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스 인과 사랑을-9화 (9/10)

9

이오네의 충격을 받아 망연자실한 얼굴로 알렉시오에게 잡혀 있는 손을 홱 빼냈다. “아빠가 죽어가고 있는데... 당신은 그걸 알면서도 알려 주지 않았단 말이에요?”

“당신이나 당신 고모에게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셨소. 몇주 뒤에 수술을 받을 예정이었는데 이제 그럴 수 없게 됐다는군” 알렉시오가 깨끗이 다 털어놓는 동안 이오네는 충격 받은 눈길로 책망하듯 계속해서 그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아버님 말씀대로 고비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을 줄 알았는데”

“고비...”이오네는 벌벌 떨리는 몸으로 통제가 안 되는 인형처럼 그에게서 휙 돌아섰다. 마지막 해외 출장에서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아파 보이긴 했지만 언제나 자신을 열심히 몰아붙이는 분이셨기에 과로 탓으로 돌렸던 기억이 났다. 어떻게 그걸 알아채지 못했을까? 알렉시오는 어떻게 그걸 미리 알려 주지 않았을까?

“당신에게 마음의 준비를 시킬 시간이 아직은 많은 줄 알았소” 알렉시오가 역력히 후회하는 투로 털어놓았다.

“그래 놓고 나더러 정직하지 못하다고요?” 이오네는 죄책감에 미칠 것 같아 몸서리를 치며 쏘아붙였다. 몇 달 전에 자기 문제에만 빠져 악화돼 가는 아버지의 건강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죄책감, 아버지를 공개적으로 망신시키고 노엽게 만들더라도 가키스 집안을 영영 떠난 작정이었다는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당신 아버지하고의 약속을 깨고 싶지 않았소” 알렉시오는 억눌린 저음으로 털어놓으며 표정 많은 양손을 그리스식으로 활짝 벌렸다.

“그러니까 우리의 결혼식에서 아빠까지도 나보다는 권리가 더 많은 거군요!” 이오네는 다시 한 번 거칠게 쏘아붙였다. “당신은 내게 충실하는 것보다 아버지와의 약속을 중요시했지만 이건 우리 집안 문제고.... 당신은 가키스 집안 사람이 아니에요!”

이오네는 가랑잎처럼 오들오들 떨며 푹 쓰러졌다. 자신의 말이 공정하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녀가 어떻게 살았는지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아버지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가장 오래된 기억의 뿌리가 있는 곳이고 언제나 그럴 것이기 때문에 자신을 그리스 사람이 아닌 무엇으로는, 가키스 집안 사람이 아닌 존재로는 생각해 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미스티 언니를 찾아낸 게 기쁘기는 했어도 친부모 얘기를 나눌 때 이상하게 초연한 기분이었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23년이란 세월은 그냥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 저녁이면 렉소스에 가 있을 거요” 알렉시오가 알려주었다.

이오네는 뭉클한 가슴으로 힘격게 침을 삼켰다. “아빠는 수선떠는 걸 싫어하시죠. 왜 나나 고모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셨는지 이해가 가요.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이오네는 자정이 넘어서야 의료진이 대기하고 있는 아버지의 방을 나왔다. 아버지는 병세가 너무 안 좋아 그녀가 침대 옆에 앉아 있는 내내 한 번도 그녀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고 듯했다. 언제나 집안을 호령하던 아버지가 저렇게 약할 걸 보고 이오네는 큰 충격을 받았다. 아니오, 호전되진 않을 겁니다. 의사가 냉정하게 통고했다. 아버지는 심한 심장마비를 일으켰다고 했다.

오빠의 상태에 큰 충격을 받고 방안에 틀어박힌 채 아직 조카 부부와 얘기를 나눠 보지도 않은 고모를 찾기엔 너무 늦은 것 같아 이오네는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아버지의 변호사들과 간부들이 그녀의 남편이 도착하길 눈이 빠지게 기다렸던 터라 이곳에 도착한 뒤로 몇 시간이 흐르는 동안 알렉시오를 보지 못했다. 알렉시오는 이제 가키스 제국의 공식적인 책임자인 탓에 모든 시간과 관심을 쏟아야 할 터였다.

거실로 들어서던 이오네는 발코니로 난 문이 활짝 열려 있고 그곳에 정장 상의와 넥타이를 벗어 던진 채 구릿빛 목이 보이도록 딱딱한 셔츠깃을 터놓은 알렉시오가 서 있는걸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아직도 할 일이 많은 줄 알았는데...”

“몇 시간 있다 다시 시작해야지” 알렉시오가 두 팔을 활짝 벌려 긴장된 그녀의 눈에 눈물이 핑 돌게 만들었다. 그녀는 목적지를 찾아 날아가는 비둘기처럼 그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그리고 달빛 속에서 당신의 곰인형들을 잠시 감상하지 않고 어떻게 잠자리에 들 수 있겠소?”

재치 있는 말에 이오네는 작게 목 멘 웃음을 터뜨렸다. 가끔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게 아플 정도로 그를 너무도 사랑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그녀는 크고 힘찬 몸으로 꼭 안겨들어 단단한 근육질의 몸에서 빠져 나오는 온기와 힘을 얻은 뒤 익숙한 그의 체취를 힘껏 들이마셨다. “코스마스 오빠가 인형 장식장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는데...”

“동생의 응석을 다 받아주는 너그러운 오빠였군”

이오네는 쓸쓸한 초록빛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도 곰인형을 좋아하지만 정작 흠뻑 빠졌던 사람은 오빠였여요”

알렉시오는 날렵한 까만 눈썹 사이에 주름을 만들었다. “코스마스라고?”

이오네는 한숨을 내쉬며 속삭였다. “오빠는 게이였어요...”

알렉시오는 깜짝 놀란 눈으로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가키스  집안의 또 다른 비밀이죠” 이오네는 잔뜩 비꼬듯이 털어놓았다.

“당신 아버지도 알고 계시오?”

“물론 모르시죠. 아빠는 늘 오빠에게 신붓감을 데려오라고 재촉하셨어요” 달빛을 받아 하얗고 갸름한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죽기 전 몇 달 동안 오빠는 엄청난 스트레스 속에서 살았지만 아빠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어요”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지 상상이 가는군”

“서로 다른 면에서 ” 이오네는 입술을 바르르 떨며 불안정한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오빠와 난 아빠에게 큰 골칫거리였는데.... 지금 저렇게 되신 걸 보니...”

“쉿” 알렉시오가 억센 팔로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누군가를 잃는 일은 언제나 죄책감을 불러일으키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수 없는 거요. 나도 그런 사실을 일찍 받아들였다면 크리스탈의 죽음을 좀더 성숙하게 받아들였을 텐데. 대신 그녀에게 일어난 일을 내 탓으로 돌렸지”

이오넨느 뜻밖의 고백을 듣고 놀라 긴장했다. “왜요?”

알렉시오가 뒤에 있는 연철 난간에 사뿐히 등을 기댔다. 얼굴은 팽팽히 당겨 있고 까만 속눈썹이 생각에 잠긴 금빛 눈을 가리고 있었다. “그녀가 죽던 날 우린 말다툼을 벌였소” 표정많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결혼식 날짜를 잡자는 걸 내가 거절했거든. 같은 문제를 놓고 우린 여러 차례 언쟁을 벌였지. 그날 밤은 코르푸의 해변 별장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오네는 강렬한 호기심을 안고 그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왜 날짜를 잡지 않았는데요?”

“우리가 떨어져 지내는 동안 그녀가 다른 남자와 잤거든” 알렉시오가 긴 갈색 손으로 숱 많은 검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넓은 어깨를 움직였다. 그가 퉁명스럽게 털어놓은 뜻밖의 사실에 이오네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동안 그의 턱에 뻣뻣이 힘이 들어갔다. “그녀와 함께 있고 싶었지만 그 일을 잊을 순 없었지. 코르푸에 온 손님들은 그녀의 친구들이었는데 다들 종일 술을 마시고 승마를 즐겼지만 나 따분해서 일을 하기 위해 다른 방으로 들어가 벼렸지. 그게 살아 있는 그녀를 본 마지막이었소”

이오네는 침을 꿀꺽 삼킨 뒤 뭐라고 위로해야겠는데 적당한 말을 생각해낼 수 없어 서툰 몸짓으로 그의 팔을 어루만졌다.

“자기들끼리 우르르 몰려나가 한밤중에 수영장으로 갔던 모양이오. 크리스탈이 안 보인다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지. 내가 죽인 기분이었소” 알렉시오가 조용하게 감정이 격앙된 소리로 고백하여 이오네를 흔들어 놓았다.

“아니에요....” 이오네는 그가 크리스탈 덴비를 극복하는 데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아 이번엔 그녀 쪽에서 그를 꼭 끌어안으며 강력하게 부인했다. 그 마지막 말다툼과 약혼녀가 자기를 필요로 할 때 그 자리에 없었던 걸 자기 탓으로 돌렸던 것이다. “ 끔찍한 사고였어요.... 코스마스 오빠의 비행기가 추락한 것 같은 사고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술을 마셨으니 물에 들어가게 놔두는 게 아니었소. 그건 엄연한 사실이지” 알렉시오가 침울하게 박반했다. “하지만 더 이상 그 문제로 자책하지 않을 거요. 크리스탈은 조종 터무니없는 모험을 무릎썼고 충고에 귀를 기울이는 법이 없었으니까”

이오넨느 긴장한 탓에 도톰한 아랫입술을 물어뜯었다. “그녀하고 비교하면 난 무척 따분한 여자로 보였겠네요...” "지금 농담하오?“ 알렉시오가 생생한 웃음이 반짝이는 눈으로 고개를 뒤로 젖히고 그런 말 말라는 듯이 소리내어 웃었다.  ”당신이 다음엔 또 어떤 행동을 할지 난 감을 잡을 수 없는걸!“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다시는 우리 결혼을 저버리고 떠나지 않을께요”

“당신이 그럴 만한 꼬투리를 잡히지 않을 거요” 낮게 잠긴 소리로 장담한  뒤 능숙한 솜씨로 기분 좋게 입을 맞춰 오자 온종일 그녀를 괴롭혔던 괴로운 불안감이 잠깐 동안이나마 스러졌다.

8시에 눈을 떠보니 알렉시오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이오네는 아버지의 주치의에게서 차도가 없다는 얘기를 듣고 아침을 먹으러 갔다.

칼리오페가 화려한 나무 조각으로 장식한 식당에 앉아 있었다. 이오네가 인사를 건네자 노부인은 분개하여 앙상한 뺨을 붉히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래, 귀하신 몸께서 이제야 우리에게 관심을 가져주는구나”

“아빠가 편찮으신 줄 알았으며 훨씬 더 빨리 집으로 돌아왔을 거예요” 이오네가 항변했다.

칼리오페가 입을 오므렸다. “거짓말. 나한텐 안 통해”

흘끗 쳐다만 봐도 고모가 평소의 신경질적인 기분 이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 비난을 듣고 이오네는 정말 난감한 얼굴로 긴장했지만 적대적인 언쟁에 말려들고 싶지 않아 잠자코 있었다.

그러나 두 여인이 볼 수 없는 곳에서 막 문지방을 넘던 알렉시오는 같은 비난을 듣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는 몹시 비판적인 눈길로 멀리서 칼리오페 가키스를 향해 얼굴을 찡그렸다.

칼리오페의 시선은 조카에게 쏠려 있었다. “네 남편에게 쫓겨나 파리에서 돌아온 티포와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결혼식을 치른 지 몇 시간도 안 돼 네가 달아났다....”

뒤늦게야 고모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챈 이오네는 흠칫 놀라 창백한 얼굴로 재빨리 해명하기 시작했다. “그 일은 모두 정리됐어요. 제가 바보 같은 실수를 했지만 알렉시오와 난 이제 행복해요”

“실수? 그걸 그렇게 부르니?” 그리스 여인이 감동 받지 못한 듯 눈썹을 치켜올랐다. “내가 티포를 시켜서 다 조사해 봤다. 알렉시오 크리스토우라키스와 결혼하기 9일 전에 벌써 런던행 비행기표를 예약했더구나!”

앞으로 나서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던 알렉시오는 급히 이오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게 사실이오?” 방금 들은 얘기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기도 전에 아내에게 물었다.

갑자기 힘이 빠진 이오네의 손에서 유리잔이 기울어져 윤기나는 식탁에 오렌지 주스가 쏟아졌다. 알렉시오의 느닷없는 등장에 고모가 놀란 소리를 내는 동안 이오네는 마치 그대로 얼어붙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남편이 고모의 비난을 들었다는 걸 깨닫고 공포에 질린 채 알렉시오의 짙은 금빛 눈에 붙잡혀 방 저편을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질문을 했던 것 같은데” 알렉시오가 무섭도록 조용하게 재촉했다.

의자를 뒤로 밀치고 칼리오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카의 충격 받은 얼굴과 알렉시오의 위협적인 부동자세를 겁에 질려 번갈아 쳐다보던 여인은 우물우물 사과의 말을 던지고 서둘러 방을 나갔다.

이오네는 떨리는 손으로 유리잔을 내려놓고 비척거리며 일어났다. “알렉시오...”

“입 다물어요” 알렉시오는 쌍날 검처럼 예리하고 조용히 말을 잘랐다. “내가 뭘 묻고 있는지 알잖소. 우리가 결혼식을 올리기도 전에 런던행 비행기표를 예약해 놨다는 말이 전부 사실이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끔찍한 침묵이 이오네의 신경을 옭아댔다. 그랬다, 사실이었다. 둘의 관계를 파멸시킬지도 모를 무서운 사실이었다. 맞는다고 대답하면 오로지 아버지의 지배에서 벗어날 작정으로 그와 이 결혼을 이용했음을 털어놓는 셈이 되었다. 결코 그의 진짜 아내가 될 생각은 없었다는 걸, 그와 살 생각조차 없었다는 걸 고백하는 셈이었다. 이렇게 행복해졌는데 지금 와서 그런 고백을 하다니 이오네로서는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결과가 두려워 괴로운 심정으로 그를 바라보자니 살갗이 서늘해지고 가슴은 돌처럼 내려앉았다. 그는 안면 골격이 불거지고 단호한 입매와 힘찬 턱에 긴장이 역력한 모습으로 이 순간을 피할 수 있다면 그녀가 10년의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는 답을 기다렸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묻겠소” 알렉시오가 강조하여 말했다. “그게 사실이오?”

저 유도 심문을 비켜갈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닫고 이오네의 뻣뻣한 어깨가 밑으로 축 쳐졌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오들오들 떨며 핏기 없는 입술을 벌려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맞아요. 당치 않은 거짓말이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불행히도.... 사실이에요”

그녀는 번득이는 짙은 금빛 눈 깊은 곳에서 자신이 두려워 하는 모든 것을 보았다. 충격, 믿을 수 없는 혐오감. 그러나 무엇보다 그녀가 그 정도로 비열할 수 있었다는, 그의 감정이나 다른 사람은 상관도 않고 오직 자기 생각만 할 수 있었다는 성난 고통을 보았다. 저 찌를 듯한 눈길은 그가 그녀에게 내릴 수 있는 최악의 형벌을 그녀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지독한 죄책감과 후회를 안겨 주었다.

“잘못된 일이지만... 당시엔 절박했어요. 아빠는 4년 동안 날 이 섬에 가둬 두었어요. 난 여기서 죄수나 다름없었어요” 그녀는 괴로운 눈길로 단호한 그의 얼굴과 핏기가 빠져나가고 있는 팽팽한 입술을 바라보며 힘없이 자신을 정당화했다. “제대로 생각을 못했던 거예요. 내 계획이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몰랐...”

“아니면 상관을 안 했거나?” 알렉시오가 냉정하게 말을 잘랐다.

그녀의 뺨 위로 괴로운 홍조가 번졌다.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짓이엇고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마저도 후회하고...”

“어쩔 계획인지 알면서 우리 결혼식을 강행했다는 거군” 알렉시오가 어이없다는 듯 거친 웃음을 터뜨리며 새삼스레 정떨어진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어떻게 이럴 수 있소? 어떻게 교회로 걸어 들어가 내가 신뢰와 진심으로 받아들였던 서약을 거짓으로 할 수 있는 거요? 당신의 속임수에는 끝이 없는 거요?”

“마지막 순간에 가서 마음을 바꿨...”

“내가 밀어붙였기 때문에 마음을 바꿨지” 알렉시오가 귀에 거슬리는 소리로 명쾌하게 받아쳤다.

“아니에요... 당신이 공항에서 날 찾아내기 전에 이미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다시 생각해 보고 있었어요!” 이오네는 마지막 힘까지 끌어모아 주장했다. “무서웠어요. 도저히 당신을 떠날 수 없었...”

“넓은 자유 세상을 생각하니 그제야 좀 위협이 느껴졌던가 보군. 뒤늦게 충절이나 예의가 당신 행동에 영향을 미쳤다는 말은 못 받아들이겠소. 그리고 당신이 그 비행기를 탔을지 말았을지 결코 모를 일이잖소?” 알렉시오가 험악한 얼굴로 한결같이 비난하듯 지적했다.

“이미 당신에 대한 감정이 생겨서 속으로 싸우고 있었단 말이에요!” 이오네는 점차 감정이 혼란해져 말을 더듭었다. 이 대화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가 방금 그녀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었다는 뜻을 넌지시 비친 것이다.

그가 밤처럼 어두운 눈으로 무섭게 질책하듯 노려보았다.

“당신은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날 이용한 거요. 이제 당신은 철저히 가키스 집안 사람이 되는 데 혈연 관계 같은 건 필요 없다는 걸 내게 제대로 입증해 보였소. 가키스 집안 사람만이 남을 완전히 무시하는 행동을 할 수 있으니까!”

변명의 여지가 없었기에 이오네는 멈칫하며 혼란한 시선을 내리깔았다. 결혼식날 파리 공항으로 가기 전에 발길을 돌렸더라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그런 말을 들어 마땅하지만 나중에는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가 없어....”

“그날 공항 호텔에서 사실을 말했더라면 당신을 놔줬을 거요” 알렉시오가 확신을 가지고 잔인하게 말을 잘랐다. “우리 결혼을 무효로 만들었을 거요. 정말이지 이 세상의 어떤 말도 당신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라고 날 설득할 수 없었을 거요!”

이오네는 침을 삼키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하고 떨리는 소리로 우물거렸다. “난 간절히 그 두 번째 기회를 원했어요. 알렉시오”

그가 오만한 머리를 천천히 가로 저었다. “내가 그 정도로 멍청했다니! 결혼식날 당신 행동이며... 당신 가방에 들었던 현금과 보석... 빈약한 변명을 간파하지 못하고 긴장한 처녀를 상대하는 거라고 나 자신을 설득했지. 기꺼이 속아넘어갈 준비가 돼 있었단 말이오. 왜 그랬는지 아오?”

그가 다음에 털오놓을 말이 너무도 두려워 이오네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때까지 날 물리친 여자는 없었고 적어도 열 두명은 넘는 여자들이 나와 결혼하려고 야단이었거든” 알렉시오가 몹시 자조적인 얼굴로 털어놓았다. “자존심을 깔아뭉개는 진실을 믿는니 어떤 변명이라고 들을 준비가 돼 있었던 거지. 내가 아내로 선택한 여자가, 옆에서 함께 늙어 갈 줄 알았던 여자가 결혼식을 치른 지 몇시간 만에 날 버리고 떠날 거라는 진실을 믿느니 말이오!”

순간순간 절망감이 산처럼 쌓여 갔다. “당신을 제대로 알지못했을 때 한 일을 가지고 날 판단하지 말아요” 그녀는 간청했다. “난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에요. 이제 내겐 우리 결혼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됐으니까요. 당신에게 마음이 있단...”

“내게 정부가 있단 오해를 하자마자 우리 관계를 두 번째로 내팽개칠 만큼 퍽도 마음이 있었지” 알렉시오가 무섭게 기회를 잡아 말을 잘랐다.

지난 일을 일깨우는 파괴적이고 위협적인 말에 이오네는 절망했다. 그녀가 한 말에 조금도 인상을 받지 못한 듯 했다. 게다가 칼리오페의 폭로가 최근의 사건들을 더욱 치명적으로 생각하도록 그를 부추겼다.

알렉시오가 평소의 유연성은 찾아볼 길 없는 어색한 몸짓으로 양손을 펼쳤다. “우리 관계는 거짓이었소” 거친 저음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처음부터...”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이오네는 미친 듯이 부인했다.

알렉시오가 잔인하게 책망하는 눈길을 던졌다. “학교 사물함에 내 사진을 꽂아 뒀다는 말을 아직도 믿어 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거요?”

마음을 어질버히는 뜻밖의 말을 남기고 알렉시오는 성큼성큼 방을 나갔다. 이오네는 의자에 덜썩 주저앉아  두 손에 얼굴을 묻고 가슴이 터지도록 울었다. 친구의 어깨너머로 핀에 꽂힌 알렉시오의 사진을 훔쳐보던 기억은 떠올리지 않으려고 해쓰며.

몇 분 뒤 누군가 어색하게 동정하는 몸짓으로 그녀의 어깨를 짧게 꽉 잡았다 놓았다. 양심에 찔린 듯 고모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려다보는 걸 알고 이오네는 당황했다.

“너희 둘 사이에 문제를 일으킬 생각은 아니었어” 칼리오페가 엄중하게 말했다. “나도 알렉시오가 마음에 들어. 이제 우리 가족이니까. 난 너한테 화가 났던 거야. 하지만 그가 듣고 있는 줄 알았으면 그런 말은 안 했을 거야”

“알아요” 이오네는 침울하게 인정했다.

칼리오페는 조카가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기로 하자 한시름 놓이는지 평소답게 기운찬 태도로 고래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아버지한테 가보자”

미노스 가키스는 그날 오후 늦게 운명했다. 알렉시오는 이오네 곁에서 사위가 처리해야 할 일들을 성의껏 해냈다. 칼리오페는 그의 품에 쓰러져 엉엉 울었다. 이오네는 그가 의지가 되어 주는 게 기뼜지만 빛나는 그의 눈에서 닫힌 표정과 낯선 거리감을 절감할 수 있었다. 그날 저녁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칼리오페가 몹시 괴로워하는데다 장례식 준비며 사업상 정리해야 하는 일들이 끼여들었다. 이오네가 지친 몸으로 잠자리에 들었을 때까지도 알렉시오는 여전히 일을 하고 있었고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옆자리의 베개만이 그가 밤중에 돌아와 한 침대를 썼다는 걸 말해 줄 뿐이다.

알렉시오는 아내, 처고모와 함께 점심을 들었다. 그래도 사적인 대화를 나눌 기회는 없었기 때문에 이오네는 알렉시오가 식탁에 나타날지 어떨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회사 직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집무실에는 접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괴로운 눈길로 알렉시오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헤아려보았다. 이렇듯 스트레스가 심할 때는 또다시 논쟁을 벌이지 않는 게 현명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그렇긴 해도 시간이 갈수록 둘 사이의 거리가 더 멀어지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겠는가.

알렉시오가 그날 밤 자정까지 침실로 돌아오지 않자 이오네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침대를 빠져나가 손으로 그린 꽃무늬 실크 실내복을 걸치고 집무실로 향했다. 아버지의 거대한 책상에 엎드려 일에 몰두하느라 알렉시오는 그녀가 조용히 다가가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이오네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곤 그가 전등 불빛을 받아 반짝이는 검은 머리를 숙이고 노트북 컴퓨터로 화면 이동을 하는 동안 단단한 구릿빛 옆얼굴과 숱 많은 속눈썹을 굶주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별일도 아닌 걸 가지고 오해해서는 함께 살 수 없다고 쏘아붙이던 그녀를 그가 어떻게 비난했는지 생각나자 벌써부터 팽팽해진 어깨를 활짝 폈다. 그를 잃고 싶지 않았다. 정말이지 알렉시오를 잃는다는 생각만 해도 두려웠다.

“곧 자러 올 거예요?” 안절부절못하는 긴장감이 목소리를 떨리게 하고 입을 마르게 했으므로 그녀는 과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알렉시오가 끝이 뾰족한 속눈썹에 가려진 짙은 금빛 눈을 들었다. 타고난 매너가 몸에 배어 의자를 뒤로 밀치고 훤칠한 키를 세웠다. “그러지 못할 것 같소. 당신 아버지의 변호사들이 내일 유언장을 발표할 생각인데다 이 수치를 뽑아내 줬으면 하는 통에”

“다른 사람이 대신 할 순 없나요?”

“유감스럽지만 없소. 악의는 없지만” 알렉시오가 차분하게 중얼거렸다. “가키스 가의 고위 간부들은 직접적인 지시 없이는 자기들 구두끈도 못 매는 친구들이거든”

이오네는 얼굴을 ?혔다. “아빠는 모든 걸 혼자서 직접 통제하셨어요”

“그렇소. 정말이지 의지할 만한 정상적인 하부 조직 하나없이 당분간 그 일을 내가 해야 할 형편이오” 알렉시오는 역시 한결 같은 어조로 지적했다.

그는 어제 이후부터 정중하고 이성적인 태도로 말하고 있었다. 그동안 보여 주었던 따뜻하고 친밀한 태도가 아니라. 그녀는 가슴이 저리고 눈물이 핑 돌았다. “날 용서해 주지 않을 거예요?”

거뭇한 얼굴이 굳어지고 속을 헤아릴 길 없는 금빛 눈이 아주 짧게 그녀의 눈과 마주쳤다.  “용서할 게 뭐가 있겠소?” 그가 물었다. “한때 당신 인생이 어땠는지 잘 알고 있는데, 당신은 아무런 힘도 없어서 다른 인생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잡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을 선택...”

“하지만 그것 때문에 지금 우리가 어떤 대가를 치르는데요?” 이오네는 그의 논리적인 양보에 안심이 되기보다는 더 괴로워서 돌연 감정을 실어 말했다. “내가 왜 그랬는지 이해한다고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그게 아니라....”

“용서할 게 없다고 했잖소” 알렉시오가 상기시켰다. “당신은 합리적인 결정을 내렸고 당시 내가 당신 입장이었더라도 똑같은 일을 했을 거요. 생존이 문제될 때는 윤리가 끼여들 틈이 없는 법이니까”

이오네는 너무 긴장해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당신에게 끌렸지만 그때마다 마음속에서 싸웠어요. 당신을 믿지 않으려고 했어요. 내가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으려고...”

“이런 얘기는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소”

그녀는 벌써 푸르스름하게 수염이 나기 시작한 완강한 턱을 바라보다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고 그의 믿음을 저버리고 둘의 결혼을 망쳤는데도 그는 저렇게 서서 결연히 이 문제를 피하려고 함으로써 그녀를 흔들어 놓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언급하고 넘어가야겠소...” 알렉시오가 침착하게 한결 같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당신 재산을 우리 아이들을 위한 신탁 자금으로 돌려놓으라고 한 건 내 잘못이었소. 그런 희생을 요구할 권리가 없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좀 웃기는...”

“아니에요, 그렇지 않았어요” 이오네는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진 이 거대한 골을 매울 수 있다면 전 재산을 양도할 수 있을 것 같아 목멘 소리로 말을 잘랐다.

“당연히 웃기는 일이었소” 알렉시오가 지친 듯 자조 섞인 미소를 지어 그녀의 가슴을 괴로운 후회로 뒤집어놓았다. “내일이면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부자가 될 거요”

“내 것이 당신 거죠” 이오네가 자포자기하여 항변했다.

“난 가키스 사를 관리하고 당신 아버지와의 제휴 관계에서 나온 이익을 얻겠다고 서명햇소. 이제 그분이 돌아가셨으니 당신 재산은 한 푼도 건드리지 않을 거요” 알렉시오가 조용히 위엄 있게 선언했다.

“그게 우리 사이에 또 다른 장벽으로 작용한다면 난 다 포기하겠어요!” 이오네는 거칠게 위협을 가했다.

알렉시오가 단호하게 책망 섞인 숨을 들이쉬자 그녀는 다시 움츠러들었다. “당신에겐 수천 명이나 되는 고용인들을 돌보고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소. 가키스 제국이 무너지면 헐값에 매각되어 엄청난 해고를 몰로 올 거요”

이오네가 깜짝 놀란 얼굴로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안 알렉시오가 덧붙였다. “견디기 힘들 만큼 가난해지는 현실도 고려해 봐야 할 테고”

나직이 울리는 음성이 살짝 떨리는 걸 포착하고 이오네는 자신이 어리석은 말을 했기 때문에 그가 갑자기 웃음을 참고 있다는 걸 알았다. 마음을 어지럽히는 초연한 태도에서 처음 본 틈이었기에 그녀는 기운을 얻었다.

“기다릴게요” 이오네는 문을 향해 뒷걸음치며 숨가쁜 약속을 했다. “그리고 내 사물함에 당신 사진을 꽂아 놓진 않았어도 종종 훔쳐보긴 했어요!”

알렉시오는 어제 자신이 한 신랄한 발언을 유도하는 말에 경직했다. 그녀에게 꽂힌 희미하게 번득이는 금빛 눈에 들키지 않으려고 애써 온 성난 동요가 엿보이긴 해도 넘실대는 은빛 금발과 고운 실크로 인해 돋보이는 나긋나긋하게 여성스러운 몸매를 본의 아니게 지그시 감상하고 있었다. 그의 강렬한 눈길과 잠시 눈이 마주친 동안 주위를 에워싼 대기가 자극적으로 이글거려 몸이 달아오르자 이오네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그가 휙 돌아서는 바람에 그 순간은 사라지고 말았다.

이오네는 뛰는 가슴을 안고 침대로 돌아갔다. 그가 아직도 날 원하고 있어. 그런데 자긍심이 부족해 그의 갑옷에 난 틈을 이용하지 못했다. 어쩌면 바로 그 자리에서 그의 책상 위로 몸을 던졌어야 했는데. 아니면 그를 얼마나 사랑하며 필요로 하는지 고백했어야 하는지도.

하지만 그 정신없고 들뜬 상념들은 모두 시간 낭비였다. 새벽이 올 때까지 이오네는 여전히 혼자였고 전보다 더 마음만 어지러워졌던 것이다. 알렉시오는 그녀의 말없는 유혹을 외면한 것이다. 그녀에게 한 번도 싫다고 해본 적이 없는 알렉시오가 처음으올 그녀를 거부한 것이다. 불안한 나머지 일단 복잡한 아버지의 재산 문제만 해결되면 그가 이혼하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쩌면 그래서 그녀의 재산에는 손도 대지 않겠다고 조심스럽게 선언한 것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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