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만의 에덴(The Stephanides Pregnancy)
린 그레이엄/U-079 ◆
당신을 갖고 싶어!
그리스의 거물인 크리스토스는 이유도 모른 채 지중해의 외딴 섬으로 납치된다. 하지만 그의 곁에 있던 베스도 함께 납치되었으니, 그녀를 유혹하려 마음먹었던 크리스토스에게는 절호의 찬스였다.
Chapter1.
제복 입은 여자는 크리스토스 스테파니스의 취향이 아니었다. 만약 그렇다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쫓고 있는 타블로이드판 신문 덕분에 온 세상이 알고 있을 것이다. 최고급 스포츠카에, 호화로운 저택과 눈부신 미녀들에 대해 전설적인 취향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의 초특급 미남 백만장자인 크리스토스 만큼 구미가 당기는 기사 거리는 없으니까.
그런데 지금 그의 관심을 끄는 여자는 이제까지 좋아하던 스타일과는 전혀 달랐다. 그 여자는 그가 있다는 사실조차 눈치 cowl 못한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차창이 코팅돼 있어서 내부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키가 크고 날씬한 그 여자는 몸에 딱 붙는 청록색 재킷과 치마를 입고 있었다. 평범한 구두 덕분에 상이라도 주고 싶을 만큼 쭉 뻗은 다리가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게다가 입고 있는 제복이 다리만큼이나 가는 그녀의 허리와 우아한 몸매를 돋보이게 했다.
“챙 있는 모자 쓴 저 여자 말이야. 입고 있는 게 군복인가?”
크리스토스는 육촌형인 스피로스 졸로타스에게 시큰둥하게 물었다.
풍채가 당당한 중년 남자가 차 밖을 힐끗 내다보았다.
“군인이 아니라 비행기 승무원 같은데?”
크리스토스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여자의 모자가 바람에 날려 길가에 떨어졌다.
그 여자가 모자를 쫓아가자 화려한 적갈색 머리카락이 등 뒤로 아치를 그리며 흩날렸다. 그녀는 크리스토스가 탄 차에서 겨우 몇 피트 떨어진 곳에서 모자를 집어 들었다. 그녀가 머리를 다시 말아 올리려고 애쓰는 동안 아름다운 머리칼이 봄 햇살을 받아 불꽃처럼 타올랐다.
그는 생기가 넘치는 화사한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그녀의 갸름한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반짝이는 눈동자와 도톰한 핑크빛 입술이 백옥처럼 섬세하고 매끄러운 하얀 피부를 강조해 주었다. 정말 넋이 나갈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였다. 크리스토스의 개인 비서인 티몬이 조용히 말했다.
“저 여자는 리무진 기사인 것 같습니다.”
순간 김이 샌 그는 짙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에게 기사란 직업은 하인과 마찬가지로 금지된 계층에 속하기 때문이었다. 진부하지만 누구라도 알 수 있을 만큼 확실하게 범퍼에 회사 로고를 부착한 벤틀리 운전석에 붉은 머리 여자가 올라탔다.
그 모습을 보며 크리스토스는 다시 한 번 눈썹을 치켜 올렸다.
“여자 직업치곤 특이하군.”
“저런 몸매라면 수입이 꽤 짭짤하겠는데?”
스피로스가 언제나처럼 야비하게 웃었다.
크리스토스는 불쾌했다. 스피로스와 함께 있으면 항상 불쾌했지만 어쨌든 그는 가족이었다. 크리스토스는 다른 어떤 것 보다 가족을 우선하도록 교육받았다.
“약혼을 생각하는 거냐?”
스피로스는 동생이 잠자코 있는 까닭을 넘겨짚고는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페트리나는 제 위치를 지키도록 교육을 잘 받았어. 혹시라도 아직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면 네가 확실히 가르쳐 주도록 해.”
“제 약혼 문제는 꺼내지 말아요."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내뱉는 크리스토스의 말투에는 차가운 경고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분노의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크리스토스는 스테파니데스 가문이고, 페트리나는 로디아스 가문이었다. 오랫동안 두 가문은 사업상 깊은 유대를 맺어 왔다. 이제 두 사람이 결혼으로 맺어지면 그 결속은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결혼은 부와 권력을 유지하고 다음 세대를 길러 내기 위한 방편일 뿐이었다. 어느 누구도 크리스토스가 성실한 남편이 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을 입 밖에 낼 만큼 분별 없는 사람 또한 없었다.
크리스토스는 육촌형의 무례한 행동에 기분이 상했다. 그는 자신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다른 속셈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비위를 맞추기 위한 입에 발린 소리는 언제나 무시해 버렸다.
스피로스도 항상 돈이 필요할 때만 그를 찾아왔다. 육촌 형은 실패한 투자 이야기를 늘어놓더니 멋진 사업 구상을 했는데 자금이 필요하다는 말을 꺼냈다. 그 작전이 먹혀들지 않자 자신이 사업에 실패하는 바람에 가족들이 고생하고 있다며 우는 소리를 해댔다. 스피로스는 평생 도박과 사치에 빠져서 살았다. 그는 마흔이 되도록 무위도식하는 인물이었다.
반 년 전에 크리스토스는 물류 회사의 런던 지사에 그를 취직시켰다. 거대한 스테파니데스 제국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수많은 계열사 가운데 하나였다. 놀고먹기만 한다는 스피로스의 명성을 일거에 무너뜨린 조치였다.
그는 육촌형이 도박판에 나쁜 친구들에게서 벗어나 새 출발 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형의 빚을 모두 갚아 주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크리스토스의 조부인 파트라스는 그 모습을 보고 하이에나처럼 웃어댔다. 어찌나 웃었던지 인공호흡을 해야 할 정도였다.
“스피로스는 패배자야. 거머리 같은 녀석이지. 어느 집에나 그런 녀석이 하나씩은 있기 마련이다. 다행히 우린 그 애의 가족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돌볼 만큼 부자야. 그러니 우리를 귀찮게 하지 않을 정도만 쥐어 줘라. 넌 그 애를 바꿀 수 없어.”
파트라스는 스피로스가 몇 달 안에 다시 옛날 생활로 돌아갈 거라는 데 내기를 걸기까지 했다.
물론 크리스토스는 그 내기를 받아들였다. 육촌형의 방종한 생활 태도는 아내와 딸들에게 고통과 치욕만 안겨주었다. 그런데도 왜 스테파니데스 가문이 돈을 대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크리스토스는 할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하지만 가족 가운데 누군가가 스피로스가 정신을 차리도록 손을 써야 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어쨌든 지금은 자신이 내기에 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내가 왜 공항까지 널 마중 나왔는지 궁금하겠지?”
스피로스는 잠시 말을 멈추고 심호흡을 했다.
“내 인생을 바꿀 마지막 기회를 준 네게 개인적으로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단다.”
갸름하면서도 강인해 보이는 크리스토스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티몬 앞에서 속마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놓는 형에게 당혹감을 느꼈다. 그는 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성과가 있었다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그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형이 무슨 말을 하던 판단을 바꾸지는 않겠지만 그 말에 진심으로 기뻤다.
“오늘 우리 집에서 저녁을 함께하지 않겠니?”
스피로스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크리스토스는 사실 다른 계획이 있었다. 아파트에서 기다리고 있는 정부와 업무 회의를 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던 하루를 완벽하게 마무리 할 생각이었다. 실크 시트 위에서 화끈한 밤을 보내면서.
그는 아쉬움을 느끼며 관능적인 상상을 떨쳐 냈다. 내 왕성한 성욕을 원망하는 수밖에. 스피로스는 이제껏 한 번도 주위사람에게서 인정받지 못했잖아.
녹음이 무성한 교외에 위치한 젬마와 로리의 아파트에 도착하기 직전까지도 베스는 여동생의 말에 절대로 열 받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래서 젬마가 투명한 푸른 눈을 크게 뜨고 연한 금발머리를 만지며 <살이 빠지는 건 나이 드는 증거>라고 비웃었을 때에도, 베스는 비스킷을 입에 쑤셔 넣으며 그저 미소만 지었다. 속으로는 <가슴이 좀 더 컸더라면>하고 아쉬워하면서.
젬마는 속 썩이는 차 엔진을 손보다가 부러진 언니의 손톱을 보고 공포에 찬 비명을 질러 댔다. 그때도 베스는 말없이 손을 식탁 아래로 밀어 넣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여동생은 청바지와 셔츠 차림의 베스가 남자아이처럼 보인다며 빈티가 난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렇지만 베스는 꾹 참았다. 내심 동생의 술수에 말려들지 않는 자신이 장하다고 격려하면서.
같이 식사를 하던 로리는 자신의 여자 친구와 언니 사이에 흐르는 살벌한 분위기를 불편해했다. 하지만 그가 화제를 바꾸려고 시도할 때마다 젬마에게 화낼 구실만 안겨 주었다.
베스는 로리를 힐끗 쳐다보았다. 기분이 상한 듯 긴장하고 당황한 모습이었다. 베스처럼 로리도 젬마가 왜 언니에게 틈만 나명 상처를 주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사실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못 살게 굴어야 할 쪽은 젬마가 아니라 베스였다.
베스와 로리가 약혼 발표를 목전에 두고 있던 3년 전 어느 날, 동생인 젬마는 로리의 아이를 가졌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부모님은 베스에게 그 사실을 의연히 받아들이라고 다그쳤고, 그녀는 그렇게 했다.
자신의 뒤통수를 치고, 자기보다 훨씬 예쁜 동생과 놀아난 남자에게 매달리고 싶은 마음을 드러낼 만큼 자존심이 없지는 않았다. 게다가 이미 삐걱거리고 있는 가족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기에는 젬마와 로리를 아끼는 마음이 너무나 컸다. 그렇지만 그런 일을 겪고 나서도 여전히 로리에 대한 마음을 접을 수 없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욱 불행하게 했다.
“내가 아는 여자들은 죄다 1주일 내내 파티에 가더라. 언니는 어떻게 아직까지 짝이 없니!”
젬마가 쏘아붙였다.
베스는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 올라서 희미한 눈썹 위로 드리워진, 불꽃처럼 붉은 머리칼 속으로 아무렇게나 손을 밀어 넣었다. 너무나 화가 나서 <네가 빼앗아 가기 전까지는 나도 짝이 있었어.>라고 소리칠 뻔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베스는 분노를 참느라 얼굴이 새빨개진 채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그러모아 거짓말을 했다.
“사무실에 남자가 있어. 요즘 만나는 중이야.”
젬마는 깜짝 놀라 언니를 바라보았다.
“이름이 뭔데?”
“조…”
베스는 식욕도 없으면서 음식을 내려다보았다. 거짓말을 하자마자 바로 후회가 되었다. 한 번의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로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조가 있는 건 사실이잖아. 아직 한 번도 데이트하지 않았지만 그가 청한 것도 사실이고.
“신입 직원이야. 우리 회사에 입사한 지 2주됐어.”
“몇 살인데? 어떻게 생겼어?”
젬마가 질문을 쏟아 냈다.
“20대 후반인데, 키가 크고 체격이 건장해. 금발에 피부는 희고.”
베스는 한 번이라도 그와 데이트를 하면 이 거짓말도 사실이 되는 거라고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젬마가 씩 웃었다.
“그렇다면 이제…”
“그 남자에 대해 얼마나 아는 거지? 이상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조심해”
로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갑자기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젬마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본 베스는 큰 소리로 신음할 뻔했다. 젬마는 로리가 조금이라도 언니에게 관심을 보이면 화를 냈다.
·베스는 어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방 안으로 기어 들어온 잠옷 차림의 아기를 안아 올리며 어색한 침묵의 순간을 어물쩍 넘기려고 했다. 이모 품에 안긴 작은 여자아이는 까르륵 웃으며 천사같이 예쁜 얼굴을 들었다.
조카인 소피는 부모의 좋은 유전자만 절묘하게 물려받았다. 아빠에게서는 짙은 갈색 머리카락을, 엄마에게서는 그 머리에 잘 어울리는 커다란 푸른 눈을 물려받은 것이다.
베스는 조카의 출현으로 분위기가 좋아진 틈을 타서 내일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한다며 동생 집을 나왔다.
혼슬로우에 위치한 비좁은 자신의 원룸 아파트에 돌아오자마자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젬마가 몹시 화가 났더구나.”
코니 미첼이 잔소리를 시작했다.
엄마의 잔소리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어서 넌덜머리가 났지만 베스는 다소곳이 전화를 받았다.
“저녁 먹으러 가지 말 걸 그랬어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분란만 일으켰지 뭐예요.”
“로리가 불쌍한 네 동생과 결혼만 한다면 아무 문제없을 거다.”
엄마가 볼멘소리를 했다.
“젬마는 이제 두 살배기 아기 엄마야. 그런데 결혼반지를 구경도 못했잖니! 그러니 불행할 수밖에. 좋은 아파트도 장만했겠다, 로리도 변호사로 일 잘하고 있겠다, 도대체 로리는 또 뭐가 필요하다니?”
베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그렇지만 너만큼 로리 배트램을 잘 아는 사람이 또 누가 있니!”
코니가 쏘아붙였다.
“로리가 젬마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
“요즘은 동거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베스는 부드럽게 엄마의 말을 끊었다.
“로리는 너하고 그렇게 살 생각이 아니었잖아?”
코니는 막내딸을 대신해서 화를 냈다.
“애 아버지가 네게 관심을 보이면 네 동생이 얼마나 상처를 받는지 아니?”
“로리는 내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요.”
베스는 피곤한 어조로 대꾸했지만 엄마가 자신의 말을 듣고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동생이 전화로 아까 일을 엄마에게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은 게 분명했다. 그것도 지극히 감정적으로.
코니 미첼은 막내딸에 대해 베스와 이야기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게 틀림없었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엄마는 베스의 감정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그 사실이 그녀를 마음 아프게 했다 동생 부부의 문제로 왜 내가 비난을 받아야 하는 거지? 왜 모두들 젬마가 못된 말을 해도 내가 관대하게 용서해 주기를 바라는 걸까?
엄마는 젬마가 응당 누려야 할 완벽한 결혼 생활을 누리지 못하는 게 베스 탓이란 걸 은연중에 드러냈다. 엄마의 비난하는 듯한 말투가 그녀를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젬마가 언니에게 화를 낼수록 베스는 다른 가족들과 멀어져 갔다. 몇 주 후면 똑같은 말을 엄마에게서 듣게 될 것이다.
젭마는 외모와 성격, 그리고 관심사까지 엄마의 판박이였다. 어린 시절부터 베스는 두 살 어린 동생이
모든 사람들에게서 사랑 받는 아이라는 사실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젬마는 옹알거리기 시작할 때부터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부모님은 젬마가 태어난 순간부터 모든 관심을 그녀에게 쏟았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부모님은 젬마를 광적으로 아꼈고, 소피는 동생의 왕관에서 반작이는 보석이었다.
그에 반해 베스는 항상 겉도는 아이였다. 옷에 대한 취향이나 다른 관심거리가 전혀 여자아이답지 않아서 엄마는 불만이었다. 사실 어린 시절에 대한 가장 행복한 기억은 돌아가신 할아버지에 관한 것뿐이었다. 할아버지는 구식 차를 조립하는 일로 소일을 하곤 했다.
다른 십대 여자애들이 남자 친구의 차를 타고 드라이브하는데 관심이 있는 반면에 말괄량이였던 베스는 그 남자아이들이 모는 차에 집착했다. 발육이 비교적 느린 베스는 동생이 자신보다 더 빨리 성숙하자 위축되었다. 젬마가 열세 살이 되자 남자아이들이 젬마 뒤를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베스는 열더덟 살 되던 해에 한 스포츠클럽에서 로리를 만났다. 처음에는 그냥 친구 사이였다. 그렇지만 그에게서 데이트 신청을 받기 오래 전부터 베스는 그에게 남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베스는 이미 다 지나간 일이라고 되뇌었다. 어떤 남자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다른 여자에게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게다가 로리가 자신보다 훨씬 생기 넘치는 섹시한 젬마와 사랑에 빠진 건 놀랄 일도 아니었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다. 가슴이 아렸다.
다음 날 아침에 출근해 보니 조 타일러가 자신이 운전할 차의 보닛을 윤이 나게 닦고 있었다. 정말 부지런도 하지. 베스는 자신이 조에 대해 본능적으로 거리감을 두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았다. 사실 그는 오만하고 우쭐대는 면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젊고 매력적이고, 게다가 미혼이었다.
조보다 잘난 것도 없으면서 잘난 척하는 남자들도 만나 봤잖아. 조는 겨우 2주 전에 임페리얼 리무진 사에 취직했다. 그는 불합리한 업무 시간이나 낮은 봉급, 혹은 깐깐하고 쌀쌀맞은 손님들에 대해 궁시렁대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처럼 언제나 혼자였고 말수가 적었다. 마지막으로 데이트한 게 언제였더라? 한참 되었지.
“실버스톤에서 열리는 차 경주를 보러 가자고 했죠? 그 제안이 아직도 유효한가요?”
조는 여전히 광을 내고 있었다.
“어쩌면…”
순간 그녀는 풀이 죽었다.
“그럼, 마음이 정해지면 말해 주세요.”
“잠깐, 내 말을 잘못 이해했군.”
조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 제안은 아직 유효하오.”
그는 바위처럼 단단한 체격이었다. 방금 전에 느꼈던 불안감이 다시 엄습했다. 없었던 일로 하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베스는 간신히 미소 지었다. 그리고 득의에 차서 우쭐대는 조의 모습에 화를 내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만약 조 타일러가 자신의 몸매에 그녀가 홀딱 반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게 엄청난 착각이라는 걸 곧 깨닫게 되리라.
크리스토스는 6주 만에 다시 남프랑스 발 런던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공항에 나와 있던 티몬이 그에게 밀봉된 봉투를 내밀었다. 그는 의아해하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게 뭔가?”
“스피로스 졸로타스 씨께서 공항을 출발하시기 전에 이 봉투를 전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크리스토스는 육촌형이 서명한 카드를 봉투에서 꺼냈다.
“내 생일도 아닌데.”
그는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티몬은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개인 비서가 주차장 맞은편에 있는 리무진을 가리키자, 그는 걸음을 멈췄다. 잠시 어리둥절해 있던 크리스토스는 신선한 기대감에 가슴이 설레었다. 그는 사진과도 같은 기억의 소유자였다. 한 달도 더 전에 스피로스와 함께 있을 때 넋이 나가 바라보았던 아름다운 붉은 머리 여자가 몰던 차였다. 그는 스피로스가 이런 고전적인 깜짝 선물을 준비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티몬이 다급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스피로스 씨께서 깜짝 선물로 1주일 동안 이 리무진을 대여하셨습니다. 저는…”
“흥분하지 말게.”
크리스토스는 허스키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운전석에 앉아 있는 여자를 바라보는 그의 대담한 짙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비록 운전기사 제복을 입었지만 완벽한 그녀의 매력이 감춰지지는 않았다. 허리는 두 뼘이 되지 않을 정도로 가늘고, 우아한 무용수처럼 유연하게 움직였다.
크리스토스는 그녀가 실크 네글리제를 걸친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저 여자를 가질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여자들은 그가 원하면 언제나 달려 왔으니까. 오히려 친구들의 아내나 파트너가 열렬한 구애의 신호를 보내는 바람에 자신의 남성적인 매력을 저주하곤 했다. 어쨌든 그의 매력이 통하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마지막 순간에 여행 일정이 바뀌어서 경호팀이 크게 걱정하고 있습니다.”
티몬이 불안한 듯 말했다.
“새로 고용한 리무진 회사를 제대로 검토할 시간도 없었거든요.”
“나는 백 퍼센트 만족하네.”
그의 관심은 온통 운전기사에게 가 있었다.
작은 머리가 기울어진 각도와 꼿꼿이 세운 등, 그리고 위로 살짝 들어 올린 섬세한 턱에서 그녀의 타고난 자신감이 느껴졌다.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을까? 그는 도전을 즐겼지만 동시에 현실적인 남자이기도 했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1주일 뿐 이었다.
“아주 작은 회사입니다. 제공하는 서비스 질이 이제까지와는 다를지도…”
크리스토스의 육감적인 입술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다시 말해서 기존의 서비스를 훨씬 뛰어넘을 수도 있겠군.”
티몬은 그제야 그의 심중을 간파하고 설득을 포기했다.
“자네는 사무실까지 따로 가야겠네.”
크리스토스가 주저 없이 덧붙였다.
순간 티몬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베스는 기분이 엉망이었다. 상사는 오늘 고객이 엄청난 부자 외국인이라며 왕처럼 떠받들라고 지시했다. 좋은 기회는 항상 남자 직원에게만 주던 상사가 자신에게 이 일을 맡긴 게 기뻤다. 그런데 공항으로 출발하기도 전에 스테파니데스의 경호원들이 임페리얼 리무진 사를 들이닥쳤다. 그게 시작이었다. 이제까지의 고객들은 개인 경호팀을 대동할 수준은 아니었다.
경호원들은 회사가 입주해 있는 초라한 건물을 보고 좋은 인상을 받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베스가 운전할 차량을 보고 코웃음을 치며 그녀의 운전 실력을 의심했다. 그리고 내내 철저한 감시를 받게 될 거라고 경고했다.
대책 없는 성차별주의자들이군. 도착한 뒤 갱 영화의 한 장면처럼 차고를 부산하게 점검하는 그들을 보며 베스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그때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다. 돌아보자 한 남자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베스는 그 남자를 보고 움찔했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큰 키에 늘씬한 몸매… 너무나 잘생긴 얼굴을 보자 가슴이 조여들어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곧 이성을 되찾아 충격으로 온몸이 마비된 듯한 상태에서 간신히 벗어났다.
“스테파니데스 씨?”
숨이 막힐 듯했지만 다행히 목소리가 조용하고 차분하게 나왔다.
“그렇소. 당신은?”
“베스 미첼입니다.”
그녀는 뒷좌석 문을 열고 그가 타도록 잡고 있었다.
“베스라…”
그는 음식을 맛보듯 그녀의 이름을 음미했다. 그녀는 그런 목소리를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허스키하며 깊고 남성적인 울림이 있었다. 오싹한 전율이 척추를 따라 흐를 만큼 섹시했다.
“그럼 그렇게 부르면 되겠군.”
“미첼이라고 부르십시오.”
베스는 두 사람의 지위를 강조하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크리스토스는 누군가가 자신의 말에 반박하는 데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속으로 놀라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멀리서 볼 때 생각한 만큼 키가 크지 않았다. 게다가 침착한 프로처럼 보이려고 애쓰고 있었다. 관찰자로서의 역할을 오랫동안 교육받은 그는 가냘픈 몸이 거의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미묘하게 떨리는 걸 눈치 챘다.
“난 베스라고 부르는 게 더 좋은데.”
크리스토스는 그녀가 자신을 올려다보도록 일부러 부드럽게 말했다.
그녀는 당황해서 머리를 뒤로 젖혔다. 밝게 빛나는 그의 검은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입술이 바싹 마르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의 도발적인 눈길은 도톰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입술에서 배회하다가 세차게 고동치는 가슴으로 향했다.
그는 다시 한 번 감상하듯 그녀를 훑어 내렸다. 그건 말보다 더 노골적인 성적 관심의 표현이었다.
베스는 충격을 받아서 숨 막히게 잘생긴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는 그가 차에 타자 문을 닫았다. 운전대를 잡은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어떻게 감히 날 시장에 나온 물건처럼 쳐다보는 거지? 어쩌면 내가 자기를 바라보는 눈길을 봤을지도 몰라. 그 생각을 하자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녀에게 크리스토스는 UFO만큼이나 환상에 불과했다. 베스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여자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반응인데, 왜 안 이렇게 당황하는 걸까? 그는 숨이 넘어갈 만큼 미남이잖아. 그가 환상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인지 확인하려고 그를 꼬집지 않은데 감사해야 해. 신경질적인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고 그녀는 통화 단추를 눌렀다.
“필요하신 게 없습니까?”
그녀가 물었다.
“냉장고에 생수가 없군.”
그가 말했다.
사실 베스는 냉장고를 가득 채운 청량음료를 보고 그가 만족할 거라고 생각했다. 문득 그가 아주 부자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부자들은 사소한 것에도 깐깐하게 나오는 경향이 있었다. 바로 여기 그 증거가 있지 않은가. 그의 섬세한 입맛은 소다수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녀가 첫 번째로 마주친 정비소 옆 길가에 차를 세우고 내리려고 하자 크리스토스가 운전석과 뒷좌석을 구분하는 유리칸막이를 내렸다.
“왜 차를 세운 거요?”
그가 물었다.
그녀는 놀라서 그에게 말을 하려고 몸을 뒤로 기댔다.
“생수를 드시고 싶다고 했잖아요. 제 상사가 어떤 희망사항이든 다 들어드리라고 해서…”
“내 희망사항이라…”
크리스토스 스테파니데스의 목소리는 벨벳처럼 부드러웠다.
그를 바라보자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노골적인 동물적 매력과 이국적인 구릿빛 용모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풍성한 머리칼은 연한 가죽 시트와 대비되어 더욱 짙은 색을 띠었다. 팽팽한 구릿빛 피부는 강인해 보이는 광대뼈를 감싸고, 그 아래로는 거만한 콧날과 윤곽이 아름다운 육감적인 입술이 이어졌다. 그녀는 자신을 여학생처럼 안절부절못하게 만드는 예리한 짙은 황금색 눈에서 간신히 벗어났다.
그녀는 정비소로 급히 들어갔다. 다리가 종이로 만든 것처럼 하늘거렸다. 머리가 아찔했다. 그래, 그가 집적거렸어. 어쨌든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잖아. 어떤 남자들은 내가 그런 걸 원한다고 착각하기도 하니까. 왜 멍청한 십대처럼 구는 거야, 베스? 그 사람이 날 이렇게 만든 거야. 계산대에서 몸을 돌리면서 그녀는 생각에 잠겨 눈을 깜박였다.
그때 커다란 나무 등걸 같은 수석 경호원이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
“우리에게 말도 없이 차를 세우라고 누가 그랬소?”
경호원이 씩씩거리며 따졌다.
“당신은 보호 조치도 없이, 문도 잠그지 않은 차 안에 스테파니데스 씨를 두고 내렸소. 어떻게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할 수 있소?”
경호원이 화를 내자 베스는 당황했다.
“아무도 허락을 구해야 한다거나 미리 그쪽에 말을 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일을 할 수 있겠소? 다시는 정해진 노선에서 벗어나지 말아요.”
그가 엄하게 말했다.
베스는 분노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차로 돌아왔다. 그녀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생수를 뒷좌석에 건넸다.
베스는 자신이 당한 일이 부당하다고 생각했지만 말을 꺼내기가 귀찮았다. 그녀는 주로 결혼식장이나 파티 장 같은 행사장으로 손님들을 태워다 주었다. 유명인사라고 해 봐야 마이너급인 고객이 단 한 번 있었다.
임페리얼 리무진 사는 VIP 고객 명단을 갖추고 있을 만큼 큰 회사가 아니었다. 그녀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백만장자 사업가를 모시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게다가 복잡한 경호 절차를 훈련받은 적이 없었다. 이 남자를 목적지로 빨리 데려다 줄수록 더 빨리 해방될 것이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소?”
크리스토스가 물었다.
“뭐라고요?”
베스는 표정도 목소리도 뚱했다.
“내 경호원이 당신에게 가던데…”
경호팀장인 돌리어스는 성격이 강해서 외교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기술이 부족했다. 크리스토스는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분노로 불타오르고 턱이 여성스럽지만 완고하게 굳은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차를 박차고 나가서 싸우려면 체격이 비슷한 남자 중에서 하나 고르라고 돌리어스에게 말해 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깜짝 놀랐다.
“그건… 맞아요. 왜 길에서 벗어났는지 묻더군요.”
그녀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돌리어스의 언행은 1톤이나 되는 벽돌이 그녀 위로 떨어진 것 같은 충격을 주었지만.
크리스토스는 비로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해했다.
“경호원 때문에 화가 났군.”
“아뇨.”
그녀는 지금 자신이 모셔야 할 또 다른 고용주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크리스토스는 그녀가 거짓말을 하자 화가 났다. 화가 난 게 분명한데 아니라고 하다니.
베스는 감정을 숨기는 데 서툴렀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차를 몰면서 쓸데없이 이런 저런 스위치와 다이얼을 조작했다. 그녀가 좌석 사이를 가로막은 칸막이를 올리자 그는 기분이 더 나빠졌다.
베스는 지난 한 주가 얼마나 끔찍했는지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조 타일러가 접근했을 때 자신의 육감을 무시한 대가를 치른 것이다. 그 일을 생각하자 온 몸에 한기가 돌았다.
첫 데이트가 끝날 무렵 조는 차를 세우더니 그녀를 길거리에서 만난 창녀처럼 다루었다. 베스가 반항하자 그는 갑자기 폭력적으로 변했다. 정말 끔찍했다.
그런 일을 겪은 자신이 크리스토스에게 쩔쩔매는 게 이해가 갔다. 조에게 별로 끌리지도 않았으면서 유혹할 여지를 준 게 잘못이었다. 그렇다면 크리스토스 스테파니데스는? 그는 침실 벽에 붙은 연예인의 포스터처럼 안전한 환상이지. 이런 생각을 하며 그녀는 가속 페달을 세게 밟았다.
크리스토스는 여자들에게 한 번도 이렇게 철저히 무시당한 적이 없었다. 뒤통수에 대고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어서 그녀와 통화하려고 카폰을 들었다.
“다음 우회로에서 빠져나가요. 그러면 호텔이 나올 거요. 거기서 잠시 쉬도록 합시다.”
“일정에 있는 일인가요?”
베스가 물었다.
“난 이번 주에 아무 일정도 없소. 일하는 게 아니니까.”
그녀는 또다시 정해진 노선에서 벗어나면 경호원들 사이에 무슨 소동이 벌어질지 상상하며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승객의 표정을 엿보고 싶은 걸 참았다. 십대 여학생처럼 생판 모르는 남자에게 환상의 나래를 펼치기에는 스물다섯 살이라는 나이는 너무 많았다. 베스는 교외에 있는 우아한 호텔 앞에 차를 세우고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난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몇 시간 동안 차에 갇혀 있는 걸 싫어하오.”
그의 낮고 풍부한 목소리가 들렸다.
“커피나 한 잔 합시다.”
베스는 그를 보지 않겠다는 결심도 잊은 채 반짝이는 그의 눈동자를 보려고 고개를 들었다.
“고맙습니다만… 전 차에서 대기하겠습니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건 부탁이 아니오. 명령이오.”
그녀는 단호한 그의 태도에 당황해서 크리스토스를 바라보았다. 재빨리 고개를 숙인 그녀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는 어쩌면 운전사가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만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운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차 문을 잠그고 그의 뒤를 따랐다.
경호팀장이 그들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크리스토스는 그리스어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용하게 이어진 대화는 짧게 끝이 났다. 경호원은 얼굴이 창백해지며 황급히 사과를 하고는 뒤로 물러섰다.
호텔 내부는 시계가 재깍거리는 소리만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화려하게 치장한 내부는 시골에 있는 개인 저택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베스는 왠지 불편했다. 그렇지만 크리스토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접수 계원에게 말을 하는 그의 모습은 태어난 순간부터 온갖 수발을 받은 사람답게 자연스러웠다.
“함께 앉읍시다.”
크리스토스는 갈색 손을 들어 커다란 대리석 벽난로 옆에 놓인 팔걸이의자를 가리켰다.
베스는 안락해 보이는 난로의 붉은 불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적절하지 못한 것 같아요.”
“무엇이 적당한지는 내가 결정하오.”
“그렇다고 제 자유 시간까지 결정하는 건 곤란해요. 이게 공식적인 휴식이라면 말이죠.”
그녀가 당당하게 말했다.
“그 시간을 어떻게 쓸지는 제가 결정합니다.”
“당신 같은 성격의 여자는 채찍으로 다루어서는 안 되겠군.”
크리스토스 스테파니데스가 천천히 말했다.
“무릎 꿇고 부탁하지. 나와 함께 커피를 들겠소?”
무릎을 꿇고? 그녀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그의 태도는 매우 침착했다. 그는 결코 굴복이라는 말을 모르는, 자신감이 넘치는 남자였다.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거지?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걸까?
“왜요?”
그녀는 머리를 뒤로 젖히며 대담하게 물었다. 에메랄드처럼 빛나는 그녀의 눈에는 의혹이 가득했다.
왜 나와 싸우려 드는 거지? 처음에 눈길을 마주친 순간부터 크리스토스는 그녀의 욕망을 알아챘다. 그는 십대 이후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불같은 욕망에 익숙했다. 그리고 베스에게서도 그런 욕망을 봤다고 생각했다. 다만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지금처럼 애쓴 적이 없었다.
그동안 다른 여자들이 알아서 적극적으로 나오는 바람에 내 솜씨에 녹이 슨 모양이군. 지금 이 여자는 말이나 행동에 조금만 실수가 있어도 꽁무니를 뺄 것처럼 보였다.
“내 동료처럼 느껴지거든.”
그는 울컥하는 기분을 삼키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베스는 당황했다. 이전에는 어떤 고객도 정해진 선을 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왜 남다르게 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제복은 구식이고 아주 수수한데.
“결혼은 했소?”
그가 갑자기 물었다. 그리고는 베스가 망설이는 걸 보고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해 했다.
“동거라도 하고 있소?”
“아뇨, 그렇지만…”
그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그녀의 등에 손을 얹고 소파 쪽으로 밀었다.
“그럼 함께 마십시다.”
돌기둥처럼 버티던 그녀도 마침내 항복하고 말았다.
크리스토스는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 있는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최근 자신이 참석한 사교계의 결혼이야기를 쏟아 놓았다. 그는 매우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베스는 그의 갸름하고 매력적인 얼굴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에 관한 모든 게 그녀를 사로잡았다. 커피를 마셨지만 아무 맛도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크리스토스의 부탁으로 모자를 벗기까지 했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의 눈길에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베스는 몇 가지 질문에 대답했다. 나이는 스물다섯 살이고 미혼이며 임페리얼 사에서 일한 지 3년이 되었다고. 그리고 항상 차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그녀는 크리스토스가 예의바르게 대화를 나누려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베스는 지금껏 자신의 외모가 아주 수수하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가 자신에게 정말로 끌리고 있으며 모종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더 이상 그의 의도를 착각할 수 없게 되자 베스는 주저 없이 모자를 쓰고 일어섰다.
“전 기사입니다.”
그녀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저는 그 외의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크리스토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얼음처럼 차가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거짓말을 하고 있군.”
그녀의 하얀 얼굴이 벌개졌지만 여전히 고개를 꼿꼿이 쳐들고 있었다.
“그림을 사지 않더라도 감상할 수는 있는 거니까…”
“지금 상황이 불편할 수도…”
“상황 같은 건 없어요. 있다 해도 불쾌한 상황일 뿐이고요.”
베스는 자신의 행동을 변명으로 얼버무리려는 그의 태도에 화가 났다.
“이런 일로 일자리를 잃고 싶진 않아요, 전 생계를 위해 운전을 할 뿐이에요.”
“난 속물이 아니오.”
“아니라고요?”
섬세한 적갈색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그녀의 녹색 눈이 조롱과 분노로 번쩍였다.
“아직은 아니죠. 데이트를 신청하신 것도 아니니까요. 하지만 제가 방금 받을 뻔한 초대는 지저분한 성적인 유혹에 불과했어요. 그리고 고맙지만 사양하겠어요.”
크리스토스는 그녀의 모자를 다시 벗기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이 관심을 가져 주는 영광을 베풀어 준데 대해 베스가 무릎 꿇고 감사할 때까지 온갖 지저분한 성적인 짓을 하고 싶었다. 자신의 말고 행동 중 어느 쪽이 그녀를 화나게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너무나 공개적인 장소여서 제대로 대꾸조차 할 수 없어서 더욱 억울했다.
맞은편에 있는 돌리어스와 경호원이 이 상황을 빠짐없이 보았을 것이다. 크리스토스는 자존심이 땅바닥에 떨어진 데다 억울해서 화가 머리끝까지 난 채 베스가 호텔을 걸어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화가 나기는 마찬가지였다. 겉만 번지르르하고 계산적이며 무자비한 악마 같으니라고. 운전석에 올라타서 문을 닫았다. 아직도 온몸이 분노로 떨렸다.
크리스토스는 정말 그런 사탕발림으로 날 호텔 방에 데려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커피를 함께 마시자고 한 것도 다 계획적이었던 거야. 내가 바보같이 보인 걸까? 아니면 헤픈 여자로 보였나? 엄청나게 많은 팁을 줄 생각이었을까? 아니면 끝내 주는 잠자리?
옆 거울에 차를 향해 걸어오는 크리스토스의 모습이 보이자 그녀는 똑바로 앉았다.
그는 고집스레 입을 다문 채 스스로 문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베스를 시험하려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는 분노와 짜증으로 뒤범벅이 된 채 마침내 차에서 내려 뒷문을 열어 주었다.
“고맙소.”
크리스토스가 말했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처럼 누군가를 미워해 본 적이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는 한 시간 가량 운전에만 집중했다.
리무진은 고속도로를 벗어나 한가한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그녀는 최고 속도로 차를 몰았다. 트랙터 한 대가 경적을 울리며 가까스로 차선을 바꾸었다. 느려터진 트랙터가 경호원들 앞을 가로막으면 얼마나 놀랄지 생각하자 웃음이 나왔다.
두 사람 사이의 가로막이 윙윙거리며 내려갔다.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크리스토스가 비꼬는 기색이 역력한 투로 말했다.
“지저분한 섹스는 내 취향이 아니오.”
“논쟁을 하고 싶으시면 제가 더 이상 당신차를 운전하지 않을 때 다시 오세요. 그리고 그때는 공손하게 대해 주세요.”
베스가 말했다.
“호텔에서… 당신은 공손했소?”
그의 빈정거리는 말에 그녀는 차를 세우고 그를 때려눕히고 싶어졌다.
“정도가 심하시군요.”
베스가 쏘아붙였다.
“어떻게 생겨 먹은 사람이 자기 운전기사를 유혹하죠?”
“완전히 속물이 되려고 작정한 사람이겠지.”
크리스토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바로 그때 한 남자가 웅크리고 있는 게 보였다. 도로에 뭔가가 있다는 경고였다. 어떤 물체가 햇빛을 받아 금속처럼 회색으로 빛났다. 그걸 지나치는 순간 타이어가 차례로 펑크가 났다. 그 반동으로 거대한 차체는 균형을 잃고 길에서 벗어났다. 차는 엄청난 힘으로 옆에 있는 수로를 들이받았다. 온몸을 망치로 내리치는 것 같았다. 충돌과 동시에 운전석 문이 열렸다.
베스는 조 타일러가 고개를 들이밀자 꿈을 꾸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지?
“조?”
그녀는 사고의 충격에서 서서히 벗어나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잘 자, 베스.”
그의 손에 총 같은 물체가 들려져 있다는 걸 알았지만 이미 늦었다. 놀랄 틈도 없이 옆구리 부분이 따끔하더니 갑자기 젤리로 변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조는 그녀를 짐짝처럼 옆으로 밀어 버렸다. 기절하기 직전에 그의 말소리가 들렸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네가 틀림없이 내 여자 친구에게 군침을 흘릴 거라고 생각했지. 이제 너희 둘 다 놀랄 일이 벌어질 거야.”
눈앞에 검은 장막이 쳐지는 것 같았다. 그녀의 몸이 축 늘어졌다. 잠시 후 그녀의 승객도 같은 처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