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9.
크리스토스는 수술실에서 나오는 베스를 기다렸다. 얼굴은 창백하고, 검은 눈동자는 흐릿했다.
베스는 그를 사랑한 것만큼 증오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진심으로 아이를 원했고, 유산되자 크게 실망했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크리스토스는 다시 아이를 가질 것이다. 물론 베스와의 사이에서는 아니었다.
“혼자 있고 싶어요. 담도 자고 싶고요”
그녀는 개인 병실로 옮긴 뒤 그가 말을 걸려고 하자 무뚝뚝하게 말했다. 크리스토스가 그녀의 작은 손가락을 감싸 쥐었다.
“뉴스에서 페트리나와 함께 있는 모습을 봤소?”
그녀는 자신의 손을 빼냈다.
“그렇다는 것으로 알겠소. 제발 내 말을 들어 봐요”
“당신과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소리쳤다. 그는 베스가 자신의 말을 들어 줄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작정 이었다.
“내게 화내는 게 당연하오. 실망도 했을 거요.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니오.”
“내가 지금 그런 일에 신경 쓰는 것처럼 보여요? 이런 일을 겪었는데!”
그녀는 비난의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가세요. 제발, 날 내버려두라고요”
“아무 말 않겠소. 그저 당신 곁에 있고 싶소.”
“혼자 있고 싶어요.”
베스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지금은 함께 있어야 하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당신과 함께하고 싶고, 또 그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소”
크리스토스의 태도는 단호했다. 베스는 그에게 등을 돌리고 벽을 바라보았다. 그와 함께 있으면 페트리나가 그의 품에 안기는 모습이 떠올랐다. 한때 심장이 있던 자리에 커다란 구멍이 생긴 것 같았다. 울고 싶었지만 더 이상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제발 집으로 가서 쉬세요.”
몇 시간 후 그녀가 말했다. 아무 말 없이 함께 있는 걸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옆에 있어서 안심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자신의 나약함에 무릎 꿇고 싶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그는 베스에게 삶의 일부가 아니었다.
“날 외면하지 말아요.”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마저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오.”
크리스토스는 그답지 않게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해서 그녀가 약간이라도 반응을 보이길 기다렸지만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마침내 문이 열리고 그가 조용히 나가자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고통에 찬 눈물이 소리 없이 뺨을 타고 빗물처럼 흘러 내렸다. 자신이 진정으로 명예를 아는 남자를 사랑했기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 그 남자는 여전히 아내에 대한 의무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의무감 때문에 결혼 생활이 더 이상 지속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리라.
다음 날 아침, 베스는 침대에 누워서 지나 스물네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생각했다. 어떤 점에서 그녀는 여전히 쇼크 상태였다. 제대로 생각할 여우도 없이 임신이라는 상황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돼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먹고 마시는 모든 것에 조심했고 충분한 운동과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임신에 관한 책도 많이 읽었다. 또한 열정적으로 유아용품을 쇼핑하고 임신복을 고르며 아기 방을 꾸밀 계획을 짰다. 그런데 갑자기 아무 경고도 없이 모든 게 끝나 버린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암산ㅂ가 아니었다. 하지만 잔인한 현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의사는 조기 유산이 흔한 일이라고 알려 주었다. 유산의 원인에 대한 정밀 검사조차 하지 않았다. 설사 맨 처음에 미세한 통증을 느꼈을 때 의사에게 알렸다 해도 결과는 변하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베스의 고통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상투적인 위안이 이어졌다. 젊고 건강하니, 곧 아이를 또 가질 수 있을 거고, 그러면 이번 일도 잊혀 질 거라고. 다음 번 임신이 또 실패하지는 않을 거라고. 어느 누구도 특정한 상황에서 벌ㅇ어진 유산은 결혼생활을 끝장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아침식사를 마치자마자 크리스토스가 다시 병문안을 왔다.
“쟁반을 보았소. 음식을 충분히 먹지 않았더군.”
그가 한숨을 내쉬며 문턱을 넘어섰다. 그의 흐릿한 흑 황색 눈동자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배고프지 않아요. 여기서 나갔으면 좋겠어요.”
“의사가 괜찮다고 하면 언제든지 퇴원할 수 있소.”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나도 당신이 집에 돌아왔으면 좋겠소.”
베스는 갑자기 화가 치미는 걸 느끼고 고개를 숙였다.
“난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크리스토스가 그녀의 심경을 헤아리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이어졌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 설명을 들어 봐요. 제대로 설명하려면 몇 주 전 이야기부터 해야겠군.”
크리스토스가 입을 열었다. 그는 자신의 말을 그녀가 다 들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녀는 머리를 베개에 기댔다. 여전히 붉게 빛나는 머리카락이 옅은 색 환자복에 대비되어 두드러졌다.
“페트리나와 파혼할 때 개인적인 관계뿐 아니라 사업적인 측면도 고려해야 했소. 스테파니데스 지주회사는 페트리나 아버지의 그룹과 합병을 앞두고 있었소. 약혼이 깨지자 합병 계획도 물거품이 됐지. 그때부터 말 그대로 전쟁이 시작됐소.”
베스는 더 이상 편하게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온몸이 팽팽하게 긴장하는 걸 느끼며 일어나 앉았다. 크리스토스가 그녀와 결혼함으로써 사업상 심각한 위기가 찾아왔다고 털어놓기 시작하자 마음이 아팠다.
“왜 진작 말해 주지 않았어요?”
“그런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소? 난 당신이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소.”
“그래서 밤낮 없이 일한 거군요.”
베스가 참담한 기분으로 말했다. 합병 직전에 대기업을 원래 상태로 만드는 게 얼마나 복잡한 일인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합병 단계에 이르면 양쪽은 서로의 강점과 약점을 모두 파악하게 된다. 따라서 우위를 접하기 위한 싸움은 더욱 치열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 이겼죠?”
베스가 물었다.
“나요. 하지만 이건 내가 원한 싸움이 아니었소. 난 페트리나의 아버지인 오레스테스를 매우 존경하고 있소. 그는 내 할아버지의 오랜 친구분 가운데 한 분이거든.”
“오, 세상에… 모두가 내 잘못이군요?”
그녀는 핏기가 가신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베스는 모든 일에 책임감을 느꼈다. 그녀의 임신은 말썽만을 일으켰다. 약혼이 깨지고, 두 가문과 두 사업체가 갈라섰다. 파트라스도 오레스테스 로디아스와의 오랜 우정에 금이 간 걸 고통스러워할 것이다.
“어떻게 당신 잘못이오? 당신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소.”
그가 격렬한 어조로 말했다.
“약혼을 한 것도, 바람을 피운 것도 나요. 그러니 모든 일은 당연히 내 책임이오.”
그의 말은 베스의 살을 후벼 파는 것 같았다. 마침내 그는 가장 중요한 사실로 돌아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한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 사람이 저렇게까지 변한 거지? 페트리나를 잃었다는 상실감 때문일까?
“절대로 자신을 자책하지 말아요. 이제 모든 건 끝났소. 어제 오레스테스 로디아스가 심장 발작을 일으켰소. 당신을 만나러 가던 중에 오레스테스가 급히 병원으로 실려갔다는 연락을 받았지. 지금은 별로 좋은 관계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난 여전히 그분을 존경하오. 그래서 부하 직원에게 당신과 연락하라고 일렀는데 아마 장소를 착각한 모양이오.”
어제 일이 마치 천 년도 더 전에 일어난 일 같았다.
“이제 그 일은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난 상관 있소.”
그는 베스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당신에ㅔ 전화를 걸려고 했는데, 20분 정도면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서 당신을 직접 만나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죠?”
그녀는 크리스토스의 개인적인 감정에 대해서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오레스테스는 스트레스 때문에 아픈 거였소. 그는 심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라는 진단을 받고 마음을 놓았지. 그리고는 우리와 화해하기로 마음먹었소. 이제 전투는 끝난 거요”
그가 급히 말을 이었다.
“페트리나 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아버지의 생사도 모르는 상태였소. 심장 발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땐 너무나 기쁘고 혼란해서 제정신이 아니었지.”
“당신들 두 사람은 오래 전부터 알던 사이니 당연히 당신에게 도움을 청했겠죠.”
베스가 말을 받았다.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그녀를 저버리고 싶지는 않았소. 히스테리 상태였거든.”
크리스토스가 말했다.
“그 포옹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소.”
그녀는 페트리나가 그에게 정신적 지지를 원하는 게 아니라 매혹돼 있었다고 생각했다. 화면 속의 크리스토스는 히스테리를 nfl는 여자의 공격을 견디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아주 특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베스가 오로지 자신의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그 미소였다.
“어제 그녀와의 사이에 있었던 일에는 어떤 개인적인 감정도 없었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오. 난 결혼 이후에 페트리나와 만난 적도 없소.”
기회가 없었을 뿐이겠지. 베스는 그를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조금만 건드리면 폭발할 것처럼 끔찍하게 슬펐다. 크리스토스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와 결혼을 해선 안 되는 거였는데. 이미 약혼한 남자와는 결혼하지 말았어야 했어. 내 무덤을 내 손으로 판 거야.
“당신이 이렇게 조용한 건 처음이군.”
크리스토스가 말했다.
“나 혼자 떠드는 데 익숙하지 않아서 말이오.”
말을 하려고 입을 열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이대로 사라지는 건 너무나 힘들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아리도 없으니 그를 놓아주어야 했다. 그는 약속대로 그녀를 지켜 주었다. 그 일의 대가는 베스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결혼 직후부터 그가 자신의 제국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다행히 위기는 지나갔으니, 이제 그녀가 결단 을 내려야 했다.
크리스토스는 침대에 걸터앉자 그녀의 손을 잡았다. 매력적인 흑 황색 눈이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당신을 위해 모든 걸 다시 한 번 제대로 해보고 싶소. 그렇지만 나 할 수가 없소. 나 자신이 너무 무능력하게 느껴지는군.”
그는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그의 말은 진심이었고 그의 태도는 매우 사려 깊었다. 베스는 그를 안아 주고 싶었다. 그는 아이 때문에 무척이나 마음이 상해 있었다. 그를 잘못판단할 걸까? 질투에 눈이 멀어 내가 너무 예민하게 나온 건 아닐까?
“난 당신 인생에서 너무나 많은 걸, 망치고 말았어요.”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요.”
크리스토스는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당신은 어떤 것도 망치지 않았소.”
그렇다면 왜 아이는 또 가지면 된다고 말해 주지 않는 거지? 왜 위로의 말이나 우리가 여전히 함께 있을 거라고 나를 설득하지 않는 걸까? 이 상황에서 그는 친절하고 사려 깊게 행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의 발목을 잡아야 하나? 우연히 자신의 아이를 가졌기 때문에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결혼생활을 유지해야만 하는 걸까? 이제 그 아이도 없는데. 그녀는 더 이상 그와 가까이 있는걸, 참을 수가 없어서 손을 빼고 귀로 물러났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무엇에 대해서?”
“내 감정에 대해서요.”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크리스토스는 그녀를 세게 안았다.
“당신은 지금 너무 힘든 상태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아요.”
베스도 그를 안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언제나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게 힘이 돼 주곤 했다. 그러니 그의 태도에 너무 많은 의미를 둘 필요는 없었다.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지만, 크리스토스는 이미 사신을 사랑하길 원치 않는다고 그녀에게 말했던 것이다. 베스는 마음을 굳게 먹으며 그에게 피곤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눈치 빠르게 병실을 떠났다. 그가 나간 지 5분도 지나지 않아서 침대 옆에 놓인 전화기가 울렸다.
“페트리나 로디아스예요. 잠시 찾아가도 될까요?”
베스는 대답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불쑥 말이 나오고 말았다.
“언제 오시겠어요?”
“지금이요.”
페트리나의 목소리는 오만하면서도 여성스러웠다. 베스는 오라고 한 게 과연 잘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일로 찾아온 걸까?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데 꼭 그녀를 만나야 할까? 그렇지만 방문을 거절하기에는 페트리나가 찾아온 이유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컸다.
페트리나가 병실로 들어오자 베스는 하얀 숄을 두르고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한눈에 남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미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푸른 눈과 풍성한 금발 머리에 날씬하고 관능적인 그녀는 우아한 인형처럼 아름다웠다. 페트리나는 노골적으로 싫은 감정을 드러내며 베스를 살폈다.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으니, 솔직하게 말하죠. 크리스토스에게 언제 그의 인생을 돌려줄 거죠?”
“무슨 말이죠?”
“이혼 말이에요”
“크리스토스가 원한다면 직접 말하겠죠.”
베스는 턱을 치켜들었다.
“당신이 유산하자마자 이혼을 요구하지는 않겠죠. 당신을 불쌍하게 여기니까.”
입을 굳게 다문 베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여자 대 여자로서 말하죠.”
페트리나가 차갑게 말했다.
“크리스토스가 실수로 당신을 임신시킨 대가를 충분히 치렀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베스는 그 말에 움찔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크리스토스가 페트리나의 이런 비열한 모습을 본 적이나 있을지, 그리고 이런 모습을 좋아할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는 페트리나를 사랑했을 것이다. 연인들은 서로에게 완벽을 요구하진 않으니까. 게다가 페트리나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그가 베스를 불쌍하게 여기고 있다면, 설사 이혼을 원한다해도 그녀가 유산으로 괴로워하는 동안에는 결코 요구하지 않으리라는 걸 베스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베스와의 결혼으로 큰 고통을 겪지 않았던가. 사업에서도, 사생활에서도, 게다가 할아버지와의 의견차이도 견뎌내야만 했다.
“할 말 없어요?”
페트리나가 조소를 퍼부으며 닦달했다.
“난 크리스토스가 행복하기만 바랄뿐이에요.”
베스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조차 알지 못했지만 지금 한 말은 진심이라고 생각했다. 막상 페트리나와 크리스토스가 함께 있는 모습을 상상하자 속이 상하고 비참했다.
“나와 함께하면 행복할 거예요. 그는 날 사랑하니까.”
페트리나 가 주저 없이 말했다.
“그가 성실하지 못했던 게 신경 쓰이지 않나요?”
베스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페트리나는 비웃는 듯한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 같은 창녀와 잠시 즐긴 걸 내가 왜 신경 써야 하죠?”
베스는 문으로 걸어가 열어제쳤다.
“그만 돌아가시죠.”
페트리나가 떠난 뒤 그녀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크리스토스가 페트리나를 사랑한다면 그녀와 함께하는 삶을 선택할 자격이 있었다. 이미 충분한 희생을 치렀으니까. 베스는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그의 인생에서 빠져 주어야 했다.
“잠시 집에 가 있고 싶어요.”
그날 오후에 크리스토스가 찾아오자 베스가 말했다. 그의 강인한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으로서는 좋은 생각 같지 않군. 먼저 몸부터 회복해야 하잖소.”
“런던에서도 몸조리를 할 수 있어요. 가족들도 보고 싶어요.”
“그럼 같이 갑시다.”
“나 혼자 갈래요”
“우린 겨우 몇 주 전에 결혼식을 올렸소.”
크리스토스가 그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 몇 주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죠.”
그녀가 똑똑히 말했다. 베스는 창가에 서 있는 크리스토스가 주먹을 움켜쥐었다가 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우리가 함께 이 어려움을 헤쳐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소. 하지만 당신이 원한다면 어디든 갈 수 있소.”
그의 목이 잠겼다. 베스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영국에 있는 별장에 머무를 거요?”
그가 갑자기 물었다.
“네”
“당신이 거기 머문다면 마음을 놓아도 되겠군.”
갑자기 크리스토스가 매우 서운해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겐 중요한 문제요.”
“알아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영국에 보내 주면 그리스로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해야 하오”
그들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이 나라를 마지막으로 찾아오는 모습이 그려졌다. 갑자기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것 같았다.
“물론이죠.”
“그럼 2주 정도 영국에 머물면서 몸조리를 하도록 해요.”
“충분하지 않아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한 달은 필요해요.”
“한 달은 긴 시간이오.”
크리스토스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그랬다. 아내를 멀리 보내놓고 여전히 사려 깊은 남편의 역할을 하기에는 제법 긴 시간일 것이다. 또한 한 달이면 두 사람이 상처를 회복하기에 충분할 터였다. 그동안 크리스토스는 이미 깨져 버린 결혼생활을 회복하는 게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내가 그리스로 돌아오면 그가 먼저 이혼을 요구하겠지. 그가 힘들지 않게 일을 처리할 거야. 쾌활하고 밝은 모습을 보이면 내 가슴에 얼마나 큰 멍이 들었는지 절대 보를 테니까.
“날마다 전화하겠소.”
그가 덤덤하게 말했다. 베스는 깊이 숨을 들이쉬며 고통을 참았다.
“우리 두 사람 다 여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당신이 그러지 않는 게 더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