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소녀로 돌아가>
메어리와 르니는 <60분>을 보고 있었다. 테스는 물을 뚝뚝 흘리며 뒷문으로
뛰어들었다.
"누구 수건 좀 갖다 줄래요?"
잠시 후 르니가 수건을 가지고 나타났다.
"너 지금이 몇 시니. 걱정하던 참이었어."
"미안해. 진작 전화를 했어야 했는데."
테스는 모자를 벗어 던지고 젖은 머리카락을 톡톡 치고 티셔츠를 쥐어짰다.
"이 시간까지 내내 말을 타진 않았을 거야. 이렇게 천둥 벼락이 치는 날에
말이야."
"그래. 케니하고 소닉 드라이브인 식당에 갔어."
"케니하고 갔단 말이지. 음."
르니는 한 발로 서서 부츠를 당겨 벗는 테스의 붉은 머리 정수리 부분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난 케이지와 말 타는 줄 알았는데. 케니도 같이 가는 줄은 몰랐어."
테스는 몸을 폈다. 아직 젖긴 했지만 물방울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부츠를 벽에 기대어 세워 놓았다.
"언니, 집에 가야 하잖아? 나하고 잠깐 이야기할 시간이나 있어?"
"필요하다면 더 오래 있을 수도 있어."
테스는 앞장서서 부엌으로 들어간 다음 메어리가 듣지 못하게 소리를 낮추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게 좋겠어."
거실 쪽에서 메어리가 말했다.
"돌아왔구나. 재미있었어?"
메어리는 다시 텔레비전에 정신을 쏟았다.
"그럼요."
2층에 올라간 테스가 젖은 옷을 벗는 동안 르니는 테스의 낡은 침대에 다리를
포개고 앉았다.
"꼭 사춘기 소녀 같구나. 아무튼 무슨 일 있었어?"
르니가 말했다
테스는 면 스웨터를 입고 머리를 묶은 고무줄을 빼고는 화장대에 엉덩이를
걸쳤다. 그리고 르니를 마주 보면서 젖은 머리를 뒤로 힘있게 빗었다.
"참 이상도 하지. 언닌 믿지 않을 거야."
테스가 말했다.
"케니하고 무슨 일이 있었던 게로군."
테스는 손에 들은 빗을 내려다보았다.
"진지하게 이야기해 줘. 그래 주겠어?"
"네가 먼저 무슨 일이 있는지 이야기하는 게 나을걸."
"5분 전 그의 차에서 내가 그 사람한테 키스했어. 그 사람이 먼저 키스할
날이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아서 내가 먼저 했지 바보 같지, 그치?"
"그게 전부야? 키스만 한 게?"
"응 하지만 집에 돌아온 뒤 2주일 동안 자꾸 이상한 일이 생겼어. 그 사람하고
부딪칠 때마다 그이는 내가 요 몇 년 동안 만난 남자 중 최고로 멋진 남자로
변해 갔어. 언니가 그이를 친형제로 대하는 것처럼 그가 좋아졌어. 엄마도
그를 아들처럼 대해 주잖아. 케이지와 같이 찍은 사진도 있던데, 난 지금 케이지한테
푹 빠졌거든, 그가 좋은 아버지라는 걸 알았어. 그 다음은 언니가 아는 대로
성가대 연습을 했어. 그리고 오늘 그가 덱스터 히키 목장에 모습을 나타내자,
난 마치 열병을 앓는 사춘기 소녀처럼 행동하기 시작했어. 정말 나답지 않은
일인데 말이야, 언니."
르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사람 때문에 케이지를 내슈빌로 데려가는 거 아니니?"
"아니야, 언니. 날 뭘로 알아?"
"확실해?"
"물론 확실하지. 케이지를 돕겠다는 건 케니하고 말 두 마디를하기도 훨씬
전에 결정났어."
르니는 동생을 쳐다보며 상황 정리를 해보았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페이스는 어쩌구?"
"케니는 두 사람 관계에 대해선 한 마디도 하지 않으려고 해."
르니는 나름대로 많은 생각을 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두 사람은 아주 가까워, 확실해. 그냥 가볍게 만나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주위 사람들이 둘을 받아들이지."
테스는 자신의 추측이 맞다는 것에 불행을 느끼며 언니를 쳐다보았다.
"너 조심했어야지, 테스. 사람 감정 가지고 장난치면 안 돼."
"장난치는 게 아니야."
"그래?"
"절대 아니야!"
"그럼 다음 일을 생각해 봤어? 넌 케니를 남겨 두고 내슈빌로 돌아갈 테고,
만약 너 때문에 케니와 페이스사이에 문제가 생긴다면 결국 케니만 상처를
입게 돼. 넌 네가 얼마나 대단한 스타인지 잠시 잊고 너의 관심을 끄는 남자한테
너무 빠졌던 거야."
"그렇지 않아. 생각해 보지 않은 게 아니야."
"또 케니는 고등학교 때 너한테 단단히 반했지. 그래서 널 거절할 방어책이
없었어, 테스."
얼굴에 흘러내리는 곱슬머리가 마르기 시작했는데도 그녀는 빗을 보았다.
케니와 같이 지낸 완벽한 날, 오늘 아침 교회에서 시작해서 비가 내리는 가운데
그의 자동차 안에서 성적인 분위기에 싸였던 하루를 생각했다. 다른 여자라면
오늘 한 행동은 나중에 어떤 고백이나 참회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언니, 때로는 테스 맥파일로 살아가는 게 몸서리치게 외롭다는 거 알아?"
"짐작은 돼. 하지만 케니가 아니더라도 남자는 많잖아."
"누구? 무대 뒤에서 얼쩡거리는 세균 같은 사람들 말이야? 아니면 경력을
쌓을 목적으로 날 쫓아다니는 연예계 사람들? 내가 물러서면 금방 거리를 채을
다른 스타들 말이야? 밴드에서 같이 일하는 남자들?"
그녀는 슬픈 목소리로 웃었다.
"그거야말로 괜찮은 밴드 멤버를 놓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
"테스, 네가 선택했어. 내가 시킨 일이 아니야."
테스는 한숨을 내쉬고 허리를 비틀어 화장대 위에 머리 빗을 던졌다.
동생을 꼼꼼히 살펴보던 르니는 변명 거리를 잡았다.
"그럼 다른 밴드에서 일하는 그 남자는 어때? 엄마 말로는 너하고 그 남자가
사귀는 중이라던데? 네가 집에 온 다음에 전화도2번했다며."
"버트야. 그래, 전화했어. 내슈빌에 돌아가는 대로 데이트하기로 약속도
했지. 그 사람과 데이트를 하면 케니를 잊어버릴 만큼 그가 멋졌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넌 오늘 밤 케니하고 장난한 거야."
"난 장난한 게 아니야……."
테스는 자기가 하는 말이 우스워 말을 끊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울퉁불퉁한
계단 벽까지 방을 가로질렀다. 계단 벽에 기대니 창문으로 폭포 같은 빗속에
케니의 집 불빛이 번지는 것이 보였다. 그의 침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르니가 뒤쪽에서 말했다.
"나한테 정신 좀 차리게 해 달라고 부탁했지. 그래, 충고해 줄게 앞으로
집에 있는 동안 케니를 가까이 하지 마. 페이스에게 그 남자를 보내 줘. 나중에
네가 잘했다고 생각할 거야."
르니는 침대에서 일어나 동생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알았지?"
그녀는 다짐하듯 물었다.
테스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저기로 가자."
그녀는 동생의 몸을 돌렸다.
"내 생각을 말해서 화났어?"
"아니."
잠시 동안 언니를 꼭 안기만 했던 테스는 울기 시작했다.
"뭐 하러 집에 돌아왔을까? 내가 세운 우선 순위를 모두 망치면서까지 말이야.
난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해!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포기해야 할 일이 있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어!"
"하지만 때때로 스타라는 커다란 글자가 머리를 들이밀고 요구하기 시작하겠지?"
테스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웃었다. 몸을 빼면서 눈물을 훔쳤다.
"오, 제기랄, 날 집으로 부른 언니가 미워 죽겠어."
르니는 다시 농담조로 말했다.
"네가 케니 크로넥에게 반하리라 곤 꿈에도 몰랐어."
르니가 휴지를 집어 주자, 테스는 코를 풀었다.
"난 케니 크로넥한테 반하지 않았어."
르니는 거짓말 말라는 눈초리를 던졌다.
"그래, 좋아,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페이스가 먼저 그 남자를 차지했다면
난 그냥 거리를 두고 좋은 여자로 남아야지 뭐. 그리고 그가 케이지를 만나러
내슈빌에 오면, 난…… 난……
"네가 뭘?"
테스는 휴지를 구겼다.
"내가 어떻게 할지 모르겠어."
"넌 알아, 테스. 우리는 한 가지만은 분명히 알잖아?"
"그게 뭔데?"
"케니 자신 말이야. 네가 생각하는 만큼 그가 제대로 된 남자라면 절대로
페이스를 배반하지 않을 거야. 그가 너한테 먼저 키스하려 들지 않았다고 네
입으로 말했잖아."
테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언니 말이 맞아. 그런데 이거 알아?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 생각이
더 많이 나."
테스는 르니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가슴에 간직하기로 했다. 케니에게
키스를 하라고 자극한 것은 무모한 시도였음을 인정하고 앞으로 그를 피하는
데 모든 신경을 집중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월요일 그녀는 케니가 집에 없을 시간을 틈타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낮 시간에
욱신거리는 몸으로 잔디를 깍았다. 저녁이 되자 케이지가 전화를 했다.
"아빠하고 어떻게 됐어요?"
"왜 아빠께 직접 여쭤 보지 그러니?"
"여쭤 봤어요. 그런데 상처 입은 수퇘지같이 매몰차게 대하기만 하시던데요."
상처 입은 수퇘지? 케니 또한 자신과 똑같은 결심을 했으리라 짐작이 되었다.
두 사람이 쌍방간에 피하는 게 어쩜 더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아니, 아무 일 없었어."
테스는 거짓말을 했다.
"아휴, 제기랄, 아무튼 전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았어요."
그녀는 그를 보았다. 집을 오가는 그의 모습을 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뒤뜰에 나오면 그녀는 집안에 머물렀다. 가끔 그는 테스가 문
현관에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메어리의 집을 흘깃 볼 때도 있었다. 하지만
테스는 몸을 숨겼다.
화요일 저녁 아주 드문 일이 일어났다. 메어리의 친구 4명이 한명 한명 차례로
병문안을 왔다. 테스는 커피를 끓이느라 손이 바빴다. 하지만 마음은 1주일
전에 있었던 성가대 연습장에 가있었다. 7시 15분이 되자 케니가 집을 나와
차고 옆에서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는 같이 가자고 찾아오지 않고 혼자 가 버렸다.
수요일 저녁 메어리는 신선한 공기를 마셔야 한다며 저녁 산책을 나가겠다고
우겨댔다. 메어리는 목발을 짚은 몸으로 힘곁게 앞문 계단까지 혼자서 내려간
다음 테스를 옆에 세우고 거리 쪽으로 걸음을 다시 떼었다. 길가 전선 위에
앉은 비둘기들이 구구 울어댔다. 메어리가 지나가는 것을 발견한 이웃들은
일부러 집밖에 나와서 어서 빨리 나으라고 말했다.
모녀가 1구역 정도 걸었을 때 케니의 차가 지나갔다. 모퉁이를 돌던 자동차가
멎었다. 그는 조수석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열린 창문으로 소리를 질렀다.
"이제 잘 걸으시네요, 메어리 아주머니!"
"레이철의 결혼식장통로를 걸으려면 이렇게 부지런히 연습을 해야지. 물론
자네가 교회에서 휠체어를 밀어 줄 수도 있겠지만 이젠 나 걸을 수 있어."
케니와 테스의 눈빛이 오고갔다. 그제 서야 케니는 늦은 인사를 건네었다.
"테스, 잘 있었소? 어젯밤 성가대 연습에 빠졌더군요."
"미안해요, 어제 너무 바빠서."
"한 주일 노래했으니 끝이라는 뜻으로 들리는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게……. 참 실망이군요. 사람들이 궁금해했어요."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말했다.
"페이스가 쓰던 바늘이 부러져서 새로 사 와야 해요. 다음에 봅시다."
그는 다시 쳐다보지 않고 미끄러지듯 차를 몰고 멀어졌다.
테스는 자기를 남겨 두고 떠나는 그를 참담한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가슴이
쿵 가라앉고 심장이 텅 빈 것 같고 당장 그를 따라가 이야기 좀 하자고 따져
묻고 싶었다. 하지만 무슨 할 이야기가 있겠는가? 너무도 희망 없는 두 사람의
상황을 둘 다 잘 알지 않는가.
일요일, 그녀는 성가대의 노래를 듣지 않기 위해 일부러 1부 예배에 참석했다.
정오가 가까올 무렵 케이지가 전화를 걸어 왔다.
"여보세요, 어디 계셨어요?"
"레이철네 가족과 같이 1부 예배를 드렸어."
"하지만 우린 당신이 다시 성가대에서 노래하실 줄로만 믿었는데!"
"아니야, 연습에도 빠졌는걸."
"연습에 빠졌다고 아빠가 쫓아내지는 못하셨을 거예요. 맙소사, 당신이 누군데.
바로 테스 맥 파일이잖아요!"
"케이지, 잘 들어 봐."
테스의 말투는 이해를 바라는 탄원 조로 바뀌었다.
"이렇게‥‥‥ 이렇게 하는 게 최상의 방법이었어. 알겠니?"
"아."
잠시 말이 끊겼고 케이지의 목소리 역시 얌전하게 바뀌었다.
"알겠어요. 짐작이 돼요. 그러니까 지난 일요일 아빠하고 무슨 문제가 있었죠?"
"아니야, 아무 일 없었어."
"좋아요. 그럼 잘 들으세요. 오늘 또 말 타러 가실래요?"
"아니, 그러지 않는 게 좋겠어, 케이지 집에서 할 일이 많거든."
"오, 그럼……. 좋아요. 하지만 언제 제가 뵈러 가도 되죠?"
"아무 때나 괜찮아. 다음 토요일 결혼식장에서는 확실하게 볼 수 있을 거야."
"좋아요. 그럼, 마음 편히 가지세요. 그리고 할머니께 안부 전해 주세요."
케이지는 그 주중에 2번 얼굴을 비치고 케니가 힘들어한다고 보고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지식을 모두 동원해도 아빠와 페이스가 싸울 만한 일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페이스와 싸운 게 틀림없다고 덧붙였다.
엿새 동안 테스는 창문을 가운데 두고 그를 보았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결혼식이 있는 토요일에는 그를 다시 만나게 되리라 생각했고 그러면서 마음이
투명하게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메어리가 수술한 지도 3주일이 지났다. 그녀는 나날이 건강을 되찾았다 기분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따라서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일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목요일이 되자 테스는 집에 도착했던 날 밤부터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문제를
이젠 펼쳐도 좋으리라고 판단했다.
메어리는 거실에서 저녁 뉴스를 보면서 식사를 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테스는
메어리가 앉은 의자 앞에 던컨 파이페 이동식 식탁을 차리고 자기는 부엌에
있는 의자를 가져다 앉았다. 두 사람은 드디어 싸우지 않아도 될 음식을 발견해
냈다. 그것은 테스 몫으로는 지방질을 빼고 메어리가 먹을 몫은 지방질을 첨가한
타코 샐러드였다.
뉴스가 끝날 무렵 두 사람은 얼추 식사를 마쳤다. 테스가 입을 열었다.
"엄마, 그 동안 엄마를 깜짝 놀라게 해드릴 준비를 했어요."
"날 위해서?"
메어리는 벌써부터 놀라는 시늉을 했다.
"일요일 아침 8시에 니키라는 미용사가 와서 결혼식장에 가시도록 머리를
손질해 줄 거예요. 염색을 하든지 파마를 하든지 커트를 하든지 엄마가 하고
싶은 대로 주문하세요."
메어리는 놀라는 눈치였다.
"바로 여기, 집으로 온단 말이냐?"
"네."
"아이구, 난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그러는 사람 많아요. 엄마도 결혼식장에 어울리게 멋 좀 내셔 야죠."
"니키라고 했니? 주디네 미용사야?"
"아니오. 주디 언니하고 언니가 데리고 있는 미용사들은 그날아침 신부 들러리들
머리 만지느라 아주 바쁘대요. 하지만 니키라면 시간이 있을 거라며 추천해
줬어요."
"그래. 팔자도 좋구나."
메어리는 아직도 얼이 빠진 모양이었다.
"제 말대로 하실 거죠?"
"그럼, 물론이구말구!"
메어리는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엄마, 여쭤 볼 게 한 가지 더 있어요."
이것은 머리를 만지는 것보다 훨씬 더 예민한 문제였다. 하지만 테스가 이야길
꺼내지 않는다면 누가 하겠는가?
"작년에 제가 시애틀에서 보내 드린 초록색 실크 바지 있죠? 입어 보셨어요?"
"웬만하면 입으려고 했는데."
"그런데 왜 입지 않으셨어요?"
"글쎄, 그게……. 너무 엄청나게 비싼 옷이더라. 한눈에 보고도 알겠던걸."
"결혼식장에 그 옷을 입고 가시는 게 어때요? 수술 받은 다음부터 내내 그
흉칙한 스타킹만 신고 계셨잖아요. 어쩌시겠어요, 엄마?"
"작년 봄에 산 다른 바지를 입고 갈 생각이다. 몇 번 안 입어서 그것도 아주
새것처럼 말짱해."
테스는 처음에는 화가 났다. 그녀는 벌떡 일어서서 입안에 퍼져 가는 화를
삼키려 애를 쓰면서 접시들을 주워 모았다. 접시들을 피라미드처럼 쌓고 나가려다
마음을 바꾸었다. 다시 접시를 내려놓고 메어리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엄마, 지금부터 제가하는 말 이해하실진 모르지만……."
그녀는 엄마의 손을 잡고 늙어 가는 여인의 갈색 눈을 들여다보았다
"제 말씀 좀 들어보세요. 아, 어떻게 말을 꺼내야 좋을까. 전 부자예요.
괜히 잘난 체하는 소리로 듣진 마세요. 사실이 그렇잖아요. 전 아주아주 부자이고
엄마를 위해 돈을 쓰는 게 제겐 큰 기쁨이에요. 엄마가 저만큼 세상을 두루
돌아보실 기회가 없기 때문에 평생 가도 구경 못 하실 물건들을 전 사 드릴
수 있어요. 그런데 성의를 담아 보낸 옷을 한 번도 입어 보지 않으셨다니 속상해요."
"오, 그래……. 네가 속상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 단지 네가 보낸
물건은 미주리 주 윈터그린에 사는 사람에게는 너무 과분하다고만 여겼지."
"전 윈터그린에 물건을 보내지 않았어요, 엄마가 쓰시라고 보냈죠."
메어리는 우울하기도 하고 다소 괴로운 얼굴로 잠시 앉아 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딴 데로 돌렸다가 다시 딸을 보았다.
"그래, 너도 솔직히 말했으니 나도 솔직해지기로 하자. 네가 보낸 물건을
받을 때마다, 난 네가 날 찾아와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너무 바빠서 시간을
못 내는 데 대한 대가로 이 물건이 왔구나 생각했어. 그래서 네가 보낸 물건을
함부로 쓰지 않았던 게지. 솔직히 말하면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물건보다 네가
집에 오는걸 더 원했거든."
테스는 진실을 찌르는 메어리의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에게
보낼 물건을 고르려고 일부러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찾아가서 신용
카드로 계산을 하는 동안 이렇게 물건을 보내는 것보다는 엄마를 직접 찾아뵈어야
한다는 죄의식이 가슴속에서 꿈틀댄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하지만 선물을
사보내는 편이 훨씬 쉬운 방법이었다. 바쁜 일정을 덜어 주는 방법은 달리
없었다.
세상에는 어머니가 없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어머니라는 사랑스러운 존재가
있다면 대단한 축복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테스는 의당히 찾아뵈어야
할 메어리를 너무도 드물게 만났을 뿐 아니라, 어머니가 나타내는 애정의 표시조차
자기 기분대로해석해서 소중한 감정을 한층 무겁게 만드는 실수를 했다.
그녀가 지금 올려다보는 메어리의 얼굴은 분명 전보다 훨씬 늙었다. 무릎
사이를 떼고 발목을 붙이지 않고 앉아야만 하는 어머니, 골반 수술은 얼굴에서
읽는 나이보다 한층 더 어머니를 늙게 만들었다. 목발을 짚어야 하는 팔, 어머니의
얼굴은 슬픔으로 말라 들어갔다. 세월의 흔적을 말해 주는, 늘어진 살과, 눈가와
입가에 팬 주름은 영원히 그녀의 얼굴에서 지워지지 않으리라. 테스가 메어리의
나이가 되었을 때, 어머니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무서웠다. 앞으로 몇 년이나
더 살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죄송해요, 엄마. 앞으로는 잘할게요."
테스는 부드럽게 말했다.
메어리는 테스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내가 널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알지, 아가야?"
테스는 눈물이 괸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네가 일하는 곳이 어떤 세상인지는 안다. 하지만 테스, 우린 가족이야.
그런데 너 혼자만 떨어져 살잖니."
"알아요."
테스는 목이 메었다.
딱딱하고 높은 의자에 앉은 메어리와 그 옆에 무릎을 꿇은 테스가 완전한
이해로 서로를 묶는 순간이었다. 서쪽으로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구식
식탁에는 음식 접시가 널 부러졌다. 바깥에서 개 짖는 소리에 이어 누군가
개를 달래는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테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내슈빌로
떠난 다음 지금이 순간처럼 서로를 가까이 느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바로 이
순간의 광경 하나 하나가 두 여인의 마음속에는 오랫동안 남을 것이었다.
"그럼, 네가 할 일을 알려 주마."
메어리는 억지로 목소리를 밝게 만들었다.
"내 옷장에 가서 네가 보내 준 그 예쁜 바지 정장을 꺼내서 토요일에 입기
좋도록 다림질 좀 해주렴. 그래야 니키에게 내 머리를 맡긴 다음 그 옷을 입고
결혼식장에 나타나 내 딸들을 뻐기게 해주지. 그렇지?"
테스는 몸을 펴고 엄마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고마워요, 엄마."
테스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테스는 그날 밤 메어리가 잠든 것을 확인한 다음 르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드디어 옷장에서 엄마의 낡은 폴리에스테르 바지를 버려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어."
"테스, 정말이니? 기적을 일으켰구나!"
"엄마는 내가 작년에 시애틀에서 보내 드린 옷을 입으실 거야."
"놀라 자빠지겠네. 레이철이 이 소식을 들으면 정말 좋아하겠다. 테스, 너한테
빛을 졌네."
"그게 전부가 아니야."
"설마 엄마가 머리를 하신다는 말은 아니겠지."
"바로 그거야. 바로 여기 우리 집에서. 미용사를 불러오기로 했어."
르니는 조금도 질투가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하는 데 비싼 돈을 들여야 한다는 게 너무 웃긴다."
"그래."
테스가 터놓고 돈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주위에 그리 많지 않았다.
테스는 언니와 생활이 많이 달랐지만 그 이상으로 르니를 사랑했다.
르니가 말했다.
"나도 할말이 있어. 주디 언니도 많이 애썼다는 걸 꼭 알려 주고 싶어. 언니가
엄마에게 언제라도 자기 미장원으로 와서 머리를 하시라고 한 적이 몇 번인지
몰라. 하지만 엄마는 너무 자존심이 강하셨지. 엄마는 당신이 가서 머리를
맡긴다면 언니가 돈을 받지 않을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셨어. 네가 무슨 재주로
엄마 마음을 돌렸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잘된 일이다."
"그래……. 결혼식 이야긴데, 교회에서 언제 사진을 찍을 거야?"
"결혼식이 5시니까 4시에는 사진을 찍어야겠지. 사진사가 적어도 3시경에는
가족이 집합해야 한다고 하길래 내가 신부 할머니까지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설명해 주었어. 그러니까 엄마가 쓸데없이 너무 일찍 오실 필요는 없어. 결혼식
피로연 하는 동안별일 없겠지?"
"큰 무리는 없을 거야. 엄마는 목발을 짚고 가겠다고 우기시지만 휠체어에
태워야지. 그래야 엄마가 집에 오고 싶으실 때 아무 때라도 집으로 모셔 오지.
엄마는 정말 물리 치료 요법을 열심히 따라하셔. 굉장히 아플 텐 데도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으시고 말이야. 의지가 아주 굳은 분이니까."
"이상하네. 엄마가 수술을 받고 맨 처음 집으로 왔을 때의 테스와는 영 딴사람이
된 것 같네."
"그땐 내가 엄마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했나 봐. 언니 말이 맞았어 엄마는
늙어 가셔. 이젠 나도 그 사실을 인정해."
"그럼…… 엄마를 돌보라고 바쁜 널 집으로 불러들인 언니와 날 아직도 원망하니?"
"아니, 더 이상 원망 같은 것도 없어. 지금쯤이면 아마도 프로듀서가 내가
화냈던 것보다 더 화를 낼 거란 짐작은 하지만."
"그래, 얘, 너무 늦은 시각이다. 내일은 또 얼마나 정신이 없을지, 원."
"피곤할 텐데 너무 오래 붙잡아 두어서 미안해."
"한 가지만 더 묻자. 너 케니를 멀리하라는 내 충고 잘 지키니?"
"기막힐 정도로 잘 듣고 있지."
"잘했어, 그럼 결혼식장에서 보자. 아이구, 결혼식만 끝나면 홀가분해질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신난다."
토요일 날씨는 더 이상 좋을 수 없을 정도로 화창했다. 테스가 옷을 입을
때 이미 기온이 20도를 넘었고 햇빛이 쨍쨍 내리쬐었다. 그녀는 뉴욕에 갔을
때 '바니 의상실'에서 새 옷을 마련했다. 디자인을 극도로 단순화시킨, 몸에
꽉 끼는 짙은 파란색 드레스였다. 발가락 끝 부분에 파란색 모조 다이아몬드가
박힌 펌프스를 골랐다. 목에는 구슬 크기의 다이아몬드가 박힌 백금 사슬 목걸이를
했다. 귀에는 그보다 작긴 했지만 진짜 다이아몬드가 박힌 작은 초승달 모양의
귀고리를 달았다. 집으로 돌아온 다음부터 옷차림을 소박하게 하려 신경을
써 왔지만 오늘은 결혼식 날이고 하루 정도는 화려하게 차려 입기로 결심을
한 것이다.
드레스는 처음 뉴욕에서 입어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몸에 끼었다. 그녀는
숨을 들이마시고 배를 꾹 눌렀다. 다시는 소닉 드라이브인 식당 같은 데서
햄버거나 감자 튀김을 먹나 봐라! 매일 달리기를 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는
새 뚱보가 되겠어.
그녀가 메어리의 침실에 들어가자 메어리가 은근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뭐 잘못됐어요?"
테스는 아래로 내려다보며 물었다.
"네가 여기 있는 동안 내내 청바지에 티셔츠 바람으로 돌아다니는 통에 네가
진짜 대단한 가수라는 사실을 내가 잊었나 보다. 하지만 정말 아름답구나,
얘야."
"오, 엄마."
"아니야. 정말 예뻐 눈이 시려도 보는 건 제대로 볼 줄 안단다. 그것들 진짜
다이아몬드냐?"
테스는 귓가를 만졌다.
"다이아몬드가 너무 많나요?"
"하하, 그냥 달고 가렴. 네가 벌어서 산 거니까."
"고마워요, 엄마."
테스는 가슴이 저렸다. 결혼 반지 이외에는 평생 당신 자신은 어떤 호사도
누려 보지 못한 메어리의 허락을 받았다. 당신 자신보다는 자식들에게 제일
좋은 것을 해주고 싶은 것이 아마 세상 모든 어머니의 모성일 것이다.
"남자들이 널 보느라 정신이 없겠구나. 여자들도 절반은 그럴 게야."
"뭘요, 엄마는 어떻구요? 이 옷을 입혀 드릴 테니 한번 보세요."
크렘 드 망테(박하가 든 리큐르 술) 술잔 같은 색상의 정장 앞부분에는 새틴
프로그(단추 고리를 겸한 장식 끈)가 4개 달려 있었다. 메어리는 테스의 도움을
받아 힘들여 그 옷을 입었다. 어머니에게 바지를 입히고 재킷 단추를 잠근
다음 테스가 말했다.
"마스카라를 발라 드릴게요, 괜찮죠? 부엌 의자를 가져 올 테니 얌전히 기다리세요."
메어리의 침실에는 구식 화장대가 하나 있었다. 오래 전 유행했던 침실 가구와
세트인 의자도 딸려 있었지만 너무 낮았다. 테스는 부엌에서 하얀 금속 다리가
달린 의자를 침실까지 들고 왔다.
"오, 테스, 이렇게까지 내 치장을 할 필요 없어."
메어리는 다소 꾸짖는 소리로 말했다.
"아니에요, 이렇게 하는 게 옳아요. 어서 이리 와 앉아 보세요."
테스는 메어리를 거울 앞에 앉혔다. 뺨에 분을 발라 주고 연한산호색 솔로
다시 털어 낸 다음 작은 컬러 스틱으로 눈가를 그렸다. 마스카라를 세워 바르고
립 라이너로 입술 윤곽을 그린 다음 솔에 립스틱을 묻혀 발랐다.
니키는 메어리에게 5년은 젊어 보이는 머리 모양을 만들어 주었다. 연회색
머리카락 끝을 살짝 구부려 귀 바로 윗 부분에 붙인 모양이었다.
"이젠 귀고리를 해요. 엄마에게 딱 맞는 게 있어요."
테스는 뉴욕에서 사온 청록색 상자를 내밀었다. 상자 겉의 글자 하나만을
읽은 메어리는 놀란 눈으로 거울 속의 테스를 바라보았다.
"티파니 제품이잖아? 오, 테스, 너 무슨 짓을 했니?"
"열어 보세요. 엄마 생일을 좀더 앞당겼다 생각하시구요."
청록색 상자 안에는 검은 벨벳으로 싸인 상자가 또 하나 들어있었다. 뚜껑을
열자 다이아몬드가 박힌 에메랄드 귀고리 한쌍이 반짝거렸다. 메어리의 눈가에
금세 눈물이 어렸다.
"오, 테스."
메어리의 뒤에 선 테스는 거울을 쳐다보며 엄마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제발 화장을 망치진 마세요. 빨리 달아보세요."
"하지만 테스, 이건 너무……."
"그래요, 알아요. 하지만 저 그만한 능력 있어요. 엄마가 새집을 짓지 못하게
한 벌이니까 귀고리는 꼭 받아 주세요."
메어리는 떨리는 손으로 귀고리를 귀에 대어 보았다. 귀고리가제자리를 찾자
그녀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숨을 멈추었다. 그녀는 팔딱거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나지막이 말했다.
"세상에."
테스는 엄마 머리에 자기 머리를 맞대고 거을 속에서 반짝거리는 귀고리를
보았다.
"정말 아름다우세요, 엄마."
화장대 위에 있는 작은 램프 불빛이 보석의 빛을 반사했다. 하지만 보석이
메어리를 달라지게 한 것은 아니었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 금방 한 머리,
화장, 우아하게 재단된 실크 옷과 평생 동안 지금처럼 오래 화장대 앞에 앉아
있었던 적이 없는 일흔 네 살 여인의 반짝거리는 눈동자. 테스는 아름다움을
다시 찾은 어머니를 보자니 끝없는 만족감이 느껴졌다.
메어리 맥파일은 환한 얼굴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고맙구나, 테스."
그녀는 딸과 같은 높이가 되도록 머리를 들고 테스의 턱을 어루만졌고, 테스는
다시 한 번 거울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천만에요. 이젠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을 깜짝 놀래켜야죠, 네?"
메어리는 기분 좋게 웃었고 테스가 다시 말했다.
"전 차 시동을 걸고 엄마 휠체어도 트렁크에 실어 놓을게요.
제가 돌아오면 엄마는 목발을 잡고 뒷문으로 나가세요. 아셨죠?"
"그래."
테스가 방을 나가자 메어리는 거울 속을 들여다보며 혼잣말을 했다.
"세상에, 이게 나라니 믿을 수 없어."
휠체어를 접어 계단을 내려간 테스는 울퉁불퉁한 뒤뜰 오솔길에 휠체어를
내려놓았다. 자동차가 있는 곳으로 다시 걸음을 떼었을 때 모자를 쓴 소년
2명이 오솔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그 중 하나는
농구공을 튀기고 있었다. 소년들은 걸음걸이를 늦추면서 테스가 Z의 문을 여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줌마 차예요?"
1명이 물었다.
"그래."
"멋진데요."
"고맙구나."
"아줌마가 컨트리 가수 맞죠?"
"그래."
"야아, 정말 머엇지다!"
소년들은 테스가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자동차를 뒤로 빼는 동안 내내 얼정거리다가
다시 농구공을 주고받으며 오솔길을 계속 올라갔다. 테스는 자기 차를 빼내고
메어리의 차를 꺼냈다. 휠체어를 넣기 위해 트렁크에 들어 있는 잡동사니를
꺼낼 때 케니가 현관문을 열고 나와 소리쳤다.
"어이, 테스. 기다려요! 내가 도와줄게요!"
그는 성큼성큼 자기 집 뒷마당을 건너왔고 그녀는 접힌 휠체어를 든 채 트렁크
문 앞에 서서, 하늘색 가는 줄무늬 양복을 입은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마침 잘 왔어요, 케니. 이거 너무 무거운데요."
그는 휠체어를 가뿐하게 들어 트렁크에 넣었다.
"다 됐소."
그는 손바닥을 털었다.
"고마워요."
"당신이 하기엔 너무 힘들……."
번쩍거리는 그녀의 구두 쪽을 내려다보면서 그는 손바닥을 터는 속도를 늦추더니
결국은 멈추었다. 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다.
"드레스가 멋지군요."
그는 더욱 작은 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당신 양복도 멋진데요. 이 넥타이 노먼 록웰 제품이죠?"
그는 눈길을 떨어뜨렸다.
"맞소. 고마워요."
한동안 두 사람은 말문을 열지 못했다.
지금 그가 입은 옷은 분명 윈터그린에서 구입한 옷이 아니었으며, 자기 옷치림이
그녀를 흥분시키리라는 사실도 짐작했던 게 틀림없었다. 그는 제대로 타이를
골랐으며 그 타이에 맞는 양복과, 또 어떤 옷이 자기 몸에 어울리는지 알았고
자신이 이렇게 몸단장을 한 이유를 알아채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는 방법도
알았다.
하지만 그녀가 이런 것을 눈치 챘다면 그 역시 그녀의 의도를 모를 리 없었다.
그녀는 그에게서 성적 매력을 느끼고 그는 그녀에게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정성스레 화장을 한 얼굴, 실크 드레스와 보석. 그녀는 지금 잡지나, 텔레비전으로
방영되는 컨트리 가요 시상식에서나 볼 수 있는 자태로 처음 그 앞에 섰다.
단순한 프린세스 라인의 드레스가 그녀를 더욱 젊고 순진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바람이 Z 자동차 위를 지나 그녀의 몸을 감싼 드레스 자락을 나풀거리게 했다.
늑골이 충분히 드러나는 목선에 마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디자인이었다. 귀고리에
달린 다이아몬드가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깊고 풍부한 파란색 드레스를
배경으로 가슴 한가운데 달린 목걸이는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들은 자신들의 눈길이 머무르는 곳이 어딘지 깨달았다.
그들은 시선을 돌렸다.
"그럼, 집으로 들어가겠어요. 엄마가 기다리셔서."
그녀가 말했다.
"내가 도울 일은 없소?"
"없을 것 같아요. 문만 열어 드리면 엄마는 혼자서 계단을 내려오실 텐데요."
그렇게 말했는데도 그녀가 집 쪽으로 걸음을 떼자 그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따라갔다.
그녀의 스타킹은 투명하리만치 짙은 파란빛이었다. 높은 구두 굽과 다리
선이 잘 어울렸다. 그는 그녀의 발끝 부분에 달린 모조다이아몬드를 슬쩍 보았다.
향수 냄새가 났다. 성가대 연습이 있던 밤 자동차에서 맡았던 향수와 같은
냄새였다. 바람이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왼쪽으로 나부끼자 그는 그녀가 내슈빌로
돌아가기 전에 폭풍우가 몰아치던 밤 차 안에서 그녀가 시작한 일을 마무리지어야
한다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테스가 집안으로 들어가 있는 동안 그는 계단에서 기다렸다. 잠시 후 그녀가
나타나 쇠 그물 문을 열었다. 그 뒤로 겨드랑이 사이에 목발을 긴 메어리가
보였다. 메어리는 잠깐 걸음을 멈추고 웃음을 지어 보였다.
케니는 계단 아래서 탄성을 질렀다.
"맙소사, 이게 누구야!"
그는 조금도 숨기지 않고 마음껏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얼굴이 창백해질
정도였다.
"잘 있었어, 케니?"
사춘기 소녀로 돌아간 것 같은 말투였다.
그는 테스가 키스를 해주고 싶을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메어리가 없었다면
아마 벌써 키스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입을 딱 벌리고 목발에 매달린
메어리를 쳐다보았다.
"이게 다 테스 생각이야. 자네 보기엔 어때?"
"제가 스무 살만 더 많았어도 당장 연애를 걸겠어요!"
케니의 찬사에 메어리는 이상하게 얼굴을 붉혔다. 메어리가 마치 다시 태어난
여인처럼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하자 테스는 불안한 눈으로 어머니를 지켜보았다.
자동차가 있는 곳까지 케니와 테스는 메어리의 양편에서 걸었다. 메어리가
베개를 정리하고 차안에 들어가자 그는 문을 닫아 주었다 그런 다음 테스 옆을
지나 운전석 문을 열어 주었다. 테스가 다리를 포개는 모양을 보던 그는 시선을
돌렸다.
그는 문을 잡은 채 물었다.
"교회까지 어머니를 모시고 갈 수 있겠소?"
"그럼요, 고마워요."
그녀는 순간 그를 올려다보았고, 두 사람은 마치 남편과 아내가 되어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자신들을 사랑하는 메어리를 돕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그가 테스 옆에서 문이 닫히기를 기다리는 동안 이 환상은 점점 커져 갔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연기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가 먼저 이성을 찾았다.
"그럼……, 난케이지를 닦달하러 가 봐야겠소. 소녀들이 옷치장 할 때 어떤지
잘 알 거요. 그럼 이따가 봅시다."
그가 문을 닫았을 때 테스는, 케니와 자신이 상식적인 선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며 만약 한 걸음만 더 나가면 서로의 인생이 복잡하고 위험한 무질서를
창조할지도 모른다는 르니의 말 따위는 무시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오늘밤이
다 가기 전에 자신들이 이 무질서를 행동으로 옮기고 말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