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들만의 에덴-8화 (8/10)

Chapter8.

베스는 노란 바탕에 작은 꽃무늬가 프린트된 짧은 소매 드레스를 우아하게 차려입고 아침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갔다.

“진주 목걸이 고마워요”

그녀는 자리에 앉으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크리스토스는 하인이 재빨리 그녀에게 의자를 빼주는 동안 잠시 기다렸다가 고갯짓으로 하인을 내보냈다.

“오늘은 신문을 읽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소.”

그가 입을 열었다. 베스는 평소에 신문을 즐겨 읽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듣자 오늘만큼은 하루 종일이라도 신문을 찾아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왜요?”

“난 항상 언론의 표적이었소. 그래서 이런 소동에는 이골이 났지.”

걱정을 가득 담은 그의 눈이 섬세한 그녀의 옆얼굴을 응시했다.

“그렇지만 당신은 다르오. 타블로이드 신문들이 얼마나 원색적으로 사람과 사건을 다루는지 잘 모르니까. 당신이 이런 일로 스트레스 받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소.”

그녀는 턱을 치켜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문은 어디 있어요?”

“베스!”

“내게 기사를 읽지 말라고 말하지 말아요. 난 어린애가 아니라고요!”

“좋소. 그렇지만 먼저 납치 사건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 게 있소. 그 사건의 배후에 내 친척이 개입돼 있소.”

크리스토스가 침울한 얼굴로 말했다. 그 말이 그녀의 관심을 끌었다.

“농담하는 거죠? 당신 친척이 관련됐다고요?”

“나도 농담이면 좋겠소.”

그는 스피로스 졸로타스에 대해 털어놓았다. 스피로스는 조 타일러와 함께 헬리콥터 추락 사고로 사망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다.

“할아버지와 달리 난 사람의 천성도 변할 수 있다고 믿었소. 내가 틀렸지. 스피로스는 날 잘 알고 있다는 점을 이요해서 납치에 승부를 걸었소. 할아버지에게서 몸값을 뜯어내려는 속셈이었지. 그는 내가 당신을 처음 봤을 때 함께 있었소. 아마 그때 당신에 대한 내 관심을 이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오.”

“전에 그 사람이 주말을 위해서 깜작 선물로 날 지목했다고 했잖아요.”

베스가 기억해 냈다.

“당신을 만난다는 생각에 난 경호팀의 염려를 무시해 버렸다. 덕분에 납치 성공 가능성이 높아졌으니 나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킬 준비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지.”

“그럼 그 모든 사건이 다 당신의 육촌형 짓이었군요.”

베스는 떨리는 가슴을 안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렇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폭풍이 몰아쳤다.

“당신이 그 사실을 이제야 털어놓은 건 신문에서 다 밝혔기 때문이군요. 스피로스인지 뭔지 하는 사람이 배후 인물이란 걸 언제부터 알고 있었죠?”

“우리가 섬에서 구조된 직후에. 할아버지와 통화하면서 알게 됐소.”

“그런데도 내겐 일언반구도 없었군요. 우린 그곳에서 거의 1주일을 함께 보냈어요. 우린 공포와 모험을 함께 나눈 연인이었다고요. 그런데 당신은 내가 누구 때문에 그 섬에 갇히게 됐는지 알 권리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다그쳤다. 분노와 상처로 인한 고통이 치솟았다.

“그 당시엔 가족의 문제였소.”

그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스피로스가 죽자 할아버지는 그의 가족이 겪을 고통을 염려하셨소. 이 일이 폭로되면 스피로스의 아내와 딸들에게 득 될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셨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베스는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가슴은 이 산에서 저 산으로 뛰어다니는 토끼처럼 콩닥거렸다.

“페트리나에게도 이 사실을 숨겼나요?”

“아니오.”

그녀의 입에서 쓰디쓴 웃음이 흘러 나왔다.

“알 만하군요.”

“뭘 말이오?”

크리스토스는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당신과 함께 납치됐지만 당신에게 난 여전히 남이었던 거예요. 난 당신이 유혹해서 가지고 놀도록 내버려 둘 만큼 정신 나간 바보였고요!”

그녀는 고통스럽게 내뱉었다.

“당신이 하는 행동을 보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어요!”

거부당하고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엄청난 고통으로 자리를 잡았다.

“당신이 내게 납치범과 공범이라고 으르렁대는 동안 당신의 빌어먹을 가족이 이 모든 일을 저지르고 있었다니!”

“이 일로 기분이 많이 상했을 거요”

“그런데도 당신은 자신이 오해한 데 대해 단 한 번도 사과하지 않았어요.”

“우리 사이에 그런 게 필요한 선은 넘었다고 생각했소.”

베스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분노에 찬 녹색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신문은 어디 있어요?”

“서재에”

그의 잘생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당신을 화나게 할 모든 것에서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 사과하지 않겠소.”

“맘대로 하세요!”

그녀는 서재로 갔다. 신문에선 자신과 가족 모두가 표적이 돼 있었다. 그녀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익명을 요구한 부모님의 이웃은 코니 미첼에 대해 잔인한 말들을 늘어놓았다. 자신의 모든 모습이 활자화돼 있다는 걸 알면 엄마가 얼마나 괴로워할지 생각하자 눈물이 앞을 가렸다. 젬마가 미혼모라는 사실도 나와 있었다.

기사는 베스가 부자를 만나 결혼할 속셈으로 리무진 기사로 취직할 만큼 야심만만한 젊은 여자라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었다. 그 섬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음란한 내용들이 마구잡이로 실린 게 눈에 들어왔다. 살면서 이처럼 수치스러운 이처럼 처음이었다. 페이지를 넘기자 아까보다 더 참담했다. 크리스토스의 화려하면서도 오래된 여성 편력이 한두 쪽으로는 모자랄 정도로 소상하게 나와 있었다.

“당신이 그런 쓰레기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소.”

그가 나타났다.

“그러시겠죠.”

그가 결혼식에서 그녀를 위해 주먹을 날리는 사진을 보자 뱃속이 울렁거렸다. 가십난의 칼럼니스트는 크리스토스가 여간해서 냉정을 잃지 않는 사람이라고 썼다. 또 그날의 몸싸움은 <임신한 신부와 결혼한 그의 심리 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베스는 그 사건에 대해 일말의 책임감도 느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페트리나 로디아스의 말도 인용돼 있었다. 그리스의 상속녀는 크리스트소를 <고귀한 명예심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덫에 걸려든 명예로운 남자>라고 말했다.

“페트리나 가 당신에게 위로 전화를 했나요?”

그녀는 고통과 수치심으로 몸을 떨며 그에게 물었다. 그의 턱이 굳었다.

“그건 무슨 의미요?”

“당신이 오늘 아침에 그 여자와 통화하는 걸 들었어요.”

“오늘은 페트리나 와 통화한 적이 없으니 그건 불가능하오.”

“당신이 그 여자 이름을 말하는 걸 들었어요.”

베스는 거의 울먹이다시피 했다. 그의 짙은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금세 무슨 일인지 알겠다는 듯 검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난 스피로스의 큰딸과 아침 전에 통화했소. 그 애 이름이… 페트린이지. 페트리나 와 페트린. 당신에겐 비슷하게 들릴 수도 있겠군.”

베스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정말이지 두 사람의 이름이 너무나 비슷했다.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오해했다는 사실에 안심이 되었다.

“확실히 내가 잘못 들었군요.”

그녀는 최대한 유쾌하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미안해요, 내 실수였어요!”

“스피로스의 아내와 딸들도 비로소 납치 사건의 전말에 대해 알게 되었소. 그들도 많이 놀랐고, 우리 두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하더군.”

“난 그 가족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당신이 그렇게 말했으리라 믿어요.”

“물론이오. 당신은 마음이 넓군.”

그가 말했다.

“그럼 이제 아침 식사를 마칠 수 있겠소?”

“난 별로 배고프지 않아요.”

베스는 빠른 동작으로 목걸이를 벗어 들었다.

“엄마와 젬마에게 전화를 해야겠어요.”

“나중에…”

크리스토스는 그녀가 벗어 버린 목걸이를 다시 목에 걸어주며 말했다.

“오늘 아침엔 사건도 많았고, 곧 공항으로 출발해야 하오.”

“그렇지만 불쌍한 엄마와 젬마가 신문에서 조롱거리가 된 건 다 내 책임이에요.”

그의 눈동자가 그녀에게 꽂혔다. 크리스토스는 떨리는 그녀의 입술에 말없이 손가락을 갖다 댔다.

“아니. 그건 당신 책임이 아니오. 당신이 그 기사를 실어 달라고 부탁한 건 아니잖소. 내 말 들어요. 우선 이 소동부터 가라앉힙시다.”

그의 말에 그녀는 순순히 따랐다. 공항으로 가는 동안 베스는 그가 아침에 한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오늘은 페트리나 로디아스와 통화하지 않았다는 말은 무슨 뜻이죠?”

갑자기 그녀가 물었다. 그의 눈이 가늘어지면서 얼굴이 굳었다. 베스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마지막으로 그 여자와 통화한 게 언제죠?”

“어제. 결혼식 전에 전화했더군.”

그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마치 고무줄이 늘어난 것처럼 팽팽한 침묵이 이어졌다.

“난 질문할 권리가 없어요. 하지만 통화 내용을 알지 못하면 단 한순간도 당신을 내버려두지 못할 것 같아요.”

베스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의 잘생긴 얼굴이 무표정하게 변했다.

“당신과 결혼하지 말라고 부탁했소. 이제 이 이야기는 그만 합시다.”

그녀는 창밖을 내다보는 척했다. 하지만 밖의 풍경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혼식 날 페트리나 는 <모든 걸 용서할 테니 집으로 돌아와요>라고 적힌 깃발을 흔들어 댄 것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페트리나 는 크리스토스의 약혼녀고, 베스는 그의 또 다른 여자에 불과했다. 그가 베스와 결혼한 건 순전히 아이 때문이었다.

<고귀한 명예심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덫에 걸려든 명예로운 남자> 어쩌면 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정작 아이를 가진 건 나인데. 그런 평가는 너무 불공평해. 베스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크리스토스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제 당신은 내 아내요. 과거는 모두 잊어요.”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당신의 전 약혼녀에게 죄책감을 느끼다가도 다음 순간에 나 자신이 불쌍해지는 걸요.”

“난 스피로스의 납치사건에 당신의 임신 사실을 언론에 알린 사람이 페트리나라고 생각하고 있소. 우리 둘에게 그런 짓을 할 만한 사람은 페트리나 뿐이거든.”

그녀에게 양심의 가책을 덜어 주려는 그의 작전은 맞아떨어졌다. 죄책감으로 무거웠던 그녀의 마음이 약간 가벼워졌다. 페트리나 로디아스가 고의적으로 결혼식을 망치려고 그런 일을 꾸몄다고? 그녀는 간신히 충격을 참았다. 그런 계획적이고 악의적인 행동은 너무나 낯설고 섬뜩했다. 크리스토스가 말한 내용을 주의 깊게 생각해 보았다. 그가 나를 위해 그럴 듯한 이야기를 꾸며내지는 않았을 거야. 그는 페트니라에게 찾아가지도 않고 그냥 미안하다고만 했을까? 뭐라고 하면서 미안하다고 했을까.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약혼을 깨야 한다고 말했을까? 아니야. 추악하고 끔찍한 진실을 있는 그대로 약혼녀에게 알렸겠지. 베스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기 때문에 결혼해야 한다는 진실을. 베스는 그가 차라리 거짓말로 꾸며댔기를 바랐다.

“앞으로 우리 두 사람의 미래가 펼쳐질 거요”

크리스토스가 나무라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게다가 우리에겐 태어날 아기가 있잖소.”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손 안에서 움찔했다.

“정말 우리 아이가 기다려져요?”

카리스마 넘치는 미소가 그의 넓고 육감적인 입가에 천천히 퍼졌다. 너무나 매력적인 그 모습에 입술이 바짝 마르고 심장이 콩닥거렸다.

“그걸 말이라고 하오. 딸이든 아들이든 상관없소.”

그녀를 감싸고 있던 긴장감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 동안에는 아이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처음에는 임신했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임신을 확인하고 나자 이번엔 어떻게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두려움이 엄습했다. 게다가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자신과 결혼하려는 크리스토스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이제야 태어날 아이가 아들인지, 딸인지 궁금해졌다. 어느 쪽이든, 행복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갖지 못한 것에 시무룩하지 말고 크리스토스와 함께 가진 것에 감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스테파니데스 가문의 전용 비행기가 아테네에 도착한 직후에 중요한 내용으로 보이는 전화를 두 통 받았다. 생기 넘치는 그의 갸름한 얼굴이 굳었다. 그는 베스와 함께 리무진에 올라타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집에 도착하면 바로 사무실에 가야 할 것 같소.”

낯선 나라에서 낯선 집에 혼자 남겨진다는 사실에 당황한 마음을 수습하기도 전에 차가 집 앞에 도착했다. 베스는 심호흡을 했다.

“괜찮아요.”

그녀는 떼쓰는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며 그에게 말했다. 그의 지적인 눈에 걱정 대신 고마움이 담겼다.

“이미 눈치 챘겠지만 지금 당장은 신혼여행을 갈 만한 시간이 없소.”

“신혼여행을 갈 거라고 말한 적도 없잖아요.”

베스는 애써 실망감을 감추며 미소 지었다. 출근하기 전에 단 며칠만이라도 함께 할 거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정말 바보같이 느껴졌다. 결혼식 직전까지 크리스토스가 밤늦게 일한 걸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시간이 나면 아주 특별한 곳으로 데려가겠소. 그리고 평범한 신혼부부들처럼 지내겠다고 약속하지.”

그는 여전히 매처럼 매서운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계속 나쁜 소식만 듣게 되는 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군.”

“네”

준비된 유머감각이 빛을 발했다.

“울고 짜는 것보다는 당당하게 현실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면 당신이 더 미안하지 않겠어요?”

그녀가 상냥하게 말했다. 잠시 후 그는 진정으로 감사의 웃음을 터트리며 단단한 두 팔로 그녀를 안았다. 그의 반응에 베스는 아마존의 여전사라도 된 것처럼 자신감을 얻었다. 그래서 애정을 듬뿍 담아 그를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결혼 상대가 페트리나 로디아스였다면 억지로라도 짬을 내서 신혼여행을 갔을 거라는 작은 속삭임이 들렸다. 그녀는 마음 속 목소리를 모든 걸 파고하는 불덩어리라도 되는 양 서둘러 꺼버렸다.

베스는 그리스 본토에 위치한 어마어마한 저택을 보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물론 대단한 저택일 거라고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집에서 그가 사랑하는 바다가 한눈에 보여도 놀라지 않았다. 그렇지만 울창한 숲과 개인 해변으로 둘러싸인 고색창연한 저택에서 자신을 맞이하기 위해 수십 명의 하인들이 늘어서 있는 장면은 미처 상상하지 못한 거였다. 그는 특별히 옴팔레라고 불리는 불그스레한 뺨에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중년 부인을 베스에게 소개했다. 옴팔레는 어릴 때부터 크리스토스를 돌본 유모였다.

“옴팔레에게 내가 임신했다고 알렸나요?”

말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는 환한 홀을 지나며 베스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에게 살짝 물었다. 크리스토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결혼에 대한 온갖 이야기가 영국 언론에 대서특필됐으니, 그리스에서도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괜찮아요. 난 바보가 아니에요.”

“하인들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소.”

크리스토스가 갑자기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을 제대로 보살필 수 없지 않겠소. 이곳 산부인과에도 등록하도록 해요. 또 가족들에게도 도움을 받을 생각이오. 그리스인의 지혜는 쓸 만한 게 꽤 많거든.”

“당신이 그렇게 대장처럼 구는 모습이 좋아요. 덩치 큰 터프한 남자가 조그감 수다쟁이 여자를 구박하는 우스운 연극의 등장인물이 된 것 같거든요. 예, 주인님. 가방 세 개를 다 채웠습니다, 주인님!”

베스는 군대식으로 손을 들어 올리며 인사를 했다. 크리스토스는 그녀를 끌어당겨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열렬하게 키스했다. 그리고는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쥐고 아쉬운 듯 신음소리를 내며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그의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저택 안내는 필요 없어요.”

베스의 두 뺨은 발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그에게로 살짝 기울이며 상처받은 듯한 녹색 눈동자로 그의 눈을 응시했다.

“그래도… 침실이 어딘지는 가르쳐 줄 거죠?”

그녀는 대답하게 유혹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크리스토스가 신음을 내뱉었다.

“안 돼. 날 유혹하지 말아요.”

그는 베스에게서 약간 떨어져 전화를 받았다. 낮고 다급한 그리스어였다. 그러더니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가봐야겠소.”

“목장에 문제가 생겼나요?”

베스는 그의 갑작스런 출발이 얼마나 아쉬운지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며 짧게 물었다. 그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무실에 문제가 생겼냐고요?”

그녀가 다시 물었다. 그의 마음은 이미 사무실로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놀란 듯한 그의 눈동자가 예기치 못한 힘에 의해 그녀의 눈과 마주쳤다. 그는 웃으며 놀랐다는 듯 검은머리를 저었다.

“물론 그렇지 않소. 당신도 참, 무슨 생각을 하는 거요?”

“그럼 저녁에 봐요”

“늦을 텐데…”

“그럼 키스해 줘요”

그녀가 속삭였다. 크리스토스가 키스했다.

“아주 많이 늦을 텐데”

그녀가 바로 서려고 그를 붙잡자 그가 허스키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한 번 더 키스해 주세요. 내가 그때까지 견딜 수 있도록 이요.”

그녀가 속삭였다.

“또 키스를 하면 여기서 걸어 나갈 수 없을 거요. 당신은 너무나 아름답거든”

“기다릴게요.”

베스는 그가 천천히 현관으로 걸어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너무나 열중해 있어서 은발의 노신사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문득 크리스토스가 그를 알아보고 놀라 탄성을 질렀다. 베스는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조각 같은 얼굴과 깊은 눈매의 노신사를 보자마자 크리스토스가 누구를 닮았는지 알아챘다. 할아버지와 손자는 붕어빵이었다.

“베스, 내 할아버지이신 파트라스 스테파니데스 씨요”

크리스토스가 할아버지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을 담아 소개했다. 파트라스 스테파니데스가 그녀에게 다가와 초대하듯 양손을 내밀었다.

“편견을 가졌던 이 늙은 바보를 용서해 주겠니?”

그의 목소리는 격한 감정에 사로잡혀 마구 떨렸다.

“물론입니다.”

그녀는 살짝 미소 지었다. 베스는 그의 손을 잡고 그가 두 뺨에 키스하는 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하지만 벌이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우리 결혼식을 찍은 몇 시간짜리 테이프가 있거든요. 저랑 같이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보셔야 해요”

무표정했던 노인의 얼굴이 풀어지면서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 벌이 정말 기다려지는구나.”

그는 안심하고 있는 손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너무 늦지 마라, 크리스토스. 요즘 들어 네가 특별히 더 바쁘다는 걸 안다만”

“알겠습니다.”

그가 베스를 보며 말했다.

“그렇지만…”

“만난 지 30초 만에 장난을 걸 정도라면 날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거겠지”

파트라스는 베스가 마음에 든다는 걸 감추지 않았다.

“네 아내 걱정은 말거라. 내가 잘 돌보마. 그래서 가족이 좋은 거 아니겠니. 좋은 시간도, 나쁜 시간도 가족은 함께하는 거다. 지난 두 주 동안 내가 가장 중요한 원칙을 잊고 있었구나.”

베스는 자신이 파트라스를 좋아하게 될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밝히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가 가장 편안했다. 크리스토스는 좀 더 예민하고 세련되서 마음을 읽기 힘든 상대였다. 반면 그의 할아버지는 결혼식을 보지 못한 아쉬움과 손자 내외의 사이를 좋게 만들어 보려는 열의를 숨기지 않았다. 베스는 그의 할아버지를 몹시 만나고 싶었다. 설사 파트라스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노력은 해보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크리스토스는 할아버지와 사이가 벌어졌다는 사실 때문에 몹시 괴로워했다. 자신 때문이 아니라 크리스토스 때문에라도 그녀는 노인이 마음을 바꿔 주어서 너무나 기뻤다.

“이 집에서 제가 할아버님께 차를 대접하려면 어디로 가야하죠?”

그녀의 물음에 파트라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크리스토스가 집을 구경시켜 줄 시간이 없었거든요”

“나중에 너만 괜찮다면 내가 가이드를 해주마. 나는 크리스토스처럼 이 집에서 태어났단다.”

그는 베스를 그늘진 로지아(한쪽만 벽이 있는 복도)로 데려갔다. 서늘한 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이 맘 때는 이 집에서 여기가 가장 좋단다.”

기분이 상쾌했다. 파트라스는 대대로 자신의 가문이 살아온 이 입에 대한 그녀의 궁금증을 차근차근 풀어 주었다. 그는 베스에게 자신이 수집하고 있는 클래식 자동차에 대해서도 얘기해 주었다. 또 차 구경을 겸한 점심식사에 초대도 해주었다. 파트라스는 떠나기 직전에 얼굴을 찌푸리고 베스를 찬찬히 살폈다.

“널 보니, 내 손자가 왜 네게 끌렸는지 알겠구나. 너는 그 녀석에게 있어서 트로이의 헬렌과도 같은 아이야”

그 말에 당황한 베스가 잠시 후 웃음을 터트렸다.

“제발 저 때문에 아무도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크리스토스를 얕보지 마라”

파트라스는 생각에 잠긴 듯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네가 그 애를 사랑해 줘서 기쁘구나. 당연히 그래야지”

그녀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노인은 그 모습을 보고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그 녀석을 보는 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내 걱정이 다 날아갔지.”

3주 후에 베스는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서 크리스토스가 불빛이 희미한 홀로 걸어 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새벽 2시였다.

“지금 몇 시인데, 이제야 들어오는 거죠?”

베스는 짐짓 화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녀의 모습을 보자 그의 굳은 입매에서 힘이 살짝 빠졌다.

“지금쯤은 침대에 있을 시간인데, 스테파니데스 부인?”

계단을 내려오는 베스의 날씬한 몸에 단순한 흰색 숄이 감겨져 있었다.

“너무 늦게까지 깨어 있을 생각은 저도 없었어요.”

그에게 은근한 초대의 눈빛을 보내는 그녀의 두 뺨이 붉게 물들었다.

“아기 거요”

그는 꾸러미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포장 속에는 밝은 색 장난감이 있었다. 그녀의 눈빛이 꿈을 꾸듯 생각에 잠겼다. 요즘은 이런 일이 의식처럼 반복되었다. 이틀이 멀다 하고 크리스토스는 육아실에 뭔가를 가져왔다. 북, 모빌, 온 방을 가득 채우는 남자아이용 기차 세트에, 귀여운 강아지 인형과 작은 그림책 등등이 이어졌다.

“배고파요?”

그녀가 물었다.

“뭘 좀 먹고 싶긴 하군.”

크리스토스는 우람한 팔을 그녀의 섬세한 어깨에 두른 채 계간을 올라갔다. 베스는 과연 그가 지금처럼 강한 척하는 태도를 버리고 자신을 믿어 줄 날이 올지 궁금했다. 단지 임신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스트레스에서 나를 보호해야 한다고 믿는 걸까? 아니면 원래 그리스 남자들이 다 이런가?

점쟁이의 수정 구슬이 없어도 스테파니데스 제국이 지금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크리스토스는 걱정을 나누고 싶은 그녀의 마음을 매번 무시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매일 열여덟 시간씩 일했다. 전화벨은 자정이 넘어서 퇴근한 뒤에야 간신히 멎었다. 그렇지만 다시 몇 시간 뒤 면 냉혹한 벌을 수행하듯 하루가 시작되었다. 아침 여덟 시가 되면 개인 비서가 브리핑을 위해 아예 집으로 왔다. 그는 일하면서 아침을 먹고, 리무진을 타고 가면서 지시를 하고, 각종 보고를 들었다. 그들 주위를 감돌고 있는 긴장감은 사태가 얼마나 다급한지 말해 주었다.

크리스토스는 침실 문가에 잠시 기대서서 베스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의 입에서 만족스러운 낮은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런 말하기 뭣하지만… 당신이 날 기다려 줘서 정말 좋군. 집으로 돌아오는 걸 특별하게 만들어 주거든”

“맞아요. 난 이 집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는 베스의 머리를 살짝 뒤로 젖혔다. 그의 반짝이는 흑 황색 눈동자가 그녀의 사랑스러운 얼굴과 어깨 주변에 드리워진 불꽃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찬찬히 살폈다.

“당신은 정말 놀라운 여자요. 한 번도 불평이란 걸 하지 않으니”

“대신 글로 남기고 있어요.”

그녀가 농담을 했다. 그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그녀의 밝은 머리카락 몇 가닥을 돌돌 말았다.

“당신이 이렇게 편안하고 사려 깊은 여자인 줄 몰랐소. 내가 당신을 과소평가한 거요. 당신이 얼마나 남을 배려하는 사람인지 잊지 못할 거요.”

“당신은 여자들이 상황이야 어떻든 떼쓰고 요구 사항이 많은 아이들 같다고 생각했나 보죠?”

“이전에 만난 여자들은 그랬지.”

크리스토스는 느긋하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의 정수리에 이마를 살짝 댔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가서 샤워를 하고 오겠소.”

그가 욕실로 가자마자 베스는 재빨리 방을 가로질러 프렌치 도어를 열고 발코니에 준비해 놓은 양초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커다란 쿠션을 가지고 나와 최대한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마지막으로 음식이 담긴 바구니를 가져왔다. 그리고는 그를 위해 포도주를 따르고 침이 넘어갈 만큼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차렸다. 베스는 그제야 숄을 벗어 던지고 쿠션에 웅크리고 앉았다. 그리스에 온 뒤 얼마나 행복한 시간을 보냈는지 생각해 보았다. 크리스토스를 지금처럼 오랫동안 일하도록 만든 사업의 위기도 두 사람 사이를 방해할 수 없었다. 대신 함께할 수 있는 짧은 시간을 최대한 즐기기로 했다.

이른 아침 일찍 수영을 하는 날도 있고, 자정에 해변에서 파도소리를 들으며 바비큐를 해먹기도 했다. 아니면 그의 사무실에서 점심을 함께 하기도 했다.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절절한 나머지 음식을 먹는 건지 키스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였지만. 한가한 시간이 단 1분이라도 생기면 크리스토스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스에서 보낸 첫 주에 베스는 스테파니데스 대가족의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혼자 있을 시간이 단 하루도 없었다. 쇼핑이나 관광을 함께하거나 찾아오는 친척들을 맞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크리스토스가 가족 내에서 얼마나 인기가 좋은지 깨닫는 순간 그에게 감사의 마음이 샘솟았다. 친척들이 그를 위해서 베스를 주저 없이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녀는 파트라스와 급속도로 사이가 좋아졌다. 노인은 거의 매일 베스를 보러 왔다. 그는 남자 에스코트가 없어서 베스가 조금이라도 곤란을 느낄 만한 모임이면 언제든지 에스코트를 해줬다. 그래서 그녀는 당당하게 저녁 외식을 했고, 수많은 사교 모임에서 주눅들지 않아도 되었다.

크리스토스가 늘씬한 엉덩이에 타월을 두르고 욕실에서 나왔다. 베스는 이미 쿠션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녀의 도자기 같은 매끈한 피부와 아찔한 몸매에는 황금색 새틴 나이트드레스가 휘감겨 있었다. 그는 베스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의 흑 황색 눈동자가 원초적인 기쁨으로 빛났다.

“당신이라면 미소 한 번으로 성자라도 유혹할 수 있겠군”

“여기엔 내가 아는 성자가 한 명도 없는데…”

그는 신음소리를 냈다.

“먼저 뭘 좀 먹게 해주겠소?”

그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규칙을 알잖아요.”

“그럼 마사지는 나중에 받을까?”

크리스토스가 악마같이 반짝이는 눈길을 그녀에게 보냈다. 그 눈길만으로도 사랑에 빠진 그녀의 가슴에 메가와트 급, 전기가 통했다.

“그만 좀 해요”

베스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녀의 자존심은 아직도 이틀 전에 시작한 첫 번째 마시지에 대한 그의 반응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최선을 다해 마시지 했는데 그걸 비웃다니. 다신 마시지하지 않을 거예요.”

반짝이는 그의 두 눈에 짓궂은 미소가 가득했다. 그는 쿠션에 몸을 던지며 훈제 치킨조각으로 손을 뻗었다.

“내가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가 했더니 저 요상한 뉴에이지 음악 때문이었군. 당신은 이런 섹시한 피크닉에 재능이 있소”

그는 장난 반, 위로 반이 섞인 농담을 했다. 베스는 남편이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크리스토스는 그녀의 세계에서 가장 소중한 손재였다. 로리를 위해서는 조금도 양보하거나 자신의 길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으면서 어떻게 로리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는지 의아했다. 반면에 크리스토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를 너무나 사랑했다. 그가 자신을 사랑해 주지 않더라도. 그는 베스가 그에게 매우 중요한 존재라고 느끼게 했다. 그와 함께 있을 때면 그녀는 자신이 눈부시게 아름답고 섹시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토스는 음식을 다 먹고 나서 그녀의 몸에서 황금색 나이트드레스를 벗기고 침대로 데려갔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당신은 자꾸 피하기만 하는 회사 일에 관해서요”

그녀는 서둘러 말했다. 잔뜩 긴장한 크리스토스는 마치 헛것을 보는 듯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난 이런 큰 저택과 하인들, 그리고 호화로운 물건이 없어도 살 수 있다는 거예요.”

“난 아니오.”

크리스토스가 감정적으로 말했다.

“아뇨. 당신은 그럴 수 있어요. 결국 가장 중요한 건 그런 것들이 아니잖아요.”

“베스”

크리스토스는 깊은 상처를 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내게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잘 알아들었소. 하지만 당신이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소. 난 부자고,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할 거요”

“하지만…”

그는 키스를 마구 퍼부어서 그녀의 입을 막아 버렸다. 콩닥거리는 맥박과 감미로운 분위기가 그의 동물적인 매력에 그녀를 눈뜨게 했다.

“당신은 정말 달콤하오.”

크리스토스는 그녀의 등을 자신의 늘씬하고 정력적인 몸으로 끌어당겨 부드러운 가슴을 움켜쥐면서 다급하게 속삭였다. 베스는 저항하지도, 저항할 수도 없었다. 크리스토스는 그녀를 꼭 끌어안으며 이름을 속삭였다.

“내일 점심 때 나를 만나겠다고 약속해 줘요. 저녁 외식은 힘들다는 거 알아요. 당신은 늦게까지 일할 테니까요. 그래도 제 생일을 축하할 만한 뭔가를 하고 싶어요.”

크리스토스는 긴장했다.

“내가 지금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다고 해도 날 유혹하고 싶을까?”

“아뇨. 시간을 많이 잡아먹지 않을게요. 그러니 너무 걱정 말아요”

그녀는 용서한다는 듯 그를 안았다. 그는 다른 데 정신이 팔려서 종종 요일도 까먹곤 했다. 그래서 베스는 자신의 생일을 크리스토스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선물은 다음 주에 생각해요. 내일은 당신만 있으면 돼요. 당신 사무실 근처에서 점심만 같이 먹어요.”

“예약해 놓겠소. 그 정도는 당신도 자격이 있지”

다음날 아침, 그의 부하직원이 전화로 오후 1시에 레스토랑에 예약을 했다고 알려 주었다. 베스는 정성을 들여 옷을 차려입었다. 호박색 린넨 드레스를 입고 피부와 머리 색깔에 잘 어울리게 화장을 했다. 그녀가 먼저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매우 고급스러운 식당이었다. 크리스토스는 늦었다. 전화를 했지만 휴대전화가 꺼져 있었다. 사무실에서는 그가 이미 나갔으며 행선지를 밝히지 않았다고 말해 주었다. 베스는 방해 없이 둘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일부러 행선지를 밝히지 않았을 거라고, 그는 이미 이곳으로 오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천천히 흘렀다. 1시가 훨씬 지났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맙소사, 오늘은 그녀의 생일이었다. 베스는 재치가 넘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인사말을 연습했다. 휴대전화로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직도 그를 기다린다는 사실을 광고하고 싶지 않아서 사무실로는 다시 전화를 걸지 않았다. 2시가 지나서야 레스토랑을 떠나며 그녀는 뼛속까지 밀려오는 고통에 목이 메었다.

베스가 탄 리무진은 차량 정체로 오도 가도 못하고 길에 서 있었다. 그녀는 화나고 상처받은 기분에서 벗어나려고 텔레비전을 켰다. 되도록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애썼다. 아마 너무 심각한 문제가 생겨서 약속을 잊었는지도 몰라.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구는 걸 거야.

뉴스가 나왔다. 그리스어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멍하니 화면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크리스토스가 화면에 나왔다. 그는 커다란 현대적인 건물로 들어가는 중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로비에서 기다리던 인파가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한 여자가 그에게 빠르게 다가왔다. 페트리나 로디아스였다. 그녀가 크리스토스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카메라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약혼한 사이였던 두 사람을 클로즈업했다. 페트리나 는 온통 눈물범벅이었지만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를 본 게 매우 기쁜 모양이었다. 크리스토스도 그녀와 적당히 거리를 두거나 밀쳐 내지 않았다. 베스는 텔레비전을 껐다. 카폰이 울렸다. 크리스토스란 건 알았지만, 도저히 그와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꽉 막힌 도로 한 가운데 서 있는 차에서 내려 행인들이 북적이는 거리를 걸었다. 생일날 그녀를 바람맞힌 크리스토스가 사람들 앞에서 페트리나와 재결합하는 장명을 보여 주다니.

베스는 수다스러운 그의 사촌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져서 많은 것들을 알아냈다. 그와 페트리나는 한때 아테네 사교계에서 최고의 커플이었다. 젊고 잘생긴 데다 사회적이나 경제적으로 쟁쟁한 두 가문의 부유한 상속자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파혼은 당연히 큰 뉴스거리였다. 대중은 스테파니데스의 상속자와 로디아스의 상속 녀가 찰떡궁합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결혼한 후에도 결국에는 그가 페트리나에게 돌아갈 거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고 베스는 마음이 불편했다.

그는 정말 페트리나 에게 돌아간 걸까? 3주 전에 크리스토스가 통화한 사람이 전 약혼녀인 페트리나 가 아니라 스피로스의 딸인 페트린 이라는 말이 진실일까? 지금 그녀가 아는 건 그의 설명을 믿도 싶어한다는 사실뿐이었다. 사랑에 눈이 멀면 남자의 정직과 성실을 의심하지 않는 법이었다. 정말 비참했다. 크리스토스와 페트리나 로디아스 사이의 공통점을 센다면 열 손가락이 모자랄 것이다. 페트리나는 그와 어울리는 짝이었다. 치명적인 흠이라면 크리스토스를 성실한 약혼자로 만들지 못했다는 거였다. 완벽했던 두 사람이 크리스토스가 자신의 아이를 져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박살이 난 거야.

하지만 베스는 결혼 전에 그의 희생을 원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밝혔다. 이제 그녀의 자존심은 더 이상 바보가 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날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연연하는 건 정말 바보 같은 짓이야. 페트리나 에게 돌아가고 싶어 하는 그를 붙들기 위해서는 그의 죄책감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페트리나 문제로 그와 대립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녀는 크리스토스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모든 걸 포기하고 런던으로 돌아가는 길밖에 없었다.

베스는 인파로 붐비는 광장 벤치에 앉아 자존심을 지켜야 한다고 자신을 다잡았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페트리나가 크리스토스를 갖는다는 생각을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게 첫째였다. 용서나 자존심과는 전혀 관계없는 복수심으로 그 두 사람을 증오하고 있다는 게 둘째였다. 세 번째는 그 증오를 한풀 벗겨 내면 여전히 그를 사랑하공 있으며, 그를 떠나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으리라는 거였다. 그때 배를 찌르는 듯한 미세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최근 며칠 동안 비슷한 통증을 두 번 정도 겪었다. 통증이라고 해봐야 금세 끝나거나 약간 불편한 정도였기 때문에 무시하고 있었다. 다음 정기 검진 때 의사와 상의하리라 생각하면서. 다음 순간 배에 예리한 통증이 엄습하자 그녀는 놀라서 숨을 내뱉었다. 그녀는 자기연민에서 빠져나왔다. 아기의 안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다른 생각들은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고통이 점점 더 심해졌다. 급기야는 웅크리고 말았다.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를 부축했다. 베스는 경호원들을 밀어 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병원으로…”

그녀는 힘겹게 그 말을 내뱉은 뒤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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