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들만의 에덴-6화 (6/10)

Chapter6.

수수한 짙은 갈색 치마 정장을 입으니 불편하고 어색했다.

베스는 스테파니데스의 집무실 밖에 있는 우아한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어색한 손놀림으로 현대적인 건물 사진이 실린 건축 관련 잡지를 집어 들었다. 페이지를 넘기자 크리스토스가 웃는 사진이 나왔다. 그녀는 잡지를 원해 있던 커피 탁자에 서둘러 내려놓았다.

“미첼 양이시죠?”

점잖은 중년 부인이 무선 전화기를 들고 다가왔다.

“스테파니데스 씨께서 당신에게 대신 사과를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매우 중요한 회의 중이십니다만 통화를 하시겠답니다.”

머쓱해진 베스는 그녀가 내민 전화기를 받아 들었다.

“당신이 찾아와서 매우 기쁘군. 점심을 같이 합시다.”

크리스토스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화기 속에서 남자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베스는 자신의 방문을 친목 모임으로 여겨지는 게 싫었다. 그래서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당신과 수다를 떨고 싶지만 지금은 곤란하오. 내 말을 잘 들어요. 당신이 탈 차를 준비하라고 말해 두었소. 돌리어스와 함께 가도록 해요. 나도 한 시간 안으로 일을 마치고 뒤따라가겠소.”

말을 할 새도 없이 그가 전화를 끊었다. 찾아간다고 미리 알리거나 약속을 했어야 하는데.

납치사건이 일어난 날, 자신과 언쟁을 벌인 경호원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돌리어스가 안내를 했다. 마치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는 듯 그의 우악스러운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없었다.

베스는 생전 처음 승객으로서 리무진을 탔다. 그렇지만 결코 편안하지 않았다. 온몸의 신경이 마구 튀어 오르는 콩처럼 요동을 쳤다. 어디로 데려가는 걸까? 호텔로? 다른 손님들이 있는 레스토랑에서 임신 사실을 알릴 수는 없었다. 크리스토스가 도착하면 개인적으로 할 얘기가 있다고 말해야겠어.

그녀의 예상은 부유층이 사는 주택 단지의 펜트하우스로 안내되는 순간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궁전 같은 이 아파트는 크리스토스가 런던에 올 때면 머무르는 곳인가 봐.

베스는 카펫이 깔린 화려한 응접실로 들어갔다. 이상하게도 사람이 사는 집 같지가 않았다. 사진이나 책 같은 개인적인 물건이나 집주인의 성격과 가족관계, 관심사를 알려줄 어떤 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다른 쪽 끝에서 식기가 짤그락거리는 소리와 사람들 말소리가 들리는 걸로 봐서 점심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베스…”

그녀는 소리 나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크리스토스가 눈을 반짝이며 맞은편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 역사적인 순간을 어떻게 축하하는 게 좋겠소?”

그는 넓은 어깨와 길고 탄탄한 허벅지에 특별히 잘 맞게 재단된, 가는 세로줄 무늬가 있는 짙은 회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매력적인 미소가 잘생긴 얼굴을 스쳤다.

순간 주책없이 심장이 마구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페트리나 로디아스를 떠올리자 수치스러운 기억들로 등이 뻣뻣해졌다.

“역사적인 순간이라뇨?”

베스는 그의 말을 되풀이했다. 그녀는 당면한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고 다짐하며 준비한 말을 하려고 애썼다.

“축하라고요?”

“이 아파트는 당신 거요. 우리가 섬에서 구출되자마자 당신을 위해서 구입했소.”

크리스토스가 다가왔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당신 취향에 맞는 새집을 구하도록 하지.”

그제야 베스는 자기가 찾아온 이유를 그가 잘못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날 위해 이 집을 샀다면 정말 비싼 실수를 했군요. 당신이 왜 내 말을 듣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겠소?”

크리스토스가 말했다.

“난 당신이 돌아오기를 바라오. 당신이야말로 왜 그러는 거요? 그런데 무슨 일이 있소? 얼굴이 수척해 보이는군.”

“네.”

베스는 짧게 대답했다.

“당신이 제대로 봤어요. 그리고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기도 하고요. 우린 지금 반대 방향을 향해 달리고 있어요. 내가 오늘 찾아온 이유는…”

“점심을 들면서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크리스토스가 부드러운 어조로 그녀의 말을 잘랐다.

“난 그럴 생각이 없어요. 난…”

베스는 서둘러 말했다.

“임신했어요.”

그는 석상이라도 된 듯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구릿빛으로 잘 태운 피부 밑에 있는 멋진 골격이 굳어 버린 게 느껴졌다. 침묵이 계속되자 베스의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확실하오?”

그가 단호한 어조로 물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선 이제 불꽃이 일지 않았다. 그의 눈빛이 점점 멍해졌다. 조심스러운 말투나 갑자기 튀어나오는 그리스 식 악센트에서 그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요. 어제 병원에 다녀왔어요.”

긴장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베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병원에서 제 예상이 맞다 고 하더군요.”

그의 턱이 단단하게 굳었다.

“그런데 그런 소식을 알릴 이상적인 장소로 내 집무실을 택했단 말이오?”

그녀의 입에서 맥이 풀린 듯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당신이 런던 어디에 사는지 모르잖아요. 잊었어요? 이것만 봐도 상황이 다 파악되죠? 난 아이를 가졌는데 애 아버지가 어디에 사는지도 모른다고요!”

“내 주소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오.”

“그랬겠죠. 당신은 콘크리트 벽돌만큼이나 무신경한 사람이니까.”

“뭘 좀 마시겠소?”

그는 더욱 정중하게 물었다. 그가 딴전을 피우자 베스는 화가 났다.

“아무거나 줘요.”

“물론 알코올음료는 안 되겠지.”

크리스토스가 거만하게 덧붙였다.

온몸에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며 분노가 터져 나왔다. 임신 소식을 들은 뒤 10초 동안 그는 분통이 터질 정도로 위압적으로 나왔다.

“많이도 아는군요. 나 같은 상황에 처한 여자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요.”

“상식 수준에서 몇 가지는 알고 있지.”

크리스토스가 그답지 않게 겸손하게 말했다.

“당신이 임신시킬 수도 있는 위험성보다는 임신한 사람의 건강 문제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기를 바랄 뿐이에요!”

베스가 비난하듯 쏘아 붙였다.

“그래서 날 비난하는 거군.”

그는 화가 난 듯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게 당신이 말하는 건설적인 태도라는 거요?”

그의 말은 황소에게 붉은 담요를 흔든 격이었다.

“아뇨. 건설적이 아니라 내 느낌을 표현한 것뿐이에요. 그리고 내 기분을 말하자면 너무나 한심스럽고 화가 나요!”

그녀는 계속 따졌다.

“모스에 있을 때 난 당신을 믿었어요. 당신은 정말 꿈같은 약속을 남발했죠. 만약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내 옆에 있어 주겠다고 맹세했잖아요.”

“자신의 불행했던 남자 경험 때문에 뭔가 오해를 한 것 같군.”

그는 단호한 어조로 말하면서 벽에 있는 벨을 눌렀다.

“무슨 뜻이죠?”

“당신이 남자에게 의지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는…”

“당신에게 의지할 수 있다는 말은 하지 말아요!”

베스가 경고했다. 그의 뻔뻔한 태도에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어떻게 감히!”

“내게 아무런 기회도 주지 않으면서 맘대로 날 판단하지 말아요.”

“로리든, 겨우 데이트 한 번 한 납치범이든, 내 앞에서 단 한마디도 꺼내지 말란 말이에요!”

베스가 날카롭게 말했다.

“다시 한 번 그런 말을 하면 소리를 지르겠어요.”

“이건 정말 아무런 소득도 없는 싸움이오.”

“남자에 대한 내 판단력 부족을 논하려거든, 제발 당신도 빼지 말아요.”

그녀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받아쳤다.

“당신이 정직하다면 당신 때문에 내가 얼마나 슬프고 큰 상처를 입었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 지금 임신을 한 건 내 미래를 완전히 박살내는 거라고요.”

크리스토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임신 소식은 마치 방관자처럼 무기력하게 서서 산만한 파도가 밀려와 모든 걸 파괴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과 같았다. 그는 자신을 전혀 믿지 못하는 그녀의 태도에 충격을 받았다.

그녀에게서 엄청난 소식을 전해들은 지 몇 초 만에 그는 이미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고, 그 결과는 어떨지 생각했다.

사업과 집안 양쪽에서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 로디어스 가와의 합병은 순식간에 박살이 날 것이다. 또한 엄청난 출혈과 추문이 따를 게 분명했다. 주가는 폭락하고 주주들은 불안에 떨 테고, 경영권을 차지하기 위한 전투가 시작될 것이다. 해고와 구조조정은 불가피했다. 얼마 동안은 하루가 열여덟 시간씩 일해야 할지도 몰랐다.

베스는 눈물이 고인 걸 들키기 싫어서 창밖을 멍하니 내다보았다. 점점 감정적으로 행동하고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기가 힘들어졌다.

사실 요즘처럼 자주 울고 소리를 질러댄 적도 없었다. 하지만 크리스토스에게 소리를 질러 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자신이 바가지를 긁어대는 여자라고 생각하도록 해서 좋을 게 뭐가 있단 말인가? 그녀는 어른이었고 그와 똑같은 위험부담을 져야 했다. 그리고 이제 뱃속에 잉태된 새 생명을 위해 동등한 책임을 받아 들여야 했다.

가벼운 노크소리가 둘 사이의 침묵을 깼다.

베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고용인으로 보이는 노인이 고개를 숙이고 크리스토스에게서 지시를 받았다.

그녀는 지루한 표정으로 그 남자가 술 장을 열고 크리스토스가 마실 브랜디와 아마 베스 것인 듯한 청량음료를 따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크리스토스가 누른 벨의 의미를 비로소 이해하고 눈을 깜박였다. 쟁반에 담긴 잔을 받아들며 그녀는 감사의 말을 웅얼거렸다.

“크리스토스”

그녀는 하인이 나가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바로 저기 있는 술 장에서 우리 둘이 마실 음료수를 따르게 하려고 벨을 눌러서 사람을 부른 거예요?”

그가 새까만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게 어쨌다는 거요?”

“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얼버무렸다.

그의 오만한 태도가 가슴 깊이 와 닿았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는 하인을 부리는 데 익숙했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위해 비천한 일을 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그가 부엌에 있으면 불편해 보인다거나 부엌에서 음식을 먹지 않으려 했던 것도 이해가 갔다. 그에게 냉장고에서 뭔가를 꺼내오라고 시키면 식기 세척기로 갔던 것도 이해가 되었다. 집안 일만 놓고 본다면 그는 석기 시대의 남자였다.

그는 베스가 자신의 셔츠를 다리는 모습을 보고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얼마나 힘이 드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건 옷을 다려 주어서 고맙다는 우회적인 표현이 아니었다. 그저 그 일이 너무나 새로워 보여서 궁금해 한 것뿐이었다.

음료수를 마시며 베스는 그를 관찰했다. 갸름하고 강인해 보이는 그의 얼굴이 경직돼 있었다. 그 얼굴이 슬퍼 보였다. 자신이 크리스토스를 슬프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잠시 마음이 둘로 나뉘어 지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남아 있던 자존심이 사라져 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여전히 그를 사랑했다. 지금 이 순간 내 눈길을 피하면서 그날 공항 주차장에서 날 보지 않았으면 하고 후회할 거야.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크리스토스가 침울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임신했다는 사실 때문에 내게 화를 내고 있군. 이해하오. 그렇지만 당신이 이 아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소.”

상처받은 듯한 그녀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의 말은 마치 5초 동안 세계평화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말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았다. 이 아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녀는 지금까지 뱃속의 아이를 온전히 자신에게 맡겨진 자그마한 인간으로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단지 아이에게 보다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는 환경과 아빠를 줄 수 없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낄 뿐이었다. 부모로서 형편없는 사람이 되지나 않을지 걱정하기도 했다. 그리고 엄청난 책임감을 짊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렇지만 이제까지 느낀 모든 감정이 창피해서 그에게 감히 말할 수가 없었다.

“힘든 일이라는 걸 이해하오.”

크리스토스가 어울리지 않게 조심스럽게 어휘를 선택하며 말했다.

“그렇지만 결정을 내려야 하오. 그러니 서로에게 솔직해집시다.”

베스는 긴장해서 외쳤다.

“난 낙태하지 않을 거예요.”

“지금 내가 그런 얘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 거요?”

그의 아름다운 입술이 동글게 휘었지만 시선은 여전히 평온했다.

“이 아이는 내 아이이기도 하오. 난 어떤 것보다 가족 간의 유대를 중요시하도록 교육받았소. 아들이든 딸이든, 이 아이는 내 아이요. 스테파니데스 가문의 다음 세대를 이을 아이란 말이오. 만약 당신이 낙태를 생각하고 있다면 마음을 바꾸도록 내가 먼저 설득했을 거요.”

“저도 당신이 그런 말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베스가 침울하게 말했다.

“그럼 당신의 선택은 뭐죠?”

“선택은 한가지요. 내기 이 아이와 어떤 관계도 원하지 않는다면, 당신과 아이가 편히 살 수 있도록 제정 적으로 최선을 다할 거요. 하지만 난 내 피와 살을 이어받은 아이를 팽개쳐 둔 채 살 수는 없소.”

크리스토스가 말했다.

“내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할아버지가 모범을 보여 주셨거든.”

“어떻게요?”

그녀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할아버지께서는 일선에서 물러나 한참 나이 어린 여자와 재혼하시기 직전이었소. 그런데 열한 살짜리 손자를 위해 모든 걸 포기하셨지. 내 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스테파니데스 제국에 계속 남으시기로 한 거요. 그 여자를 사랑했지만 새엄마로서의 자질이 없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에 그녀도 포기했고.”

눈물이 베스의 콧잔등을 타고 흘러 내렸다.

“난 당신이 희생하길 원하지 않아요. 크리스토스”

“난 우리 아이를 생각하는 거요.”

그가 딱딱하게 말했다.

“우린 어른이라 얼마든지 혼자서 살아갈 수 있지만 이 아이에겐 우리 두 사람뿐이오. 난 아이에게 안정적인 환경을 제공하고 싶소.”

“난 술을 마시거나 마약을 하지 않아요. 날 아이를 돌보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 취급하지 말아요.”

베스가 따졌다. 그는 조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날 공격하지 못해서 안달이 났군. 그런 적대적인 태도는 잠시 접어두고 더 중요한 문제를 생각하는  게 어떻겠소? 당신이 부모로서 부적격자라고 생각하지 않소. 어쨌든 당신도 우리 아이가 결혼으로 맺어진 부모의 축복을 받으며 태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진 못하겠지?”

베스는 혼란해서 눈살을 찌푸렸다. 더 이상 서 있기가 힘들어서 뒤에 있는 소파에 쓰러지듯 앉았다.

“다시 한 번 말해 봐요. 결혼이라고요?”

그는 짜증스러운 듯 두 팔을 벌리며 말을 이었다.

“그렇소. 우리는 결혼하는 거요.”

“오, 안 돼요. 그런 희생은 다른 사람에게나 하세요.”

베스는 그가 청혼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물론 저도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 할 거예요. 하지만 당신 같은 남자와는 결혼하지 않겠어요.”

“나 같은 남자라니, 그게 무슨 뜻이요?”

그가 물었다.

“당신은 약혼녀가 있으면서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가졌어요.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서 나한테 정부가 돼 달라고 했잖아요. 그것만 봐도 당신이 얼마나 형편없는 남편이 될지 불을 보듯 뻔해요.”

크리스토스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난 훌륭한 남편이자 아버지가 될 거요.”

베스가 턱을 치켜들었다.

“그렇지만 내 남편은 되지 못할 거예요.”

횃불에 기름이 퍼져나가듯 둘 사이에 긴장된 침묵이 감돌았다. 그때 하인이 들어와 점심이 준비됐다고 알렸다.

“난 배고프지 않아요.”

그녀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크리스토스가 그녀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아기는 생각이 다를걸. 그러니 좀 드는 게 좋을 거요.”

홀을 가로질러 들어간 방에는 윤이 나는 마호가니 탁자에 화려한 본차이나 식기들이 차려져 있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좋아서 입이 귀에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들은 충격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방금 전에 그는 아이에게 자신의 성을 물려주기 위해 파혼할 준비가 됐다고 선언했다. 그는 섬에서 한 약속대로 임신 기간 내내 그녀를 지켜 줄 생각인 것이다.

“페트리나와의 관계만 보고 날 판단하지 말아요.”

크리스토스가 차갑게 말했다.

“당신은 나와 그녀를 잇는 끈을 이해할 수 없을 거요. 또 그럴 필요도 없고. 어떤 일들은 사적인 내용이라 내놓고 말하기가 쉽지 않지.”

“그러니까 당신이 불성실하고, 그런 생활을 바꿀 생각도 없다는 걸 합리화하겠다는 거군요.”

베스가 그의 말을 끊었다. 섹시한 핑크빛 입술에 비꼬는 듯한 미소가 번졌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크리스토스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난 당신에게 청혼했소. 내가 무슨 짓을 했든 내 청혼을, 나를 모욕할 꼬투리로 삼는 건 받아들일 수 없소.”

그녀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버릇이 없다고 야단맞는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난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소. 원만한 결혼 생활을 위해 최선을 다할 거요.”

“그건 아이를 위해서겠죠.”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목이 따끔거렸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요.”

크리스토스가 말했다.

베스는 그가 베푸는 자비의 대상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최소한 그의 선의를 존중해 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앞에 놓인 신선한 과일 전채를 들기 시작했다.

“아이를 좋아해요?”

“아주 많이…. 형제들이 모두 어릴 때 죽어서 지금은 나 혼자뿐이지만 사촌들은 많소. 조카들도 많고.”

진심이 담긴 그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그는 아이들을 좋아해. 그렇다면 페트리나 로디아스에게서도 아이를 원하지 않을까? 그는 페트리나를 사랑할까? 사랑과 정절이 항상 함께 하는 아니었다. 모든 사람들이 육체적인 정절이 사랑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베스는 달랐다.

페트리나는 그가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갖는다는 걸 알고도 어떻게 견디는 걸까? 아니면 모르는 걸까? 페트리나는 크리스토스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여자와 공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다.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소? 걱정거리라도 있소?”

그는 기다란 구릿빛 손에 포도주 잔을 들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검은 머리칼과 생각에 빠진 구릿빛 얼굴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정말 그답다고 베스는 우울하게 생각했다. 모든 특권을 누리는 그리스의 백만장자에, 지성적이고 세련되기까지 한 남자. 그렇지만 그녀가 아는 크리스토스는 이제는 구식이 된 명예라는 가치를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잘 안 될 거예요.”

그녀가 거칠게 말했다.

“당신과 나 말이에요. 우리는 너무 달라요.”

“정말 자극적이잖소.”

“우린 항상 싸우기만 하잖아요.”

그의 검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육감적인 입술이 곡선을 그리며 살짝 벌어지자 눈처럼 하얀 치아가 보였다.

“침대에서 우리 차이를 잊을 수 있었잖소. 우리는 서로에 대해 열정을 가지고 있소. 그걸 잊지 말아요.”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담담하게 말했지만 고통이 서서히 파고들었다. 내가 그를 거절하는 게 얼마나 운 좋은 일인지 그는 모르는 걸까? 그는 날 미치게 했지만 난 여전히 그를 사랑해.

차라리 이기적으로 잇속을 차리는 게 편할지도 몰랐다. 그와 결혼하는 게 이기적인 행동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크리스코스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그 대상이 그와 공통점이 많은 페트니라일 것이라는 사실도.

물론 그는 금전적인 도움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아주 약간의 도움만으로도 그녀를 독립적으로 생활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면 그도 자신에게 걸 맞는 아름다운 상속 녀 와 결혼할 수 있을 것이다.

페트리나에게 무슨 죄가 있담? 죄책감이 느껴졌다. 로리와 젬마로 인해서 겪은 불행을 생각하면 다른 여자에게 자신이 똑같은 잘못을 저지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누군가가 아파야 한다면 그건 크리스토스야. 한 번도 보지도 못한 아이가 어딘가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면서 평생을 살아야 해. 하지만 어떤 방안도 완벽해 보이지 않았다.

“당신은 솔직하지 못하군.”

그의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자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마치 최를 지은 듯한 기분이었다.

“당신은 여동생의 남자 친구를 사랑하고 있소. 그 두 사람의 관계는 삐걱대고 있고. 혹시 그 사람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건 아니오?”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어떻게 날 그렇게 계산적이고 저속한 인간으로 생각할 수 있는 거지? 베스는 너무 분했다.

“그 사람이 당신과 뱃속의 내 아이까지 모두 원할지 의심스럽군.”

크리스토스의 얼굴에는 비웃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화가 나서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갑자기 현기증과 구토가 몰려 왔다. 몸이 기우뚱하더니 희미한 신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눈앞이 하얘지면서 그녀는 쓰러졌다.

“가만히 누워 있어요.”

베스가 정신을 차리자 그가 말했다.

이번에는 그녀도 말없이 그의 말을 따랐다. 여전히 속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욕지기를 참으려고 애쓰며 눈을 감았다.

크리스토스가 누군가와 낮은 소리로 다급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그가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머리가 텅 빈 듯한 몽롱한 느낌을 지우려고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베스를 부드럽게 안아 들었다. 갑자기 치미는 눈물을 참으려고 눈을 꼭 감았다. 그가 침대에 뉘이자 그녀는 일어나려고 했다.

“이제 괜찮아요.”

“괜찮지 않소. 당신이 쓰러진 건 내 잘못이오. 당신을 화나게 했으니까. 당신과 말싸움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임신을 하면 종종 머리가 어지러워요. 원래 그래요.”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너무 한심스러웠다.  크리스토스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어쨌든 의사가 도착할 때까지 좀 쉬도록 해요.”

“의사는 왜 불렀어요?”

그녀가 불평을 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그때 인상 좋은 중년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쾌활하게 기운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는 베스가 피곤에 지친 상태이며 건강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크리스토스는 걱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녀는 너무 지쳐서 베개에서 머리조차 들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뻔했다. 결국 잠시 눈을 붙이겠다고 말해 버렸다. 크리스토스는 침대 발치에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당신과 결혼하겠다는 내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소. 당신을 돌볼  권리와 내 아이에게 적합한 지위를 줄 수 있기를 바라오. 더 나은 해결책을 제시할 수는 없을 거요.”

“지금은 너무 졸려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요.”

그녀는 부드러운 녹색 눈동자로 숨 막히도록 잘생긴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얼굴을 붉히며 돌아누웠다.

“미안해요. 당신이 약속을 지킬 거란 걸 믿지 않아서요. 당신이 최선의 해결책을 찾았다는 걸 알아요. 그리고 당신의 의사를 존중해요. 그렇지만 요즘은 여자들이 단지 아이의 양육을 위해서 결혼하지는 않아요.”

“스테파니데스 가문의 여자들은 그렇소.”

그는 결코 뜻을 꺾지 않을 사람이었다. 왠지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힘없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몇 시간 동안 잠을 잤다. 다시 일어났을 때는 몸이 개운했다.

그때 크리스토스가 전화기를 들고 다가왔다.

“전화 받아요. 당신 부모님이 통화를 하셨으면 하시오.”

“우리 부모님이라고요?”

그녀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이미 나가고 난 뒤였다.

“베스”

코니 미첼은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네 아빠와 난 너랑 통화하고 싶어서 죽을 지경이었단다. 네가 쉬는 동안 크리스토스가 전화를 해서 자기소개를…”

“크리스토스가 뭘 어쨌다고요?”

그녀가 되물었다.

“그는 네가 너무 무리한다고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어. 그리고 우리를 만날 날을 학수고대하고 있단다.”

베스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정말 그랬단 말이에요?”

“정말 그 사람이 마음에 드는구나. 아주 미남인 데다가 매너도 좋은 것 같다. 재산도 어마어마하다면서? 우린 네가 돈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걸 안단다. 하지만 이왕이면 재산이 있는 사람이 더 좋다고 생각해.”

“크리스토스가 결혼 비용을 모두 부담하겠다고 하는구나.”

코니 미첼이 신나서 말했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난 네가 임신을 했다기에 좀 화가 났단다.”

“그가 말했어요?”

베스가 놀라서 소리쳤다.

“그렇지만 곧 결혼할 거잖니. 나 로리와 젬마처럼 결혼도 안 하고 살면 네가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단다.”

“맞아. 그러니까 너도 크리스토스에게 너무 싫은 소리를 하지  말거라.”

아버지가 아내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네 손에 반지를 끼워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났더구나.”

“어째서 그 사람과 내가 결혼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베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우리한테 초대하고 싶은 사람의 명단을 만들라고 했단다.”

코니가 신이 나서 통화 내용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 말이, 원하는 사람은 다 부르라는  나. 내게 짜증내지 말거라. 베스, 우린 지금 네 덕분에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란다. 벌써 친척들 반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렸다. 성대한 결혼식을 보면 로리도 느끼는 바가 있을 거야.”

“젬마가 로리와 화해했다. 정말 다행이지 않니?”

아버지가 다시 끼어들었다.

“젬마가 신부 들러리를 하면 될…”

“안 돼요. 그 애는!”

코니가 낙담하며 남편의 말허리를 잘랐다.

“젬마가 신부가 되고 싶어 얼마나 안단인데 베스의 들러리를 한단 말이에요? 차라리 소피를 시키는 게 나아요.”

부모님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베스는 나중에 전화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크리스토스가 양심의 가책도 없이 쳐놓은 덫에 걸린 느낌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지를 수 있을까? 그녀는 크리스토스가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키기 위해 아무것도 모르는 부모님을 이용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불쌍한 엄마는 만나는 사람마다 맏딸이 드디어 시집을 가게 됐다고 자랑을 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결혼하지 않으면 엄마는 크게 실망할 테고, 주위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될 게 분명했다.

그녀는 거실에서 그리스어로 통화하는 크리스토스를 찾아냈다. 빛나는 검은 눈동자가 고집스럽게 냉정을 유지하며 그녀를 향했다. 그는 전화를 끊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그녀가 따지듯 물었다.

“훗날 오늘을 돌이켜 보면서 내가 얼마나 당신을 생각했는지 고마워할 날이 있을 거요.”

그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거라곤 하고 싶은 일은 반드시 이루고 말겠다는 것뿐이죠? 자신이 늘 옳다고 생각하니까!”

“일 리가 있는 말이군.”

크리스토스는 그녀를 자극하지 않기로 단단히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이제 와서 어떻게 당신과 결혼하지 않겠다고 엄마 아빠에게 말하죠? 아기에 대해서도 다 아시는데!”

베스가 나무라듯 말했다.

“한바탕 난리가 나겠지.”

“어떻게 내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어요. 우리 가족에게 전화해서 결혼한다고 말하다니. 내 승낙도 없이. 당신은 이럴 권리가 없어요. 그리고 우리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가족을 이런 일에 끌어들일 권리도 없고요. 이건 협박이나 다름없어요.”

“그건 그렇고 몸은 좀 어떻소?”

그는 베스의 잔소리에 익숙해져서 말대꾸할 필요도 없다는 듯 딴청을 피웠다.

“세상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아요.”

그녀가 쏘아붙였다.

“당신은 지금 내가 전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를 몰아붙이고 있어요. 이건 우리 두 사람의 인생을 파멸시키는 일이에요. 페트리나에게 이렇게 해서는 안 돼요. 너무 잔인한…”

그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페트리나 걱정은 내게 맡겨요.”

“로리에게 받은 상처를 다른 여자가 똑같이 겪게 할 수는 없어요.”

베스가 침울하게 말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번쩍하고 빛나더니 얼굴이 굳었다.

“우린 무엇보다 아이를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오.”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쳐졌다. 크리스토스는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 쪽으로 당겼다.

베스는 자신을 믿을 수 없어서 그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자신을 더 이상 힘들게 하지 말아요.”

낮게 울리는 그윽한 목소리가 마음이 아플 정도로 친숙하게 느껴졌다.

“화낸다고 상황이 변하는 것도 아닌데 왜 화를 내는 거요? 난 당신과 하루 빨리 결혼하고 싶어서 당신 부모님께 알린 것뿐이오. 단지 우리의 첫 아이를 결혼 전에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결혼식을 놓고 싸워야 하는 거요?”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그녀의 손이 떨렸다. 그는 어떻게 하면 그녀의 감정을 자극한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우리의 첫 아이. 그는 이후에 태어날 다른 아기들도 축복 받을 진정한 결혼생활이 포함된 미래로 그녀를 초대하고 있었다. 베스는 목이 메어서 침을 삼키기가 힘들었다. 정말로 그와 결혼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당신은 덫에 빠진 기분이 들지 않나요?”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화나지 않아요?”

그는 길게 늘어뜨린 풍성한 붉은 머리카락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그녀의 얼굴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근심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베스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결코 그렇지 않소. 난 당신을 원하오. 그리고 우리의 아이도.”

그녀는 한 손을 그의 어깨에 올려놓고 손가락을 폈다. 부끄럽게도 육체적인 접촉을 하고 싶은 욕구가 밀려 왔다.

“당신은 바람피우면 안 돼요. 변명이나 실수는 통하지 않을 거예요. 내가 옆에서 매처럼 감시할 거니까.”

그녀가 경고했다.

“나와 결혼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다른 여자와 시시덕거리는 것도 안 돼요. 그렇게 살 수 있겠어요?”

“선택할 수 있소?”

크리스토스가 물었다.

그녀의 녹색 눈에 불꽃이 일었다.

“아뇨. 원 스트라이크면 영원한 아웃이에요.”

“그렇지만 당신은 나와 결혼할 거잖소.”

오늘밤이라도, 하마터면 그렇게 말할 뻔했다. 다행히 너무 흥분해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베스는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라는 듯 태연한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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