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2.
크리스토스가 먼저 의식을 되찾았다. 그는 누워 있던 침대에서 일어났다. 제일 먼저 다친 곳은 없는지 살폈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는 그의 검은 눈에는 멍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매서운 눈초리로 의식 없이 누워 있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보자는 간 곳이 없고 붉은 머리칼 몇 가닥이 눈썹 위에 흩어져 있었다. 피부는 눈처럼 희었다. 동요에 나오는 매리의 작은 양처럼?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했지만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베스 미첼이 얼마나 위험한 미끼인지 드러난 것이다. 이 여자가 파놓은 함정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는 사실에 치가 떨렸다. 그렇지만 그녀도 공범자들에게 이중으로 배신을 당해서 희생자와 함께 버려진 걸 생각하면 정말 소설에나 나올 법한 정의의 실현이었다. 저 여자는 내가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리란 걸 알게 될 거야.
베스는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며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뜨지 않아도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끔찍한지 알 것 같았다. 옆구리에 추를 매단 것처럼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게다가 너무 더웠다. 그것만으로도 뭔가가 잘못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옷을 입고 있었지만 다 입고 있는 건 아니었다. 눈을 떠서 낯선 방을 보는 순간 자신을 공격한 조가 생각났다. 옆구리가 약간 시큰거렸다. 재킷을 벗고 셔츠를 올리자 붉은 주사 자국이 보였다. 믿을 수가 없었다. 기절한 걸 보면 진정제 주사를 놓은 게 분명했다. 조가 왜 이런 짓을 했을까? 크리스토스 스테파니데스! 도대체 그 사람은 어디에 있는 거지?
조는 거절당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납치하는 미치광이인가 봐. 베스는 공포와 혼란에 휩싸였다. 두려움에 온 몸을 웅크렸다. 발을 보니 구두를 한 짝밖에 신고 있지 않았다. 나머지는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신고 있던 한 짝마저 벗어버리고 베스는 침실을 나와 열려져 있는 커다란 문으로 다가갔다.
현관으로 향하다 말고 그녀는 너무 놀라서 눈을 깜박였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백 피트 정도 떨어진 곳에 하얀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다. 그 너머에서는 하늘인지 바다인지 구분도 가지 않는 푸른 바다가 넘실거렸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헛것을 보는 게 분명했다.
사고가 났을 때는 분명 비가 내리고 있었어. 맑았다 비가 왔다 하면서 산들바람이 부는 전형적인 영국의 봄 날씨였잖아. 그런데 지금 내리쬐는 뜨거운 태양은 지중해의 날씨야.
멀리 해변 북쪽에 있는 바위 뒤에서 크리스토스가 걸어왔다. 뱃속이 마구 요동쳤다. 그는 안전했다. 왠지 그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다.
그는 좀 전까지의 말쑥한 모습이 아니었다. 양복 상의와 넥타이는 사라지고, 은회색 드레스 셔츠는 풀어 헤쳐져서 넓은 어깨가 거의 다 드러났다. 검은 머리칼도 마구 헝클어져 있었다. 그동안 거뭇거뭇하게 자란 턱수염이 고집스러운 턱 선과 넓고 섹시한 입술을 강조해 주었다. 흐트러진 모습이지만 여전히 멋졌다. 뱃속이 또다시 공중제비를 했다. 그의 강렬한 성적 매력이 효과를 발휘했다.
그녀를 보고 크리스토스가 멈춰 섰다. 갸름하고 잘생긴 그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차가웠다.
“여기가 어디요?”
그가 딱딱하게 물었다.
베스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녀가 뭔가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는 말투였다. 왜 그런 식으로 말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모르겠어요. 당신은 알아요?”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이오? 날 바보 취급하지 말아요.”
크리스토스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녀는 온몸이 얼어붙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맨발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태양으로 달구어진 길 쪽으로 물러섰다. 땅이 어찌나 뜨거운지 스타킹만 신고 있던 베스는 급히 나무 그늘로 들어갔다.
“바보 취급이라뇨? 도대체 무슨 말이죠?”
“단신은 날 납치한 자들과 한패잖소.”
“네?”
“물론 여기서 깨어난 뒤에야 공범들의 배신을 알아차렸겠지만.”
“한패라니? 무슨 근거로 날 모함하는 거죠?”
베스는 놀라서 따지고 들었다.
“우리에게 주사를 놓은 그 고릴라 같은 녀석의 이름을 불렀잖소. 그 주사 때문에 우리가 기절한 거고.”
그녀는 너무 놀라 머릿속이 잘 정리되지 않았다. 고릴라라고? 조를 말하는 건가? 우리 둘을 공격한 걸 보면 조가 납치에 가담한 건 분명해.
“조는 임페리얼 리무진 사에 근무해요. 하지만 그 사람이 갑자기 문을 열어서 나도 어리둥절했어요.”
“그 녀석의 이름을 꽤나 기쁘게 부르더군.”
“전 너무 놀라서… 그게 진짜 사고가 아니었다는 걸 알아차릴 여유도 없었어요.”
익숙하지 않은 더위로 이마에 땀이 맺혔다. 그녀는 머리를 고정하고 있던 핀을 뽑아 머리를 풀었다. 그리고는 핀에 눌린 자국이 남은 뒷목을 마사지했다.
“타이어에 펑크를 내서 차를 세우게 하려고 도로에 뭔가를 설치해 놓은 거죠? 그렇죠?”
그는 굳은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당신이 이 일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믿게 하려고 그러는 거요? 괜히 힘 빼지 말아요. 그렇지 않아도 당신 때문에 열 받았으니까.”
베스는 화가 나서 그를 쏘아보았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예요? 조를 안다는 이유만으로 날 범죄자 취급할 순 없어요.”
“난 그렇게 단순한 인간이 아니오.”
그가 빈정거렸다.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데 어떻게 그를 모를 수 있겠어요?”
“당신들 둘이 그보다 더 친밀한 관계인 줄 알았는데?”
크리스토스가 비꼬았다.
베스는 결코 털어놓고 싶지 않은 사실을 그가 암시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무슨 뜻이죠?”
“그 녀석이 당신을 여자 친구라고 부르더군.”
그녀는 정곡을 찔린 것 같아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비로소 자신이 의식을 잃기 전에 조가 한 말이 떠올랐다.
“그 사람과 데이트 한 번 했어요. 만족해요?”
“아니, 어림도 없소. 이 상황이 어떻게 만족스러울 수 있겠소?”
그의 갸름하고 힘찬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신은 이 더러운 납치 극에 연루된 게 분명하오.”
“연쇄 살인범과 데이트 한 번 했다고 그 사람이 저지른 범죄에 책임을 져야 하나요?”
베스가 따져 물었다. 지금 그의 태도는 너무나 부당했다. 또한 자신이 조 같은 악당과 데이트 했다는 사실이 너무 창피하고 황당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어떤 말이나 행동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소.”
그는 성큼 다가와 그녀의 두 팔을 잡았다.
“난 납치됐소. 위험에 처해 있단 말이오. 납치범들의 다음 행동을 기다리면서 망망대해 무인도에서 멍하니 있을 순 없소.”
“무인도라고요?”
베스는 깜짝 놀라서 그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는 자신의 팔을 쥐고 있는 그의 손힘에 놀라 몸을 움츠렸다.
베스는 자신이 꽤 키가 큰 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190센티미터가 넘는, 탑처럼 우뚝한 그 앞에 서자 꼬맹이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위협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는 힘도 센 데다 엄청 화가 나 있었다. 게다가 그녀를 전혀 믿지 않았다. 그렇다고 비난할 수는 없었다. 그는 납치를 당했고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었다. 베스는 납치범 중 한 명을 알고 있는 자신이 매우 의심스러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무슨 섬이오?”
크리스토스가 거칠게 물었다.
“당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모두 알아야겠소. 그래야 다음 상황에 대비할 수 있으니까.”
“전 아무것도 몰라요.”
베스는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급히 뒤로 물러났다.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크리스토스도 깜짝 놀랐다.
“절 믿어 주세요.”
그는 베스의 항변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못 믿겠소. 당신은 미끼였소. 아주 효과적인 미끼. 난 그걸 덥석 물었고.”
온몸을 긴장한 채 베스는 그와의 거리를 조금씩 벌렸다.
난 스테파니데스에 대해 뭘 알고 있지? 이런 상황에서 그는 얼마나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을까?
그는 베스가 납치범과 한 패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었다. 게다가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면 그녀를 거칠게 다루는 것도 마다하지 많을 게 분명했다.
만약 열흘 전에 크리스토스와 맞서는 상황이 벌어졌다면 베스의 반응은 지금과 크게 달랐을 것이다. 내 몸은 스스로 돌볼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외쳤을 게 분명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다 신사적이라고 확신하면서.
아이러니가 느껴졌다. 남성의 완력에 대한 공포를 심어 준건 조 타일러였다. 그녀는 조에게 붙잡혀 있는 동안 무시무시한 공포를 맛보았다. 그 뒤로 남자들이 대부분인 지금의 직장에서 맘 편히 일할 수가 없었다.
“난 미끼가 아니에요.”
베스는 가능한 한 진지하고 진실 게 들리게 하려고 애를 썼다.
“이 납치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을뿐더러 나도 당신만큼이나 놀랐어요.”
“그랬겠지.”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환상적인 붉은 머리가 어깨 위에서 출렁거렸다. 그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짙은 갈색을 띠어 가는 걸 바라보며 크리스토스가 말했다. 그는 자신의 주의를 끌기 위해 그녀가 일부러 머리를 풀어 내렸다고 생각했다.
“남자친구가 당신을 이렇게 내팽개치기 전까지는 당신도 이 계획의 일부였을 테니까.”
“그 사람은 제 남자 친구가 아니라니까요. 고작 데이트 한 번 했을 뿐이에요. 게다가 그 사람은 변태였다고요!”
베스는 격분해서 소리쳤다.
“당신 말을 믿을 수가 없소. 내가 원하는 건 진실이오.”
그는 무자비한 검은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당신은 날 위험에 빠지게 했으니 내게 빚을 졌소. 이제 슬슬 진실을 말해보시지.”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에 그녀는 몸을 떨었다. 두 사람 사이에 무언의 협박이 감돌았다. 그의 낮고 깊은 목소리는 온몸에 소름이 돋고도 남았다. 베스는 맞은편 해변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크리스토스가 이름을 불렀지만 그녀는 더욱 빨리 달렸다.
그는 낮은 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그는 베스의 눈에서 점점 커져 가는 공포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렇지만 그녀를 안심시키지 않았다. 베스는 폭력적인 남자에게 시달린 경험이 있는 걸까? 그 생각만으로도 끔직했다.
그는 이제껏 여자에게 손찌검을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어떤 여자도 그런 눈길로 그를 쳐다본 적이 없었다. 그는 거칠게 한숨을 내쉬며 자신이 여자의 공포심을 악용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자신의 안전은 베스 미첼에게서 정보를 알아내는 데 달려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를 겁에 질리게 하는 실수를 범하다니.
베스는 모래 언덕을 가로질렀다. 느닷없는 그녀의 출현에 풀을 뜯고 있던 한 떼의 양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괜찮아.”
그녀가 중얼거렸지만 양은 모두 도망가 버렸다.
크리스토스의 화가 가라앉을 때까지 떨어져 있어야겠어.
찌는 듯한 더위에도 조 타일러를 생각하면 온몸에 한기가 돌았다. 조가 본명인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왜냐하면 그가 임페리얼 사에 입사한 시점이 스테파니데스가 예약를 한 직후였기 때문이었다. 조가 다른 남자 직원들과 어울리지 않은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의 목표는 크리스토스 스테파니데스를 납치하는 거였다. 그렇지만 조 타일러가 왜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며 데이트를 신청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베스는 햇빛을 피해 나무 그늘로 들어갔다. 얼마나 목이 마른지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돌로 지은 건물의 테라코타 지붕과 그 집 뒤에 있는 작은 건물이 보였다. 보트 창고인가? 그 건물과 부두 사이로 배를 바다로 끌어내리는 조선대가 보였다.
어디를 봐도 푸른 바다와 연한 금빛 모래사장, 그리고 싱싱한 나무들뿐이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하지만 마실 물이 없다면 이 아름다운 광경이 무슨 소용이람. 잠깐 양들은 어떻게 살지? 분명 어딘가에 신선한 물이 있을 거야.
잠시 후 베스는 나무 사이에서 시냇물을 찾아냈다. 물이 어찌나 깨끗한지 물속의 조약돌 하나하나의 색깔이 다 보였다. 손으로 물을 떠 마시고 얼굴을 씻었다. 목을 축이자 갑자기 졸음이 밀려왔다. 그녀는 시냇가의 그늘진 곳에 누웠다. 그리고는 손을 머리 밑에 받친 채 잠에 빠져들었다.
베스는 마침내 잠에서 깨어나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몇 시간 동안 시체처럼 잠을 잔 모양이었다. 주위는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다시 해변 쪽으로 돌아갔다. 그러다가 예리한 돌에 발을 부딪치고 말았다.
그녀는 너덜너덜해진 스타킹을 벗고 상처를 살폈다. 피가 흐르는 상처를 보고 인상을 찌푸리며 스타킹으로 임시 붕대를 만들었다. 언젠가 소금물이 소독효과가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그녀는 힘들게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바로 길게 뻗어 있는 바위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발을 씻을 수 있는 장소를 찾았다.
크리스토스는 섬을 다섯 번이나 돌았다. 그렇지만 저녁이 될 때까지 베스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점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숨을 만한 곳은 다 찾아보았지만 아무 소득도 없었다. 그때 바위 위에 그녀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베스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녀는 왜가리처럼 날씬한 한쪽 다리로 서 있었다. 하지만 자세가 불안정해서 파도에 휩쓸릴 것만 같았다.
“베스… 거기서 내려와요!”
부하 직원에게서 무조건적인 복종을 즉각적으로 끌어내는 엄격한 어조로 크리스토스가 소리쳤다.
그녀는 바위 틈새에서 쓰라린 발을 담그기에 적당한 물웅덩이를 발견하고 막 발을 담그려는 순간, 무시무시한 크리스토스의 고함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몸을 돌려 소리가 난 곳을 보려다가 균형을 잃고 바다에 빠지고 말았다.
그녀는 공포에 휩싸였다. 그곳은 수심이 깊었고 물살도 강했다. 베스는 한 번 떠올랐다가 두 손을 마구 허우적거리며 다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때 크리스토스가 물로 뛰어들었다. 살면서 이보다 더 재빠르게 움직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베스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때 튼튼한 두 팔이 그녀를 붙잡아 물 위로 끌어 올렸다. 그녀는 기침을 하고 허우적거리며 최대한 많은 공기를 마시려고 애를 썼다.
크리스토스는 그녀를 해변으로 데리고 나왔다.
“전 괜찮아요.”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그가 그리스어로 욕설을 내뱉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를 잡은 손길은 놀랄 만큼 부드러웠다. 베스는 침착해지려고 애를 썼지만 물속에 빠졌을 때의 공포가 다시 밀려와 눈물이 쏟아졌다.
그는 심하게 충격을 받은 그녀를 보고 집으로 데려갔다.
“발은 왜 다쳤소?”
“배었어요.”
갸름하고 힘찬 얼굴을 잔뜩 긴장한 채 크리스토스는 그녀를 안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베스는 여전히 몸을 심하게 떨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을 거요. 아무도 당신을 해치지 않소.”
그는 격렬한 어조로 말했다.
“나와 함께 있으면 안전하오. 알겠소?”
그의 반짝이는 눈동자와 마주치자 베스의 심장 박동이 하늘로 치솟았다.
“네.”
“발을 한번 봅시다.”
그는 쿠션을 댄 나무의자에 그녀를 앉히고 발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상처가 심 하자 눈살을 찌푸렸다.
“씻어야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상처에 물이 닿지 않게 조심해야 하오.”
“바닷물에 빠지는 바람에 제 몸에서 해초 냄새가 나요.”
베스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인어 같군.”
크리스토스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온몸이 흠뻑 젖고, 창백한 피부는 태양 빛에 발갛게 익어 있었다. 그리고 총명한 두 눈은 그가 사랑하는 푸른 바다만큼이나 밝고 변화무쌍했다.
“제 다리가 물고기 같아요?”
그녀가 농담을 했다.
크리스토스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몸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평상시의 바위 같은 자제심조차 끓어오르는 욕망을 막지 못했다.
“다리가 정말 끝내주는군.”
진심이었다. 날씬한 허벅지와 우아한 무릎, 가느다란 발목은 놀랄 만큼 앙증맞은 발로 이어져 있었다. 안목이 높은 그의 눈에도 정말 아름다웠다.
베스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고 욕실로 달려갔다.
“금방 끝낼게요.”
크리스토스도 완전히 젖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채고 그녀가 우물거렸다.
잉크처럼 검은 속눈썹이 그의 예리한 눈동자를 가려 버렸다.
“당신은 수영을 못하더군. 그러니 다시는 바위 위에서 춤추지 말아요.”
그가 쌀쌀맞게 말했다.
“춤추던 게 아니었어요. 상처가 곪지 않게 바닷물에 발을 담그려고 했어요.”
“감염이나 익사할 위험을 무릅쓰고?”
크리스토스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쇼는 이제 그만해요.”
그의 말에 베스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런 게 아니라…”
“내게서 도망쳐서 뭘 어떻게 할 생각이었소?”
그가 코웃음을 쳤다.
“난 여자를 때리는 사람이 아니오. 그 사실을 명심해요. 또다시 당신을 찾아다니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으니까. 오후 내내 정작 중요한 일에는 신경을 쓰지도 못했잖소.”
“날 찾아달라고 한 적 없어요. 맙소사, 나도 화가 나요. 기절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화가 잔뜩 난 남자와 낯선 곳에 와 있잖아요.”
바로 그때 크리스토스가 바다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해줬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에게 아직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도.
“어쨌든 구해줘서 고마워요.”
그녀는 속삭이듯 덧붙였다.
“괜찮소. 당신에게 해가 가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을 생각이오.”
크리스토스가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이 납치극과 관련이 있다면 온전한 상태로 경찰에 넘겨야 하니까.”
베스는 에메랄드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매섭게 쏘아보았다.
“여기서 당장 나가요!”
그는 힘이 넘치는 넓은 어깨를 돌려 욕실을 나갔다. 그리고는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그녀를 자극하는 건 너무 쉬웠다.
그녀는 욕조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욕조는 정교하고 화려한 모자이크 타일로 장식돼 있었다. 욕실 바닥은 대리석이었다. 인테리어에 돈을 아끼지 않은 것 같았다. 겉에서 볼 때는 소박한 시골집인데, 내부는 사치스러운 백만장자의 저택과 흡사했다. 납치범들은 원래 인질에게 이렇게 너그러운가?
베스는 커다란 타월로 머리를 감고 침실로 들어갔다. 침실 벽은 지중해처럼 파랗게 질해져 있고, 커다란 침대가 있었다. 레이스로 장식된 침대 시트는 눈처럼 깨끗하고 빳빳했다.
크리스토스가 문가에 나타났다. 머리를 깨끗이 뒤로 넘기고 면도를 한,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난 밖에서 샤워를 했소.”
베스는 당황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우아하게 재단된 베이지색 치노 면바지와 검은색 반소매 셔츠를 입고 있었다.
“어디서 깨끗한 옷을 찾았어요?”
“내 짐 가방도 함께 딸려 왔더군. 발을 다시 한 번 봅시다. 부엌에서 구급상자를 찾았거든.”
따뜻한 발에 닿은 그의 손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숱이 많은 검은 머리가 창을 통해 들어온 희미한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그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에 손을 집어넣고 싶었다. 그녀는 생소한 욕망을 참느라 손을 맞잡았다. 소독약과 반창고만으로도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는지 그가 보여 주는 동안 그녀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내 셔츠를 빌려 주겠소.”
그는 일어서면서 중얼거렸다. 자신이 넋이 나간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베스는 고개를 돌렸다. 왜 이 사람 앞에서는 이렇게 쩔쩔매고 혀가 얼어붙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런 곳에 오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죠?”
그녀가 침묵을 깼다.
“글쎄, 이곳은 신혼부부를 위한 고급 병장 같소. 옆방에는 어울리지 않게 꽃다발에 축하용 샴페인 한 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더군.”
“신혼부부용 별장아라고요?”
베스는 그가 건네 준 셔츠를 받아 들었다.
“완벽한 곳이오. 작은 무인도에서 휴가를 보내려는 사람이 낯선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하겠소? 그러니 어느 누구도 여기에 나타나지 않을 것 같소. 긴급사태에 대비해서 교신용 무전기가 있을 줄 알았는데 벌써 치워 버렸더군.”
그녀는 푸른 셔츠에 팔을 끼우고 조심스럽게 소매를 말아 올렸다. 그리고는 단추를 채우고 머리를 감고 있던 타월을 풀었다.
이러면 안 돼. 크리스토스는 자신을 타일렀다. 하지만 그녀에게 자꾸 눈이 갔다. 셔츠 밑은 완전히 알몸이라는 사실에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그는 베스에 대한 동물적인 욕망을 억제하려고 애를 썼다. 바보 같은 자신의 모습에 화가 났다.
이 여자는 그 고릴라 같은 녀석의 여자잖아. 납치범이 버린 여자를 가지고 싶어서 안달을 하다니. 면 셔츠가 너무 섬새해서 봉긋한 가슴의 연분홍 빛 유두와 아랫배 밑의 짙은 그림자가 비쳤다. 더 이상 참기가 힘들었다. 정말 어이없는 상황이군. 크리스토스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남성 호르몬이 넘치는 십대 애송이가 된 기분이었다.
“뭐를 좀 먹었으면 좋겠어요.”
베스는 그를 지나쳐 널찍한 응접실로 갔다.
“음식은 어디에 있어요?”
“요리할 줄 아요?”
그녀는 소박한 부엌으로 들어갔다.
“당연하죠. 남자들이 제 솜씨에 눈물을 흘릴 정도랍니다.”
“그 남자들을 어떻게 만족시켰소?”
크리스토스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그녀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농담이에요.”
그의 비난하는 듯한 눈동자를 바라본 건 경솔한 짓이었다. 현기증이 났다. 공기 중에 보이지 않는 흥분이 감도는 것 같았다. 피부가 따끔거리며 뜨겁고 팽팽하게 당겨졌다. 가슴이 부풀어 오르며 유두가 딱딱해졌다. 크리스토스 스테파니데스가 주위에 있으면 자신이 육체적으로 흥분한다는 걸 그녀는 알아챘다. 수치심으로 온몸이 화끈거렸다.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로리와 함께했을 때도 이러지 않았잖아.
그녀는 힘들게 크리스토스에게서 시선을 떼고 좀 더 안전한 주제에 집중하려고 요리를 시작했다.
“먹을 건 얼마나 있어요?”
베스는 그를 외면한 채 물었다. 그를 쳐다보았다가는 또다시 부끄러운 욕망에 사로잡히게 될 테고, 그 모습을 그에게 들킬지도 몰랐다.
“충분하오.”
크리스토스는 그녀가 민첩하고 솜씨 좋게 볶음 요리를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평생 자기 손으로 물 주전자 한 번 끓여 본 적이 없는 그로서는 입이 벌어지는 광경이었다.
“그 사람들이 우릴 여기까지 어떻게 데려왔을까요?”
다 된 음식을 식탁에 차리며 베스가 물었다.
“내 생각에는 화물로 위장해서 개인 항공기로 데려 왔을 것 같소. 이 섬에는 보트로 왔겠지. 집으로 오는 것치고는 이상한 방법이지.”
그가 빈정거렸다.
“집이요?”
“여기는 그리스에 있는 외딴 섬이오.”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의 번득이는 검은 눈동자가 그녀의 눈을 시험하듯 쏘아보았다.
“난 그리스인이오. 이곳 공기에서 내 고향 같은 냄새가 나거든.”
베스는 말없이 음식을 먹었다. 그는 자신만만한 걸로도 모자라서 오만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녀가 알지 못하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식탁에서 일어서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제 그만 자야겠어요.”
“푹 쉬어요.”
크리스토스가 침착하게 말했다.
“내일 새벽에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구조 신호를 보낼 모닥불을 피우려면 나무를 많이 모아야 하오. 운이 좋아서 연기가 눈에 띈다면 무슨 일인지 알아보러 오는 사람이 있겠지.”
좋은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말을 하지 않아도 자기가 얼마나 똑똑한지 그는 알고 있을 테니까. 그녀는 서늘한 침대로 들어가 편안한 매트리스에 눕자마자 금세 잠이 들었다.
잠든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이미 익숙해진 구릿빛 피부의 남자가 그녀를 깨웠다.
“이제 일어날 시간이오.”
그녀는 잠에 취한 눈으로 자신의 얼굴 바로 위에 있는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길고 풍성한 검은 속눈썹이 빛나는 눈동자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는 정말 잘생기고 멋진 몸매의 소유자였다.
그 두 가지를 한 번에 갖추기는 쉬운 일이 아닌데.
“이런 일은 처음이란 걸 알아줬으면 하오.”
크리스토스가 스스럼없이 말을 꺼냈다.
“섹스도 하지 않고 여자와 함께 잔 건 처음이거든.”
베스는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비꼬는 듯한 그의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챈 것이다. 그녀의 두 눈에 비난이 담기고 두 뺨은 불처럼 달아올랐다. 그녀는 시트를 몸 위로 끌어당기며 일어나 앉았다.
“지난밤에 당신도 이 침대에서 잤단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