 상태에서 다시 한
번 들어 본 다음에 타이틀곡으로 정할지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테스는 앨범의 성공 열쇠를 쥔 삽입곡의 배열에 대해서도 잭과 의견을 나누었다.
테스는 팬클럽 활동을 관리하는 실라 사디크도 만났다. 그래서 실라는 팬클럽
소식지에 실을 내용을 정리해서 미국 전역에 있는 팬클럽 대표자들에게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사진 촬영에는 이틀이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사진가 뿐 아니라 조수와 스타일리스트까지
뉴욕에서 비행기로 날아와야 했기 때문이다. 촬영을 마친 다음 그녀는 이들에게
저녁을 대접했다.
그녀는 1년에 4번 만나는 전담 공인 회계사를 만났다. 그들은 수입과 1사분기
세금을 계산하고 고용된 직원들의 퇴직 연금에 대한 법령이 수정된 것을 검토했다.
메릴 린치로부터 윈터그린엔터프라이즈의 재정 청사진을 위해 장기 투자 계획과
일시적으로 회사 자산을 분리 투자하는 일에 관해 조언을 얻었다.
그녀는 뮤직 비디오 제작 기획서를 읽었는데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MCA 시장조사부에 전화를 걸어 자신의 생각을 알려 주었다. 그런 다음
새 앨범 발매와 때를 맞추어 7월호에 그녀에 대한 특집 기사를 내보내기로
기획한 <굿 하우스키핑>잡지사와 인터뷰를 했다. 이 특집 기사를 위해 2시간동안사진을
찍은 다음에는 취재진이 뉴욕으로 돌아가기 전 자기 집으로 초대해 점심을
대접했다.
그녀는 300장이 넘는 사진 엽서와 팬들이 우편으로 보낸 사진과 또 팬클럽을
통해 들어온 홍보용 사진에 사인을 했다.
콘서트 연습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녀는 짬을 내서 의사를 찾아가 어지럽다고 불평을 했다. 혈당을 검사한
의사는 붉은 고기류를 더 많이 먹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윈터그린의 친구 민디 앨버슨에게서 아름다운 편지와 카드가 날아왔다. 결혼식
피로연장에서 노래를 부른 친구의 모습을 영원히 간직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다음에 윈터그린을 방문하면 꼭 점심 초대를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테스는
민디에게 직접 손으로 쓴 답장을 보냈다. 순회 공연이 끝나는 11월에 고향에
가면 꼭 점심 초대에 응하겠노라는 답장과 같이 남편과 민디가 언제 어느 때든지
원하는 시간에 그녀의 콘서트를 관람할 수 있는 자유이용권을 보내 주었다.
윈터그린에서 불었던 몸무게 5킬로그램이 다시 빠졌다.
그녀는 어머니에게는 이틀에 한 번, 르니에게는 주말마다 전화를 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케이지가 졸업식 행사를 알려 왔다. 졸업식은 전몰 장병 추도일(5월의
마지막 월요일) 전의 금요일 밤이라고 했다. 테스는 당장 그곳으로 달려가
엄마와 케니를 만나고 싶지만 그럴 짬을 낼 수 없다는 게 속이 상하면서도
케이지에게 답장 보내는 것을 미루었다.
버트가 시내에 와서 다시 전화를 걸자, 그녀는 결국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스톡야드에서 만난 두 사람은 실내 장식이 옛날 우시장을 연상시키는, 작고도
아늑한 공간으로 들어가 앉았다. 버트는 구운 양파를 곁들인 비프스테이크를
주문했고 테스는 두 다리를 높이 쳐든 바닷가재를 주문했다. 그들은 포도주로
건배를 하고 서로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녁을 먹은 다음에는
아래층 불펜 라운지로 가서 빠른 춤곡에 맞추어 2곡 정도 춤을 추었다. 그녀를
눈여겨보던 관광객들이 용기를 내서 다가와 사인을 해 달라는 말을 하자 곧장
그곳을 빠져 나왔다.
테스의 집에 돌아오자 버트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당신을 위해 노래를 만들었소. 이리 와서 들어 봐요."
그녀는 크림색 피아노 의자에 그와 나란히 앉아 건반을 누르는 그의 투박한
손을 지켜보았다. <당신의 고향에 같이 있고 싶었소>라는 그 노래는 여자라면
누구나 가슴을 끓일 아름다운 곡이었다. 노래가 끝나자 버트는 테스에게 팔을
두르고 수염 난 얼굴을 내리며 그녀의 몸 전체를 덮은 솜털이 모두 쭈삣 설만큼
진한키스를 했다. 하지만 그가 키스에 빠진 동안 그녀는 버트가 케니크로넥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녀는 솔직한 키스를 할 기회를 주고 또 버트가 원하는 식대로 응답하면서
케니를 마음에서 몰아내려 했다. 하지만 이 수염 난 사내는, 물론 부드럽긴
했지만 더 이상 아무런 매력도 없어졌다. 그의 애무는 기분 좋았지만 그녀가
아는 다른 사람과는 달랐다. 그리고 음악으로 표현한 아름다운 헌사는 감동적이었지만
그녀의 어머니와 그녀 자신에게 다른 남자가 보인 다정하고 친절한 행동을
물리치지는 못했다.
버트가 가슴을 만지자 그녀는 이런 손은 자신처럼 음악을 하기에 이상적인
손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자신처럼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이며, 그녀가 내슈빌에서
음악을 하는 사람들과 가까운 만큼 그도 그들과 친했다. 공연으로 살아가는
가수라는 직업과 그 직업이 요구하는 모든 것과 변덕스러움을 너무도 잘 아는
두 사람은 언제라도 각자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는 탄력성도 지녔다.
하지만 테스의 마음속에선 아무 것도 일지 않았다. 그 동안의 성적인 절제도
이렇게 감정적이고 세속적인 조건이라면 폭발해야 할 텐데, 아무런 감정이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 것도.
그녀는 버트의 손목을 끌어내렸다
"안 되겠어, 버트."
그는 몸을 뒤로 빼고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당신이 이걸 원하는 줄 알았는데."
"나도 그런 줄 알았어, 그런데…… 미안해."
그는 그녀의 엉덩이에 다시 손을 댔다.
"지난번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지금 이 순간이면 우리는 사랑을 하게 되리라
생각했어."
"그땐 그랬을지도 몰라. 하지만 다른 일이 일어났어."
"다른 일?"
그녀는 그의 손을 떼어 내며 시선을 떨구었다. 피아노 의자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누군가를 만났군."
"비슷해."
그는 고개를 떨군 테스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두 손을 의자가장자리에
짚고 어깨를 활 모양으로 구부렸다.
"심각해?"
"아니."
"심각한 사이가 아니라면 지금 왜 이러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알던 사람이야. 고향에 돌아가면 볼 수 있는 사람이구,
우리 가족에겐 친구 같은 사람이야."
버트는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 다음 두 손을 들더니
무릎을 탁 쳤다.
"그렇다면 감히 내가 비교 대상도 못 되겠군.당신과 나는 역사 같은 걸 만들
시간이 짧았으니 까."
"저녁은 즐거웠어, 춤추는 것도 좋았고."
입에 발린 말이라는 걸 두 사람 모두 알았다.
"그럼……."
그는 한숨을 쉬고 일어섰다.
"이젠 내가 사라져 주어야 할 시간인 것 같아."
그녀는 문까지 배웅을 나왔다. 그는 악수를 청했고 손을 잡은 채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주변에 있는 음악가들이 당신을 가까이 하려는 것은 자기 경력을 쌓기 위해
당신을 이용하려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 하지만난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주면 고맙겠어."
이 말을 마치고 그는 떠났고, 그녀는 그의 말이 참말임을 깨달았다. 음악에
관계되는 일을 하는 남자 중 그녀에게 관심을 보인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한결같이 방금 버트가 읊은 그대로의 혐의자로 변해 갔다. 버트의 동기가 순수했다는
데서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기긴 했지만 2000만 달러를 상회하는 가치를
지닌 그녀에게 세상이 무엇을 원하겠는가. 그녀가 레코드 기획자에게 단순한
추천 말 이상으로 누군가를 소개한다면 그 사람의 경력이 하루 사이에 달라지는
것은 사실이잖은가.
하지만 케니는 음악 경력을 쌓기 위해 몸부림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돈도 명성도 내슈빌에 있는 저택도 탐내지 않았다. 그는 단지 윈터그린에서
보았던 그대로의 그녀를 원했다. 그가 직접 밝힌 말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케이지의 졸업식 초대에 대답할 수 없었다 전화를 걸면 그가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이 났고,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다시 마음이 약해져 한꺼번에
무너질까 봐 두려웠다.
그녀는 가능한 전화하는 일을 피했다. 케이지의 졸업식은 금요일 밤이라고
했다. 그 주 화요일 발 9시에 테스는 완전히 지쳐 떨어졌다.
엽서 100여 통에 사인을 마치자 손에 경련이 일어났다. 생리 전 증후군이
심했고 뉴욕에서 온 스타일리스트가 잘라 준 머리도 그다지 대단치 않았다.
켈리는 치과에 간다며 조퇴를 했기 때문에 테스가 직접 다이얼을 돌려야
했다. 전화기 저편의 비서가 전화 이어 주는 것을 깜박 잊는 바람에 한참 동안
수화기를 들고 기다려야 했다. 잠시 후 카를라 나일스가 전화를 받았다. 주치의는
목에 아무 이상이 없다고 말했지만 여전히 갈라진 목소리가 나오기 때문에
성대 전문의와 만날 약속을 받아 놓은 상태라고 말했다. 그녀가 성대 전문의를
만나기까지는 콘서트 연습을 미루어야만 했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최악이었다. 샌드위치로 저녁을 해결할 생각으로
바깥에 나가다가 가장 아끼는 회색 가방이 자동차 문 사이에 끼인 것을 모르고
레스토랑으로 가는 길 내내 끌고 다녔기 때문에 가방이 거의 다 해어져 버렸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팬들의 편지를 읽다가 그녀가 부른 어느 노래에서
'그냥 가정 주부로'라는 노랫말이 여성을 비하했다는 비난조의 글을 보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가정 주부는 거저 되는 줄 아나 보지? 그렇다면 직접 가정
주부가 되어 체험해보라지!
이러한 일 가운데서 그날을 완전히 망친 일은 저녁 9시 케이지에게 전화를
하고자 마음을 먹고 번호를 눌렀을 때 일어났다.
그녀가 염려했던 대로 케니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하루 종일 너무 시달리기도 했고 또 생리 전 증후군 증세가 여기에 가세했는지도
모르지만, 그 이유야 어떻든 간에 케니의 다정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녀는
울컥 눈물이 솟았다 그녀는 다짜고짜 울기 시작했다. 울지 않는 척하고 싶었지만
금방 대꾸를 할 방법이 없었다.
"여보세요?"
케니의 목소리가 조금 날카로워졌다. 그런 다음 화난 목소리로 다그쳤다.
"여보세요? 누구십니까?"
"케니, 테…… 테스예요."
그녀는 간신히 입을 떼었다.
"테스, 무슨 일이오?"
그는 이내 염려스러운 목소리로 변했다.
"아, 아무 일도 아니에요."
그녀는 대강 얼버무리려 했다.
"모든 게…… 아, 모르겠어요. 오늘 하루 너무 끔찍했어요, 그게 다예요."
"테스."
그는 아이를 어르듯 말했다.
"자, 진정해요, 내 사랑. 입으로 말할 수 있으면 그렇게 나쁜 건 아니야.
내가 들어 줄 테니 마음놓고 이야기해 봐요."
테스는 벌써 기분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좀처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어린아이가 되는 역할을 받아들였다.
"케니, 다시 한 번만 내 사랑이라고 불러 주겠어요? 오늘밤은 그 소리가
듣기 좋으네요."
"내 사랑."
그는 실감나게 발음했다.
"자, 이젠 말해 봐요. 오늘 뭐가 그리 끔찍했소?"
그래서 그녀는 늘어놓았다. 그녀는 자신의 제국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간다는 사실을 케니에게 고백했다. 하지만 간혹 대리인이나 회계사, 사업
매니저들이 자신들의 직분을 잊고 오히려 스타를 속여 경영을 잘못하게 해서,
슈퍼스타들의 제국이 중간에 무너진 일이 얼마든지 많다고 말했다.
"내겐 그런 일이 생기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그녀는 맹세하듯이 말했다.
"망한 사람들을 보면 그 이유가 하나같이 통제권을 다른 사람에게 맡겼기
때문이에요. 내가 모든 일에 일일이 참견하고 정신을 쏟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거죠."
그녀는 지금 자신이 다른 인간에게 기대할 수 있는 이상의 일을 해 왔으며,
자기 사업체가 성장한 18년 세월 동안 줄곧 이런 긴장 속에서 살았다고 고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 일을 맡기는 법을 배워야겠소. 일을 시키려고 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하는 거 아닌가."
케니가 말했다.
"알아요. 하지만 월리 넬슨의 경우를 봐요. 그는 죽도록 공연해서 번 돈을
빛 갚는 데 다 날리잖아요."
"혹시 부리는 사람 중 믿지 못할 사람이 있소?"
"글쎄요."
그녀는 잠깐 생각했다.
"없어요."
"바로 그거요."
그는 이성적으로 말했다.
"당신이 문제지 다른 사람들이 잘못된 게 아니오. 테스, 당신은 자신을 전능하다고
착각했어요. 게다가 자기 결정이 옳다고 믿으면 다소 독선적인 사람으로 변하지,
그렇지 않소? 다른 사람을 완전히 믿고 일을 맡겨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소? 사람을 순수하게 믿으면 사람들한테서 더 많은 것을 얻게 될
거요. 협조도 더 잘 이루어지고. 또 당신이 일하는 사람들의 자존심을 세워
주면 그들은 자기 일에 자긍심을 느끼고 더 열심히 일하지요. 사람한테 자존심이
얼마나 중요한지 당신도 잘 알 거요."
그의 말이 옳았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녀가 테스 맥파일이란사실 때문에
정작 해야 할 말도 하기를 꺼렸다. 그녀는 케니의 이성적인 충고뿐 아니라
솔직함이 존경스러워 졌다.
"어떻게 그렇게 똑똑해 졌어요, 미스터 크로넥?"
그녀는 훨씬 기분이 좋아졌다. 화도 가라앉고 무기력하게만 느껴졌던 우울증도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는 작은 소리로 껄껄 웃었다.
"당신도 단둘이서 사무실을 경영해 보면 기진 맥진할 정도로 힘든 일이 늘
따라붙는다는 걸 알게 될 거요. 지난번에는 화장실에 갔던 미리엄이 그만 치마
후크를 팬티 스타킹 위에다 걸치고 그대로 화장실을 나와 버려서 우리가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
테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내 사무실을 지나 자기 책상 의자에 앉았는데 내가 손가락을 올리며
'어이, 미리엄, 이게 뭐요?' 하고 묻는 시늉을 했지 하지만 당신이라면 당장
비서에게 달려가 방금 본 것을 따지고 들었을 거야. 혹시 날씬한 여자라면
그런 대로 봐 주었겠지만, 당신, 미리엄을 본 적 있지요?"
"아니오, 못 봤어요."
테스는 계속 소리 내어 웃었다.
"못 봤다구! 미리엄이 어떤 여자냐 하면 말이오, 당신이 술집에서 한번 딱
보기만 해도 당장 '이봐, 미리엄, 저기 의자 2개 좀 끌어와. 내가 술 한잔
사지' 하고 말하고 싶어질 여자예요."
테스가 다시 한 번 폭소를 터뜨리자 케니도 따라 웃었다. 이 웃음이 200마일
거리를 전화선으로 연결한 두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주었다. 테스는 마음껏
웃는 일에 자신을 기분 좋게 맡겼다. 한바탕 웃고 나서 테스는 간신히 숨을
몰아쉬고 허리를 펴고 머리를 쓸어내렸다.
"아휴, 이젠 한결 기분이 좋아졌어요."
"당연히 그래야지요. 당신을 웃기는 걸 보니 나도 꽤 괜찮은 사람이야."
그가 능청을 떨었다.
"그래요, 정말 재주 좋으네요."
가벼운 이야기를 몇 가지 더 하다가 그가 물었다.
"그런데 지금 어디에 있소?"
"아직 뮤직 로에 있는 사무실이에요."
"이제야 전화할 시간이 났소?"
"네, 사실 그래요. 성질까지 괴팍하게 변할 정도로 너무 피곤한 하루였어요.
당신에게 전화하기 전까지는요."
두 사람은 그녀의 말속에 든 의미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페이스 오늘 밤 거기 있어요?"
그녀는 한층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잠시 동안 대답이 없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가 대답했다.
"아니, 케이지와 나뿐이오."
"사실은 케이지와 이야기하려고 전화했어요. 졸업식 파티에 초청하고 싶다는
편지를 받았어요. 참석하고 싶지만……. 갈 수 없어 정말 유감이에요."
"나도 당신이 여기 왔으면 좋겠소."
이젠 케이지를 바꾸라고 말할 때가 되었지만 그를 놓아 주고싶지 않았다.
멀리 길가에서 사이렌 소리가 커지더니 다시 점점 멀어졌고, 홀 아래에서 팩스
신호음이 들리고 팩스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윈터그린의 집 뒤뜰에서 들은 귀뚜라미 소리를 생각했고 부엌에 있는
전화를 받던 그와 기타를 치던 케이지, 그리고 온통 푸른 빛으로 감싸인 부드러운
여름밤을 떠올렸다. 서로 마주 보는 두 사람의 집과 오솔길 위에서 만난 다음
각자의 집으로 돌아갈 때 밟던 낡고 좁은 보도를 떠올렸다. 그곳에 다시 가고
싶은 간절함이 맹렬하게 그녀를 사로잡았다. 어머니의 집 계단에서 내려와
따스한 5월 밤을 뚫고 자신에게 다가오던 그가 너무도 그리웠다 그의 품에
안겨 그의 체취를 다치 한번 느끼고 싶었다.
대신 그녀는 그를 상상하는 것이 고작이었고 혹시 떨리는 목소리에서 자신의
나약함을 눈치 채이지나 않을까 걱정이었다. 또 현실주의자의 눈으로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일과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을 냉정하게 분석하면서도,
아무런 질투를 느끼지 않으려 그녀가 얼마나 애를 쓰는지 그가 눈치 채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페이스는 케이지 졸업 축하 파티를 열어 주겠죠."
"그래요. 장을 보고 파티에 쓸 그릇을 주문하느라 요즘 바쁘게 지내는 중이오.
또 케이지와 같이 옛날 앨범을 뒤져서 오래 된 사진들을 뽑아 판에 붙여 장식도
했어요."
테스는 어머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순간 페이스 옥스버리가 하는 일을 자신이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되었다. 테스의 책상에는 조카들의 사진이 있었다. 이들이 아마
그녀가 인생에서 가질 수 있는, 자식이라면 유일한 '자식'일 것이다. 멀거니
사진을 보는 사이 그녀의 가슴속에 어른거렸던 한 가지 질문이 다시 살을 파고들었다.
"케니, 하나 물어 봐도 될까요?"
"그럼요."
말 한 마디로 이렇게 쉽게 감정을 드러낼 수 있다니 얼마나 재미있는가.
"케이지가 집을 나오면 페이스가 당신 집으로 들어가나요?"
케니가 잠깐 대답을 미루는 사이 테스는 숨을 멈추어 버린 자신을 발견했다.
"그렇진 않을 거요, 테스. 여기는 작은 마을이오. 그런 식으로 살면 이웃들
눈총을 받게 돼요."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눈을 감았다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침묵이
전하는 의미를 생각했다. 두 사람 사이를 가른 침묵은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점점 위태롭게 치닫는 이런 대화가 어디까지
다다를지 생각하게 만드는 고통과 기쁨이었다. 결국 그녀는 목이 메는 것을
참을 수 없게 되자 이마를 짚으며 더듬거렸다.
"빌어먹을, 당신이 보고 싶어요."
마치 음악의 휴지부처럼 침묵은 굉장한 생명력으로 나름대로 대화를 이루었다.
두 사람 모두 목이 메었다. 결국 그는 화가 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도 벌써 말했잖소, 당신이 보고 싶다고. 그런 내게 뭘 원하지? 당신 때문에
내 인생을 포기할 순 없소!"
"알아요, 안다니까요! 당신에게 그런 기대를 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만약…….
또 다시 말이 끊겼다.
커다란 침묵이 먼 거리까지 울렸다.
"만약에 뭐요?"
그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내가 원하는 건……. 그건……. 당신과 같이 있고 싶어요.
아주 가끔씩이라도. 그게 전부예요. 그냥 당신 옆에 있고 싶은 마음, 이해해요?"
"뭣 하러? 같이 자고 싶어서?"
"아니오!"
그러더니 조금 더 솔직하게 말했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윈터그린에 마음 한구석을 남겨 두고 온 것 같아요.
그래서 아직 내가 당신과 그곳에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나 봐요. 내슈빌로
돌아온 이후 별다른 일은 생기지 않았지만, 이런 마음마저 없애라면 난 죽을
거예요, 케니. 죽을 것만 같아요. 이건 내 인생이에요! 그러면서도 당신 없는
인생에 난 서서히 죽어 가요. 너무도 혼란스러워요."
두 사람은 답안을 찾으려 애썼지만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다시 말했다.
"아마 날 사랑하나 봐요, 테스. 날 사랑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 적은 있소?"
"네."
"하지만 떠나기 전에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지요. 또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할 기회도 주지 않았고."
"사랑은 너무 무서워요. 너무 많은 일이 복잡하게 얽히니까요."
"누구에게? 내게, 아니면 당신에게?"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그러면서 지금도 그 말을 하지 않으려 하겠지."
"확실하진 않으니까요!"
"그러면서도 내가 페이스와 끝나길 바라요, 왜지요?"
"난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그래요, 하지만 암시는 주었소. 당신에게 내슈빌과 가수 경력이 중요한
것처럼 내게도 나름대로 중요한 인생이 있고, 페이스는 내 인생의 가장 큰
부분이라는 사실을 당신은 모르는 척하는 것 같소."
"좋아요, 좋다구요! 말싸움하고 싶진 않아요, 부질없는 짓이니까. 우리가
싸울 때마다 논리적으로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요. 그러니까 난 여기
있고, 당신은 거기 있으니, 당신은 당신 일이나 상관하고 난 내 경력을 쌓으며
1년에 120회가 넘는 콘서트를 열면 그만이에요! 머리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우리가 지금 말도 안 되는 짓을 한다는 걸 금방 알겠지요. 우리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싸움을 비약시켰는지조차 모르겠어요."
"왜냐구? 우리가 서로를 그리워하기 때문이오……. 또 어쩌면―이건 정말
만약의 경우인데 ―우리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일 수도 있소. 이게 사실이라면
왜 우리는 사랑한다는 감정을 직시하지 않고 도망치려 할까?"
"케니, 난 졸업 축하 파티에 참석할 수 없다고 말하려고 전화했어요.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복잡하게 됐죠?"
"당신뿐 아니라 내 마음 역시 복잡해졌다는 걸 알아주면 좋겠군요. 이제
싸움이 시작됐으니 이만 서로에게 잘 자라는 인사나 하고 케이지하고 이야기하는
게 어떨까? 우리 이야긴 다음에 할 수 도 있으니까."
"좋아요."
테스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알았소."
그도 되받았다.
그런 다음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어서 케이지를 바꿔요!"
테스가 명령조로 말했다.
"알았소."
그도 똑같이 화를 내며 고함쳤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히 짚고 넘어갑시다. 그건 그냥 잔디밭에서 뒹군
것 이상이라는 걸 우리 두 사람 다 알아요!"
찰칵하고 수화기를 놓는 소리에 이어 케이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케이지, 테스 전화다!"
케이지는 금방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만 들어도 함박 웃음을 짓는 소녀의
얼굴이 떠오를 정도였다.
"여보세요, 1주일도 안 남았어요. 제가 날아갈 테니까!"
"그래. 그런데 기다리기가 힘들구나."
"일요일 오후에 그곳에 도착할 거예요. 아, 잠깐만, 월요일에 갈게요."
"네가 쓸 방은 다 준비해 두었어, 토요일 졸업 축하 파티에는 갈 수 없단다.
미안해."
"치, 그럴 줄 알았다니까."
케이지는 금세 들뜬 목소리로 변했다.
"그래도 초대장은 보내고 싶었어요."
"일찍 전화를 했어야 했는데. 하지만 나도 빠져 나갈 궁리를 하느라 애썼단다."
"괜찮아요."
"그래도 졸업 축하 선물은 보내야겠지. 너만 알아야 하는 비밀이야."
"뭔데요?"
"내슈빌에서 발매되기 전에 내 새 앨범을 제일 먼저 듣고 싶지 않아?"
"어머머, 맥, 정말이에요? 저한테 제일 먼저 앨범을 보내 주시려구요?"
"너한테 빨리 들려주고 싶어. 하지만 다른 사람한테는 절대로 테이프를 빌려주거나
들려주지 않겠다고 약속해야 해. 내가 신곡 앨범을 먼저 빼낸 사실을 잭이
알면 욕할 테니까. 약속하지?"
"아빠한테도 비밀인가요?"
케이지는 조금 실망스러운 목소리였다.
"글쎄, 네 아빠라면 괜찮겠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한테는 절대 안 돼. 페이스도
안 되고, 브렌다도 에이미도, 어느 누구한테도 들려주지마. 너하고 네 아빠만
들어야 해. 알았지?"
"약속할게요, 맥."
"좋아. 그럼, 다음주 월요일에 만나자, 그리고 네가 여기 오면 우리끼리
근사하게 파티 하자."
"좋아요. 그건 그렇고 우린 언제 스튜디오에 가죠?"
"화요일에, 잭이 벌써 다 계획을 세워 두었어."
"야, 이런 통화를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어요. 믿기지가 않아요!"
"사실이니까 마음대로 믿으렴. 이젠 끊자. 늦은 시간인데 나 아직 사무실이거든.
이젠 집에 가야지."
"그래요. 엿새 남았네요!"
"그래 엿새야. 그럼 그때 보자"
그 6일은 강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빨리 지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하루가
지나갔다. 또 눈을 뜨면 새로운 하루였다. 테스는 테이프를 특급 우편으로
케이지에게 부쳤다. 테스는 마리아에게 손님방 중에서 욕실이 딸린 방을 치우고
냉장고에는 10대들이 좋아할 만한 음식을 가득 채우라고 말했다. 가능한 케니
생각을 떠올리지 않으려 노력했고 이런 노력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녀의 마음은 처리해야 할 일로 채워졌다. 그 중 카를라의 성대 문제가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몇 달 전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지며 쉰 소리를 내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단순한 감기거나 아니면 간단한 호흡기 문제로 여겼다.
하지만 이런 상태가 계속되자 카를라는 적절한 기술을 배울 생각으로 다른
식으로 발성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발성 지도를 받은 지 몇 주일이
지나도 목소리가 나아지지 않자 그때서야 의사를 찾아갔다. 의사는 '목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 목소리를 그대로 썼는데 그것이
결국에는 최악의 결과를 낳게 되었다.
결국 카를라는 성대 전문의를 찾아갔다. 전몰 장병 추도일 전 금요일 오후에
검진 결과가 나왔다. 전문의는 갑상선 기능 부전증이라는 진단을 내렸는데,
이 말은 그녀의 몸이 성대에 영향을 미치는 갑상선 호르몬을 더 이상 만들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의사는 목을 쓰는 일을 당장 중지하라고 명령했다 한 달
동안은 휘파람을 불어도 안 되었다! 그러면서 카를라의 목소리가 정상으로
돌아오려면 적어도 2년은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 소식을 들은 테스 맥파일 측은 당연히 아연했다. 순회 공연을 위한 연습은
벌써 시작되었기 때문에 잭 그리브스와 데인 틀리, 로스 하덴버그와 테스는
머리를 모아 카를라의 목소리를 대체할 인물을 찾아내야 했다. 이 도시에는
작은 클럽에서 노래하며 음반을 낼 기회를 잡으려고 혈안이 된 여자 가수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한 번만이라도 테스 맥파일의 노래에 화음을 넣어 주면 단번에
화려한 경력을 쌓는 데 필요한 발판을 얻을 수 있었다. 로스는 후보자 명단을
만들었다. 제일 위에는 스물 두 살인 라이저 라이먼의 이름이 있었다. 테스도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었고, 그만하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맞을지 모르겠어요."
테스가 말했다.
"한 번은 기회를 주어야지. 들어봅시다. 주말 동안 각자 생각해 보고 다음
화요일 회의 때 다시 이야기하기로 해요."
로스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