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스 인과 사랑을-10화 (10/10)

10

“내가 너라면 어떻게 했겠냐고?” 1주일 뒤 이오네하고 통화하다던 미스티는 생각에 잠겨되물었다. “나라면 딱 잡아뗐겠다”

“언니...”이오네가 신음했다.

“남자들이 감당 못하는 일이 몇 가지 있어” 쌍둥이  언니가 지극히 침착하게 일러주었다. “결혼 서약을 한 지 몇 시간도 안 돼 그를 버릴 생각이었다고 인정하는 게 정확히 거기에 해당하지! 알렉시오는 아주 로맨틱한 남자야. 그걸 모르겠니? 결혼식날 교회 계단에서 네게 꽃을 안겨 준 남자야. 네가 자기를 여학생처럼 좋아한다는 걸 기분 좋게 받아들인단 말이야. 이제 네 감정을 솔직히 고백해야 할 것 같아”

“내가 자기에게 얼마나 마음이 있는지 아마...”

“나도 많은 사람들에게 마음이 있지만 그들 모두를 사랑하진 않아. 알렉시오는 평생 여자가 아쉬웠던 적이 없던 남자였다가 너하고 결혼한 뒤로는 처지가 역전된 거야!”

“맞아” 이오네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질 것 같아 잠긴 소리로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요즘 일에만 묻혀 살아. 이번 주에는 거의 본 적도 없어. 물론 그의 탓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런다고 도움이 되지도 않아”

미스티가 탄식했다 “나와 프레디 언니를 장례식에 부르지 그랬어. 의지도 되고 직접 만나서 얘기해 봤더람녀 더 나았을 텐데”

“난 괜찮아” 이오네는 미노스 가키스가 유언장에 밝힌 대로 얼마 안 되는 가까운 친지들만 장례식에 불렀다. 언니들도 부르고 싶었지만 그런 상황에 낯선 사람들을 만나면 칼리오페가 어떤 반응을 보일 지도 고려해 봐야 했다.

이미 가장 친한 친구가 된 솔직한 언니에게  문제를 털어놓고 나니 소득은 없지만 위로는 되었다. 이오네는 통화를 끝낸 뒤 꽃으로 예쁘게 꾸며 놓은 발코니로 나갔다. 짧은 한 주일동안 너무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부터 써온 방을 둘러보다 곰인형과 오빠를 기리기 위해 특별한 디스플레이를 하기로 했다. 이제는 소녀 취향을 벗어날 때라는 결론을 내리고 변화도 주었다. 지금 그녀는 두 달 전의 그녀가 아니었던 것이다.

두려움을 떨치고 한꺼번에 훌쩍 성장한 느낌이었다. 그때의 기억이 그렇게 가슴 아프지만 않았어도 결혼식날 달아날 때 입었던 어처구니없는 소녀 취향의 옷차림을 떠올리고 미소 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은 정착할 수 있다는 게 즐거웠다. 물론 곰인형 에드워드는 2층에 있는 방으로 옮겨 놓았다. 그렇게 하고 나니 그동안 살아온 집에서 새 출발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알렉시오는 유언장이 발표된 뒤 섬을 떠났다.  아테네에 있는 가키스 본사로 날아가 장인 회사를 효율적인 21세기 사업체로 개편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가 하루에 18시간씩 일한다는 것도 알고 장례식에 참석해서도 왜 금방 떠나야 했는지 이해하지만 그런다고 둘의 결혼 생활에 대한 불안감이 덜어지진 않았다. 한 침대를 쓰는 건 고사하고 키스를 나눈 지도 1주일이 넘었다. 끝까지 이런 식으로 살아야 하는 걸까? 알렉시오가 점점 더 멀어져 가다 결국에는 사랑하는 남자가 더 이상 그녀와 함께 하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렇긴 해도 렉소스가 지금보다 아름다워 보인 적은 없었다는 사실을 이오네는 쓸쓸하게 인정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청록색 바다를 배경으로 푸른 언덕에 이 섬에 자생하는 화살 모양의 키 큰 사이프러스가 점점이 박혀 있는 경관이 숨을 앗아갔다. 칼리오페가 아테네에서 살기 위해 이곳을 떠날 거라는 소식으로 사람을 놀라게 하기 전까지 이오네는 자신이 렉소스 섬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닫지 못했다.

“네 아버지가 바라셨고 네 엄마 아만다가 집안일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이 집에서 할 일이 있었던 거란다” 고모가 정확하게 사실대로 지적했다. “하지만 난 친구들과 늘 가가이 지낼수 있는 도시에서 살고 싶었어. 오빠가 살아 계셨으면 펄쩍 뛰실 일이지만 이제 내 집을 장만한다는 생각에 소녀처럼 마음이 설레는구나”

이오네에겐 칼리오페의 인생이 얼마나 제한적이고 공허했는지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 계기였다. 고모는 이오네 자신이 갈구했던 자유를 결코 누려 보지 못했다. 그 중년 여인은 한평생을 오빠네 집 살림을 맡아보며 보냈고, 그건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역할이었기 때문에 성격이 비뚤어진 것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이오네가 경직된 태도를 버린 후로 둘 사이는 좋아졌고, 오늘 오후에는 친구들을 초대하고 싶다는 부탁까지 해왔던 것이다.

그 모임에 잠시 얼굴이라도 내밀어야 한다는 걸 깨닫고 이오네는 한숨이 나오는 걸 참으며 우아함이 절로 배어나는 심플한 청색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어제는 알렉시오와 한 마디도 나누지 못해 격식을 차린 대화에 가담하기엔 정서적으로 무척 불안정한 상태였다. 정말이지 조그만 일에도 울음을 터뜨릴까 봐 겁이 났다.

이오네가 반갑게 미소를 머금고 고모의 손님들을 맞고 있을 즈음 알렉시오의 헬기가 렉소스 섬에 내려앉았고, 동시에 부두에 정박한 페리에서 내려 터벅터벅 긴 언덕길을 올라와서는 별장까지 이르는 가파른 차도로 접어드는 남자가 있었다. 마르고 지적인 얼굴에 불안한 표정을 짓고 앙상한 어깨 위로 재킷을 걸친 낯선 사내는 이윽고 걸음을 멈추더니 숨을 골랐다.

알렉시오는 현관 쪽으로 향하다 사내가 거기 서 있는 걸 발견하고 누구와 있더라도 눈에띄는 자연스런 예의를 갖추고 다가가 자신을 소개했다.

젊은 남자가 경계하며 말했다 “제 이름은 야니스 카나보스입니다. 저기.. 이오네를 만났으면 해서 찾아왔습니다”

남자의 말에 크게 움찔한 알렉시오는 잠시 자신의 입에서 무슨 말을 튀어나갈지 자신이 없었다.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순간에 그가 가장 두려워하던 악몽이 현실로 나타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부의 아들. 아버지 때문에 강제로 헤어져야 했던 이오네의 유일한 사랑이었다. 즉시 공격적인 본능이 솟구쳤다.

“제 이름을 아시는 것 같군요” 야니스는 꿈쩍도 안 했지만 무척 불안해 보였다.

경관을 보여 주러 칼리오페가 손님들을 데리고 로지아로 나가자 이오네는 거실에 홀로 남아 있었다. 문이 열리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야니스를 보는 순간 믿을 수가 없어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반쯤 일어섰다. 어릴 때부터 알던 청년의 긴장된 얼굴로 온통 눈길이 쏠려 알렉시오가 뒤따라 들어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정말이지 너무 놀라 야니스가 부를 때서야 정말 그라는 걸 받아들였다. 그녀는 양손을 내밀고 급히 앞으로 쫓아나가 그의 손을 잡았다.

“당신이군요”

“그래, 나야” 야니스가 그녀만큼 감정을 가누지 못하고 응얼거렸다.

“어디 있었어요?” 반색을 하면서도 눈물이 앞을 가려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코소보에서 의료지원단으로 활동하고 있었어. 휴가차 집으로 돌아왔다가 네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지”

로지아에서 거실로 들어서던 칼리오페 가키스는 뜻밖의 손님과 둘의 재회를 알아보고 경악과 불만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놀란 눈길로 알렉시오를 쏘아보니 급히 그의 곁으로 쫓아가 작은 소리로 따졌다. “카나보스 녀석이 여긴 웬일인가?”

“이오네를 만나러 왔답니다”

“그래서 허락해 줬다고?” 칼리오페가 제정신이냐는 듯이 조카사위를 바라보았다.

도의심이 알렉시오의 원초적인 본능을 이겼다. 가키스 집안을 찾아온 야니스의 용기는 가상했지만,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광경은 그가 베푼 관용에 대한 보상이 되지 못했다. 순수한 형벌이자 고문이엇다. 이오네가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을, 그것도 남자를 저렇게 긴장을 풀고 꾸밈없이 대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기쁨의 눈물과 웃음 사이를 오가며 옛날 남자 친구와 깊은 대화에 빠져 있었다. 알렉시오는 이오네가 남편이 들어온 줄도 모르고 있다는 뼈저린 자각에 그대로 서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오네는 야니스에게 자리를 권할 때서야 문 앞에 꼿꼿이 서 있는 알렉시오를 발견했다. 그의 얼굴을 흘끗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었지만 생각에 잠긴 어두운 표정이 그녀의 입술에 막 피어오르고 있는 안도의 미소를 잠재웠다.

“알렉시오...” 그가 언제부터 저기 서서 그녀가 야니스를 만나 법석을 떠는 걸 지켜보고 있었을까 싶어서 무안하고 당황한 나머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두 사람이 할 얘기가 많을 거요. 이따 식사 시간에 봅시다” 알렉시오는 방 한가운데에 그녀를 멀거니 세워 놓고 다시 방을 나갔다.

야니스가 떨떠름해하는 고모와 좀더 의례적인 인사를 주고 받자 이오네는 그와 단 둘이 얘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우리 나가서 좀 걸어요” 이오네는 고모의 분개한 눈길에 부드러운 얼굴로 응수하고 야니스와 함께 방을 나갔다.

두 사람은 정원을 따라 걷다 야니스가 이 섬에 오래 머물 시간이 없다는 걸 알고는 해변으로 내려갔다. 야니스는 평소 자립심이 투철한 성격답게 그녀가 본토까지 비행편을 제공하겟다는 걸 거절하고 생필품을 부리기 위해 2시간 동안만 이섬에 정박해 있는 페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알렉시오 크리스토우라키스하고의 결혼은 네가 내린 결정이야?” 부두로 돌아나 있는 해변을 따라 걷는 동안 야니스가 물었다. “그 때문에 널 만나 봐야 할 것 같았어. 아버지의 강요에 못 이겨 결혼했을까 봐 걱정했거든”

“알렉시오를 사랑해요” 이오네는 간단히 대답했다.

야니스가 미소지었다. “ 다행이다. 그 사람이 널 열렬히 사랑하고 있다는 건 이미 알아봤지!”

“그래요?” 이오네는 야니스의 확언에 자신감이 생겨 흐뭇했다.

“내가 누군지 알아보는 순간 위협적으로 날 노려봤거든. 내가 너를 만나는 걸 허락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어. 우리 사이를 어떻게 말했길래 그 사람이 그런 식으로 반응하는거야? 넌 날 사랑한 적도 없는데” 야니스가 슬픈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일깨웠다. “기껏해야 우린 우정이 깊은 친구 사이였잖아. 만사가 결국은 좋은 방향으로 풀릴 수 있는데 한 사람만 그렇게 보지 않는다는 게 묘하지 않아?”

카나보스 가족이 이 섬을 떠나 새 출발이 할 수 있도록 아버지 몰래 코스마스 오빠가 도와주긴 했지만 부모님이 이 섬으로 돌아오고 싶어한다는 야니스의 말에 이오네는 기꺼이 환영한다고 그를 안심시켰다. 이오네는 그들이 서둘러 섬을 떠난 뒤로 판자로 막아 놨던 마을에 있는 그의 집을 새로 단장해 바로 쓸 수 있도록 환기시켜 놔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야니스가 페리를 타고 떠나가는 걸 지켜보다 생각에 잠겨 느릿한 걸음으로 돌아갔다.

알렉시오하고의 문제에서 자존심 때문에 숨는 짓은 이제 그만둬야 해. 그녀는 침울하게 인정했다. 칼리오페의 폭로가 둘의 결혼 생활을 엉망으로 만든 걸 바로잡기 위해 진정으로 어떤 노력을 해봤던가? 1주일 전에 자지 않고 기다린다는 말을 한 것이 어떻게 화해의 손짓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지? 그건 사랑을 나누기 위한, 섹스로 그들의 조각난 관계를 감추기 위한 유혹일 뿐이었는데. 그녀는 지독한 수치심을 느끼며 인정했다. 두 사람이 처한 상황에 비열하게 피상적으로 대응했으니 거만하게 일축해 버린 그를 탓할 수가 없었다.

신이 인간에게 언덕 너머에 있는 부두까지 꿰뚫어볼 수 있는 쌍안경을 만들도록 허락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생각에 빠져 있던 알렉시오는 독한 브랜디를 세 잔째 마시다 언덕을 올라오고 있는 이오네의 작은 체구를 발견했다. 안도감에 몸이 날아갈 듯했다. 그는 그녀가 야니스와 함께 떠나는 걸 보았다. 하지만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지옥을 경험한 듯했다. 그녀가 야니스와 목가적인 꿈에 젖어 나란히 손을 잡고 페리에 올라타는 상상도 해봤다. 그녀를 떠나게 놔두는 게 그로서는 평생 가장 힘든 일이었지만 그녀를 위해 그렇게 했다. 그러나 이오네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 그 일은 자신이 지금까지 한 일 중에서 가장 어리석고 미친 짓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이오네가 계단을 올라오는 동안도 못 참고 알렉시오는 벌써 넓은 층계참을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돌아왔군...”

그가 뻔한 사실을 왜 굳이 언급할까 의아해하며 강렬한 금빛 눈을 바라본 순간, 이오네는 제대로 생각하는 능력을 잃고 말았다. 지난 며칠간의 외로운 불안감이 안에서 복받치자 그에게로 몸을 던지는 일이 없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했다.

“떠나지 않는 거요?” 알렉시오가 목쉰 소리로 물었다.

이오네는 그가 무슨 상상을 했는지 알지 못한 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시오는 팔을 뻗어 긴 손가락으로 이상하리 만치 부드럽게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더니 천천히 머리카락 속으로 갸름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심장이 목 안 어딘가에 걸려 쿵쿵 울리는 통에 그녀는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러다 그녀를 느닷없이 와락 끌어안은 그는 넓고 육감적인 입술로 불화살이 과녁에 꽂히듯 그녀를 관통하고 있던 열망을 폭발시켰다.

지난 한 주간의 모든 혼란이 미친 듯이 부딪혀 오는 맹렬한 키스에서 출구를 찾았다. 알렉시오가 그녀를 번쩍 들어 안더니 곰인형 에드워드가 천진난만하게 앉아 있는 방을 지나 침실로 걸어갔다. 그녀는 알렉시오가 넥타이를 잡아 빼고 정장 상의를 벗어 던지는 등 한꺼번에 너문 많은 일을 하려 들면서도 똑같은 열정으로 키스를 성공적으로 이어가는 동안, 침대 위에서 산소를 한껏 들이마시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오....” 이오네는 그의 열정에 몹시 흥분되고 더할 나위 없이 기뻤지만 얼떨떨하기도 하여 놀란 소리를 토했다.

“당신이 그 페리를 탔더라면 두 사람을 ?아가서 그 훌륭한 의사 선생을 찢어 놓았을 거요. 당신을 보낼 수 없었단 말이오. 그럴 순 없었어!” 알렉시오가 으르렁거렸다. “내가 집안으로 들어오라고 했을 때 그 친구가 뭐랬는 줄 아오?”

“음.... 아뇨” 이오네는 자신이 페리에 탄다는 얘기가 영 이해가 안 돼 우물거렸다. 내가 야니스와 달아날 줄 알았다는 건가? 이 남자가 제정신인가?

“자기한테 중요한 건 당신이 행복해지는 것뿐이라고 하길래 그 위선적인 녀석을 멋지게 때려눕힐 뻔했지!” 알렉시오가 기세등등하게 으르렁거렸다. “나도 당신의 행복을 원하지만 오직 나하고만 그렇게 되길 바란단 말이오. 난 당신 남편이니까. 그리고 나와 행복하지 않다면 행복해지도록 당신이 노력했으면 좋겠소. 당신은 그런 녀석의 여자가 아니란 말이오. 그는 다이아몬드나 곰인형 같은 건 상대하지 않을 친구니까”

“알아요. 야니스는 진지한 사람이라서 남의 아내와 달아나는 짓 같은 건 절대 안 해요. 곧 간호사와 약혼할 거라는 얘기도 했어요”

알렉시오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아주 좋은 사람이에요. 어릴 때부터 친했었고, 늘 그와 얘기하는 게 좋았지만 2년 전에도 야니스를 사랑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이오네가 쓸쓸히 고백했다. “특별한 사람이고 무척 예의 바르고 친절하긴 하지만 그와 장난 삼아 연애를 했던 것뿐....”

“장난 삼아?” 알렉시오가 큰소리로 되물었다.

“그래서 아빠가 그보다 심각한 관계라고 넘겨짚고 그를 섬에서 내쫓았을 때 아주 지독한 기분이 들었던 거예요. 그 모든 게 다 나 때문이었으니까” 이오네는 후회막급이라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알렉시오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 친구는 당신을 사랑했소?”

“처음엔 반했지만 함께 하는 미래를 생각해 볼 만큼 둘 사이에 공통점이 없다는 걸 본인도 느꼈던 것 같아요”

“난 그 친구가 당신을 내게서 빼앗아가려고 영원한 사랑을 선언하러 온 건 줄 알았잖소” 알렉시오가 비난하듯 내뱉엇다.

“그러니까 그를 따라 페리로 가도록 내버려두고는 내가 안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는 거군요” 그제야 이해가 되자 이오네는 어이없는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남편이 그래요?“

알렉시오의 조각 같은 광대뼈 위로 검붉은 홍조가 확 퍼져 나갔다.

이오네는 발끈 화가 치밀었다. “난 당신 아내예요. 도대체 어떻게 한순간이라도 내가 야니스와 떠날 거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난 당신이 우리 둘 중에 한 사람을 선택하길 바랐던 거요” 알렉시오가 엄중하게 말했다.

감정이 극에 달한 고백에 이오네는 충격으로 멈칫했다.

“나와 함께 사는 걸 당신 의사로 선택하지 못했잖소” 그녀가 반박할 것처럼 예쁜 입술을 벌리자 알렉시오는 괴로운 눈길로 그녀를 응시했다. “아니, 반박하지 말고 한 가지 질문에만 대답해요, 당신 아버지가 나와 꼭 결혼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는 동안 침묵이 쿵쿵거리며 주위를 에워쌌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고는 벗어날 길이 없었다. 눈물이 핑 돈 이오네는 떨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여 그 고통스러운 사실을 인정했다.

알렉시오의 올리빛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알고 있었어야 하는데, 그러니까 내가 옳았군. 당신은 선택권이 없었던 거고 내가 공항으로 쫓아갔을 때야 갑자기 마음을 바꿔 우리 결혼을 유지해 보기로 마음먹었던...”

“당신은 지금 실제보다 안 좋게 말하고 있...”

“아니, 당신이 강요에 못 이겨 나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보다 안 좋은 건 없지” 알렉시오가 거친 듯 깊게 울리는 소리로 인정했다.

깊은 충격이 담긴 눈을 한 그가 본능적으로 움츠러드는 걸 보자 이오네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알렉시오가 그녀의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대 말을 막았다.

“당신은 순종적인 그리스의 딸로 키워졌던 거요. 그렇소, 처음엔 날 버리고 떠날 생각이었지. 그런데 내가 막아서 혼란해 지기 시작하자 우리 결혼을 최대한 이용하는 게 당신으로선 더 쉬웠던 것 아니오?”

이오네는 지난 9일 동안 알렉시오가 어떤 생각을 해왔는지 마침내 깨닫고 아연했다. 모든사실을 조합해 둘의 관계에서 그녀를 힘없는 희생자로 묘사하는 한 장의 큰 그림을 만들어 낸 것이다.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그녀는 확신에 차 강력하게 반박했다. “사실은 지금까지 내가 한 일 중에서 가장 힘들었어요. 나더러 순종적인 그리스의 딸이랬지만, 그 당시는 아무것도 개의치 않았어요. 어떻게 언니를 찾아내 새 인생을 살까 계획하고 꿈꾸면서 여러 해를 보냈어요. 그러다 당신이 끼여들자 갑자기 나 자신이 뭘 가장 원하는지 모르게 됐어요. 공항에서도 당신 생각밖에 안 났다고요. 내가 달아난 걸 알면 당신이 어떤 기분일까 하는 생각밖에요. 당신 곁에 있고 싶어서 남았던 거예요....”

“그게 사실이오?” 알렉시오가 비범한 눈으로 염치없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우리가 어떻게 시작했는가는 문제되지 않아요. 우리가 결국 어디로 가느냐가 중요하지” 이오네는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 그리고 난 당신과 함께 가고 싶어요. 그뿐이에요. 다른 건 아무것도 없어요. 당신이면 돼요”

“그게 야니스일까 봐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르오” 알렉시오는 긴장감 때문에 팽팽하게 당겨진 얼굴로 그답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물어봤지.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면서 어떻게 당신 인생에 걸림돌이 될 수 있을까? 나와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걸 아는데 어떻게 당신을 내 곁에 잡아 둘 수 있을까?”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면서? 수천 마리의 나비가 뱃속에서 풀려나 파닥거리는 느낌이었다. 이오네는 얼빠진 얼굴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난 당신이 크리스탈과 함께 당신 마음도 묻어 버린 줄 알았어요...”

“비탄에 빠졌던 건 사실이지만 죄책감일 뿐이었소. 당신을 만나고서야 그걸 이해했지” 알렉시오는 인상을 썼지만 벌꿀색처럼 짙고 솔직한 눈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크리스탈이 죽었을 때 우리 약혼은 깨지기 직전에 있었지만 내가 너무 완고해 그걸 받아들이지 못했던 거요. 그녀를 두고 가족들과 의견 대립이 심했는데 내가 실수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거든. 그렇다고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오. 우린 오랜 시간을 함께 했기 때문에...”

“그녀와 결혼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던 것뿐이죠” 이오네는 그의 솔직한 말에 가슴이 저려 대신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가 하지 않은 말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크리스탈과의 관계에 대해 식구들이 그렇게까지 반대만 안 했어도 애초에 그녀와 약혼하는 일도 없었을 거라는 얘기였다.

“당신을 사랑하고 나서야 내가 결코 사랑에 빠져 본 적이 없다는 걸 알았지” 알렉시오가 잠긴 소리로 시인했다. “나 자신보다 당신 생각을 더 많이 했으니까. 지극히 기본적이긴 해도 그게 가장 정확한 표현일 거요”

“그리고 아주 특별한 표현이고요” 이오네는 목멘 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우리가 결혼하기도 전에 벌써 당신이 비행기를 예약해 뒀다는 말을 듣고 망연자실했지. 당신이 그러고 있는 동안 난 우리 결혼식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예약 사실을 알고는 큰 타격을 받았던 거요. 어떻게 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없었거든. 지난 한 주 동안 그런 생각을 안 하려고 발버둥치며 일에 파묻혀...”

그가 사랑한단다. 정말 사랑한단다. 그러나 그가 자기 감정을 드러낼수록 그녀는 더 울고 싶어졌다. “당신은 정말 지독히 냉담했어요”

“사랑하는 여자가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걸 알았을 때 어떻게 해야겠소? 그 여자가 왜 그래야 했는지 이해하기까지 하는데 뭐라고 하겠소? 얼마나 마음이 상했는지 모르오. 그 문제를 해결 못하는 나 자신이 바보 같았지만.... 난 그 문제를 해결하고 싶지 않았단 말이오” 알렉시오가 솔직하게 말하자 그녀는 더욱 눈물이 났다. 그가 와락 끌어안더니 침착함을 잃고 서툴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당신이 사실대로 털어놨을 때 더는 당신과 함게 있을 자격이 없는 것 같고 당신을 내 아내로 여길 자격도 없어 보였소. 당신이 무슨 선택을 할 수 있었겠소?”

“하지만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이오네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을 많이 사랑해요. 당신을 잃을까 봐 두려워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던...”

알렉시오가 그녀의 상체를 뒤로 젖혀 눈물이 글썽한 눈을 강렬하게 들여다보았다. “당신도 날 사랑한다고?”

이오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울고 있는 거요?” 알렉시오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당신이 한 주일 내내 얼마나 참담한 기분이었을까 생각하니 너무 마음이 아파서요”

알렉시오가 돌연 교묘한 동작으로 그녀를 다시 베개 위로 쓰러뜨렸다. “엉뚱한 소리는 말고... 지금 내가 안 됐다는 생각에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거요?”

“아, 아니에요” 그녀는 더욱 힘겹게 짜내듯이 말했다. “지난 한 주일 동안 오히려 나 자신이 더 딱하게...”

“정말 날 사랑하오?” 알렉시오는 아직도 확신이 없었다.

“당신에게 푹 빠졌단 말이에요!” 이오네는 그가 믿지 않자 화가 나 복받치는 눈물을 흘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알렉시오의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번졌다. “얼마만큼?”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을 정도로 홀딱 반했단 말이에요” 이오네는 행복이 샘솟는 걸 느끼며 남편의 애정 어린 눈 속으로 녹아들었다.

“내 인생에 결코 다른 여자는 없을 거요” 알렉시오가 맹세했다. “당신을 너무도 사랑하니까...”

그의 키스에서 그녀는 갈망과 사랑을 맛보았다. 알렉시오의 애정 어린 눈을 바라보며 그에게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그가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지 깨닫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었다. 둘 다 그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허겁지겁 옷을 벗어 던졌다. 침착한 태도라고는 찾아볼 길 없이 서로의 품에 안긴 그들은 열정에 취해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고 관계가 끝난 뒤에는 서로의 품에 안겨 새롭게 얻은 친밀감을 즐겼다.

“음...” 말할 수 없이 편안하고 아늑한 기분을 느낀 이오네는 생각에 잠긴 듯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며 속삭엿다. “<내 것이 당신 것이다>라는 견해는... 어떡해요?”

알렉시오는 순간적으로 긴장하더니 아주 곤혹스런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당신을 어떤 식으로든 이용할 거라는 생각을 견딜 수 없었거든. 자존심에서 나온 소리였지. 당신 고모의 말을 듣고 난 뒤로는 그나마 얼마 남지도 않은 자존심이기는 했지만. 난 재산을 노리고 결혼한 게 아니란 말이오”

이오네는 이해한다는 눈길로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난 바로 당신에게서 행운을 발견했어요” 그녀가 강조했다. “숨쉬는 공기가 필요하듯 당신이 필요해요”

그의 멋진 미소가 그녀를 깊이 감동시켰다. “당신을 열렬히 사랑하지만... 장담하는데 내게 5년이나 10만 주면 당신을 먹여 살릴 수 있을 거요!”

“난 당신이 그렇게 긴 시간 동안 나와 떨어져 일하는 건 싫어요!” 이오네는 깜짝 놀라 이의를 제기했다.

알렉시오가 허스키한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를 자기 위로 끌어올렸다. “당신이 내 눈앞에서 1시간만 벗어나도 난 당신이 보고 싶은걸. 내 말 믿어요”

그녀는 마음이 환해지는 걸 느끼며 그 말을 믿었다. 온몸으로 그를 믿었다.

1년 반 뒤, 이오네는 런던 저택의 아이방에서 휘장을 드리운 한 쌍의 아기 침대를 자애롭게 번갈아 가며 들여다보았다.

아들 딸 쌍둥이를 낳은 지 3개월이나 지났는데도 그녀의 성취감은 식을 줄 몰랐다. 아폴로는 커다란 갈색 눈에 짙은 고수머리를 지닌 사내아이로 젖 먹는 시간을 빼고는 세상 모르고 잘 잤다. 녀석은 먹기 위해 잠이 깰 뿐이라고 알렉시오가 놀릴 정도였다. 디안사는 오빠보다 작음 몸집에 잠은 덜 자면서 더 많은 관심을 요구하는 아이였다. 그러나 둘 다 벌써부터 서로 판이한 성격으로 인해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었다.

이오네의 입가에 짖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세 자매가 몇 년 내에 각자 아이를 낳아 비슷한 또래를 이루면 아주 멋질 거라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그런 포부를 굳이 남편들에게는 알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물론 프레디는 아들 벤과 카림을 시작으로 유리하게 출발하여 최근에는 인형 같은 딸 아지마가지 낳았다. 미스티는 코너의 말동무가 되어 줄 두 번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이오네는 쌍둥이를 가진 걸 알고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아들 딸을 한 번에 얻는 건 과자에 꿀을 입히는 격이었다.

그렇다고 알렉시오까지 그런 건 아니었다. 두 아이를 가지는 바람에 마지막 몇 주 동안 아내가 몹시 힘들어한는 걸 보고 그는 크게 걱정했지만, 다행히 출산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분만할 때는 알렉시오가 안절부절못했기 때문에 언니들이 분만실 밖에서 기다려 주는 게 얼마나 든든했는지 몰랐다.

언니들과의 친밀한 관계는 이오네의 외로웠던 생활을 보상하고도 남는 커다란 기쁨이었다. 생부인 올리버 서전트는 만나서 유쾌한 분이라고 느꼈지만, 강하게 끌리는 혈육의 정을 느낄 수 없어 못내 아쉬웠다. 그러나 아이가 없는 그의 아내 제니하고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언니들에 관한 한 그런 실망감은 없었다. 프레디는 아주 정이 많은 성격이고 미스티는 활력과 유머 감각이 넘쳤으며, 둘 다 똑같이 깊은 애정으로 이오네에게 큰 의기가 되어 주엇다.

반 년 전 알렉시오는 아내와 쌍둥이 언니를 위해 스물네 번째 생일 파티를 성대하게 치러 주었다. 그날 저녁 미스티는 낡은 신발 상자를 꼭 끌어안고 생기 넘치던 평소와 달리 약간 긴장된 모습으로 도착했다.

“고백할 게 있어” 미스티가 자매들에게 죄지은 사람처럼 털어놓았다. “두 사람에게 알리지 않았던 우리 얘기가 한 가지 있어. 우리 어머니 캐리는 내가 아직 어렸을 때 재혼한 적이 있어. 내가 엄마에 관해 알아낸 사실 중에 가장 상처가 컸던 일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에게 말해 줄 수 없었어. 가정을 꾸미면 나를 수양가정에서 데려가겠다고 찾아올 때마다 안심시켜 놓고는 나라는 아이가 있는지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해 버렸거든!”

자매들에게 그런 사실을 감추고 있는 게 점차 편치 못하던 차에 그들의 생모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알아내는 것으로 미스티는 그동안의 침묵을 보상하고자 했다. 어머니 캐리가 언제, 어디서 운명했는지 가장 먼저 안 사람은 프레디였지만 어머니가 쌍둥이 딸을 버리고 떠난 뒤부터 시내 하숙집에서 홀로 죽어간 사이의 세월에 대해서는 다들 모르고 있었다. 미스티는 혹시 어머니를 기억할까 싶어 그 하숙집 주인을 추적해 찾아냈다. 그 노인이 기다리라고 하면서 낡은 신발 상자를 들고 나왔을 때 그녀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 사람 유품을 버리는 것도 못할 짓 같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달리 줄 사람도 없었지. 이 사진 속의 아이들이 누굴까 언제나 궁금했는데” 할머니가 설명했다.

상자 안에 담긴 유품은 그들 모두의 심금을 울려 그들을 세살에 내놓고는 번갈아 가며 그들 모두를 버렸던 여인에 대한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낡은 봉투 안에는 아기 때 사진과 그들 각자의 머리카락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가장 놀라웠던 건 봉투가 3개가 아니라 4개라는 사실이었다. 네 번째 봉투에서는 고동색 머리카락을 지닌 아장거리는 아이 사진이 나왔다. 아이의 수줍은 듯 사랑스러운 미소가 그들의 가슴을 비틀어 놓았다. 이 여자아이도 그들처럼 제 엄마에게 버림받았을 것이 틀림없었기에...

“어딘가에 우리 여동생이 또 하나 있는 것 같아” 프레디와 이오네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평소처럼 미스티가 가장 먼저 말문을 열었다. “엄마이 두 번째 결혼에서 태어난 것 같은데 남편이 누군지도 모르고 그 시절에 대해 아는 것도 없어서 그 아이를 찾아낼 단서가 전혀 없어. 그 아이도 우리 같은 언니들이 있는지조차 모를 거야! 아직 우리보다 많이 어릴 텐데... 엄마가 20대 초반에 우릴 가졌으니 말이야. 우리 동생이 아는 사람 하나 없이 혼자 수양 가정에서 자라고 있으면 어쪄지?”

알렉시오로서는 미스티가 던져 놓고 간 최악의 시나리오 때문에 이오네가 눈물 흘리는 걸 닦아주는 게 기쁠 리 없었다. 레오네, 알렉시오, 야스파르는 아내들의 동생인 그 어린 소녀를 찾아내는 데 총력을 기울일 것을 맹세했다. 그러나 그 빠진 세월 동안 어머니 캐리의 행방을 알아내지 않고는 추적할 단서가 없어 지금까지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여린 어깨에 억센 팔이 드리워지자 이오네는 쓸쓸한 생각에 잠겨 있다가 화들짝 현실로 돌아왔다. “우리 쌍둥이들을 또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군” 알렉시오가 짐짓 나무라는 투로 탄식했다.

“왜 아니겠어요? 내가 엄마가 됐다는 게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데”

“당신은 멋진 엄마라니까” 알렉시오가 그녀를 안심시켰다.

이오네는 남편이 흐뭇하고 만족한 얼굴로 아들과 딸을 바라보는 걸 지켜보며 미소를 지었다. 사진으로 본 버림받은 넷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말은 꺼낼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 동생을 추적할 작은 단서라도 찾아보려는 노력이 다른 자매들의 남편들처럼 별 성과가 없었다는 사실만 알렉시오에게 일깨워 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오네는 꿈에 그리던 남자에게서 지속적이고 진정한 사랑을 발견할 수 있어서 자신인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알렉시오가 바라볼 때마다 자신의 감정이 그와 똑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사람은 한때 그녀의 오빠 소유였던 런던 저택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처음 이사 왔을 때는 실내 장식이 다소 엉뚱해 보이는데다 지하에 있는 엄청난 수영장을 보고 알렉시오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조명과 폭포, 미니 인공 섬까지 갖춘 시설이 영화 세트 못지 않았던 것이다. 집의 나머지 부분을 개조하여 살다 보니 주말에 이용하는 시골 별장과 함께 이제 런던은 그들의 진정한 고향이 되었다.

렉소스 섬에 있는 저택은 휴가와 이따금 회의가 있을 때 이용하거나 프레디와 야스파르 부부나 미스티와 레오네 부부에게 로맨틱한 휴가를 보낼 수 있도록 빌려주었다. 또한 집이 워낙 넓어서 자매들 가족이 모두 모이기에 적당했다. 종종 알렉시오의 부모님과 여동생들을 그곳으로 초대해 대접하기도 했다. 이오네는 시댁 식구들을 언니네 가족들만큼이나 좋아하게 되었고 시어머니하고는 놀랍도록 친밀한 관게를 유지하고 있었다.

알렉시오가 그녀의 두 손을 잡고 층계참으로 끌어내더니 거칠게 만족한 신음 소리를 내며 그녀의 입술을 급습했다. “당신이 그리웠지” 그가 탁한 소리로 중얼거리고는 두 번째 키스로 대답을 들을 기회를 날려보냈다.

“아폴로와 디안사도 보고 싶었고....” 세 번째 키스로 이오네의 입에서 그에 대응하는 신음 소릴 뽑아낸 알렉시오는 그걸 초대로 받아들이고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서 두 사람의 침실로 들어갔다.

이오네는 그가 이렇게 간절히 집에 돌아오고 싶었다는 사실에 기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소유욕 깊은 사랑의 눈길로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며 만족하게 지어 보이는 아주 섹시하고 탐욕스러운 미소에 뭔가 있는 듯 보여서 이오네는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나중에 얘기해 주지...” 알렉시오의 미소가 이제는 어렴풋이 승리에 도취된 기색마저 띠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아름답다고 칭찬한 데 이어 언제나 넋을 잃게 만드는 방법으로 셔츠를 벗는 ?에 이오네는 질문할 시간을 놓쳐 버렸다.

“당신을 열렬히 사랑하오, 크리스토우라키스 부인” 알렉시오는 1시간쯤 뒤 아직도 이오네를 꼭 끌어안고 나른하게 속삭였다. “내가 당신의 진가를 모를 거라는 생각은 절대 하지 말아요”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하여 백일몽에 잠긴 이오네는 전적으로 진가를 인정받고 있다는, 정말이지 축복 받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가끔 난 무척 이기적이거든. 오늘밤 한시바삐 전해 주고 싶은 소식이 있어 돌아왔는데 당신을 보는 순간 오늘 밤도 당신이 밤새도록 언니들과 전화에 매달려 있을 것 같아서 발뺌을 했지” 알렉시오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을 맺었다.

“뭐라고요?” 알렉시오가 일어나 앉자 이오네는 베개에 몸을 기대고 무슨 소린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아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알렉시오가 편하게 사용하라고 그녀의 무릎에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 네 번째 칼턴 자매를 추적할 수 있을 것 같은 단서를 찾아냈거든...”

“어머나!” 이오네는 흥분해서 외쳤다. “뭘 알아냈어요?”

알렉시오가 그녀의 생모가 두 번째 결혼에서 썼던 성을 알아냈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동안 이오네의 초록빛 눈은 빛을 더해 갔다. 이제 성을 알아냈으니 그들의 여동생을 찾아내는 일은 분명 시간 문제였다.

“레오네 형님이 약 꽤나 오를걸”

“남자들은 왜 그렇게 경쟁적이에요?” 이오네가 나무랐다.

“여자들은 아니고?” 생기와 웃음이 가득한 금빛 눈이 그녀를 훑어보았다. “그럼 내가 어떻게 내년에는 당신이 임신할 차례라는 걸 알고 있는지 말해 보겠소?”

이오네는 얼굴을 붉혔다. “그건 경쟁하는 게 아니에요”

알렉시오가 게으른 호랑이처럼 기지개를 켜며 싱글거렸다. “걱정 말아요. 두 형님들과 난 그런 과정을 전적으로 즐기자는 데 동의했으니까”

미스티 언니의 집으로 전화를 거는 중에 이오네는 그의 갈빗대를 장난스럽게 때렸다. 그가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사랑해” 그가 잠긴 소리로 속삭이자 행복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그녀는 이번만큼은 언니들과의 통화에 평소처럼 그리 오래 매달려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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