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들만의 에덴-3화 (3/10)

Chapter3.

크리스토스는 그녀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다급하게 침대에서 뛰쳐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잠에서 막 깬 모습이 나무나 신선해 보여서 가슴이 설레었다. 갸름한 얼굴 주변에 마구 헝클어져 있는, 불꽃처럼 새빨간 머리가 구겨진 셔츠 위까지 흘러 내려서 정말 섹시했다.

“남자와 한 번도 잠을 잔 적이 없는 것처럼 굴 필요는 없소.”

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한 번도 없어요!”

베스가 쏘아 붙였다.

“이런 일로 농담을 하지는 않아요.”

크리스토스가 웃음기가 가신 얼굴로 물었다.

“그렇다면 혹시… 동성연애자?”

베스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최악의 시나리오가 틀렸다는 안도감에 크리스토스는 베개에 몸을 기댔다.

“당신이 남자와 한 번도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건 과장한 게 분명하오.”

그녀는 팔짱을 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언제나 화가 났다. 그런데 자신은 우습게도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입증할 거죠?”

“설마 당신이 처녀라는 이야기는 아니겠지?”

“왜요?”

베스는 자신이 궁지에 몰린 사람처럼 군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 사실을 부끄러워할 거라고 생각해요?”

침묵이 감돌았다. 크리스토스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베스는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더 이상 거론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욕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이런 일에 항상 수줍음을 탔다.

심각하게 사귄 남자는 로리가 전부였다. 데이트를 시작한지 두 달 뒤 로리는 1년간 해외 발령을 받았다. 그동안 힘든 일도 많았지만 두 사람은 1년 후에 다시 합쳤다. 하지만 로리가 런던에 돌아온 뒤에도 베스는 서둘러 친밀한 관계로 발전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청혼했을 때조차도 그를 더 알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조심성이 그들의 관계를 삐걱거리게 만들었고, 동생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녀는 처녀였다. 그 사실 때문에 그녀가 더 특별해 보이는 걸까? 크리스토스는 자신이 왜 그 어느 때보다 그녀를 더 갖고 싶어 하는지 의아했다. 욕망이 커져갈수록 분노 또한 커져갔다. 성적인 욕망은 충족돼야 할 식욕 같은 거였다. 그녀는 특별할 것도, 남다를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어느 때보다 차가운 샤워가 필요했다. 샤워라도 할 수 있으니 다행이군. 침대를 빠져 나오며 그는 중얼거렸다.

베스는 침실 옷장에 여자 옷이 걸려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이 옷들은 다 누구 거죠?”

뒤에서 크리스토스의 기척이 들이자 그녀가 물었다. 크리스토스는 손을 뻗어 옷을 집어 들었다.

“새 옷처럼 보이는데.”

“취향이 좀…”

그녀는 날씬한 몸에 옷을 대보며 말했다.

앞부분이 많이 파이고 길이가 짧은 데다 어깨 끈밖에 없는 옷이라는 걸 알고 보드라운 입술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샌들을 보고 너무 좋아서 당장 신어 보았다. 좀 크긴 했지만 맨발로 다니는 것보다는 나았다.

“비치웨어인 것 같군. 입는 게 좋겠소.”

크리스토스는 옷 사이즈를 확인하고는 그녀에게 딱 맞겠다고 생각했다. 우연의 일치일까? 그럴 리는 없었다. 누군가 이 섬에서 그들을 영접하려고 엄청난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래서 다른 옷장에 남성복이 걸려 있는 걸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베스의 발에 난 상처가 잘 아무는지 확인한 뒤 그는 면도를 하러 갔다. 그녀는 보라색 비키니를 입고 푸른색 샤롱을 가느다란 허리에 걸쳤다.

아직 새벽이라 공기는 서늘했다. 현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태양이 동쪽에서 눈부시게 붉은 빛을 발하며 떠올랐다. 베스는 바다 위로 떨어진ㄴ 신선한 새벽빛과 하얀 모래사장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밖을 어슬렁거렸다. 그 광경에서 눈을 떼자 크리스토스가 말했던 꽃 옆에 놓여 있는 샴페인 병이 보였다. 이미 꽃에서는 꽃잎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꽃병을 들자 꽃병과 샴페인 병 사이에 있던 얇은 종이 한 장이 테이블위로 떨어졌다. 거기에는 굵은 글씨로 타이프를 친 외국어가 몇 줄 적혀 있었다.

“크리스토스”

자신의 입에서 그의 이르이 너무 쉽게 나오자 베스는 얼굴을 붉혔다. 이름뿐 아니라 크리스토스란 사람 자체도 왠지 친숙했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그녀는 침실 문에 나타난 그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종이에 쓰인 글을 읽자 칠흑 같은 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이건 그리스어인데… 어디서 발견했소?”

“테이블 위에 있었어요.”

그의 검은 두 눈이 가늘어졌다.

“어제는 거기에 없었소.”

“그렇지만 있었어요.”

그녀가 반박했다.

“그랬다면 내가 어제 봤을 거요.”

크리스토스는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꽃병을 드니까 거기 있던 걸요. 뭐라고 써 있어요?”

그의 턱이 단단하게 굳으며 거친 웃음이 흘러 나왔다.

“다 개소리요. 우리는 안전할 거라고, 몸값 지불 여지와는 상관없이 풀려날 거라고 써 있소. 마치 몰랐던 것처럼 말하는군.”

베스는 놀라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이것 말이오!”

그는 메모지를 구겨서 경멸스럽다는 듯 그녀의 발치에 집어 던졌다.

“이건 어제 그곳에 없었소. 그러니까 당신이 갖다 놓은 게 분명하잖소.”

“내가… 가져다 놓았다고요? 당신 미쳤어요?”

베스는 어이 없어하며 소리쳤다.

“이 섬에 쥐 죽은 듯 있으라고 날 설득할 생각이었다면 당신 계획은 실패요.”

그가 거칠게 말했다.

“지금 이 순간 날 걱정하는 유일한 사람은 할아버지뿐이오. 그분은 이미 내 부모님과 여동생을 땅에 묻었소. 그런데 내가 실종됐으니 나마저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도저히 견뎌내시지 못할 거요.”

그녀는 온몸이 긴장으로 팽팽해졌다.

“나라고 내 가족이 걱정하지 않겠어요? 도대체 왜 날 의심하는지 알 수가 없군요.”

“그럼, 어떻게 생각해야 하지? 당신은 이 터무니없는 메모지를 가져왔소. 이 납치 시나리오는 말도 안 되는 것들 투 성이오.”

그는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납치를 당했으면 손발이 묶여서 다락방에 갇혀 있어야 하는 것 아니오. 그런데 지금 난 몸 편히 해변에 있는 별장에서 섹시한 빨간 머리 여자와 함께 있잖소.”

“정말 어이가 없군요. 다음번에 이 근처에서 쪽지를 발견하면 그땐 못 본 척하죠. 어쨌든 당신은 내가 납치 극에 연관 돼 있다고 의심하는 타당한 이유를 아직 하나도 대지 못했어요.”

“우연의 일치가 너무 많잖소.”

크리스토스가 말했다. 그의 갸름하고 정력이 넘치는 얼굴이 어두워졌다.

“내가 당신을 처음 본 건 6주 전이었소.”

“6주 전이요? 어디서요?”

베스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공항에서 바람에 당신 모자가 벗겨졌지. 당신은 주차장에서 그 모자를 좇고 있었소. 당신은 날 보지 못했을 거요. 그때 난 당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했지.”

후회의 빛을 담은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했다.

베스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분노가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6주 전에 날 처음으로 봤다고? 그리고 날 <아름답다>고 생각했단 말이지? 기쁨으로 뺨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그렇지만 당신을 다시 보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소. 어제 런던에 돌아와 보니 육촌형의 호의로 당신이 이번 주말에 내 차를 운전하도록 고용되었더군.”

“당신 육촌형은 이 일과 어떤 관계가 있죠?”

“육촌형인 스피로스는 그동안 이용하던 리무진 렌트사 대신 당신이 근무하는 회사에 예약을 했소. 당신은 내게 주는 깜짝 선물이었겠지.”

그녀는 이를 갈았다. 그가 자신을 매력적으로 느꼈다는 사실이 더 이상 칭찬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왜 이렇게 중요한 일을 자신에게 맡겼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 육촌형이라는 작자가 특별히 그녀를 보내 달라고 부탁했을 것이다. 그녀는 체면이고 뭐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당신 형은 차와 함께 내 서비스도 샀다고 생각했겠군요?”

폭풍이 이는 듯한 베스의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크리스토스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의 강인한 광대뼈가 살짝 붉어졌다.

“내가 말하려고 한 건 그게 아니오. 내 형이 끼어든 덕분에 당신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는 거지. 그게 다요.”

“그렇지 않아요.”

베스는 격분해서 주먹을 불끈 쥐고 반박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완곡한 표현을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당신의 <깜작 선물일 거라고 생각한 여자>라는 말보다 더 남성 우월적이고 역겨운 말은 들어본 적이 없어요!”

크리스토스는 냉정을 유지했다.

“그건 당신 마음이오. 난 당신이 섹시하다고 생각했고, 당신을 더 잘 알 수 있는 기회를 반겼을 따름이오.”

“당신은 날 만난 지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아서 호텔 방으로 유혹해서 재미를 보려고 했어요. 그래놓고도 나더러 미끼라고 비난할 수 있나요? 날 일부러 찾아낸 사람은 당신의 그 재수 없는 형이고, 날 이 꼴로 만든 사람도 그 형이라고요. 그런데 내가 운전하는 차에 탔다가 납치됐다는 이유만으로 날 비난하는 거예요?”

화가 더욱 끓어올랐다.

“난 평소에 하지 않던 위험을 감수했소. 직원들의 의견을 무시해 가면서까지 안전에 대해서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단 말이오. 그건 당신에게 그만큼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오.”

“맙소사.”

베스는 날카롭게 말을 끊었다.

“당신은 자신의 과도한 성욕조차 나 때문이라고 비난하는 거예요?”

“당신은 사랑을 나누려는 남자들을 항상 이렇게 공격적으로 대하오?”

베스는 그의 뺨을 세차게 때렸다. 다음 순간 그녀는 자신의 행동에 놀라서 뒤로 추 춤 물러섰다.

“겨우 이 정도밖에 못 때리오?”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주먹으로 때렸다면 더 아팠을 텐데.”

“그럴 생각은 아니었어요. 미안해요.”

그녀는 일단 사과를 했다. 도도하게 솟은 그의 광대뼈에 손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베스는 미안해서 시선을 돌렸다.

“용서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지. 당신에게 키스하게 해줘요.”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녹색 눈동자에 의심의 빛이 가득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넓은 어깨를 들썩였다.

“당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시는 키스하지 않겠소.”

뺨이 화끈거렸다. 베스는 다시 한 걸음 물러났다.

“물론 마음에 들지 않을 거예요. 괜히 망신을 자초하지 말아요.”

그녀가 충고했다.

“이 말도 안 되는 쪽지를 가져다 놓았다고 날 비난한 지 5분도 지나지 않았잖아요.”

한밤중처럼 검은 그의 눈동자가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그런 일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오. 난 지금 마차에서 되풀이해서 떨어지는 술주정뱅이가 된 기분이오. 당신을 너무나 원하오.”

베스는 숨이 막혔다. 어찌나 그와 가까이 있었던지 남성적인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느껴지다 못해 맨살이 드러난 옆구리가 후끈할 지경이었다. 작은 떨림이 등을 타고 내려가 골반 내부에 불꽃을 만들었다. 등이 아프고 입술이 바싹 타들어갔다. 그의 잘생긴 구릿빛 얼굴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천천히 내려왔다. 이성은 물러서라고 경고했지만 그녀는 어느새 그 이상을 기대하고 있었다.

“싫어요.”

베스는 마지막 순간까지 저항하며 그에게 경고했다. 그러면서 그와의 육체적 접촉이 메스꺼운 일이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려 애를 썼다.

그의 육감적인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향해 내려왔다. 십대 시절부터 항상 꿈꿔 왔지만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는 멋진 키스였다. 베스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고 몸을 일으켰다. 그의 키스는 정말 끝내줬다. 어쩌면 그의 모든 행동은 그녀를 즐겁게 하기 위해 특별히 의도된 것인지도 몰랐다. 그가 마침내 부족한 산소를 들이마시려고 고개를 들었다. 베스는 그의 남성적인 체취와 두 사람의 살이 맞닿은 유쾌한 느낌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넋을 잃고 그의 늘씬하고 강인한 육체에 안겨 있었다.

그의 눈이 짙은 황금색을 띄고 붉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흘깃 바라보았다. 크리스토스는 그녀를 더욱 세게 안으며 아까보다 더 집요하게 입술을 탐했다.

베스는 열정에 휩싸여 그에게 키스를 되돌려 주었다. 그의 혀가 현란한 기술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녀는 신음을 내뱉으며 그에게 매달렸다. 또다시 욕망이 그녀를 집어삼키도록 내버려 둔 채. 그만두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의 육체는 열기와 다급함과 욕망으로 채워졌다. 이전에는 결코 경험하지 못한 강렬한 굶주림이 자제심을 날려 버렸다.

“침대로 갑시다.”

그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베스는 도저히 그에게 저항할 수 없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진도가 너무 빨랐다. 그녀는 놀라움을 감추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릎이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존심과 이성, 자기 존중 같은 것을 깡그리 잊어버린 채 그만을 원했다. 야성적이고 사악한 욕망이 내부에서 피어올랐다. 욕구가 너무 강렬해서 스스로도 놀랄 지경이었다.

크리스토스는 가늘고 긴 갈색 손가락으로 그녀의 허리에서 가슴까지 훑어 올라갔다. 베스의 가슴이 부드럽게 부풀어 올랐다. 아랫배에서 억압돼 있던 뜨거운 감각이 피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사실 너무 흥분해서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그의 매력적인 검은 눈동자가 노골적인 기대감으로 활활 타올랐다. 자신의 욕구를 언제든지 충족해 온 남자의 눈동자였다.

베스는 온몸이 뻣뻣해졌다. 서투른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다보니 자연히 그렇게 되었다. 그녀는 더욱 붉어진 입술을 열어서 갈라진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모닥불… 우린 모닥불을 피워야 해요.”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문으로 걸어갔다.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베스가 비틀거리며 의자에 부딪히는 모습을 보니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그녀는 밖으로 나와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떨리는 손으로 달아오른 얼굴을 감쌌다. 다음 순간 자신이 얼마나 흥분했는지 그가 눈치 챌까봐 황급히 손을 내렸다.

“지금 내 손길이 싫다고 말하는 거요?”

크리스토스가 다가와 물었다. 그리스 악센트가 강하게 느껴졌다.

베스는 윤곽이 뚜렷한 그의 옆얼굴을 곁눈질했다. 그가 나타나자 온몸으로 전율이 퍼져나가는 걸 느끼고 재빨리 감정을 억눌렀다.

“아뇨. 하지만 더 이상 진도를 나가고 싶지 않아요. 그건 미친 짓이에요.”

그녀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일 리가 있군.”

크리스토스가 선뜻 그녀의 말을 인정하자 오히려 신경이 쓰였다.

“난 지금 피임약이 없소. 당신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네. 그래요.”

베스는 재빨리 대답했다. 그녀는 머리끝까지 빨개진 채 서둘러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와 함께 있으면 자신이 한참 미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토스라면 키스 몇 번으로 자신을 곧장 침대로 데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자신이 수치스러웠다. 게다가 피임에 대해 너무 솔직하게 말하는 모습에 당혹감을 감출수가 없었다.  베스는 사고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희생자처럼 나약하고 어수룩했다. 반면에 크리스토스는 예상치 못한 그녀의 반응에도 여전히 침착하고 논리적으로 대처했다. 그 점을 생각하자 슬며시 약이 올랐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크게 놀랐다. 내가 그렇게 열정적으로 변할 수 있다니. 그러나 무엇보다 로리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크리스토스를 간절히 원한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남자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다는 사실도 상황을 바꾸지 못했다. 로리의 키스는 머릿속을 백지로 만들어 버리거나 통제력을 잃게 만들지는 않았다.

그녀는 순진하게도 이제껏 자신이 섹스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크리스토스와 함께하면서 자신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모닥불을 피울 장소로는 해변 북쪽 끝에 있는 곳이 가장 좋겠소.”

그는 자신이 흥분한 걸 감추려고 주먹 쥔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말했다.

“장소를 고르기 전에 먼저 둘러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솔직히 그녀는 왜 자신이 항상 그의 말에 반박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곳이라면 지나가는 배에서 가장 잘 보일 거요.”

크리스토스는 왜 그 자리가 가장 적당하며 실제로 유일한 장소인지 타당한 이유를 세 개나 말했다. 베스는 그의 말을 잠자코 듣기만 했다. 그가 은신처와 풍속, 그리고 연소율에 대해 강의하기 시작하자 그녀는 자신의 이해력을 넘어섰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고분고분한 일꾼이 되는 게 속 편한 일이었다.

곶 아래 해변에는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많이 흩어져 있었다. 베스는 그것들을 모아 정해진 장소로 가져갔다. 그녀가 보기에 그는 절대 일을 운에 맡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모닥불은 정확하게 측량한 장소에 피웠고, 불을 계속 피울 나무 더미를 쌓는 것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런 더위에선 어깨에 화상을 입을 수도 있소. 가서 뭐라도 좀 걸쳐요.”

연기가 서서히 피어오르자 그가 말했다.

“전 괜찮아요.”

베스가 쏘아 붙였다. 무더위에서 오랜 시간동안 익숙하지 않은 일을 한 터라 너무 힘들어서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나 자신은 내가 돌보도록 내버려둬요!”

“어떻게 그럴 수 있겠소.”

크리스토스가 반짝이는 눈동자로 그녀를 쏘아보며 칠흑처럼 까만 눈썹을 치켜 올렸다. 단추가 풀어진 셔츠 사이로 구릿빛 가슴이 드러났다. 대리석으로 깍은 듯한 완벽한 몸매였다.

“당신은 매사가 어설픈데.”

그녀의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분노로 번쩍였다. 그녀는 화를 억누르려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어디서부터 시작하길 바라오?”

그는 재미있다는 듯 맞받아 쳤다.

“차 문을 잠그지 않아서 우리 둘이 납치된 것부터? 아니면 발을 벤 것부터? 바다에 빠져 죽을 뻔한 건 어떻소? 당신이 산 채로 익는 사태를 막으려는 내 마음을 왜 몰라주는 거요?”

베스는 그곳까지 질질 끌고 간 통나무를 내던졌다.

“당신은 내가 당신과 자지 않으려고 했다고 화풀이하고 있어요.”

그는 모래 언덕에서 베스를 향해 훌쩍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놀란 그녀를 양팔에 안아 들었다.

“무슨 짓이에요?”

그녀가 빽빽거렸다.

“가서 거울을 좀 보고 나서 말해 보시지.”

“당장 내려놔요!”

베스가 소리쳤다.

크리스토스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내려놓았다.

“내게 소리치지 말아요.”

실크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가 경고했다.

“장난감처럼 날 들어 올리지 말아요. 명령하지도 말고요.”

“그런 사람이 어떻게 리무진 기사가 될 생각을 했소?”

“내 사업을 시작할 때까지만 일할 거예요.”

베스가 다시 소리쳤다.

“자기 사업에 뛰어드는 모험을 하기 전에 전문적인 충고를 경청하는 게 현명한 처사일 텐데?”

그가 잘난 척하며 말했다.

“당신이 아직 살아있다는 게 기적 이 군요, 크리스토스”

“무슨 뜻이오?”

“어떻게 목 졸려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남았죠? 당신 때문에 머리가 돌 지경이에요. 당신은 뭐든 다 안다고 생각하죠. 설사 뭘 알아도 혼자만 알고 있고요.”

베스는 턱을 치켜 올렸다.

“참고로 말하자면 난 경영학 학위가 있어요. 그 분야에서 문제가 생기면 내가 알아서 해결할 수 있어요.”

그녀는 백사장을 가로질러 집으로 걸어갔다. 크리스토스가 그녀를 찾아 침실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기습적으로 그녀의 어깨에서 비키니 끈을 벗겨냈다. 베스는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땡볕에 있었는지 알아챘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침대 발치에 주저앉았다. 입에서는 짜증 섞인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당신 말이 맞지만… 그렇다고 당신이 좋아진 건 아니에요.”

크리스토스는 욕실로 들어가서 로션을 가져왔다. 그는 베스에게 로션 병을 던졌다.

“어서 발라요. 그러면 저녁쯤엔 구운 가재 같은 꼴은 면할 수 있을 거요.”

그녀의 시선이 그의 반짝이는 눈동자와 마주쳤다. 아랫배가 울렁거리며 요동을 쳤다. 그녀는 욕망을 부정하듯 고개를 흔들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크리스토스도 뒤쪽에 앉아 거울에 비친 그녀를 바라보았다. 거울속의 그는 너무 멋졌다. 그 모습을 정신없이 바라보는 동안 베스의 입술이 자기도 모르게 살짝 벌어졌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그가 병 쪽으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지금쯤은 이런 일에 익숙해지지 않았나요?”

그 순간 오만하게 솟은 그의 광대뼈에 붉은 빛이 살짝 감돌았다. 그 모습을 보자 우스웠다. 물론 그는 자신이 잘생겼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잘생긴 얼굴과 큰 키, 거기에 끝내주는 몸매까지. 이 모든 걸 다 가진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매력을 모를 수 있을까.

“당신은 자신이 만들어내는 효과에 익숙한 것도 모자라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목적을 이루려고 그걸 이용하기도 하잖아요.”

베스가 덧붙였다.

“사실 목적 달성에 큰 어려움을 겪지는 않지.”

크리스토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맞장구를 쳤다.

“강의는 끝났소?”

그리고는 차가운 손으로 베스의 화끈거리는 어깨에 로션을 부드럽게 펴 발랐다. 그의 손길에 베스의 온몸이 경직되며 작은 신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손에 힘이 들어갔소?”

그가 나른한 말투로 물었다.

“아뇨.”

누군가가 건초 더미에 던진 성냥불처럼 어깨에 닿은 남자 손길이 그녀에게 불을 지필 날이 올 거라고 말했다면 아마 큰 소리로 웃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손가락이 자신의 몸을 어루만지자 몸이 가만히 있질 않았다.

“그만 하는 게 좋겠소?”

그가 물었다.

“아뇨…”

베스는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한 줄기 열기가 다리 사이에서 서서히 피어올랐다. 그의 탄탄한 근육질 몸에 기대고 싶었다. 다음 순간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하고 했다는 사실에 온몸이 굳었다. 그녀 안에 있는 욕망은 그녀의 약점을 찾도록 프로그램 된 비밀요원 같았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또다시 거울 속에서 그의 모습을 찾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이제까지 자신이 안전만을 선택해 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대부분이 실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정비사 교육을 받고 싶었지만 전혀 관심도 없는 경력을 위해 대학에서 4년을 썩는 쪽을 택했다. 졸업 후 1년 동안 지긋지긋한 사무실에서 잔업을 하며 지냈다. 꽤 많은 봉급을 받았지만 전혀 위안이 되지 않았다. 로리와 관계를 갖는 걸 주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신중하게 행동한다는 구실로 상처받을 일을 피했던 것이다.

베스는 가장 이성적이고 위험이 적은 일만을 골라서 했다. 그런데 크리스토스는 어느 누구보다 그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힐 사람 같았다.

그녀는 침대에서 뒹굴며 그의 육감적인 입술에 키스하는 자시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상상이 현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사실에 놀랐다.

갑자기 크리스토스가 일어섰다. 그리고는 욕실로 가서 손을 씻은 뒤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쉬도록 해요. 난 이런 더위에 훨씬 익숙하니까.”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 앞에서 욕망을 자제하는 일에 난 익숙하지 않으니까 어서 자리를 피해야 해.

그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는 날씬하고 우아한 그녀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살갗은 자신과 대조적으로 희고, 놀라울 정도로 보드라워 보였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완전히 그녀에게 빠졌군. 그는 짜증이 났다. 그래서 모닥불을 피우고 땔감을 모으는 데에 정신을 집중했다.

베스는 섹스에 대해 매우 신중했다. 반면에 그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사실 크리스토스의 마음 한 구석에도 열한 살 때 돌아가신 어머니 칼리오페의 보수적인 견해가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었다. 그녀는 결혼과 함께 스테파니데스 가문 남자들의 넘쳐나는 성적 매력과 싸워야 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어린 아들에게조차 존경과 정절, 자제 같은 덕목들을 가르치곤 했다. 그리고 사랑도.

그의 갸름한 잘생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머니는 열여덟 살 때 자신이 진정한 사랑과 결혼했다고 말했지만, 그건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다.

베스도 흠잡을 데 없는 여자였다. 그녀가 처녀라고 말한 순간 크리스토스는 그녀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부자라면 언제라도 잠자리를 같이 할 준비가 돼 있는 수많은 싸구려 여자들과 그녀를 한 부류로 취급할 수는 없었다. 이제껏 가장 좋은 건 항상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해 온 그에게 베스는 은근한 욕망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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