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들만의 에덴-4화 (4/10)

Chapter4.

베스가 눈을 뜨자 시계 바늘이 오후 1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자신이 이렇게 태평스레 잠을 잤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크리스토스에게 너무 미안했다. 창밖을 보니 그는 여전히 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이런 상황에서 잠이나 자다니!

그녀는 덥고 온몸이 끈적끈적해서 비키니를 벗고 샤워를 했다. 그리고는 옷장에서 찾은 알록달록한 홀터 넥 비치웨어로 갈아입었다. 거울에 감히 모습을 비춰 볼 수가 없었다. 브래지어를 하지 않으면 가슴이 얼마나 작을지, 또 짧은 치마를 입으면 젓가락 같은 다리가 얼마나 부실해 보일지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비키니를 빨아서 뒤쪽 테라스에 널고 서둘러 점심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가족들은 지금쯤 애타게 날 걱정하고 있겠지. 베스는 얼굴을 찡그렸다.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을 걱정해 봤자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 섬에 얼마나 더 있어야 할지 걱정스러웠다.

어제 크리스토스가 식료품과 연료가 이 집에 얼마나 있는지 말해 주었다. 그는 모든 걸 점검하고 고려하니까. 어쨌든 생필품은 충분했다. 신선한 요리 재료들은 언젠가 바닥이 나겠지만 냉동실에는 음식이 가득하고, 발전기를 돌릴 연료도 충분했다.

베스는 그에게 할아버지가 손자를 석방시키기 위해 몸값을 지불할 의사가 있을지 묻고 싶었다. 지금까지는 그 질문을 애써 참았다. 납치와 관련된 일이라면 그가 펄쩍 뒤는 데다 자신의 범죄 연루에 대한 의혹만 증폭시킬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크리스토스를 부르려고 집 밖으로 나왔다. 그렇지만 그의 모습은 아무 데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해변 가에 있는 옷가지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파도를 가르며 수영하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흑단 같은 젖은 머리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녀는 크리스토스가 해안 근처까지 헤엄친 뒤 걸어 나오는 모습을 가슴을 쓸어내리며 지켜보았다.

베스는 평생 처음 완전히 나체가 된 성인 남자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너무나 놀라서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그의 모습이 돌처럼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그는 정말 대단했다. 넓은 구릿빛 어깨와 곱슬곱슬한 검은 털 때문에 더욱 강조된, 잘 발달된 가슴, 그리고 호리호리한 허리와 날씬한 엉덩이, 털이 무성한 건장한 허벅지는 남자로서 최고라는 걸 보여 주었다. 그녀는 보다 개인적인 신체 부분은 청교도적인 순수함을 발휘해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려고 노력했다. 난 관음증 환자가 아니니까. 그가 옷을 입도록 5분 정도 여유를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 베스는 해변으로 나갔다. 그는 야외 샤워장에서 샤워를 하느라 여전히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누드에 대한 그의 자유로운 태도에 익숙해져야겠다고 마음먹고 베스는 그에게서 눈을 돌린 채 소리쳤다.

“점심 드세요!”

그녀는 팔짱을 끼고 나무 아래에 서서 기다렸다. 크리스토프가 치노 바지를 날씬한 엉덩이에 감고 셔츠를 어깨에 두른 채 맨 가슴에 맨발로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황홀할 정도로 멋진 눈동자가 그녀의 눈을 사로잡았다. 조각처럼 아름답고 표정이 풍부한 입술에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말 그대로 살인 미소였다.

그는 베스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얼굴이 홍당무가 됐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물론 베스도 그가 눈치 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그 모습에 약이 올랐지만 도저히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의 미소에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입술은 바싹 말라붙었다.

“당신은 너무 수줍음이 많군. 그 모습을 보니까 더 흥분되는데?”

크리스토스가 뻔뻔스럽게 말했다.

“배가 고플 거예요.”

그녀는 일상적인 대화를 시도했다 그렇게 하면 그에 대한 반응을 억제할 수 있을 거야.

“내 굶주림은 당신을 향한 거요.”

그의 검은 눈동자가 도발적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런… 말은 하지 말아요.”

베스는 그의 대담한 태도에 충격을 받아 우물거렸다.

크리스토스는 탁자에 놓인 얼음물을 마셨다.

“난 당신을 원하오. 진실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소.”

덫에 갇힌 동물처럼 베스는 그를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그녀는 엄청난 의지력을 발휘해서 뜨거운 그의 시선에서 눈길을 돌렸다. 바로 그때 팽팽하게 당겨진 그의 바지 앞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욕망이 어느 정도인지 확실히 보여주는 물적 증거를 보자 그녀는 큰 충격을 받았다. 다른 나자가 그런 모습이었다면 냉큼 쫓아 버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크리스토스는 달랐다. 자신이 미치도록 그에게 빠졌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베스는 그에게서 관심을 거뒀다.

“내가 당신을 원하는 모습이 보기 싫으면 차라리 이불 속에 들어가 있어요.”

그가 말했다.

“난 꿈에서조차 당신처럼 행동할 수 없을 거예요!”

베스는 화를 내며 쏘아 붙였다.

“당신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이오. 난 보통 운전기사의 꽁무니를 뒤쫓지 않는 건 원칙으로 삼고 있소.”

크리스토스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런데 당신이 갑자기 내 앞에 뛰어든 거요. 아름다운 여자와 마주치면 난 선수가 되거든.”

의지와 달리 베스는 그에게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에 대해 미치도록 알고 싶었다.

“이제까지 많은 여자들과 사귀었겠죠?”

크리스토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그는 베스의 사랑스러운 얼굴에 떠오른 긴장과 쑥스러워하는 표정을 보았다. 그녀가 왜 자신의 매력을 과소평가하는지 궁금했다.

“숨이 막힐 지경이오.”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뜻밖에 그녀의 약한 모습을 보자 마음이 아팠다.

그녀는 언제라도 성적인 즐거움을 기꺼이 제공하는 잘난 체하는 미인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항상 완벽한 손톱을 자랑하는 미인들은 크리스토스처럼 고집스럽고 시니컬했다. 그들은 스릴과 지위, 돈을 위해 자신의 몸을 팔았다. 그렇지만 그의 재산이나 권력도 베스에겐 아무런 인상도 주지 못했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에게 소리를 질러 대고 뺨을 때렸다. 다른 여자들은 꿈도 꾸지 못할 방식으로 그를 대한 것이다.

그래서 그녀에게 빠진 걸까? 새로운 경험이어서? 자신의 대답에 만족하며 크리스토스는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혔다. 그는 힘들이지 않고 자신만만하게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의 건장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와 자신감에 베스는 몸을 떨었다. <숨이 막힐 지경이오.> 어떤 남자도 그렇게 말한 적이 없었다. 그 말을 듣자 자신이 매우 소중한 존재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 물러서야 해. 난 지금 큰 도박에 뛰어들려고 하고 있어. 엄마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해댄 말을 빌리자면 제 손으로 무덤을 파는 중이었다. 다음 순간 그가 꼭 안아 주었다. 그러자 자신의 무덤을 파는 일이라 해도 그의 품에 오래오래 안겨 있고 싶었다.

“키스해도 돼요.”

베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의 크리스토스라면 이런 기회를 덥석 잡았겠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처녀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항상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이용했다.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이익을 낚아채는 게 그의 사업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주저하는 걸까? 그녀의 첫 경험을 난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데. 그녀에게 상처를 입힐지도 모르는, 술 취한 형편없는 녀석보다 훨씬 능숙하게.

“난 키스로 끝내지 않을 거요.”

크리스토스는 그녀에 대한 갈증으로 헐떡이며 나직이 말했다.

그 말에 기분 좋은 전율이 그녀의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그러더니 아랫배를 미끄러져 내려가 열기를 발산하는 바로 그곳에 둥지를 틀었다. 베스는 그의 강인한 근육질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구릿빛으로 잘 태운 그의 몸에서 풍기는 체취가 코를 간질였다. 기대감으로 머리가 아찔할 지경이었다.

“온몸이 떨려요.”

그녀는 의식적으로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왜 이러는 거죠?”

크리스토스는 그녀를 안아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침실 커튼이 한낮의 더위를 어느 정도 막아주었다. 그는 베스를 침대에 뉘었다. 그녀가 누운 곳으로 밝은 햇살이 들어와 붉은 머리카락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음…”

기분이 이상했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에 놀라서 목청을 가다듬었다.

“우리가 이런 일을 벌이면 당신 주변에 상처받을 사람이 있나요?”

그가 미혼인지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그녀가 물었다.

“없소.”

크리스토스가 그녀의 손을 잡고 위로 들어 올렸다. 그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아름다운 그녀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그리고는 거친 욕망에 사로잡힌 입술을 그녀의 입술 위에 포갰다. 그의 혀가 다소곳하게 벌어진 그녀의 입 안으로 마구 진격해 들어갔다.

베스는 그를 자기 안에 가두려는 듯 그의 목에 두 팔을 감고 꼭 안았다. 그가 관능적인 섬세함을 앞세워 보다 섹시한 침략을 감행하자 그녀는 온몸을 떨었다.

베스는 그와 몸이 잠시 떨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오늘 오후에 당신에게 수영을 가르쳐 줄 생각이었소.”

크리스토스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좀 더 재미있는 걸 가르져 주지.”

그녀는 자신이 제대로 생각하지도 않고 이렇게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 뻔뻔한 말괄량이가 내 속에 숨어서 대 활약을 펼칠 날만 기다린 걸까?

“난 리얼 일에 소질이 없어요.”

“난 아니오.”

크리스토스가 타고난 자신감을 갖고 말했다. 그리고는 베스 뒤로 돌아가 목에 걸려 있는 홀터 넥의 매듭을 풀었다. 그녀는 숨을 들이마시고 눈을 감아 버렸다. 난 너무 말랐어. 동생은 열세 살 때 베스가 성인이 됐을 때보다 가슴이 더 풍만했다. 젬마는 지금도 여전히 몸에 꼭 끼고 목이 많이 파인 탑을 입고 풍만한 곡선을 뽐내는 걸 좋아했다. 그는 내 몸에 실망할 게 분명해.

“눈을 떠 봐요.”

크리스토스가 재촉하듯 말했다.

“내가 당신을 맘껏 감상하는 걸 보고 놀라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소.”

그녀의 속눈썹 아래로 녹색 눈이 휘둥그레졌다.

크리스토스는 거뭇한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띤 채 침대 한쪽에 앉았다. 그리고는 허벅지로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는 긴 머리카락이 출렁이는 허리까지 그녀의 옷을 조금씩 잡아 당겼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가슴이 드러나자 그녀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는 베스가 몸을 가리지 못하도록 막고는 팔에 안은 채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섬세한 핑크빛 젖꼭지와 아담한 가슴을 드러냈다.

“아름답소.”

그는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노골적인 그의 반응과 거칠게 갈라지는 풍부하고 낮은 목소리를 들으니 진심인 것 같았다.

그는 한 손으로 가슴을 감싸 쥐고 달콤하고 신선한 봉우리가 부풀어 오르고 딱딱해질 때까지 희롱했다. 베스는 그의 허벅지 위에서 몸을 비틀었다. 아랫배에서 전해지는 따뜻하고 고통스러운 느낌이 그녀를 가만두지 않았다. 그는 부드러운 젖꼭지를 입술로 마음껏 희롱했다. 그녀는 신음 소리를 내뱉으며 숱이 많은 그의 검은 머리칼 속으로 다급하게 손을 밀어 넣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의 입술을 찾았다.

“크리스토스?”

“좀 더 편안하게 합시다.”

그는 베스의 등에 베개를 받쳤다. 그리고는 드레스를 순식간에 벗겨 옆으로 던졌다. 남은 것이라곤 그녀가 서랍장에서 찾은, 아찔할 정도로 야한 핑크 빛 끈 팬티뿐이었다. 서랍에는 이것 말고도 아슬아슬한 팬티들이 더 있었다.  이제 다 벗은 것과 다름없다는 생각을 하자 끔찍할 정도로 당황스러웠다.

“내가 아직 아무 짓도 하지 않았소.”

크리스토스는 그녀 아래에서 시트를 잡아 빼 침대 발치에 놓인 의자로 던졌다.

베스는 자신이 지금 하려는 일에 대해 잠시라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크리스토스에게 자신의 처녀성을 바치겠다는 결심이 폭풍처럼 순식간에 그녀를 사로잡은 것이다. 언제나 무슨 일이든 결정을 내리기 전에 몇 번씩 생각을 하던 그녀였다.

맙소사, 스물다섯 살이 돼서도 여전히 동생의 남자를 좋아하다니. 베스는 착잡했다. 난 왜 열정적인 정사를 벌이면 안되는 거지? 크리스토스는 단 한 번의 미소로 그녀의 혼을 빼놓고, 단 한 번의 키스로 다리가 후들거리게 만들었다. 이런 육체적인 매력에 사로잡힌 그녀가 미숙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이런 육체적인 이끌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는 바지 지퍼를 내리고 미간을 찌푸린 채 가만히 서 있었다.

“혹시 임신이 될 수도 있을 텐데, 상관없소?”

그녀가 얼어붙었다. 크리스토스가 신음을 내뱉었다.

“당신이… 그걸 잊었다는 걸 알고 있소. 나도 그랬고. 그렇게 중요한 문제를 어떻게 잊을 수 있었는지 나 자신을 믿을 수가 없군. 그렇지만 당신 앞에만 서면 무슨 이유인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소.”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무릎을 가슴에 모으고 앉았다.

“임신을 하느니 차라리 죽을래요.”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게 비관적일 필요는 없소. 내가 조심하겠소. 밖에다 사정을 하면 괜찮을 거요.”

베스는 그의 노골적인 표현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더 이상 그의 반짝이는 눈을 바라볼 수 없을 것 같았다.

“너무 위험해요.”

“난 위험을 즐기는 사람이오.”

“난 그렇지 않아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는 걸요.”

“당신이 임신한다면 내가 끝까지 보살펴 주겠소.”

크리스토스가 말했다.

“당신은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소. 그런 일이 일어날 리는 없지만 만약 그렇다면 내가 모든 책임을 지고 당신을 지켜주겠소.”

베스는 그의 잘생긴 얼굴을 쳐다보았다. 충분히 생각하고 나서 하는 말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의 말에 감동을 받았다.

“날 믿어요.”

크리스토스가 바지를 마저 벗으며 말했다.

비싼 박스팬티가 그녀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유연한 움직임으로 그것마저 벗어 버렸다. 타고난 아름다운 육체가 여지없이 드러났다.

베스는 자신도 모르게 단단하게 굳은 그의 남성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다시 한 번 숙고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에요.”

그의 무게에 침대 매트리스가 묵직하게 눌리는 걸 느끼며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다만…”

“너무 긴장되고 창피해서 도저히 환상적인 몸매를 드러낼 수 없다는 말이겠지.”

크리스토스는 그녀의 팔을 벌리고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를 뒤로 넘겨 가슴을 완전히 드러냈다.

“난 당신에게 어울리는 짝이오. 난 완전히 녹아내릴 것 같소.”

“나도 알아요. 하지만…”

베스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당신은 가만히 누워서 내가 보내는 유혹을 즐기기만 하면 되오.”

크리스토스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는 그녀의 등을 살짝 들어 올려 붉은 머리카락이 베개 위에 부채처럼 활짝 펴지게 했다.

“지난 금요일에 당신을 다시 만나기 전부터 당신이 나오는 에로틱한 꿈을 몇 번이나 꾸었소. 이제 이 침대위에서 그 꿈을 실현할 거요.”

“난 당신의 환상에 나오는 여자가 아니에요.”

그녀가 속삭였다.

“그저 평범한 여자일 뿐이에요.”

“어떤 평범한 여자도 날 이렇게 성적 에너지로 충만하게 만든 적이 없소. 난 쉽게 유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오.”

크리스토스가 말했다 그는 베스의 두 손을 쥐고 이미 붉게 부풀어 오른 그녀의 달콤한 입술을 격렬하게 탐닉했다.

마치 온몸의 세포가 다시 태어나는 것 같았다. 그의 이가 그녀의 목을 살짝 스치자 맥박이 세차게 펄떡거리며 강렬한 흥분이 그녀를 휘감았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부풀어 오른 그녀의 유두를 고문하듯 감질나게 스쳤다. 불과 몇 분 전보다 훨씬 민감해진 그녀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정체 모를 욕망이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그녀는 오로지 더 원하게 만들고 자제력을 앗아가는, 고통이면서도 동시에 기쁨인 예리한 감각에 대해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최고의 키스나 애무도 그녀 안에서 타오르는 열기를 만족시켜 주지는 못했다.

“이런 기분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그녀는 숨을 몰아쉬었다. 저항할 수 없는 욕망에 들뜨기도 하고 겁이 나기도 했다.

“조금씩 천천히 완벽한 기쁨으로 다가가는 거요.”

그는 배 아래에 나 있는 고슬고슬한 보드라운 숲에, 손을 넣고 가볍게 애무했다. 그곳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럽고 뜨거우며 이미 촉촉해져 있었다. 그녀가 몸을 비틀었다. 그는 가만히 그녀를 안아 주었다. 그의 입술이 흥분에 휩싸인 그녀를 달래듯 천천히 내려갔다.

“긴장을 풀어요.”

기대감으로 온몸의 뼈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녀의 손이 잘 발달된 그의 어깨 근육과 부드러운 등을 쓰다듬었다. 남성적인 그의 육제가 그녀를 달뜨게 만들었다. 입술과 혀에 닿는 그의 피부가 그녀를 매혹시켰다. 그녀는 새로운 발견으로 가득한 세계에 와 있었다.

크리스토스는 촉촉하게 젖은 뜨거운 계곡을 계속 탐색했다. 그녀는 몸을 비틀었다. 점점 달아오르는 욕망의 불꽃이 그녀를 집어삼킬 기세로 타올랐다.

그는 베스의 등을 뒤로 젖히고 몸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그녀의 두 다리 사이로 들어갈 준비를 했다.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음 순간 크리스토스가 그녀를 완전히 채웠다. 그가 입구를 막고 있는 장애물을 밀고 들어가자 타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놀라움에 휩싸인 베스를 그가 점점 더 파고들었다. 크리스토스는 불타는 듯한 눈동자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두려워하고 있군.”

그는 베스의 엉덩이 아래에 손을 밀어 넣어 그녀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남성적인 만족감에 사로잡혀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더욱 깊게 그녀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녀는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느리고 관능적이며 리드미컬한 그의 움직임에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크리스토스가 그녀 위로 다시 올라오자 생생한 흥분이 그녀를 에워쌌다. 그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졌다. 그녀는 점점 익숙해지는 기쁨에 몸을 맡긴 채,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제심이라는 게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쾌락의 절정에 도달하기 바로 직전에 그는 아무런 경고도 없이 갑자기 몸을 뒤로 뺐다.

“크리스토스?”

베스는 놀라서 그를 부렀다. 그리고는 그가 몸을 완전히 빼기도 전에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는 기꺼이 그녀의 몸으로 파고들었다. 격렬한 절정이 후려치듯 지나갔다. 크리스토스는 그리스어로 무슨 말인가 내뱉었다. 산산이 부서진 쾌락의 파도가 두 사람을 강타했다. 그의 거대한 몸이 그녀 위에서 전율했다. 그녀는 더욱 간절하게 그에게 매달렸다.

잠시 후 베스는 그에게 꼭 안긴 채 누워 있었다. 그녀는 두 사람 사이에 새로운 친밀감이 생겼다는 걸 깨달았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만족스러운 느낌이었다.

“마지막 순간은 너무 위험했소.”

크리스토스는 헐떡이며 말했다. 그리고는 감상하듯 그녀를 바라보며 등을 어루만졌다. 그는 헝클어진 머리를 들어 올리고 눈썹 위에 키스했다.

“오…”

베스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그리고 괘락에 눈이 멀어 경솔한 행동을 한 자신을 반성했다.

“제 실수예요.”

“그렇지만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정말 최고였소.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랄뿐이오.”

그가 조르듯 말했다. 그리고는 바로 누워서 자신의 몸 위로 그녀를 들어 올렸다.

베스는 새로운 단계로 들어선 둘만의 게임에 흠뻑 빠져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다른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미칠 정도로 행복했다.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녀의 반짝이는 눈빛이 부드러워지는 걸 보자 크리스토스는 불안해졌다.

“경고하지만.”

그가 가볍게 말했다.

“날 사랑하지 말아요. 난, 사랑 같은 건 하지 않으니까.”

마음속에 오싹한 한기가 퍼지며 좋은 기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는 혼란과 상처를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아무렇지도 않게 웃음을 터뜨리는 건 더욱 힘들었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요.”

그의 경고에 모욕을 느끼며 그녀가 말했다.

“난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그녀의 말에 크리스토스는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는 두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안아 옆에 내려놓았다.

“그런데 왜 나와 관계를 가진 거요?”

대놓고 화를 내는 그의 모습을 보고 베스는 놀라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막상 일어선 후에야 자신이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걸칠 걸 찾으려면 바닥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걸 생각하자 화가 쉽사리 가라앉을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침대 아래에서 방금 전에 벗어 던진 사롱을 찾아서 몸을 가렸다.

“난 대답을 기다리고 있소.”

그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왜 그걸 알려고 하는지 알 수가 없군요.”

베스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당신이야말로 자신을 사랑하지 말라고 말한 사람 아닌가요?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그 사람이 누구요?”

크리스토스는 수치심도 없는 그녀에게 경악했다. 분노가 마구 끓어올랐다. 예민하고 순진한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당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에요.”

그녀는 사롱을 가슴 위에서 묶으려고 했지만 손이 말이 듣지 않았다. 화가 났다. 자신도 그의 말에 왜 그렇게 대꾸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와 잠자리를 같이 한 순간부터 당신은 내거요.”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람이 누구요? 남자친구요?”

망설이던 마음이 그의 질문으로 되살아난 쓰라린 고통의 물결에 굴복하고 말았다.

“한때 그랬어요.”

그녀는 힘들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제 동생과 같이 살아요. 두 사람 사이에 아이도 있어요.”

그 말을 듣자 그의 화가 갑자기 수그러들었다. 그 남자는 그녀에게 금지된 사람이고 경쟁상대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과 헤어진 지 얼마나 됐소?”

“3년이요.”

“그런데 당신은 아직도 그를 잊지 못하는 거요?”

크리스토스는 조롱하듯 말했다.

“당신은 정말 끔찍하고 냉소적인 악마에요!”

베스가 소리쳤다. 뺨이 붉게 물들었다.

구리 빛 피부와 강렬한 근육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크리스토스가 쌓아 올린 베개에 몸을 기댔다.

“그 녀석이 당신 여동생과 살림을 차린 지 3년이 됐는데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니, 너무 신파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소?”

베스는 머리가 띵할 정도로 화가 났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나 하는 거예요? 로리는 가장 좋은 친구이고 내 영혼의 동반자…”

“그렇지만 한 번도 관계를 가진 적이 없잖소.”

그는 고귀한 감정에 대해 아무런 경의도 표하지 않은 채 불쑥 끼어들었다.

“어쩌면 침대에서 시동이 걸리지 않는 인간이었나 보지.”

“당신은 정말 역겨운 인간이에요. 모든 걸 성적인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밖에 모르는 사람이군요!”

베스가 받아쳤다.

“당신의 첫 남자이기도 하오.”

“당신에게 성적으로 끌린 건 사실이에요. 그래서 어떻다는 거예요?”

베스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당신은 정말 무식하고 오만한…”

“지금 내가 오만하다고 말한 거요?”

트리스토스가 소리쳤다.

베스는 날씬한 허리에 손을 걸치고 그가 이제까지 여자들에게서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빈정거리는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내가 당신 같은 남자를 사랑할 만큼 멍청하다고 생각하잖아요. 그 정도면 오만한 게 아닌가요?”

크리스토스의 검은 눈이 번득였다. 그는 먹이 감을 덮치기 직전의 흑표범처럼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왜 날 사랑하지 않겠다는 거요?”

“개인적인 감정은 없어요. 단지 당신은 로리가 아니잖아요.”

베스는 차갑게 말했다. 머릿속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욕실로 서둘러 들어갔다. 찬물이라도 뒤집어 써야 할 것 같았다.

화를 삭이는 중에도 그와의 언쟁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크리스토스가 노크를 했다. 그녀가 노크소리를 무시하자 그가 문을 열었다. 그녀의 뺨에는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화가 가라앉았다. 그는 베스를 품에 안았다.

“이건 미친 짓이오. 도대체 우리가 왜 싸웠는지 모르겠군.”

“당신의 신념 때문이에요. 당신은 자신이 너무 사랑스럽고 남자 경험이 없는 여자들에게 치명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녀는 우는 모습을 들킨 게 억울해서 비꼬았다.

“이곳은 너무 답답하오. 기분을 전환할 일을 찾아야겠군.”

크리스토스는 그녀의 말을 못 들은 척 딴소리를 했다.

그녀도 고집을 꺾고 그의 따뜻한 품속에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난 왜 화를 내고 그토록 흥분했을까? 그녀는 왜 스스로를 폭발직전까지 화를 내도록 내버려뒀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그에게 무례하게 구는지도. 분명한 건 너무 혼란스러워서 감정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 휴식이 필요했다.

베스는 지금까지 자신뿐 아니라 크리스토스도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지금 두 사람은 자신들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 최대한 적응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는 다만 징징거리지 않을 뿐이었다.

그는 베스를 안고 침대로 돌아갔다.

“당신에겐 세 가지 선택이 있소.”

그리고는 카리스마 넘치는 검은색 눈동자로 그녀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며 속삭였다.

“첫째… 당신은 잠시 혼자서 쉰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콧잔등을 찡그렸다.

“둘째… 내가 당신 생애 최초의 수영 레슨을 해준다.”

베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소리를 내자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셋째… 내가 샴페인을 가지고 다시 침대로 돌아온다. 물론 그 샴페인은 신맛이 많이 나겠지만.”

“샴페인으로 할래요.”

그녀가 대답했다. 그를 향해 팔을 벌리는 대답함에 스스로 놀라서 뺨이 붉게 물들었다. 그를 원하는 것뿐이야.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니지. 그녀는 자신을 타일렀다.

닷새 후에 베스는 모래 위에 주저앉으며 손가락으로 허공에 V자를 그렸다.

“나도 수영할 수 있어!”

“하지만 아직 혼자서 물에 들어간 적은 없잖소.”

크리스토스가 상기시켰다.

그녀는 웃음을 터뜨리며 초록빛 눈에 장난기를 머금고 그에게 기댔다.

“내게 명령하는 데 질릴 때도 되지 않았어요?”

“아니, 한참 재미있어졌는데…”

크리스토스가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돌돌 감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초대가 항상 환영받는다는 걸 잘 아는 남자답게 자신만만하게 그녀를 자신의 몸 위로 끌어당겼다. 그는 베스의 입술을 탐하고 나서 그녀가 온몸에 전율을 느끼며 나긋나긋해질 때까지 관능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아름다운 흑 황색 눈은 즐거운 기대감으로 활활 타올랐다. 그는 일어나 앉아서 그녀를 안으며 말했다.

“당신을 또 갖고 싶소.”

크리스토스는 그녀를 안고 시원한 침실로 갔다. 그녀에게 거의 손도 대지 않았지만 그녀의 몸은 이미 그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너무나 그를 원했다. 그가 비키니 브래지어를 벗겼다. 방안에 그의 거친 신음소리가 퍼졌다. 그가 단단해진 분홍색 유두를 건드리자, 베스는 격려하듯 부드러운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기댔다.

“당신은 아주 조용해졌군.”

그는 격정에 사로잡혀 누워 있는 베스를 침대 쪽으로 밀어붙이며 비난하듯 말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루 중 그를 생각하지 않은 시간은 단 1분도 없었다. 처음에 느낀 열정과 매력이 위험한 집착으로 변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녀는 거만한 성격 아래에 감춰진 그의 모습에 열광했다. 그의 용기와 타협하지 않는 성격, 그리고 지성에…. 그녀는 자신이 그의 멋진 미소를 애타게 바라며 누워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크리스토스 스테파니데스를 미치도록 사랑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입을 다물고 있는 이 순간에도 당신은 날 흥분시키는군.”

그는 베스의 비키니 팬티를 벗기면서 말했다.

“당신이 기쁨에 겨워 비명을 질러대는 건 더 좋지만 말이오.”

그는 이미 촉촉해진 꽃잎들을 헤쳐서 가장 민감한 부분을 찾아냈다. 그녀는 열기에 휩싸여 미치도록 그를 원했다. 그렇지만 크리스토스는 달콤한 고문을 계속해서 여러 번 절정에 도달하게 하면서도 정작 그녀가 원하는 건 들어주지 않았다.

그녀는 화를 내며 몸부림을 치고 불만에 차서 끙끙거렸다. 그녀가 극도의 흥분 상태에 도달했다는 사실에 만족한 후에야 그는 베스의 부드러운 중심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그리고 노련한 몸놀림으로 그녀를 절정으로 몰아넣었다.

잠시 후 크리스토스는 기진맥진한 그녀를 끌어당겨서 만족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녀와의 섹스는 언제나 믿을 수 없을 만큼 대단했지만 차마 입 밖에 내어 말하지는 못했다. 고문을 받는다 해도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베스의 손바닥에 키스하고는 감싸 안았다. 어린 시절 이후 처음으로 망설임 없이 누군가를 안을 수 있었다. 그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하면 그녀가 행복해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최고의 섹스를 한없이 즐기는 대신 상냥한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다. 이 섬을 떠나게 되면 그녀를 평생 정부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머리에 타월을 감고 욕실에서 나오자 또다시 크리스토스가 보이지 않았다. 곶에 피워 놓은 모닥불을 점검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아침부터 밤까지 믿을 수 없을 만큼 정력적으로 움직였다. 그런 그에게 보조를 맞추려고 그녀는 무진 애를 써야 했다.

낡은 보트 창고에는 온갖 쓰레기가 가득했다. 크리스토스는 모닥불을 계속 피우기 위해 창고의 잡동사니들을 땔감으로 썼다. 하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낚시 배 하나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이 섬은 배들이 다니는 길에서 멀리 떨어진 게 분명했다. 또한 그들은 해안가에 돌로 거대한 SOS 글씨도 만들어 놓았다. 그렇지만 메시지를 읽을 수 있을 만큼 낮게 날 수 있는 소형 항공기도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날씨가 몹시 더웠지만 베스는 자신의 몫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보트 창고로 들어가 먼지가 쌓인 낡은 종이 상자들을 집어 들었다. 상자에 담긴 잡지가 보였다. 그녀는 불쏘시개로 쓰려고 그걸 카트에 집어넣었다.

힘들게 카트를 끌고 곶으로 올라갔지만 크리스토스는 보이지 않았다. 불이 꺼져 가고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상자를 불에 던져 넣었다. 그렇게 하면 기름을 뿌리는 것보다 더 오래 타니까.

그녀가 모래 언덕 아래로 내려오자 갑자기 폭발음과 함께 쉿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발걸음을 멈췄다. 엄청난 불꽃이 청명한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터지고 있었다. 그 모습에 그녀는 할 말을 잃었다.

“불꽃놀이 화약을 찾았다고 왜 말하지 않은 거요? 아니, 그걸 불에 왜 집어넣었소?”

크리스토스가 30피트 정도 떨어진 곳에서 소리를 질렀다. 거뭇하고 잘생긴 얼굴이 믿을 수 없을 만큼 굳어 있었다. 또 다른 불꽃이 로켓처럼 곶 위로 날아올라 가더니 곧 이어 작은 불꽃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베스는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온몸이 굳은 건 크리스토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공포에 휩싸인 채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화려한 불꽃을 바라보았다. 모두 여섯 번의 폭발이 있었고 그 중 한 번만 불발탄으로 끝났다.

“거기에 화약이 있는 줄 몰랐어요. 보트 창고에서 상자를 꺼내 왔는데, 잡지 상자인 줄 알았어요. 그것밖에 보이지 않았거든요.”

그녀는 깜짝 놀라 말했다. 그는 나무라듯 화난 표정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내용물도 확인하지 않고 불에 넣었단 말이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나 미안했다.

“저 화약을 밤에 유용하게 쓸 수 있었을 텐데. 당신의 부주의 덕분에 제대로 써보지도 못했잖소!”

크리스토스가 매몰차게 말했다.

“당신이 보트 창고를 다 뒤진 줄 알았어요!”

베스는 그를 지나치며 항변했다. 이 섬을 떠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를 자기 손으로 날려 버린 데 대해 죄책감이 밀려왔다.

크리스토스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보자 그녀의 내부에 고통의 매듭 같은 게 생겼다. 보호막을 완전히 잃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정작 잃은 건 독립심과 마음의 평화였다. 그녀는 이제 그의 눈을 통해 모든 일을 판단했다. 크리스토스는 그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그와 함께 지내며 베스는 자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제껏 진심으로 믿고 있었던 로리에 대한 사랑도 실은 호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감정적 부대낌없이 과거를 털어 버리게 되었다.

오후 늦게 그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베스의 얼음장 같은 반응을 무시한 채 꼭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똑같이 다혈질이었다. 이런 일은 몇 번이나 있었다. 말다툼 후에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물론 그가 화해를 원하는 것만큼이나 빨리 그녀도 화를 누그러뜨렸다.

두 사람은 곧바로 화해했지만, 짧은 냉전에도 그녀는 미칠 지경이 되곤 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암묵적인 화해의 조건에 대해 말을 꺼낼 기회조차 없었다. 그는 강렬하고 다급하게 그녀에게 키스했다.

놀란 그녀가 숨을 내쉴 틈도 없이 크리스토스가 눈을 반짝이며 그녀를 창 쪽으로 돌려 세웠다. 창밖으로 파란 색과 흰색의 고기잡이배가 부두에 정박해 있는 모습이 보였다.

“우린 이제 구조됐소.”

실수로 터뜨린 불꽃이 젊은 어부의 관심을 끈 거였다. 그때부터 모든 일이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10분도 지나지 않아서 그녀는 여전히 알록달록한 비키니와 여름용 드레스를 입은 채 보트에 탔다. 구겨진 제복은 가방에 쑤셔 넣었다. 베스는 그 섬이 자줏빛 아지랑이처럼 아스라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 바라보았다. 그동안 크리스토스는 조타실에서 무전기로 교신을 했다.

“당신 가족에게 당신이 무사하다고 알렸소.”

베스가 주변을 서성이자 그가 말해주었다.

“내 할아버지가 모든 일을 알아서 처리하실 거요.”

비로소 자유를 찾았지만 뭔가가 빠진 것 같았다. 왠지 공허하고 두려웠다. 그렇다 해도 그에게 매달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다시 육지가 보이는 곳까지 오자 베스는 그들이 지낸 섬 이름을 알아냈는지 물었다.

“그게 왜 궁금하지?”

그는 놀라서 되물었지만 어부에게 물어봐 주었다.

“모스라고 부른다는군. 우린 사이클라데스에 있었소.”

그들은 시프노스 섬에 도착했다. 봄이 한창인 그 섬도 모스만큼 신록이 우거진 곳이었다. 크리스토스가 이곳저곳에 전화를 거는 동안 그녀는 또다시 홀로 남겨졌다. 그와 동행할 수 있는지 묻고 싶지는 않았다.

30분 후에 크리스토스가 침통한 얼굴로 나타났다.

“납치범들이 몸값을 요구했나요? 그들에 관한 무슨 단서라도 찾았대요?”

그녀는 너무 궁금해서 질문을 퍼부었다. 크리스토스가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 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이미 냉정하고 소원한 사이처럼 굴었다. 섬에서 함께한 시간은 다른 행성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었다고 그녀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그의 갸름한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소. 우리를 본토에 데려갈 교통편이 곧 도착할 거요.”

“전 여권이 없어요. 집에 어떻게 돌아가죠?”

“당신네 대사관에 모든 걸 알려 두었소. 그들이 알아서 처리할 거요.”

“우린 언제 경찰을 만나죠?”

크리스토스는 어깨를 들썩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방금 전에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소식이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아직도 거기서 헤어 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육촌형 스피로스가 납치의 주범이라니. 치가 떨렸다. 가족이 탐욕 때문에 그렇게 타락할 수 있다는 사실에 모욕을 느꼈다. 할아버지가 이 사건에 손을 쓰고 계시니, 더 이상의 경찰 조사는 없을 것이다.

닷새 전에 스피로스와 공범인 조 타일러, 그리고 다른 두 명의 남자는 사망했다. 스피로스가 조종하던 헬리콥터가 모스에서 본토로 돌아가다가 에게 해에 추락한 것이다. 베스나 다른 사람에게 이 사실을 알려서 좋을 게 없었다. 스테파니데스 가문의 명예와 슬픔에 잠긴 스피로스의 가족을 위해 침묵을 지키는 게 최선이었다.

침묵이 감돌자 그녀의 온몸이 경직되었다.

크리스토스는 침울한 얼굴로 심호흡을 했다.

“말할 게 있소. 내 약혼녀가 아테네에서 마중 나와 있소. 그러니 우리는 따로 가는 게 좋겠소.”

그가 지금 사과를 하는 건지, 고백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그 말이 벽돌처럼 그녀를 내려쳤다. 그 순간 모든 게 변했다. 그와 함께 한 모든 게 이제 다른 모습을 띠기 시작했다. 베스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항구를 멍하니 바라보며 몇 걸음을 내딛었다. 그녀는 이제까지 겪은 그 어떤 고통보다 더 큰 지금의 이 고통을 이겨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거짓말을 했군요.”

그녀가 말했다.

“아니오.”

“우리 행동 때문에 상처 입을 사람이 있는지 내가 물었죠? 그때 당신은 없다고 했어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지난 일을 상기시켰다. 이성을 잃거나 울부짖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내 대답은 진실했소. 페트리나는 이런 일에 간섭하지 않소. 그녀가 내 정절에 신경 쓰지 않는 한, 나도 그녀의 위치를 존중하고 항상 예의를 지키고 있지.”

물속에 퍼지는 독약처럼 증오와 고통이 베스의 마음속에 퍼져갔다. 그녀는 두 팔로 자신을 감싸 안으며 감정을 자제하려고 애썼다.

“당신이 내 곁에 계속 남아 줬으면 하오.”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이상한 웃음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녀는 또 한 걸음을 내딛었다.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겁이 났다.

“농담하지 말아요.”

“난 당신을 포기할 수 없소.”

크리스토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한 탓인지 그의 올리브 빛 피부가 창백해 보였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를 뚫어져라 살피고 있었다.

“완벽하지는 않을 거요. 하지만 언제까지나 나와 함께 있을 수 있소.”

“당신을 남과 나눠 갖는 상황을 받아들일 만큼 내가 당신을 원한다고 생각해요?”

녹색 눈동자가 사납게 빛나는가 싶더니 그녀는 암호랑이처럼 그를 향해 사납게 소리쳤다.

“당신 갈 길이나 가요, 크리스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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