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들만의 에덴-10화 (10/10)

Chapter10.

30분 후면 전용 제트기가 그리스에 도착할 것이다. 베스는 옷매무새를 살폈다. 검은색 쉬프트 드레스와 같은 색 재킷을 입은 자신의 모습이 조문객처럼 보일까 봐 걱정스러웠다. 냉정하고 침착하게 보이고 싶어서 머리를 올렸지만 지그 보니 너무 평범해 보였다. 크리스토스는 아마 다시 합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자신을 보고 도대체 어떤 점에 끌렸을까 의아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꼬박 한 달 동안 베스는 데본에 있는 스테파니데스 별장인 애쉬스테드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보낸 첫 주에는 내내 울다가 지쳐서 잠이 들곤 했다. 둘째 주가 시작되자 가족을 만나러 런던에 갔다. 가족들의 위로도 받고 젬마의 약혼반지를 보고 기뻐하기도 했다. 런던에서 돌아온 뒤로는 주변을 산책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식욕도 점차 돌아오고 눈에 생기도 되찾았다. 이틀 예정으로 파트라스가 찾아오기도 했다. 그녀는 파트라스가 결혼생활에 대해 엄한 카운슬러처럼 행동하는 게 불편했다. 그렇지만 그의 방문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또 그가 들려 준 크리스토스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마지막 주가 끝난 즈음, 크리스토스가 아니라 비서가 전화를 걸어서 여행에 필요한 일에 대해 알려주었다. 베스는 그동안 슬픔을 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가 없는 삶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생각만 커져갔다. 그가 페트리나 에게 돌아간다는 생각만으로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페트리나는 그를 가질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었다. 매순간 그가 그리웠다. 수화기를 들어서 그의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다. 그런 유혹에 지지 않도록 자신을 다독여야 했다.

제트기가 아테네에 착륙한 뒤 베스는 차로 공항을 가로질러 헬리콥터에 올라탔다. 헬리콥터가 에게 해 상공을 날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로 가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굳이 묻고 싶지도 않았다. 이 여행의 끝이 결혼생활의 종말을 의미한다면 영원한 여행자로 남고 싶었다.

런던을 출발할 때부터 크리스토스와 곧 재회한다는 생각으로 들떠있었다. 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하면, 구름 속을 걷다가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헬리콥터가 착륙했다. 여기가 어디지? 저 멀리 푸른 바다가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아 넘실대고 있었다. 황금빛 해변에는 발자국 하나 보이지 않았다. 베스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마치 모스 섬에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설마…, 그녀는 헬리콥터를 돌아 곶 아래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테라코타 지붕을 얹은 자그마한 빌라가 보였다.

베스는 모래에 자꾸 빠지는 구두를 벗어버리고 그 집을 향해 달렸다. 현관에 사람이 나타나자 발걸음이 느려졌다. 충격이 온몸을 관통했다. 크리스토스였다. 베이지색 치노 바지와 검은 셔츠를 입은 그의 모습은 넋이 나갈 만큼 멋졌다. 그는 가만히 서서 그녀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의 모습에 한껏 굶주려 있던 베스로서는 금식 후에 벌이는 축제와도 같았다. 그녀는 몇 피트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 자신이 이 섬에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이 아직도 실감나지 않았다.

“이게 다 뭐죠? 어떻게 된 거예요?”

“또 내게 화를 내는 군.”

크리스토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왜 화를 내겠어요?”

베스는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그를 지나쳐서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집 안을 들여다보았다.

“여기 페트리나 가 있나요?”

그는 정색을 했다.

“지금 농담을 하는 거요? 페트니라는 자신이 이런 원시적인 곳에 있는 모습을 상상하지도 못할 거요.”

여전히 찜찜한 기분으로 베스는 팔짱을 꼈다.

“난 이곳이 원시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쨌든 날 이곳에 다시 데려오다니 정말 무신경한 사람이군요.”

베스는 빨간 머리를 뒤로 젖히고 탐스러운 입술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제 난 어떻게 아테네로 돌아가죠?”

“돌아가지 않을 거요. 적어도 나를 버리고는”

그가 말했다.

“이번이 당신 인생에서 두 번째 납치인 것 같군.”

“납치라고요?”

베스는 놀라서 그의 말을 따라했다.

“전에 여기 왔을 때는 모든 게 아주 단순했소. 그래서 우리 결혼을 다시 원점으로 되돌리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지”

베스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섬에 남게 하려고 날 납치했단 말이에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베스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우리 결혼을 지키기 위해서요?”

“물론 당신에게 선택의 기회를 준다면 더 이상적이겠지. 하지만 좀 더 치열하게 협상을 하고 싶었소. 당신이 협상 테이블에서 걸어 나갈 수 없다면 난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 거지.”

“일 리가 있군요. 어쩌면 난 협상 테이블을 떠날 생각이 없을지도 모르죠.”

그녀는 약간 흥분해서 말했다.

“그런 생각은 들지 않던가요?”

“그건 이제까지의 당신 행동과 어울리지 않소. 찾아오지도 마라, 전화도 걸지 마라, 그리고 억지로 별거하자. 그렇게 요구했잖소.”

그가 씁쓸하게 말했다. 베스는 이제 솔직해지기로 마음먹었다.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 당신이 내 곁에 머무르는 걸 원치 않았어요. 당신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고 싶었어요. 당신이 페트리나를 선택할 수도 있으니까”

“우리 두 사람이 그런 일들을 겪었는데도?”

“그녀 말이 당신이 그녀를 사랑한다고…”

“당신, 페트리나를 만났군. 맙소사, 언제 만났소?”

그가 놀라서 물었다. 그녀는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크리스토스는 그리스어로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페트리나는 어떻게 그렇게 잔인하게 굴었을까? 당신은 그때 아이를 잃은 직후였는데. 얼마나 상처받기 쉬운 상태였는데….”

그의 눈에서 분노가 번쩍였다.

“그녀와의 사이에 사랑은 없었소. 존경이나 친숙함, 인내 정도였지. 솔직히 난 그녀가 전혀 그립지 않았소. 그러다가 당신을 만난 거요”

베스는 그의 고백을 듣자 마음이 가벼워졌다. 페트리나를 향한 감정은 오로지 존경과 인내뿐인 반면에 베스에게는 그 이상의 감정이 있는 듯이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결코 페트리나를 사랑하지 않았어. 그 사실을 알자 안도감에 머리가 아찔했다. 그녀가 상상한 최악의 상황이 말끔히 해소되었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 모든 게 복잡해졌소.”

크리스토스가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당신은 로리를 사랑한다고 말했지. 결혼식 날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걸 본 순간 난 당신이 여전히 그를 사랑한다고 믿었소.”

“아니에요!”

베스는 진심으로 그의 말을 부정하며 손을 잡았다.

“나 자신이 깨닫기도 전에 이미 로리와 끝났어요.”

후회를 담은 그의 눈동자가 그녀의 상기된 얼굴에 꽂혔다.

“난 그날 너무 화가 나고 질투가 났소. 그래서 우리의 결혼이 시작되기도 전에 거의 박살을 내버렸던 거요.”

“내가 로리를 사랑한다고 생각한 이후로 오랜 시간이 흘렀어요. 난 어떻게든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어요. 당신은 날 몰아붙이면서도 정작 페트리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 주지 않았어요.”

그녀도 지지 않았다.

“나 역시 확신이 필요했어요.”

“임신했다는 얘기를 듣자 당신에 대한 내 감정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었소.”

그는 비로소 자신의 행동이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는 강한 햇빛을 피해 그녀를 집안으로 이끌었다.

“난 당신과 결혼하고 싶었소. 너무 간단했기 때문에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지.”

“내겐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 문제가 간단했던 건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이오. 두 번 다시 생각하지 않았지. 내겐 너무 간단한 결정이었거든.”

“날 사랑한다고요?”

베스는 너무 놀라 눈만 깜박였다. 제대로 들었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 날 사랑한다는 걸 알았죠?”

“우리 결혼식에서, 로리와 함께 있는 당신 모습을 보자 당장 그 녀석을 죽여 버리고 싶었소. 하지만 당신을 잃고 싶지 않으면, 당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지. 쉬운 일은 아니었소. 하지만 당신을 붙잡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할 거라는 걸,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지”

베스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날 정말 사랑하는군요?”

그의 잘 태운 구릿빛 얼굴에 멋진 미소가 퍼져나갔다.

“내가 당신을 왜 납치했다고 생각하오?”

갑자기 울음이 터지자 베스 자신도, 그도 몹시 놀랐다. 크리스토스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

“왜 그러는 거요?”

“날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지난 몇 주 동안 너무 비참했어요. 그럴 필요조차 없었는데”

그녀는 마구 울면서 말했다. 그는 베스를 안아 들고는 에어컨이 있는 시원한 방으로 갔다.

“지난 한 달은 내게도 지옥이었소.”

그가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렇지만 당신에게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소. 당신과 함께 있고 싶었지만, 당신이 나와 함께 있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서…”

“몰랐어요. 난 아이 때문에 당신이 나와 결혼했다고 생각했어요.”

베스가 옛일을 상기시켰다.

“아이가 그렇게 되자 당신에게 결혼을 지속할 이유가 없어 보였어요. 그래서 우리 결혼은 끝장났다고 생각했죠.”

“정말 못 말리는 여자로군. 어떻게 그렇게 모를 수가 있지?”

크리스토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사무실에서 내 평생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천국과도 같은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지. 살면서 그렇게 행복했던 적이 없었소. 그리고 아이를 잃었을 때 난 너무 실망했소. 하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서로가 있어야 위안이 됐지.”

“그렇지 않았어요. 내가 영국으로 가버렸잖아요. 당신은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울 거예요.”

베스가 사과하듯 말했다. 크리스토스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웃고 나서 고개를 저었다.

“할아버지 말씀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떤 여자도 애어른이었던 내 어린 시절에 대한 얘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들어주지 않았을 거라고 하시더군. 난 그분 말을 믿지 않았지”

“그분 말씀이 옳았어요. 난 할아버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 빠져들었죠. 그분이 내게 오셨을 때 난 당신이 너무나 그리웠어요.”

베스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당신이 날 사랑한다고?”

갑자기 크리스토스가 그녀를 인형처럼 꼭 안았다.

“정말 바보 같았어요.”

베스는 그의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는 사랑이 담긴 눈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당신이 내 남자라는 걸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아요.”

그의 멋진 흑 황색 눈동자가 그녀의 눈과 얽혔다.

“언제까지나 그럴 거요.”

베스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 탄탄한 근육질 몸에 파묻혔다. 그는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정열적인 키스로 답했다. 그리고는 으스러뜨릴 듯 세게 안으며 거칠게 말했다.

“다시 아이를 가지려고 노력하면 정말 좋겠는데…”

그의 말에 베스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녀는 크리스토스에게 몸을 기댔다.

“지금 노력하자고 하면 너무 이른가요?”

그의 갸름하고 멋진 얼굴에 서려 있던 긴장감이 눈 녹듯 사라졌다.

“당신이 화를 낼까 봐 두려웠소. 당신이 두 번째 임신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거든.”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오, 내가 입원했을 때 당신이 속마음을 털어놓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베스가 격한 감정을 드러내며 말했다.

“내가 다시 애를 가질 수 있다고 말해야 했단 말이오? 사촌 누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던데, 내가 유산을 슬퍼하지 않는다고 당신이 느낄 수 있다면서 그런 말은 밖에도 내지 말라고 했소.”

크리스토스가 잔뜩 긴장해서 말했다.

“난 당신을 상처 입히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소.”

“난 상처입지 않았을 거예요. 다만 당신이 우리 결혼에 아직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어요.” “앞으로는 언제나 함께 있을 거요. 당신이 영국에 가 있는 동안은 지옥 같았소.”

크리스토스가 그녀를 넋이 나간 듯 바라보며 솔직히 털어놓았다.

“당신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고통은 또다시 겪고 싶지 않소.”

“이제 그런 걱정은 던져 버리세요.”

베스가 타고 난 유머감각과 새롭게 얻은 자신감으로 그를 안심시켰다.

“그럴 시간도 없을 테니까요.”

크리스토스가 잘생긴 얼굴을 뒤로 젖히고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사랑하오.”

그의 목소리에서 강한 정열이 묻어났다. 베스는 그의 얼굴을 아래로 끌어내려 육감적인 입술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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