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 슈퍼스타>
케이지가 도착하기로 한 시간은 햇빛이 쨍쨍 나는 더운 낮이었다. 마리아에게
휴가를 주었기 때문에 테스 혼자 집에 있었다. 이 집에서 자고 간 손님이 여럿
있었지만 테스가 이렇게 고대한 사람은 없었다.
테스는 저도 모르게 행복감에 빠지고 또 조바심을 내며 구석구석 집안을
둘러보는 자신을 발견했다. 케이지를 위해 하늘색 방을 골라 참나무 원목으로
만든 가구를 들여놓았다. 하얀 차양을 올리고 열어 놓은 창문 사이로 햇빛이
들자 큼지막한 흰색과 파란색 체크 무식의 침대보는 마치 테네시 주의 하늘을
끌어들인 것처럼 방안을 밝게 만들었다.
테스는 잽싸게 방안을 훑어보았다. 서랍장 위에는 화병이 있었다. 욕실에는
파란 수건들을 준비했다. 샤워기 옆에 샴푸와 비누를 놓고 욕조에는 거품 비누가
놓였다. 오디오를 튼 다음 침실조명 2개를 밝히자 손님을 맞을 장소로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손님용 공간은 3개 더 있었고, 테스는 어리석은 기대라고 생각하면서도 케니가
올 경우도 준비를 했다.
케니는 케이지를 차에 태우고 오겠다는 말을 비치지 않았다. 테스도 묻지
않았다. 테스는 미리 말해 두지 않은 것이 지금 후회되었다. 왜 물어 보지
않았을까? 그가 아니라고 말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리라 이런 결론을 내리자
기대감도 멀어져 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가 쓸 방을 짙은 청색 계열로 꾸미려고 했는데 막상 꾸미고 보니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밝았다. 미션 스타일의 가구들과 테라 코타 장식은 조가
비색의 벽과 차양, 바다색 페이즐리모직 천으로 만든 침구와 어울려 한층 더
남성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녀는 금요일 시내로 나가 작은 가게에서 갈색 종이에 싸인화장용 탤컴
파우더(활석 가루에 붕산 ? 향료를 넣은 화장품)와 비누를 샀다. 나무 냄새가
나는 비누로 남자들은 이런 냄새를 좋아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케이지의
방에 꽃은 노란 나리꽃 한 송이를 빼다가 케니의 욕실 바다색 손수건 옆 화병에
꽃았다.
그녀는 그의 침실 문에 깍지를 끼고 서서 그에게 윈터그린으로 돌아가기
전에 이곳에서 지내라고 한다면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해졌다.
갑자기 그에게 자신의 집을 보여 주고 싶어졌다. 그녀가 이루어 놓은 것을
구체적으로 관찰하게 만들며 성공으로 그녀가 누리는 생활 공간-세련되고 널찍하고
안락한 ―을 확인시키고싶다는 욕망에 그녀는 내심 놀랐다. 그녀는 자신이
이렇게 꾸미기 위해 직접 가구와 장식을 고를 수도 있는 여인임을 그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바로 집을.
그녀는 그의 방 침대 옆에 있는 오디오를 낮게 틀고서 방을 나왔다. 서쪽
창에는 해가 직사광선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차양 넓이를 조정해 두었다.
'케니, 케이지를 데려와요, 당신이 직접 딸을 데려다 줘요.'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2시 30분 빨간 포드 브론코 자동차가 진입로로 들어오자 테스는 그
안에 탄 사람이 하나뿐이란 걸 알았다. 피아노를 치느라 앞에 있는 창으로
밖을 내다보았는데, 케이지 혼자 브론코에서 내리자 테스의 마음은 납처럼
무거워졌다. 가슴이 끌로 긁히는 것 같았다.
그는 오지 않았다. 케이지 혼자였다. 선글라스에 카우보이 밀짚모자를 쓴
소녀는 자동차 문을 닫은 다음 병실병실 웃으며 집 쪽으로 걸어왔다.
아, 그래, 나는 무대 위의 마술사지. 케이지를 위해서 실망감은 얼마든지
숨길 수 있었고 소녀의 기대감을 만족시킬 정도로 신나게 환영해 줄 수 있었다.
케이지가 초인종을 울리기 전에 그녀는 앞문을 활짝 열었다.
"오, 귀여운 아가, 드디어 왔구나!"
케이지는 테스의 팔에 와락 안겼다. 둘은 껴안은 채 소리를 내어 웃었고
다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디서 브론코 자동차를 잡아탔어?"
"아빠가 졸업 선물로 사 주셨어요.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믿어지세요?"
"멋진 선물이다."
"아빠는 고물 트럭은 절대 타지 마라, 믿을 수 있는 운송 수단을 가지게
되면 제가 다시는 고물 트럭을 끌고 다니지 않아도 되니까 마음이 놓인다고
하셨어요. 정말 멋진 아빠죠, 그렇죠?"
"그럼, 대단한 아빠지. 들어가자, 네 방을 보여 줄게.우선 짐을 풀고 네
방에서 쉬렴."
거실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케이지는 미주리 주 사투리를 섞어 흥얼거렸다.
"오, 하느님, 이렇게 멋진 집은 난생 처음 봐요. 여기가 정말당신이 사는
곳이에요?"
"그래, 내가 사는 곳이야."
"그리고 저 피아노하며."
케이지는 흘린 듯 피아노 곁으로 다가가 진품인지 아닌지 감정이라도 하는
양 반들반들한 상아색 표면을 살짝 만졌다.
"그리고 저 창문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야, 저것 좀 봐! 하느님의 거실을 보는 것 같아."
소녀는 테스를 따라 신고전주의 양식의 기둥 2개를 지나 거실에서 볼 때
2층 발코니와 천장이 연결된 식당으로 들어간 다음 다시 뒤에 있는 부엌으로
갔다. 이곳에서 테라스로 나가는 프랑스식 문을 열면 그 아래로 수영장이 내려다보였다.
그런 다음 차고 뒤로 연결된, 테스가 집에서 일할 때 사무실로 쓰는 공간을
둘러보고 다시 집 앞으로 나와서 2층으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을 올라갔다
집 구경을 하는 동안 케이지는 감탄사를 연방 내뱉고 보이는 모든 것에 찬사를
보냈다. 소녀는 그칠 새 없이 종알거렸다. 하지만 테스는 이런 칭찬이 조금도
싫지 않았다. 자신이 호사스럽게 사는 것을 난생 처음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케이지는 자기가 쓸 침실 문가에 섰다.
"저보고 여기서 자라고요?"
"네 방이니까. 욕실도 있어."
"저 혼자 쓰는 욕실이라구요?"
"그래. 한번 둘러보겠니."
케이지는 마치 성소에 들어가는 순례자처럼 조심스럽게 발을 테고 욕실 문가에서
멈춰 서서는 유리벽이 세워진 샤워 시설과 대리석 욕조, 길다란 세면대 장식과
커다란 거울을 둘러보았다.
"고향에 있는 제 방보다 여기 욕실이 훨씬 커요. 세상에, 맥, 저도 언젠가
이렇게 큰집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럼, 언젠가 그런 날이 올 거야. 못할 이유가 없잖아? 성공은 바로 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나와."
케이지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빠도 보시면 좋을 텐데. 제 말만 듣고는 믿지 않으실 거예요.
침실로 돌아온 소녀는 침대 옆 벽에 걸린 판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이건 뭐죠?"
"오디오 시스템이야."
WSM은 라디오가 틀어져 있었고 스피커에서는 위노나의 노래가 감미롭게 흘러나왔다.
"집 안 전체에 오디오 시스템을 깔았단 말씀이신가요?"
"음, 나는 가수니까."
테스는 손을 저었다.
"집안에 음악이 흐르게 해야지 컴포넌트는 거실에 있어. 벽난로 뒤에 캐비닛을
만들어서 장치해 두었지."
"지금 저거 뭐예요? 라디오를 틀었나요?"
"그래."
"라디오 말고 CD나 테이프도 들을 수 있나요?"
"뭐든지."
"그럼 새 노래 들어 볼 수 있을까요?"
"그럼, 잠깐만."
"야, 신난다!"
케이지는 테스를 따라 성급하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저기, 당신의 새 앨범 무지 마음에 들어요. 멋진 선물을 보내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아주 많이 팔릴 거예요. 100만 장! 200만장! 아빠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아무한테도 들려주지 않았어요. 약속했던 대로 아빠하고만 들었다구요."
테스가 테이프를 넣자 케이지는 명령을 내렸다.
"소리를 높여라!"
케이지는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테스도 따라 불렀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며 열어 놓은 앞문으로 나가 브론코 자동차에서 짐을 내렸다. 그리고 노래를
멈추지 않으며 2층으로 올라가 옷장을 열었다. 옷을 옷걸이에 걸기도 하고
구석에 있는 판지 상자에 담은 다음 빈 옷 가방은 침대 발치에 세워 두었다.
노래가 끝나자 케이지는 온 집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한 번 더! 좋다!"
아래층 부엌로 내려오자 테스는 마리아가 냉장고에 넣어 둔엔칠라다(고추로
양념한 멕시코 요리의 하나)를 꺼내어 치즈를 얹은 음 전자 레인지 안에 집어넣었다.
케이지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전 뭘 할까요?"
"차가운 물 좀 받으렴."
부엌도 오디오 시스템이 설치되었다. 테스가 양상추를 뜯는 동안 케이지는
얼음 덩어리를 덜면서도 노래를 불렀다. 냉장고문에 달린 정수기에서 물을
받던 케이지는 잠간 노래를 멈추고 비명을 질렀다.
"아, 차가워!"
테스는 노래를 부르며 녹색 양파를 썰고 냅킨과 은식기와 접시들이 담긴
찬장을 가리켰고, 케이지는 역시 노래를 부르며 상을 차렸다. 김이 오르는
멕시코 요리를 식탁에 놓을 때도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아 포크를 들었을 때도
노래는 그치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 음식을 입에 넣을 때가 되어서야 노래는 끝났다.
메어리의 집 부엌에서 서로가 서로를 정말 좋아하게 되었던 그때처럼 둘만이
있는 이 시간이 즐거웠다. 케이지는 입에 가득 음식을 담은 채 다시 노래를
불렀다. 테스도 따라 부르려다가 입에서 음식을 떨어뜨려 두 사람은 신나게
웃었다. 케이지는 입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참 버릇없는 사람들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테스는 음식이 가득 담긴 입으로 말했다.
"응. 엄마가 아시면 야단났을 거야."
"우리 아빠도요. 하지만 그분들은 이런 기분을 모르시죠."
엔칠라다를 다 먹은 두 사람은 바나나를 들었다. 바나나는 입에 넣고도 노래를
부르기가 훨씬 쉬웠다. 케이지는 이따금씩 바나나를 지휘봉 삼아 휘두르기도
했다.
바나나 껍질을 반 정도 벗겼을 때 테스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이 소녀는 테이프에 담은 노래를 모두 외우는 것이었다! 그녀는 바나나 먹는
것도 잊고 케이지를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소녀는 아직도 노래를 부르며 지휘하는
몸짓을 했는데 그것은 백업 가수들의 화음 부분이었다.
"케이지, 지난 6일 동안 이 테이프 몇 번이나 들었지?"
"몰라요. 50번, 아니 60번? 세어 보지 않아서 몰라요."
"가사를 다 외 우는구나."
"네, 그런 것 같아요."
"바나나 그만 먹고 나와 같이 노래 불러 보자, 방금 네가 불렀던 식으로."
박자가 빨라서 가사를 따라 부르기가 어려운 <마지막 부기춤>이 나왔다.
그들은 식탁 쪽으로 의자를 당겨 앉고 서로의 눈을 응시하면서 노래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런 다음 테스는 일어나서 부엌에 있는 스피커의 볼륨을 줄였다. 테스가
다시 식탁에 돌아왔을 때 부엌만 빼고 다른 공간에서 다음 곡이 흘러나왔다.
"왜 멜로디를 부르지 않았지?"
그녀는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글쎄요. 모르겠어요."
케이지는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난감한 표정이었다.
"멜로디는 당신이 부르셨잖아요."
"하지만 사람들은 대개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를때는 멜로디를
부르는걸."
케이지는 어깨를 으쓱 올렸다.
"전 안 그러는데…… 아마 성가대에서 알토를 맡아서 그런가봐요."
테스의 머리에 우연히 아주 기묘하고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열일곱
살짜리 소녀에게 적용하기는 아직 너무 이른 것 같았다. 아직 스튜디오에서
정식 녹음한 것도 못 들었으면서 대단한 실력이야. 그녀는 생각했다. 카를라가
적어도 1년 어쩌면 몇 년 동안 자리를 비워야 한다는 사실과 그러면 6월 하순부터
시작되는 순회 공연에는 다른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사실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케이지는 이마를 찌푸리며 물었다.
"뭐가 잘못됐나요?"
테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아니야. 그래도 놀랬는걸, 가사를 그렇게 빨리 외우다니."
"치, 그건 아무 것도 아니에요. 당신이 부르신 노래를 모두 다 아는 걸요."
"그래?"
"CD로 나오기 전 앨범에 실린 노래를 먼저 들었으니 그만한 값은 해야죠."
"가사 전부를?"
"뭐라고요? 절 못 믿으시겠다 이 말씀이죠? 레코드 플레이어를 작동시킬
줄 알았을 때부터 당신을 우상으로 섬겼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시는군요."
테스는 이제 다음 시간을 위해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케이지, 이젠 접시를 설거지통에 넣자. 그런 다음 넌 짐을 풀거나 놀거나
수영을 하거나 마음대로 해."
"수영이라고요! 야호! 정말이죠? 근사하다!"
케이지는 자기가 먹은 접시를 나르면서 다시 말했다.
"먼저 아빠한테 전화부터 했어야 했는데. 여기 오자마자 전화하겠다고 약속했거든요."
"어서 전화하렴. 비밀 이야기를 하고 싶으면 네 방에도 전화가 있어."
"제가 비밀 이야기를 할 필요가 뭐 있나요?"
케이지는 부엌에 있는 무선 전화기의 단추를 눌렀고 테스는 음식을 치우고
식탁을 닦았다. 대화는 무사히 잘 도착했다는 상투적인 이야기였다. 그런 다음
케이지는 덧붙였다.
"저, 아빠, 아빠도 여기 와서 꼭 보셨어야 하는데 여긴 궁전이에요, 궁전!
모든 게 하얀색 아니면 상아색으로 칠해졌어요. 거실에는 크림색 그랜드 피아노가
있고 온 집안에 오디오 시스템 장치가 연결되었어요. 또 2층 홀에는 거실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극장에나 보이는 발코니가 있어요. 내 방은 욕실까지
딸렸는데, 테스가 침실에 꽃을 꽃아 주었고 욕실 물건들은 하나같이 아주 환상적이에요.
또 수영장도 있어요! 아빠 이거 아세요? 지금제가 아빠한테 무선 전화기로
전화한다는 거! 아빠, 여긴 무지무지 멋져요!"
대화가 몇 분 동안 계속되다가 케이지가 말했다.
"네, 테스 여기 있어요. 저, 맥, 아빠가 당신과 통화하고 싶으시대요."
케이지와 달리 테스는 은밀하게 전화를 받고 싶었다. 하지만 장소를 옮기면
이상하게 보이리라. 할 수 없이 케이지에게서 수화기를 건네 받고 소녀가 가까이
있는 데서 이야기를 해야 했다.
"안녕, 케니."
그녀는 케이지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밝게 말했다. 요전날 밤 전화에 대고
싸움을 한 다음 처음으로 하는 통화였다.
"안녕, 내 사랑."
그는 말했고 그녀는 마음이 놓였다.
"아직도 나한테 화났소?"
"아니오."
"다행이군 내 딸이 당신 집이 무척 마음에 드나 봐요."
"네, 하지만 워낙 감동을 잘 하는 아이니까."
"마치 부자와 유명인에게 어울리는 전형적인 생활을 하는 것처럼 들리더군요."
"틀린 말은 아닐 거예요. 난 케이지가 당신하고 같이 올 줄 알았죠."
"초대를 받았다면 나도 갔을 거요."
그녀는 할말이 없어서 화제를 바꾸었다.
"딸에게 멋진 브론코 자동차를 선물했더군요."
"케이지는 차를 가득 채워 갔소. 난 당신 집에 가지고 가기엔 짐이 너무
많다고 말했지. 혼자 지낼 아파트를 찾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이오. 하지만
10대 소녀들이 어떤지 당신도 잘 알겠지요. 그애는 하나라도 빠지면 자기는
못 산다고, 모두 중요한 물건이라고 대꾸하더군."
"여긴 방이 많으니까 그런 걱정은 말아요."
케이지가 어슬렁거리며 거실 쪽으로 가는 것이 보이자 테스는 다시 말했다.
"어떻게 지내요, 케니. 그러니까, 케이지를 떠나 보내고 괜찮아요?"
그는 잠시 말이 없다가 놀림조로 말했다.
"내 일생 최악의 날이었지."
연민의 감정이 밀려왔다. 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집밖으로 나오는 그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짐작이 돼요."
"딸애 방에 가서 텅 빈 그 방을 몇 번씩이나 둘러보았소. 기타가 있던 자리와
서랍장 위에 흩어졌던 물건들하며. 참, 그애는 자기가 베던 베개까지 실어
갔소."
"페이스 거기 있어요?"
"아니, 오늘밤은 안 왔소."
"왜 전화해서 잠간 동안이라도 같이 있지 그래요?"
"오늘은 페이스와 있고 싶은 기분이 아니오. 재미있지요, 당신이 여길 떠난
다음부터 난 자꾸 주눅이 드는 것 같소. 오솔길을 건너 잠시 메어리 아주머니를
찾아볼까 생각하던 중이었소. 혹시 아주머니가 카드놀이나 다른 놀이를 하고
싶으시지 않을까 해서."
"엄마가 좋아하실 거예요. 난…… 이제 가봐야겠어요. 케이지와 수영이라도
할 생각이에요."
"그래요."
쓸쓸한 목소리였다.
"내일 레코딩 회의가 끝나는 대로 케이지가 당신에게 전화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들려 줄 거예요."
"아무 때라도 수신자 부담으로 전화를 하라고 일러두었소. 그애 이름으로
신용 카드를 신청했는데, 아직 나오지 않았어요."
"오, 케니, 그럴 필요 없어요. 케이지는 원할 때면 아무 때라도 우리 집에서
전화할 수 있어요."
"아니오, 그럼 안 돼요. 당신은 할만큼 했소. 그애를 받아 주고 좋아하는
음악을 위해 시간도 내주고 말이야. 전화 요금까지 당신이 부담할 이유는 없소."
"이제 그 얘긴 그만 해요."
케이지는 어느새 돌아와 대화를 듣고 있었다.
"케이지가 필요한 게 있으면 나한테 알려 줘요, 알았소?"
케니가 말했다.
"알았어요. 이젠 마음 푹 놓고 더 이상 집에서 궁상떨지 마세요. 케이지
바꿔 줄 테니 작별인사 하세요."
"어, 테스, 기다려요!"
케이지는 바로 옆에서 전화를 돌려 받기만을 기다렸다. 케니는 다짜고짜
말했다.
"사랑해요."
테스는 너무도 놀라서 얼이 빠졌다. 케이지를 바라보았지만 그의 말은 심장을
건드렸다. 얼굴이 붉어졌다. 마치 그녀가 "사랑해"라는 말을 기대하기라도
했듯이 그가 "다음에 봅시다"고 말했으면 마음의 가책이 훨씬 덜했을 것이다.
그녀는 수화기를 꼭 붙든 채 어정정하게 서 있을 뿐 같은 말을 해줄 수가 없었다.
이것은 가볍게 내뱉을 수 있는 말도 아니고 확실한 자신감 없이 대답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의 딸이 가까이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이 말을 해야
좋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무언가 적절한 대답이 떠오르길 애타게 기다렸다.
"그냥 외로워서 하는 소리라고 생각해요, 케니.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케이지가 옆에 있군?"
"네, 바로 옆에 있어요."
"그럼, 좋소. 다음에 당신 대답을 듣게 되리라 기대하지요."
그녀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핑겟거리를 찾아냈다.
"케이지 바꿀게요."
케이지는 테스에게 얼굴을 찌푸리더니 낮은 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죠?"
"아무 일도 아니야."
테스는 얼버무리면서 전화를 건네고 뒤 돌아섰다.
테스는 케이지와 같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모든 상황에 대해서 극도로 긴장하는
것을 케이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숨기는 일이 점점 힘들어졌다. 그들은 같이
수영을 하고 내일 있을 일을 이야기했다. 케이지는 녹음 스튜디오에서 이루어지는
일에 대해 많은 질문을 했고, 테스는 하나하나 대답해 주었다.
테스는 집안으로 다시 들어와서, 다른 가수들이 음반을 발매하기 전 시청회에서
공짜로 준 CD를 들으면서 이런 선전용 음반이 만들어지는 경위와 중요 배급자들을
만나는 데 이것이 얼마나 큰 구실을 하는지 케이지에게 들려주었다.
그녀는 케이지가 살게 될 아파트를 언제 어디서 찾아볼지 이야기했고 또
곧 다가올 팬클럽 축제에 대해서, 그리고 순회 공연이 언제 시작되고 어디서
할지를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테스는 케이지가 순회 공연 중에 백 화음을 넣을
가능성은 조금도 비치지 않았다.
11시가 다 되어서야 두 사람은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 그때가 되어서야 집은
고요한 어둠에 잠겼고, 테스는 자기 침대에 누워 케니가 했던 말을 곱씹을
수 있었다.
그녀는 비밀 비단 속에 감추어 둔 보석을 꺼내는 것처럼 자신의 기억 속에
담아 두었던 그의 말을 꺼내었다. 동시에 그의 사무실에서 고통스러운 얼굴로
다가오며 작별을 고했던 마지막 날의 그가 떠올랐다.
"어, 테스, 기다려요!……사랑해요."
그녀를 무방비 상태로 만들어 버린, 전화기에 대고 무뚝뚝하게 내뱉던 말이
다시 들려 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전에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그에게 키스를 하는 장면을 떠올리고
이런 것이 사랑이란 감정일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또 그가 없는 하루하루가
허전하다는 사실과, 수화기를 통해 멀리 떨어진 그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의
환희에 찬 기분과, 두 사람의 감정을 시험하기 위해 깊숙이 숨겨 두었던 기억을
꺼내고 또 다음 시간을 위해 조심스럽게 속에 간직하는 자신을 생각해 보았다.
'이봐요, 케니. 나도 당신을 사랑하는지 몰라요.'
혹시 그가 사랑을 고백했기 때문에 그를 이상적인 남자로 그려 가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이상주의자가 아니고 현실주의자였다.
언제나 현실주의자였다.
그렇다면 현실주의자답게 물어 보아야 할 것이다. 페이스에게 충실함을 지키며
페이스와 헤어지기를 거부하는 케니와 테스의 관계는 무엇인가? 무슨 희망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테스가 자신의 경력을 사랑하고 지키려 하듯이 그도
페이스에게 그런다면?
지금 둘은 서로 다른 장소에서 완전히 다른 생활 방식으로 살아가지 않는가?
두 사람의 수입 역시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그녀가 부자이고 유명하기 때문에
그가 달라붙을 가능성도 아주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야, 이것만은
아니라고 그녀는 확신했다. 아마 그 반대가 맞을 것이다. 그는 여자의 수입으로
살아가는 것을 스스로에게 용납하지 않는, 자존심 강한 유형에 속하는 남자일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에게 그녀의 수입으로 살라고 요구할 권리도 없지
않은가?
그를 사랑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확인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시인들이 읊었던
번민 비슷한 감정에 이미 고통을 받았다. 오늘 케이지가 혼자 나타났을 때
느꼈던 실망감은 전에 없던, 전혀 익숙지 않은 감정이었다. 그것은 무언가
자신이 상상해 놓은 것과 영 다른 방향으로 진행될 때 느끼는 좌절감 비슷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그를 이상화시킨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케이지와 같이 있다는 것 자체도 이상하게 고통스러웠다. 세밀한 심리 분석은
하기 어려웠지만 아무튼 분명히 괴로웠다. 가끔 자신이 케이지를 케니의 대리물로
삼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케이지의 얼굴 표정과 몸짓에서 케니의 그림자가
보일 때도 있었다. 이야기를 나눌 때면 케니와 같이 지냈던 윈터그린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으며, 그때의 기억이 아주 생생하게 떠올랐다.
케이지의 보호자 노릇 자체가 실제로 가까운 미래에 케니를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안은 것이었다. 그것도 윈터그린이 아닌 장소에서.
그렇다면 테스는 이런 모든 것을 계산에 넣은 모사꾼인가? 케이지와 케니
모두를 속이는, 테스 답지 못한 짓을 하는 것은 아닐까? 소녀를 이용해서 그를
유혹하려는 것은 아닐까?
너무도 어지러운 생각에 그녀는 배를 깔고 엎드렸다.
달이 높이 떴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키웠던 보랏빛 붓꽃을 흐릿하게 비추던
그 달이 창틀에 색을 입혔다. 이 순간 미주리 주윈터그린에 있는 케니의 집에도
저 달이 비칠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 집에도. 두 사람이 오늘 밤 카드놀이를
했을까? 지금쯤 그는 케이지가 떠난 집으로 돌아와 쓸쓸한 마음에 잠을 못
이루지나 않을까? 그는 테스 맥파일을 그리워할까? 자신이 던진 퉁명스러운
사랑 고백에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할까 헤아리겠지? 혹시 그녀의 대답이 오기를
기다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11시 15분이 되자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그녀는 전화기를 들고 번호를
눌렀다. 첫 번째 신호음이 떨어지자마자 그가 받았다. 졸음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또랑또랑한 목소리였다.
"여보세요."
그의 단 한 마디가 그녀의 마음속 절규를 더 간절하게 만들었다.
"안녕, 내가 잠 깨우지 않았나요?"
"아니오, 깨어 있던 중이었소."
"나도 그래요."
"케이지는 자나?"
"네. 우린 같이 수영을 하고 이야기도 나누고 CD도 듣고 했어요. 그애는
내일 스튜디오 일이 궁금한 게 많은가 봐요. 우리 엄마한테 가서 카드놀이
했나요?"
"음, 4번했는데 아주머니가 3번을 이기셨소. 나에게 대황 파이와 아이스크림을
먹인 다음에야 집으로 보내 주셨어요."
"우리 집에 가서 기분이 좀 좋아졌어요?"
"일시적으로. 여기는 너무 조용해요."
창문 아래로 오솔길과 뒤뜰이 내려다보이는 침실에서 그가 쓸쓸하게 혼자
있는 장면이 떠올랐다.
"케니, 당신이 아까 했던 말……."
무슨 말을 하겠다 미리 작정해 놓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의 말은 맺어지지
않았다.
"그냥 흘러나온 말이오."
그가 말했다.
"정말?"
"그래요."
"오늘밤은 외롭다는 게 정말 다예요?"
"어느 정도는. 하지만 케이지가 떠나기 한참 전부터 마음을 다졌으니까."
"그렇다면 그건 내가 페이스와 다르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내가 당신 딸을
돕고 또 내가 부자이고 쉽게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유명인이기
때문일지도 모르죠. 또……."
"물론 그렇소!"
그는 버럭 화를 냈다.
"그 모든 게 하나도 빠짐없이 해당돼요! 내가 아니라고 할 줄 알았다면,
당신을 실망시켜서 미안하지만, 당신이 부자이고 성공했다는 사실을 당신 언니
주디와 똑같이 지워 버릴 수가 없소. 하지만 그것이 내가 대중의 우상인 맥이란
여자와 사랑에 빠진 이유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이야! 또 만약
평범한 보통사내가 백만 장자 가수와 쉽게 사랑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봐요. 그렇게 된다면 난 사사건건 당신의 의심을 사게
될 테고, 그건 너무도 끔찍한 일일뿐이오. 난 내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나름대로
분석을 했어요. 그리고 결국 이 커다란 허무함은 모두 내 사무실에서 당신에게
작별 인사를 했을 때부터 내 내장 속에 들어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지. 테스,
이건, 이건……. 제기랄, 모르겠어."
화를 내던 그의 목소리는 어느새 비참하게 변했다.
"난 내일 아침이면 또 일하러 나가야 해요. 내 일상에 전환점 같은 건 없소.
하루하루가 똑같아. 더 오를 데도 없고 나빠질 것도 없고 웃을 일도 기대할
일도 없소. 당신이 보고 싶소. 매일같이 당장 내슈빌로 달려가 당신 집 초인종을
누를까 생각을 하지. 그러다가 다시 이건 모두 어리석은 짓이다 하고 생각하지.
그건 그 다음에 일어날 일을 알기 때문이오."
"당신이 여기 오면 나와 같이 자게 될 텐데, 같이 자도 아무런 해결책이
없기 때문이겠죠?"
"그래요, 그래도 기분은 확실히 나아지겠지."
웅웅거리는 전화기 소리가 계속되는 동안 두 사람은 지금 자신의 갈망을
상대방에게 펼쳐 보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고백했다.
"이 이야긴 처음인데, 요즈음 사귀던 남자, 버트 기억나요? 그와 같이 외출했어요.
당신이 내 마음에서 지워 지기를 바라며 그 사람한테 키스하려고 애를 썼는데,
잘되지 않았어요. 자꾸 당신과 비교가 돼서 그이한테 입 맞추는 것이 너무
힘들었죠. 그런데 지금은 그 일을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그는 숨을 깊이 들이마신 다음 물었다.
"날 사랑하오, 테스?"
그는 잠시 말을 끊고 다시 이었다.
"사랑한다면 직접 그 말을 듣고 싶소."
그녀는 어두운 천장을 응시했다. 말하기가 두려웠다 심장 고동 소리가 등에
달라붙은 매트리스를 뚫고 나갈 것만 같았다.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 모든 고통을 불러들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요. 나도 그렇게 말해야겠죠. 왜냐하면 당신과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이전에는 몰랐던 무언가를 잃었다는 생각으로 생활이 엉망진창이 됐으니까요.
줄곧 생각했어요. 이만하면 성공할 만큼 성공했다, 여러 방면으로 부러울 것이
없고 재능 있는 사람들을 끌어들여 성공의 길을 열어 주었으니 만족할 수 있는
인생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내슈빌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녀는 목이 메어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내슈빌로 돌아가고 나서 그 다음은."
그가 다그쳤다.
"당신이 보고 싶었어요, 케니."
"하지만 아직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는군."
그렇다, 그녀는 그 말을 하지 않았다. 마음속에 담긴 그 말이 입 밖으로
나가는 것이 죽도록 두려웠다. 일단 그 말을 하게 되면 견딜 수 없는 백일몽이
다시 시작될 것이고, 만약 그녀가 바라는 대로 현실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려가 바라는 대로 두 사람의 관계가 이루어지기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좋아요."
그는 지친 목소리로 한숨을 쉬었다.
"당신 부담을 덜어 주겠소. 강요한다면 아무 의미도 없을 테니까. 자, 이제
밤이 깊었소. 작별 인사를 하는 게 좋겠군요."
그녀는 손등으로 감은 두 눈을 가렸다. 목이 메고 가슴속에만 말을 담아야
하는 자신이 너무도 혐오스러웠다. 그가 전화를 끊으면 나는 자신을 더욱 미워하면서도
다시 적응해 나가겠지.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는 것을 꿈꾸었을 때처럼. 맥!
슈퍼스타! 백만 장자! 자신의 미래와 일과 화려한 경력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여자! 남편도 결혼도 가족도 그 어떤 짐도 필요없는, 혼자서 인생을 끌어
나가는 맥으로 돌아갈 것이다.
"케니, 당신 마음을 아프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런 건 괜찮다고 말했잖소."
"하지만 내 기분은 엉망이에요."
"어, 또 울어요? 그렇지?"
그녀는 그의 목소리에서 슬프게 웃는 그의 얼굴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래, 우는 것도 한 방법이지."
"케니."
애원이 담긴 목소리였지만 무엇을 애원하는지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러니 그가 어찌 가르쳐 줄 수 있겠는가.
"당신이 옳아요. 이젠 작별하기로 해요."
"그럼 잘 자요, 테스. 사랑해요."
그가 말했다.
찰칵 전화가 끊기고 그녀는 침대 위에 엎드렸다. 그리고 두려워했던 대로
바로 그렇게 되었다. 맥. 슈퍼스타. 백만 장자. 그녀 앞에 놓인 자랑스러운
인생. 그녀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