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치지는 않는군>
다음날 오후 2시, 테스와 케이지는 뮤직 로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방갈로를 개조해서 만든 '16번 애비뉴 사운드'로 갔다.
테스는 별 특징 없는 작은 접객실을 지나 소파와 탁자, 의자들만 있을 뿐
밖으로 난 창문은 하나도 없는 방으로 케이지를 안내했다. 콜라 자동 판매기에
빨간 불이 켜져 있었고 은은한 커피 향기를 풍기는 커피 메이커가 보였다.
스피커는 보이지 않았지만 컨트리 음악이 낮게 깔렸다. 회색 구레나룻을 달고
꽁지머리를 묶은, 몸집이 큰 사내 1명이 소파에 앉아 음악에 맞추어 휘파람을
불며 전자 콘트라베이스를 꺼냈다.
"여, 레런드! 그 동안 잘 지냈어?"
테스는 반갑게 인사했다.
"오늘 내 노래에 화음을 넣어 줄 예쁜 아가씨를 소개할게."
테스의 활기 찬 말솜씨에 레런드는 웃음을 지었다.
"이쪽은 케이지 크로넥, 이쪽은 레런드 스미스야."
두 사람이 악수를 하는 사이 붉은 머리를 자니 카슨처럼 깎고 말쑥한 청바지에
폴로 셔츠를 입은 30대 남자 1명이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는 키보드를 연주하는
댄 폰테이노였다. 그도 케이지와 악수를 나누었다.
"케이지, 이젠 잭을 소개해 줄게."
테스가 말했다.
잭 그리브스는 5미터가 넘는 콘솔을 앞에 두고 앉아 기다리는 중이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버튼과 전선으로 연결된 이 마법의 전자 기계 위에 켜진 주황색
불빛들은 마치 우주 정류장의 활주로 같았다.
잭의 옆에는 56가지 음향을 마음대로 골라 결정하는 음향 엔지니어가 앉아
있었고 그 옆 녹음기가 놓인 근처에 조수가 있었다. 가운데에는 커다란 유리벽이
있어 그 안의 녹음 스튜디오가 한눈에 들어왔다. 녹음을 하게 될 가수들이
연습을 하는 장소에는 낮은 조명이 들어왔고 그 위로 벽 높은 곳에 스피커가
달려 있었다.
테스가 들어오는 것을 본 사내 2명이 유리벽 너머에서 손짓으로 인사를 했다.
"안녕, 맥."
그녀는 몸을 앞으로 숙이고 유리벽 너머로 소리가 연결되는 단추를 눌렀다.
"모두 잘 있었죠?"
단정한 갈색 머리에 턱수염과 콧수염을 모두 기른 잭은 언뜻 보아서도 꼼꼼하고
야무진 인상이었다. 그는 의자를 빙글 돌려 테스에게 웃음을 짓고 뺨에 입을
맞추고는 케이지를 소개받자 악수까지 청했다. 하지만 이런 태도에서도 시간을
조금도 낭비하지 않는 깐깐한 사업가다운 인상은 지워지지 않았다. 음반 프로듀서로서
그는 테스의 시간 관리뿐 아니라 여러 가지 신경이 많이 쓰이는 회의를 주재하는
사람이었다.
스튜디오 임대료는 하루에 2000달러였다. 스튜디오 연주자들은 하루 3시간
동안 일하는 대가로 일당을 500달러 받았다. 오늘은 믹싱 작업이나 최종 마스터
테이프를 만드는 일은 없지만 6시간 일하도록 계약이 되었기 때문에 오늘 하루만도
비용이 1만 달러나 나가게 될 것이다.
잭 그리브스는 1분 1초가 돈이라는 것을 알만큼 이 분야에서 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또 테스의 돈을 함부로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직 AFTRA(미국 텔레비전 라디오 연예인 연맹) 카드를 신청하지 않았나?"
잭은 케이지에게 물었다.
케이지는 얼이 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뭐라고 하셨죠?"
"회원 가입 신청을 말하는 거야."
테스가 설명했다.
"미국 텔레비전 라디오 연예인 연맹에서는 모든 가수들의 연주를 기록으로
남긴다는 방침을 세웠거든."
그런 다음 테스는 책에게 얼굴을 돌렸다.
"오늘은 첫날이니까 케이지에게 자격을 확인할 필요 없어요.
아직은 자유로운 처지니까 한 달 동안은 괜찮아요. 그러니 그 일은 걱정
말아요."
테스는 다시 케이지에게 말했다.
"연맹에 가입하도록 도와주라고 비서에게 말해 둘게."
잭은 곧바로 일을 착수했다.
"상자 하나를 쓰겠소, 아니면 2개?"
"하나요. 처음 온 케이지에게는 그쪽이 편할 거예요."
"카를로스, 준비됐나?"
그가 음향 엔지니어 쪽으로 몸을 돌릴 때 레런드가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와
콘트라베이스를 조율하기 시작했다.
테스는 케이지에게 속삭였다.
"잭은 신경 쓰지마. 여기만 들어오면 한 가지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남자니까.
자, 이젠 우리가 할 일을 하면 돼."
유리벽과 조정대를 향해 등이 높은 가죽 의자 8개가 일렬로 서있었다. 케이지와
테스는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런 다음 케이지는 낮은 소리로 물었다.
"상자가 뭐예요?"
"녹음실을 말하는 거야."
테스는 유리벽 너머로 보이는 스튜디오 왼쪽 편에 붙어 검은 벽으로 둘러쳐진
작은 방 2개를 가리켰다.
"각각 다른 방에서 따로따로 녹음할 수 있어. 우리는 한 방에 들어갈 수도
있고 따로따로 나누어 들어갈 수도 있지만 네가 익숙해지기까지 같은 방에서
녹음하는 편이 더 나을 거야. 그럼 눈을 감고도 서로에게 상승 작용을 일으킬
수 있을 테니까."
잭은 스튜디오 안 마이크를 켜 두었기 때문에 연주자들이 두 방 사이를 오고가며
하는 말을 모두 들을 수 있었다. 각자 악기를 조율하던 연주자들은 갑자기
5, 6소절에서 20소절 정도 악기를 맞추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스튜디오
바깥 사람들은 짐작 못 할, 자기들만 아는 짧고도 색깔 있는 말을 주고받았다.
누군가 입을 열었다.
"리의 베이스 소리가 졸립지 않아?"
"이 안에 날파리가 들어왔나 보군."
"다른 트랙으로 해보자."
"좋아, 그럼 16소절을 해볼게, 리."
잠시 후 레런드가 뛰어들었다.
"제기랄, 그대로야."
"그럼 다른 코드로 해봐."
음향 기술 조수는 방을 나갔다가 유리벽 반대편에 나타나 코드를 바꾸었다.
레런드는 다시 연주했다.
"훨씬 나아졌지?"
조수는 말했다.
귀마개를 한 드럼 연주자는 작은북과 테너 북 위에 막대기를 걸치더니 심벌즈를
때리고 그 다음에는 베이스 북을 몇 번 쳐보았다. 기타 연주자 2명은 밖으로
소리가 안 나도록 전자 튜너를 만지며 악기를 조율했다. 유리문을 바라다보는
검은 그랜드 피아노 뒤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는 피아노 연주자는 거슈윈의
피아노곡을 치다가 리듬을 부기우기(블루스에서 파생된 재즈 음악의 한형식.
1920년대 시카고의 흑인 피아니스트에 의해 흑인 사이에서 유행함. 1소절을
8박으로 연주함)로, 다시 아르페지오로 바꾸어 연습하다가 슬며시 건반에서
손을 eP었다. 전자 키보드를 치는 사람은 종소리가 나도록 음향을 조작하고
난 다음 피아노 연주자와 똑같이 연주를 했다. 레런드는 아직도 베이스를 만지작거렸다.
"오늘 습도가 너무 높아서 계속 끽끽거리는 소리가 나는데. 내 능력으로는
소리를 낮추기 힘들겠어."
색소폰 연주자는 두 방 사이에 있는 홀에 악보 대를 세우고 열린 문 사이로
최고 높은 음에서 코맹맹이 소리가 나는 저음까지 꼬리를 물고 늘어지듯 요술을
부렸다.
잭이 말했다.
"누가 악보 있나?"
"저요. 여기로 가지고 왔어요."
피아노 연주자가 말했다.
"무슨 말이야, 모두 돌려보고 한번 들어 봐야 하지 않겠어?"
연주자들을 둘러보는 케이지는 처음 경험하는 녹음 현장에 압도되었고 자기가
이 사람들의 일부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리드 기타리스트를 노려보던
그녀는 테스에게 속삭였다.
"어머머, 세상에, 앨 머피잖아. TNN에 출연하는 걸 본 적 있어요. 그리고
키보드는 테리 솔럼이잖아! 존 덴버하고 호흡을 맞추던 연주잔데!"
"이번에 우리 작업을 같이하게 됐어. 네 마음에도 들 거야. 순회 연주자들은
본질적으로 모방자라고 할 수 있어. 그들은 음악을 재창조하지. 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 즉 스튜디오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제일 처음 원곡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야. 오리지널 말이야. 우린 최고 실력자들만 불러모았어. 모두에게
이중 급료를 주면서 말이야. 연주할 때 보렴."
"이중 급료라뇨?"
"일반적으로 한 번 받고 또 협회 규칙에 따라 한 번 더 돈을 받거든."
연주자들은 스튜디오에서 나와 조정실로 들어왔다. 케이지는 한명 한명을
소개받을 때마다 얼굴이 환해졌다.
피아노 연주자가 복사한 악보를 나누어주었다. 내슈빌 번호제도에 따라 종이
위에 코드를 표시하고 이것을 연주자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내슈빌 번호 제도란 악보가 엉뚱한 사람들 손에 넘어가 표절되지 못하도록
일련 번호를 매기는 제도였다. 50년대에 조더네어란 사람이 창안한 이 번호
제도는 그 후 수정 발전을 해서 악보를 다시 그리는 일 없이도 즉시 편곡할
수 있게 되었다. 케이지가 1, 4, C, V번 줄을 들여다보자 테스는 하나하나
짚으며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엔지니어 조수가 데모 테이프를 걸었고, 연주가
시작되자마자 케이지는 무슨 곡인지 알아챘다.
각 키에 이름이 있었다. 그리고 숫자는 그 키에 몇 소절이 해당하는지를
가리켰다. V는 노랫말이고 C는 코러스 부분이었으며 B는 간주를 의미했다.
이것은 건물을 짓기 전에 집의 틀을 세우는 것과 똑같았다. 노래의 구체적인
뼈대는 연주자들이 마음대로 변주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연주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었다.
데모 테이프가 다 돌아가자 연주자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아주 좋은데.
정말 둘이 같이 지은 노래야? 조금 고쳐야 할 부분이 있긴 하지만 제대로 만들어질
것 같아. 다시 한번 들어 보자구"
"우리가 무슨 장조로 노래했죠, 테스?"
"바장조야."
테스가 대답했다.
모두가 악보에 바장조라고 쓴 다음 연주자들은 수없이 많은 데모 테이프를
들었던 스튜디오로 다시 들어갔다. 처음에는 서로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그들은 각각의 음악적 재능을 그 노래 속에 담기 시작했으며, 곧이어 다른
사람이 연주하는 소리를 느끼고 의견을 나누고 다른 사람의 음악 사이에 끼여들며
연주를 했다. 말하고 연주하고, 연주하고 말하고. 뒤죽박죽 세상 같았다.
그 동안 테스와 케이지는 가사가 적힌 종이를 들여다보며 어디에서 누가
부를지 표시했다. 때때로 스튜디오 안쪽에서 연주자들이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
낸 음악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이리 와. 인제 들어가자."
테스가 말했다. 그녀는 스튜디오를 지나 녹음실 중 한 곳으로 케이지를 데리고
들어갔다. 방음 장치가 된 검은 벽, 악보대 2개 위로 조명이 비쳤고 스탠드
마이크가 2개 있었다. 각 악보 대에는 헤드세트가 하나씩 얹혀 있었다 엔지니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럼 소리 좀 확인해 보자구."
엔지니어가 음량을 조절하는 데는 약간 시간이 걸렸다. 그 동안 각자 자기
파트로 노래 여기저기를 부르는 두 여자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들렸다가 가라앉았다.
이렇게 몇 분에 걸쳐 음향 조절이 끝나자 조정실에 앉은 잭 그리브스가 마이크를
통해 말했다.
"좋아, 여러분, 지금 시작해도 문제없겠지?
테스는 케이지가 긴장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음놓고 윈터그린에서 불렀던 것처럼만 부르면 돼. 녹음하기 전에 연습할
시간은 많아."
드럼 연주자가 표준 박자로 시작을 알리는 신호음을 냈다. 헤드세트를 통해
악기의 합주 소리가 들려 왔고 온몸을 울리는 그 소리에 케이지의 얼굴은 점점
밝아졌다. 야, 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헤 벌렸고 테스는 소녀를 향해
웃음을 지어 준 다음노래를 시작했다.
갑자기 잭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오오, 무슨 일이야. 색소폰 부분에 보컬이 들어가야 하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음악 소리가 사라지고 제1 엔지니어가 의견을 냈다.
"그럼 19번으로 해보지."
조정실에서 무언가 부산을 떨더니 문제는 해결되었다.
"좋아, 한 번만 더 하자구."
잭의 말을 신호로 다시 드럼 연주자의 박자가 시작되었다. 테스는 노래를
시작하라는 신호를 받았고, 케이지의 목소리가 여기에 더해지자 이어폰으로
들려 오는 그 목소리는 충격적이었다. 마치 부드러운 초콜릿과 딱딱한 호두가
묘하게 어우러진 것처럼 서로 아주 다른 목소리가 섞여 귀에 들리는 순간 테스는
오늘 뿐 아니라 앞으로도 많은 노래를 케이지와 같이 부르게 되리라고 확신했다.
케이지의 표정을 살피며 노래를 부르는 테스는 소녀의 비범한 재능을 다시
확인하자 기뻤다. 둘이 같이 만든 노래가 제대로 된 음향 기기의 도움을 받자
놀라운 생명력으로 다시 태어났다. 케이지의 환한 표정에서 소녀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확인하는 순간 오래 전 노래를 시작할 때 처음 녹음실에 들어갔던
자신이 떠올랐다. 소녀는 훌륭했다. 화음은 최고였다. 케이지는 크게 불러야할
때와 목소리를 죽여야 할 때를 알았다. 내슈빌에서는 진짜 음악에 재능을 가진
사람을 키울 때 늘 "음악을 망치지는 않는군"하고 말하는 게 관습처럼 되어
있었다. 케이지가 바로 그랬다. 테스가 윈터그린에서 처음 감지했던 소녀에
대한 믿음이 오늘 다시 더 큰 힘으로 떠올랐다.
첫 번째 연습이 끝나자 케이지는 소리를 내질렀다.
"야, 다 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멋져요, 테스! 내가 죽은 게 아닌가?
여기가 천국이 아니라면 어디가 천국이겠어요!"
"할수록 더 좋아질 거야."
"더 좋아지다뇨. 지금 부른 것보다 더 좋아지면 어쩌게요?"
테스는 낄낄 웃었다.
"아니, 난 음악을 말한 거야. 아직 정리해야 할 부분이 있어. 내 생각에는,
여기 간주가 들어가기 전 이 부분 말이야."
두 사람이 각자 맡을 부분을 나누는 동안 연주자들도 의견을 나누었다.
조정실에 있는 잭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숙녀분들, 소리 좋았어요. 2절 마지막 부분에서는 2소절 정도 솔로로 하다가
슬쩍 사라지는 게 어떨까?"
잭의 말대로 되었다. 잭은 다른 연주자들 모두에게 의견을 물었다. 연주자들은
각각 자기 생각을 펼치면서 자기가 연주하는 악기로 군데군데 색다른 리듬과
기술을 시연해 보였다. 스튜디오에 모인 재능꾼들은 모두 독창적인 방법으로
산뜻하게 일을 했다.
3000달러어치가 넘는 공테이프가 준비되었지만 잭은 충분히 다듬어지지 않은
노래를 녹음해서 돈을 없애고 싶지 않았다. 대신 서로 이것저것 실험해 본
10분 후에 두 번째 연습을 했다. 첫 번째와는 많이 다른 느낌이었다. 잭은
말했다.
"좋아, 여러분, 이제 하나 녹음해도 되겠지."
댄 폰테이노가 말했다.
"물론이지, 우리는 전문가란 말이야. 한 방에 끝내 줄 수 있어."
"좋아, 그럼 테스와 케이지는?"
"준비됐어요."
댄이 박자를 치자 엔지니어 조수가 테이프를 걸었다. 엔지니어는 보드를
조정했고 잭은 정신을 집중할 때의 버릇대로 손가락하나를 입술에 대고 이마를
찌푸리며 음악 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다. 감미로운 음악이었다. 하지만 중간에
댄의 이어폰이 떨어지자 댄은 연주를 멈추었다. 반주 소리가 수그러지며 노래
소리도 끊겼다. 연주자들은 자연스럽게 농담을 던졌다.
"어, 댄, 집에나 가라구."
"그럼, 우린 전문가인데 말이야."
누군가 흉내 내는 소리를 했다.
"한 방에 끝낼 수 있다니까."
"그놈의 이어폰을 댄 머리에 확 틀어박아 줘. 그래야 두 번 다시 떨어뜨리지
않을 테니까."
"누구 초강력 접착제 가진 사람 없어?"
모두가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모든 것의 감독이자 책임자인 잭은 재빨리
자기 본분으로 돌아왔다.
"지금까지 한 것은 살려 두고 다시 한 번 해보자구. 댄, 준비됐으면 알려
줘."
이번에는 끝까지 연주를 마쳤고 테이프에 녹음도 되었다. 연주자와 가수
모두가 테이프를 들어 보기 위해 조정실 안으로 꾸역꾸역 들어왔다. 여자들은
가죽 의자에 앉아서 경사진 책상 위에 팔꿈치를 대고 몸을 숙였다. 남자들은
조정대 근처에 모였다. 기타 줄을 혼자 튕기는 사람도 있었고 조정대를 열심히
들여다보기도 하고 또 이런저런 말을 하는 연주자도 있었다. 방안의 모든 사람들은
음악에 맞춰 무릎장단을 치거나 발과 머리를 끄덕이기도 하고 손뼉을 치며
노래를 들었다.
테이프가 다 돌아가자 일제히 한 마디씩 던졌다.
"아주 탄탄한데."
"심금을 울리는 신선한 발라드 곡이야."
"케이지, 첫 시작이 아주 좋았어."
첫 녹음이 마음에 들긴 했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생각을 털어놓았다.
"솔로 부분이 너무 화려하지 않아?……여기 네 번째 소절은 조금 빠른 것
같구.……모두 템포를 조금 늦추는 게 좋겠어."
그들은 의견을 나누는 대로 스튜디오와 조정실을 오가며 2시간 반 동안 더
소리를 맞추며 음악을 만들어 나갔다. 매번 녹음이 되었고 녹음된 것을 다시
들어보았다. 녹음, 듣기, 녹음, 듣기의 반복이 계속되었다. 결국 모두의 마음에
맞는 테이프가 완성되었다. 그들은 이것을 택하기로 했다.
"이게 좋겠어."
"드디어 밥값을 했군."
오랫동안 수고한 결과로 최고의 테이프가 나오자 그 동안의 긴장은 수그러들고
모두가 자기 만족을 느꼈다.
"간단하게 요기라도 하자. 저녁 7시에 다시 모이도록 하고."
잭이 말했다.
그들이 녹음하는 동안 주문 음식은 이미 도착되었다. 음식은 라운지에 있는
커다란 식탁에 부페식으로 차려졌다. 사람들이 식탁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믹
머롤이 잭에게 물었다.
"테스가 노래하는 부분, '안녕 이란 작별 하지만 울진 않으리'부분을 좀더
강조해도 될까?"
믹이 스튜디오로 돌아간 사이에 다른 사람들은 라운지에서 얼쩡거리며 콜라
자동 판매 기에서 콜라를 빼기도 하고 접시에 음식을 담아 소파에 둘러앉기도
하면서 지금 작업중인 노래에 대해이야기를 나누었다.
케이지는 너무 좋아서 자리에 앉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야, 정말 끝내주는 동네예요!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 재미있는 곳은 처음이에요!"
사람들은 누구나 맨 처음 자기 노래를 들으면 반하게 마련이라고 한 마디씩
던지며 악의 없는 농담으로 소녀를 놀렸다.
"어이, 맥, 이 꼬마 숙녀 꼬리를 단단하게 잡아야겠어. 그렇지 않으면 어디서
빼 갈지 모르니까 말이야. 꼬마가 굉장히 잘한단 말이야."
테스는 웃음을 지었다.
"케이지, 신경 쓰지 말고 많이 먹어 두는 게 좋아. 여기 사람들은 앞으로
3시간이 더 지나야 아 이제 저녁이구나 하니까."
믹이 돌아와서 책에게 다가갔다. 잭은 음식에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테스에게 말했다.
"아직 보컬에 문제가 있어. 만약을 위해 기계를 조정하고 내일 다시 녹음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당신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래야죠. 케이지는 어떻죠?"
"케이지도 와야지. 녹음실을 2개 다 이용하면 훨씬 소리가 좋아질 것 같아.
케이지, 어때?"
소녀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곳에 다시 와 달라는 부탁을 받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다.
"네, 그럼요. 되고 말고요!"
테스는 잭에게 말했다.
"그림 내일 같이 올게요."
그들은 둘러서서 구운 새우와 쌀 필라프(쌀에 고기?채소를 섞어 기름에
볶은 다음 수프로 쪄서 향료를 가미한 요리), 샐러드, 청포도와 수박을 먹었다.
음식은 모두 실용적이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파티가 아니라 작업 중에 잠깐
쉬는 휴식 시간이었다. 스튜디오 연주자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언제까지나 생생한
음악을 추적하는 태도가 필수였다. 먹는 걸 위해서 어딘 가로 나가게 된다면
음악에 대한 충동이 식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들은 잘 알았다. 그렇다면 테이프에
실릴 음악은 생명력이 약하게 된다는 것도.
잭은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는 조정실로 돌아간 다음 엔지니어와 그
조수와 함께 앞서 녹음한 테이프를 다시 들으면서 어디를 잘라야 할지 생각
중이었다.
테스는 케이지 곁을 떠나 잠깐 동안 연주자들과 이야기한 다음 프로듀서와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기 취해 조정실 안으로 들어갔다.
"잠깐 얘기할 수 있어요, 잭?"
"그럼."
그는 조정 대에서 빙그르 의자를 돌리고 그녀에게 앉으라고 권했다.
엔지니어와 조수는 두 사람만을 남기고 먹을 게 남았나 보러 방을 나갔다.
"당신 의견을 알고 싶어요."
두 사람만이 남자 테스는 물었다.
그는 그녀가 중요한 것을 물을 때는 언제든지 그녀의 요구대로의견을 말해
주는 상대였다.
"당연히, 그래서 돈을 받으니까."
"앨범 이야기가 아니에요. 순회 공연 문제예요. 카를라의 목은 오늘내일
나아지지 않을 거예요. 순회 공연에 케이지를 데리고 가도 괜찮을지 당신 생각을
듣고 싶어요."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너무 어리잖아."
"그래도 재능이 있잖아요. 또 내 음악을 잘 알아요. 잭, 어제우리 둘은 집에서
전에 발표했던 앨범에 실린 노래들을 불렀는데 저 애는 모든 곡을 완전하게
소화해 냈어요. 한 구절 한 구절이CD에서 나오는 화음과 꼭 일치했어요. 저
애가 경험이 없다는 건 인정하지만, 우린 지금 연습할 시간도 많지 않은 데다가
때로는 경험만 있는 사람보다 열정 있는 사람이 같이 작업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되는 법이잖아요. 게다가 난 저 애가 좋아요. 우린 한우리에 사는 고양이처럼
잘 맞구요. 어때요?"
"랠프에게 말해 봤어요?"
공연 측 프로듀서인 랠프 손리프도 결국은 승낙할 것이다.
"나중에 말할게요. 지금은 당신 생각을 알고 싶어요. 어젯밤 떠오른 생각이어서
랠프에게 전화할 시간이 없었어요. 그건 그렇고, 어떻겠어요?"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잘 알 텐데. 난 당신의 감각을 전적으로 믿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당신 앨범 공동 제작자로 나서지 않았겠지. 또 저 애 목소리도
마음에 들고."
"여기에 다이언 목소리까지 합치면 괜찮겠죠?"
다이언 어빙턴은 테스의 또 다른 백업 가수였다.
"케이지 목소리는 정말 다이언과 많이 닳았더군. 같이 노래를 부르면 멋질
거야."
"에스텔은요?"
에스텔 파글리오 역시 테스의 노래에 화음을 넣는 가수였다.
"에스텔이야 아무하고도 어울리는 목소리지 왜 진작 두 사람을 여기로 불러올
생각을 못 했을까?그랬다면 케이지와 두 사람이 같이 화음을 맞추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테고, 당신도 마음이 편했을 텐데. 당신이 원한다면 <오래
된 영혼>을 조금 부르게 할 수도 있었을 테고. 아무튼 3화음으로 넣으면 더
깊은 소리를 낼 수 있는 부분이 어딘지 생각해 봐야겠군. 당신 생각은 어때?""좋은
생각이에요. 세 사람이 목소리를 맞추는 동안 난 랠프에게 전화를 걸고, 그럼
우리 모두가 4명이서 같이 노래하는 소리를 알게 되겠죠. 랠프에게 케이지를
소개할 기회도 자연스럽게 잡게 되구요."
테스는 라운지로 돌아와 연주자들과 어울렸다. 색소폰 연주자는 자리를 떠났고
대신 다음 노래를 위해 바이올린 연주자가 왔다.
저녁 시간이 되자 모두가 다시 스튜디오로 집합했다. 마지막으로 연습한
<나를 멀리 떠나게 하지 말아요>는 새 앨범에 실을 마지막 노래였다. 연주자들은
조금 전과 같은 식으로 일을 했다. 악보를 보고 데모 테이프를 듣고 각각 연주할
부분을 정하고 최종 곡이 나올 때까지 녹음을 계속하다가 저녁 9시가 되자
잭은 오늘 일이 끝났다고 말했다.
집으로 자동차를 달리는 길에 케이지가 말했다.
"오늘은 정말 제 인생 최고의 날이에요."
아드레날린 분비가 많아졌군, 테스는 생각했다. 케이지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파도를 타는 사람처럼 두 팔을 활짝 폈다.
"아흔 살이 될 때까지 이렇게 살고 싶어."
테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까지 노래를 하려면 장기 몇 개를 새로 달아야 할걸. 예를 들면 폐나
후두 같은 부분 말이지."
"지금 그 생명이 느껴져요! 밤새도록 노래할 수 있을 것 같아! 테스, 사랑해요!"
"다행이구나, 나도 너를 사랑해."
"어떻게 이 은혜를 갚죠?"
"아무것도 갚을 건 없어. 네가 마흔 살이 되어 슈퍼스타의 자리에 오르면
너도 새로운 인물을 찾아내어 길을 터주는 전통을 세우면 되잖아. 그게 음악
하는 사람들이 빛을 갚는 방법이지."
"꼭 기억해 두겠어요. 약속해요."
집에 돌아가자마자 케이지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케이지가 부엌 전화에
매달리는 동안 테스는 마리아가 선반에 놓아둔 우편물을 뒤적였다.
"아빠! 너무너무 멋진 하루였어요! 이어폰으로 제 목소리를 들어 봤는데,
그건, 야호, 정말 중요한 일이란 거 아빠도 아시죠? 우린 같은 노래를 몇 번씩이나
녹음하고 또 녹음했어요. 사람들이 모두 제게 참 잘해 줬어요. 스튜디오 연주자들은
리키 넬슨이나 그레이엄 내시 등등 아빠도 잘 아시는 유명 가수들하고 호흡을
맞추었던 연주자들이었어요. 그러니까 여기서 제일 실력 있는 그 사람들이
절 어떻게 대했냐 하면……."
케이지가 쉴 새 없이 말을 쏟아 내는 동안 테스는 부엌을 나와 사무 공간으로
갔다 10분쯤 지났을까, 케이지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보세요, 테스, 아빠가 전화 바꿔 달라세요!"
테스는 사무실에 있는 전화기를 들었다.
"안녕, 귀는 어때요?"
조금은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그녀는 말했다.
그는 큰 소리로 웃었다.
"케이지가 완전히 얼이 빠졌더군, 너무 흥분해서."
"당신도 여기 와서 보면 좋았을 텐데. 케이지는 정말 훌륭했어요. 같이 맞춘
소리도 좋았구요."
"알아요. 케이지한테서 들었소. 뭐라뭐라 종알대지 않으면 죽을 것처럼 얘기하고
또 하고."
이번에는 테스가 웃었다. 거실에서 케이지는 온 집 안이 떠나가도록 테스의
CD를 크게 틀었다.
"잠깐만요."
테스는 의자를 돌리고 벽에 걸린 스피커의 음량을 조금 낮추었다.
"됐어요, 한결 조용해졌군요. 당신 딸이 음악을 너무 크게 틀어서, 게다가
지금……."
"케이지가 혹시 너무……."
"아니오, 걱정 말아요."
테스는 말을 끊었다.
"케이지와 난 사이 좋게 잘 지내니까요."
"오늘 일 고맙소, 케이지를 위해 당신이 한 일 모두가."
"케니."
그녀는 의자를 앞으로 당기고 책상에 팔꿈치를 기댔다.
"내일 일 말인데요, 내일 스튜디오에서 다시 녹음을 하기로 했는데 다른
가수들과 같이 케이지에게 노래를 시켜 볼 작정이에요. 내일 올 두 사람은
순회 공연 때 같이 다니는 가수들이거든요. 원래는 3명이었는데 카를라라는
백업 가수가 성대에 문제가 생겨서 적어도 2년 동안은 같이 작업을 할 수 없게
되었어요. 하지만 케이지가 다른 가수들과 잘 어울린다면 7월 하순부터 있을
순회 공연을 같이하자고 제의할 참이에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테스가 다시 먼저 말을 꺼냈다.
"반대하나요, 케니?"
"케이지를 너무 빨리 키우는 거 아니오?"
"맞아요."
그려는 솔직하게 대답하고 그의 응답을 기다렸다.
"겁이 나는군."
"짐작이 돼요."
"너무 빨리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어."
"그애는 내가 취입한 노래 전부를 외워요. 가사뿐 아니고 화음도 모두 외워요.
솔직히 말하면 오히려 케이지가 나를 도와주는 셈이에요. 새로운 가수를 만나고
같이 연습을 하고 하는 지루한 과정을 겪을 필요가 없으니까요. 1∼2주일 정도만
연습하면 순회공연 하는 것도 문제없을 거 같은데."
다시 침묵이 흘렀고, 그녀는 현명하게 이 침묵을 받아들였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그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뿐 말은 없었다.
"순회 공연은 6월 28일 애너하임에 있는 애 로우헤드 폰드에서 시작해요.
공연 첫 회 입장권이 이미 매진되었기 때문에 29일에 다시 공연을 하기로 결정했죠.
당신 딸이 관중 1만 8000명 앞에서 노래한다고 상상해 봐요. 환상적이잖아요,
케니."
그녀는 계속 말을 이었다.
"당신은 맨 앞줄에서 케이지의 첫 공연을 보고, 무대 뒤로 돌아와 딸을 안으며
축하한다고 말하고, 우리 모두와 샴페인을 터뜨리는 거예요. 이런 생각 어때요?"
그는 다시 한 번 숨을 내쉬고 나서 어색하게 웃었다.
"날 꼼짝 못 하게 하는군."
"생각해 봐요. 당신에게 제일 좋은 좌석표를 보내 줄게요. 우리 엄마를 모시고
오면 되잖아요. 엄마를 설득하기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당신과 페이스와 같이
간다 하면 여행하시려 할 거예요."
"페이스와 같이 가라구? 정말 페이스가 가기를 바라요?"
"글쎄요. 특별히 바란다고 할 수는 없지만 페이스는 쏙 빼고 당신한테만
표를 보낼 수는 없잖아요?"
"테스, 이건…….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군. 아무튼 당신은 아직
케이지가 다른 가수와 어울리는지 어떤지 들어보지도 않았잖소."
"난 전문가예요. 세 사람 음색이 합쳐지면 어떤 소리가 날지 알 수 있다구요.
그러니 케니, 제발 내 말대로 하겠다고 말해 줘요. 그래야 당신 말을 핑계
삼아 케이지에게 부탁하기 쉽잖아요.
이건 내게 아주 중요한 일이란 말이에요."
"좋아요, 그럼, 당신 말에 동의하겠소. 제기랄,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담?"
테스는 슬며시 웃응 지었다. 이제 그를 언제 만날지 확실히 알게 된 것이다.
"좋아요,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녀는 들뜬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6월 28일 비워 두세요. 애너하임에서 만나요."
"기다려요, 테스!"
"무슨 일이죠?"
"내일 밤 내게 전화 좀 해줘요. 스튜디오에서 어떻게 되었는지 알게."
"물론이죠. 케이지 다시 바꿔 줄까요?"
"아니, 그냥 잘 자라고 전해만 줘요. 한 가지 더 있는데."
"그게 뭔데요?"
"난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아요. 어젯밤 확실히 알았소. 그런데 오늘밤은…….당신에게
내 딸의 일생이 달렸다고 생각하니 어제처럼 선명하진 못한 것 같소."
그녀는 다시 웃었다.
"당신 딸에게 나쁜 일이 생기면 내가 그냥 있을 것 같아요? 걱정 말아요.
난 그애를 사랑하니까."
"오, 케이지는 사랑하는데 난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말하진 않았어요."
"그럼 날 사랑해요?"
"그런 말도 하지 않았어요. 잘 자요, 케니."
"잘 자요, 테스."
그녀는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